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진
이병진 - 잠들지 않는 그리움展 2015.10.07
토포하우스()
2015-10-07 ~ 2015-10-12
이병진 - 잠들지 않는 그리움展

이병진의 흑백사진

최근 ‘슬로우 리빙’, ‘힐링’, ‘로하스(Lifestyles Of Health And Sustainability)’ 같은 용어들을 듣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산업화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오래 동안 진행되어 나온 효율과 속도가 초래한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와 피로감을 치유하기 위해서 편안하고 느긋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려는 현대인의 욕구 때문일 것이다. 이병진의 흑백 풍경사진들은 바로 그런 용어들을 머리에 떠올리게 만든다.

대부분 자연의 풍경을 찍고 있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인간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모래 위에 버려진 듯 놓인 운동화와 사구 끝을 향해서 이어진 발자국, 부교와 기다란 목책, 더 이상 바다로 나가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어선들, 전신주, 바다 가운데 조그맣게 떠있는 등대….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그런 적막하고 쓸쓸한 풍경 속에서 과거에 그곳에 사람이 존재했다고 하는 기억이나 흔적 같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다. 그곳은 열띤 연기를 끝낸 배우가 사라지고 난 다음의 공허한 무대와 같은 장소다. 어쩌다 뒷모습을 보이며 등장하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풍경의 일부처럼 정지된 시간 속에 영원히 멈춰 서있다.

그의 사진 속에는 현재와 과거의 시간이 중첩되어 있다. 그의 사진은 누가 찍은 것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는 조금 특별하고 일관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가 그런 장면들을 우연하게 만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아마도 그는 눈이 쏟아지는 날이나 아직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서 먼 거리를 수없이 걸었을 것이고, 안개가 자욱한 길 위나 인적 없는 황량한 해안에서 감각을 날카롭게 곤두세운 채 오래 인내하며 무엇인가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가 흥미를 가지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복사하거나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 풍경과 자신과의 만남이거나, 또는 누군가가 그 장소에 개입해서 남겨놓은 흔적 같은 것들과의 관계성이다.

우리가 그가 카메라에 담아온 바다냄새를 맡고 파도소리를 듣는다. 수평선 맞닿은 하늘, 습기 찬 바람, 바다를 향해서 뻗어나간 목도, 짙은 물안개, 여인의 뒷모습,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 나무, 잿빛 하늘을 힘겹게 나는 갈매기, 외로움, 그리고 억눌린 꿈…. 모든 것들이 희미하게 떨리는 빛과 그림자 속에서 무거운 납처럼 녹아있다.

요설적인 컬러로 뒤덮인 일상에서 추상적인 모노크롬의 세계를 접한다는 것은 언제나 신비한 체험이다. 섬세한 광선과 대기의 미약한 움직임이 정착된 사진에 출현하는 것은 현실에서 벗어난 명상적인 이차원의 세계다. 적막감이 떠도는 그의 흑백사진은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기보다 자신이 입회한 시간과 장소에 대한 정서적인 감응이고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병진의 흑백사진은 촬영에서부터 필름현상과 프린트까지의 모든 과정을 자신의 의지로 컨트롤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은염사진은 아니다. 하지만 디지털인들 어떻겠는가. 사진이라고 하는 장치를 통해서 그가 얻으려고 하는 것은 금욕적인 기술에 자신의 표현 욕구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선택하고 배치하는 빈틈없이 계산된 디자인의 힘과 자신의 감성에 의해서 출현되는 시적인 의미의 세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수묵화에 친숙한 우리에게 흑백사진은 체질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색채가 붙은 세계를 흑백의 톤으로 바꿔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상당한 수준으로 완성시키고 있고, 그가 보여주는 흑백 모노크롬은 충분한 깊이와 무게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채도를 극단적으로 낮춘 컬러사진이라는 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모든 작업의 과정을 스스로 완벽하게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한다. 버튼 조작 하나만으로 안이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카메라워크와 프린팅 테크닉에 의해서 실현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흑백사진의 대가인 안셀 아담스는 촬영하는 단계에서 최종적인 프린트의 상태를 미리 예측하는 ‘전시각화(pre-visualization)’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또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도 했다. 스스로 만족할만한 프린트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애초부터 완성된 이미지를 예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색채에 의지하거나 눈속임을 하지 않고 순수하게 주제를 표현하는 것이 흑백사진이다. 컬러로 기록된 화상을 색상이 아닌 흑백의 농담으로 옮겨놓은 과정은 일종의 추상화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글 : 김승곤, 사진평론가, 국립순천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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