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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 시스킨 탄생 100주년 기념전시 초청강의 - 최봉림 (사진평론가)

한미갤러리에서 미국 추상주의 사진작가 아론 시스킨(1903 -1991)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아론 시스킨 탄생 기념전시는 내년 2월7일까지 연장전시 될 예정이다. 이 전시에 발맞추어 지난 11월15일에는 한미타워 2층 세미나실에서 ‘사라짐에 대한 추상 미학’이라는 주제로 사진평론가 최봉림씨의 초청강연이 열렸다. 이날의 강연회에는 2시간여 동안 100명이 넘는 사진가와 사진애호가들이 참석, 열띤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다음은 아론 시스킨 초청강연의 요약문이다.

1. 추상미학과 사진

● 최봉림 (사진평론가)

1410-1415년경, 브루넬레스키 Filippo Brunelleschi (1377-1441)는 원근법의 구성원칙을 정의하고, 플로렌스의 도심풍경을 두 개의 도판 위에 원근법으로 구획하여 증명한다.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은 주어진 현실 공간의 거리와 크기 계산의 문제는 물론, 그 현실 공간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구조를 설정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중세 광학의 원리를 도심 건축의 실천 원리로 자리잡게 했다. 원근법은 서로 교차하는 정사투영선과 한 점에 수렴하는 직선들의 조합을 통해 도시 건축물의 기하학적 형상을 2차원의 평면 위로 전이시키는 기술적 방법이다.

도나텔로 Donatello와 마사치오 Masaccio는 알베르티 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의 「회화론」 (1435)을 통해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에 직접, 간접적으로 입문하여 그들의 제작물에 나타나는 건축환경과 인물, 대상과의 관계, 또한 그들의 제작물과 그 제작물이 놓이는 건축 환경과의 관계문제를 해결한다. 마사치오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프레스코, <삼위일체>는 그 전형적인 예다.

15세기 말, 프로렌스에 최초로 문학 아카데미를 모방한 인문주의적인 humanist 미술 아카데미가 설립되었을 때, 원근법은 시각 예술의 아카데미적 지위의 확보를 위한 방법론적 교과목으로 자리잡았다. 즉 중세의 논리학의 학문적 지위를 대신한 수학적 원리의 내재화를 통해 미술은 바야흐로 고귀한 기예 nobles arts에 도달했다. 르네상스의 지도학문으로 자리잡은 수학적 원리를 재현 행위에 응용하는 시각예술은 이제 중세의 장색계급의 산물일 수 없었다. 미술, 특히 회화는 역사적, 문학적 주제를 수학에 기초한 원근법에 의거하여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까닭에, 당시의 지도계급으로부터 고귀한 예술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플로렌스에 뒤이은 로마 미술 아카데미, 17세기 중반, 이태리의 미술 아카데미를 모방하여 설립된 ‘프랑스 회화와 조각 왕립 아카데미’ 역시 원근법 강좌를 시각예술을 고급예술로 고양시키는 지도원리 중의 하나로 삼는다. 현실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구획 정리하고, 2차원의 평면 위에 3차원의 공간의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원근법은 유럽의 모든 미술 아카데미의 필수 교과목으로 자리잡고, 이후 서구의 시각적 재현 행위는 원근법을 내재화시켰다. 레오나르 다빈치는 미술 아카데미의 이상적 모델이었는데, 그에 따르면, “원근법은 회화를 통제하고, 조정하는 제동기이며, 방향타이다." 이후 원근법은 서구의 미술 아카데미라는 제도를 통해 서구 근대 사회의 시각적 재현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원칙으로 자리잡는다.

