오승환 Oh, Seung Hwan
오승환/유적(遺蹟) 2007.06.04
공근혜 갤러리(02-738-7776)
2007.5.31 ~ 6.16
2007.5.31 오후 6시30분
오승환/유적(遺蹟)

기쁨의 유적 - 외면 세계의 내면세계에 관한 이야기들
The Remains of Pleasure : Stories about the Inner World of the Outer World

글: 김난령(디자인 평론가)

프롤로그

이 세상에 선에 속한 것은 모두 악에 속한 것일 수 있다.
열심히 사랑행위를 하는 연인들까지도.
감미롭고 달콤한 것은 저열하고 치욕적인 것일 수 있고,
내가 지금 헤매는 혐오의 구덩이는, 과거의 흔열(欣悅)이 파 놓은 함정일 수 있다.
신념이 우리를 비웃을 때,
길 잃은 배가 거친 파도에 휩싸여 헤맬 때,
구원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 진부한 일일까.
아니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다만 ‘지독히 사무적인’ 흔적(痕迹)뿐이라며 자조(自嘲)하고 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면 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까맣게 탄 슬픔이던
증명할 길 없는 솔바람이던
가슴에 들어와야 사랑이다.
진부해도 할 수 없다.
지독한 흔적만 남는다 해도 할 수 없다.


인물 이야기

때때로 사람은 정지되어 있을 때 오히려 더 역동적으로 보인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말고 다른 것까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른 것’이란 ‘이미지’를 말한다. 예컨대, 우리가 집에 간다고 했을 때 건물이 아닌 보금자리를 의미하듯, 내가 ‘나타샤’를 말할 때는, 그녀의 검고 푸른 눈과 눈부신 흰 허벅지가 아니라, 냉정하면서도 자제력이 없는 그녀의 ‘모순적인 정신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 이미지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 하면, 하나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나면, 그 순간부터 한 인간의 몸, 행동, 심지어 취향까지 그 이미지에 예속되고 이미지에 의해 통제당하고 만다. 예컨대, 나타샤의 검푸른 눈은 그녀의 냉정한 성격에 잘 어울리고, 그녀의 눈부신 흰 허벅지는 ‘냉정하되 자제력이 없는’ 그녀의 관능성과 적절한 것 같다. 그런 그녀에게는 히아신스 보다 수선화가 어울릴 것 같다. 왜냐하면 헤르만 헤세의 표현처럼, 히아신스는 “벌꿀처럼 달콤한 구름 속에서 잠에 겨운 듯, 감미롭게, 취한 자의 머리위로 솟아오르는” 향을 지녔지만, 수선화는 “떫으면서도 감미로운” 향을 지녔으니까. 하지만 때때로 내 머리 속에 있는 이미지가 나타샤의 본질을 반영한 것인지, 아니면 나와 나타샤 사이의 관계를 반영한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또니오 승환의 작품속의 인물은 하나같이 왜곡되어 있다. 뭉개지고, 부예지고, 오물인 듯 페인트인 듯 알 수 없는 물질로 유린당한다. 이러한 왜곡을 통해서 또니오 승환은 인물의 겉모습 아래 숨어 있는 어떤 본질적인 것을 파악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진 속의 인물은 이미 본래 인물과 상관없어져 버렸다. 그 이미지는 인물을 박차고 나와, 스스로를 불멸화(不滅化)시켰다. 그리하여 이미지는 인물의 본질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또니오 승환과 인물과의 관계, 더 나아가서 또니오 승환과 인물이 살고 있는 사회와의 관계를 반영고야 만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이미지는 자생(自生)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므로.


사물 혹은 장소 이야기

빗물에 얼룩진 회벽, 풍화되어 살갗이 벗겨진 담벼락, 혈흔인 듯한 붉은 자국을 드러내놓고 굳게 닫은 문, 잉어 같기도 하고 부나비 같기도 한 빛의 일렁임, 비닐 천막 너머의 뿌연 풍경……. 또니오 승환이 여행지에서, 혹은 일상 속에서 담아낸 이 모든 것들은 보는 이의 마음을 깊이 뒤흔든다. 그것들은 마치 현재의 내 심상을 기막히게 묘사한 일러스트레이션 같기도 하고 어떤 예언 같기도 하다.
또니오 승환의 앵글에 담긴 사물이나 장소는 모두 공간의 중심 형상이 아니라 늘 뒤에 물러서서 배경이 되던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우연하게 눈에 뜨인 것 같아도, 사실 기이한 형태를 바라보는 버릇이 있거나 우리의 현상 속에서 비합리적이고 이상야릇한 형태에 몰두하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의 눈에만 자주 뜨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 우연한 포착은 하나의 ‘능동적인 발견’이 된다. 하지만 그 발견은 주체와 객체 사이를 구분 짓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주체)와 자연(객체) 사이에 놓인 경계를 스르르 녹여 없애기 위함이다. 비와 바람과 먼지와 빛과 같은 자연의 요소와 연합한 이미지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마법처럼, 우리의 내면에 그런 형상과 일치하고 싶은 감정이 솟아난다. 그러면 그 이미지의 형상이 원래 그러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내면에서 떠오른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어 진다. 이는 무형과 유형,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가 결합하는 신성한 경험이다.


에필로그

사진에 담기는 상은 ‘순간’이라는 시간으로 ‘트리밍’되어 생산된 이미지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주제가 분명하거나 자연스러운 사진들은, 사실 조작되고 진실을 왜곡시킨 경우가 많다. 바로 이것이 또니오 승환의 사진이 다른 사진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점이다. 그는 형상을 일부러 심하게 왜곡-그가 형상을 왜곡시키려는 노력은 이미지를 ‘옻 종이’에 인쇄하여 일부러 ‘누더기 꼴’로 만들려는 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시키거나, 아예 형상이 아닌 배경을 담아서,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려 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주체와 객체, 안과 밖, 유형과 무형이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서 만나는 경험을 시도한다. 그 순간에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대극적 주제들, 즉, 선과 악, 미와 추, 정의와 불의간의 경계는 떨리며 녹는다. 그리고 남는 것은 순간을 사랑한 기억뿐이다. 그것이 까맣게 탄 슬픔이던 증명할 길 없는 솔바람이던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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