사진적 재현은 3차원의 현실공간을 원근법에 의거하여 2차원의 평면 위에 편리하고 손쉽게 재현하는 장치인 ‘암상자 camera obscura'의 재현원리를 전적으로 수용한 재현 매체이므로, 15세기 이후 제도화된 원근법적 재현의 연장선상에 놓인다. 사진적 재현은 원근법에 의거한 현실 환영주의 illusionism룰 암상자에 투영된 이미지를 통해 광화학적으로 기록하는 재현 기술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사진의 발명이 공개된 1839년 이후, 원근법에 의한 재현은 아카데미즘을 거부하는 일군의 화가들에 의해 그 권위를 도전 받았다. 미술 아카데미가 관장하는 교육기관과 살롱전에서 소외된 일부 젊은 작가들은 미술 아카데미의 교조화된 재현 규범을 송두리째 문제삼기 시작한다. 그들은 아카데미즘 미술이 천박한 물질성의 발현으로 규정한 회화에 있어서 원색의 사용과 거친 붓의 터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정신성과 지성의 발현으로 상정한 역사화를 뒷전으로 미루고, 아카데미즘이 하위 장르로 규정한 일상적 풍경, 초상, 정물을 선호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회화를 2차원의 평면을 지지체로 사용하는 재현예술로 파악하고, 아카데미즘이 수호한 원근법적 환영주의를 점차적으로 거부했다. 그 당시 유입된 일본 판화와 중세 고딕미술에 대한 새로운 평가에 힘입어, 그들은 원근법적 재현은 미술 아카데미가 교육과 살롱전의 심사를 통해 화가들에게 주입하고 강요한 시대 문화적 산물임을 인식했다. 그들은 3차원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원근법에 거리를 두고, 일본 판화, 중세고딕의 평면적 재현에 관심을 기울였다.

20세기 초엽의 미술은 인상주의와 함께 시작된 원근법의 해체작업을 가속화했다. 큐비즘은 전통적 장르의 위계질서 속에서, 가장 하위장르를 차지하는 초상과 정물을 선호하면서, 원근법에 의거한 환영주의에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게다가 미술 아카데미의 이론에 근거한 미술생산을 부르주아 양식으로 규정한 아방가르드 미술은 원근법에 의거한 시각재현을 시효를 상실한 보수주의 미학의 산물로 규정한다. 다다이즘의 콜라주는 원근법적 환영주의를 마구 찢어 붙이는 것이었고, 바우하우스 운동은 아카데미즘의 정신적 이상주의와 원근법에 의거한 환영주의에 묘비명을 새기는 작업이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과 함께 시작된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운동 역시 부르주아 문명의 산물로서의 원근법을 철저히 거부하는 작업이었다.

1910년대 후반부터 사진 역시 이러한 미술계의 움직임에 미국의 경우 ‘순수 사진 pure photography'의 형태로, 독일의 경우 ‘신객관주의 Neue Sachlichkeit'의 이름으로 뚜렷한 미학적 프로그램을 갖추지 못한 채 참가했다. 극단적 클로즈업, 사물 세부의 과격한 절단은 사진적 재현에 내재화된 원근법의 속성을 무화시키며, 재현대상을 추상화했던 것이다..

미국의 경우, 1940년대에, 윌렘 드 쿠닝, Willem de Kooning (1904- ), 마크 로트코 Mark Rothko (1903-1970), 바넷 뉴먼 Barnett Newman (1905-1970), 프란츠 클라인 (franz Klein (1910-1962)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 (1912-1956) 의 ‘추상 표현주의'의 성공과 더불어 사진은 추상화를 체계적으로 추구하는 3명의 작가를 생산한다. 해리 캘러한 Harry Callahan(1912- ), 시스킨 A, Siskind(1903- 1991 ), Minor White 화이트는 (1908-1976) 극단적 클로즈업, 평면 촬영의 선호를 통해, 사진적 재현이 본래적으로 갖는 원근법적 환영주의를 무화시켰다.

2. 아론 시스킨(1903-1991), 사라짐에 관한 추상미학

시스킨의 작품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Alfresd Stieglitz의 예술사진의 엄정성과 추상 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의 실천을 결합한다. 그는 정치 투쟁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사진작업 공동체인 맨해튼의 포토 리그 Photo League의 Feature Group을 주도하면서 <할렘 도큐먼트 Harlem Document >와 같은 작업으로 사진에 투신하지만, 1941년 Tabernacle City에 대한 조형적 사진작업 전시회 이후, 포토 리그를 떠나 본격적인 추상적 사진작업에 몰입한다.

아론 시스킨의 추상 작업은 단순히 작가 개인의 경향의 변화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의 예술적 상황을 완벽하게 표상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미국의 사진 비평가 애비게일 솔로몬 고도 Abigail Solomon-Godeau는 <극단적 형식주의, 투쟁의 무기에서 예술 양식으로 The Armed Vision Vision Disarmed : Radical Formalism from Weapon to Style>>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돌이켜 보면, 아론 시스킨은 너무나 완벽하게 시대의 문화적, 사진적 조정 상황을 대변하여, 그는 한 시대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차라리 시대가 만들어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그의 추상화된 형태는 어떤 그의 개인적 의미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바위, 벽, 낙서, 해변의 표류물들을 그것들의 주변 문맥과 일상 조건에서 분리시키는 극단적 클로즈업 작업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쇠퇴하고, 사라지는 사물의 양상을 엄정하게 포착한다. 한 마디로 그의 추상화된 형태 속에는 사라짐과 죽음에 대한 강박 관념이 내재되어 있다. 칠이 벗겨지는 벽면, 부서진 울타리, 찢겨진 포스터, 표류한 해초는 아론 시스킨이 새롭게 발명한 ‘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의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의 새로운 표상물이다. 17세기의 서구 정물화에 등장하는 해골, 모래시계, 시든 꽃과 과일, 깨어진 그릇들처럼 이 세상 존재의 ‘헛되고 헛됨'을,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쇠퇴와 죽음에 이르는 삶의 운명을 표상하는 사물들이다. 파괴적인 시간 속에서 죽음을 향해 가는 생명과 삶의 메타포이다.

동양의 서체를 연상시키는 일련의 작업, <프란츠 클라인에게 보내는 경의 Hommage to Franz Kline> 역시, 평면을 가로지르는 그 힘찬 서예적 표기법에도 불구하고, 1962년에 죽은 프란츠 클라인 (1910-1962)의 회화를 기린다는 점에서 ‘메멘토 모리’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사각형의 틀 안을 가로지르는 우발적인 거친 선과 역동적인 형상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죽고 없는 클라인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그가 발견한 벽면의 낙서는 ‘메멘토 모리’의 한 변이형이다. 냉정한 기하학적 추상의 면모를 보여주는 돌담, 바위의 부분 형상들도 세월의 이끼와 마모의 흔적을 섬세한 프린트 속에 간직한다는 점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지상의 것에 대한 간결한 애가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강박 관념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이 노스탤지어와 상실의 자괴감을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의 기능적 제목 붙이기에 있다. 예를 들면, 한미 갤러리의 전시작품, <글로체스터 1H, 1944> 혹은 <시카고 27, 1960>처럼, 촬영한 장소이름과 촬영 연도, 그리고 시리즈의 일련번호를 일종의 제품 목록처럼 기입함으로써, 감성과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문학성에서 멀리 벗어난다. 재현대상의 형태에 대한 엄정한 관찰과 감정의 군더더기를 찾을 수 없는 극단적 클로즈업, 삼차원적 공간재현에 필수적인 소실점의 제거, 평면성의 강조라는 엄정한 형식적 특성과 더불어 그의 기능적 제목 붙이기는 감수성, 감상적 회한을 말끔히 제거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구체적 장소와 시간의 기입은 사진의 현실 재현적 기능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추상미학에 역설적이게도 사실성, 현실적 구체성을 부여한다.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관건이 되는 1950년의 글, <신조 credo>를 인용하면서, 그의 ‘사라짐에 관한 추상미학’을 정리하기로 하자.

“사진작업은 다음과 같은 세 요소로 구성된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대상세계이며, 그 항구적 조건은 변화와 무질서다. 다음은 인화지로 거기에서 사진이 실현될 것이며, 마지막은 그 둘을 결합하는 경험이다. 무엇보다도 그리고 강력하게 본인은 인화지의 평면성을 사진의 제1 준거로 받아들인다. 경험은 대상에 완전히 흡수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상은 오직 개인적 필요성 그리고 사진적 요구에만 소용될 뿐이다. 대상은 어떤 의미에서 사진 속으로 들어가며, 직접적으로 사진 찍힌다. 그러나 대상은 종종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대상의 일상 문맥이 제거되고 관례적인 이웃 사물들이 유리되고, 새로운 관계 속으로 강제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명백하게 개인적인 세계의 주제는 무엇인가? 이 형상들과 이미지들은 지하 세계의 특성들, 의식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저 아래로 내려가 광대한 기억의 일상 영역에서 거주하는 사물들을 암시한다. 아마도 거기에는 그런 것들이 있을 것이다. 사진으로 찍은 이러한 사물들과 연루된 감정과 자유 연상은 그 쪽을 가리키곤 했다. 그러나 나 자신의 관심은 즉각적이며 사진 속에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하겠다. 내가 의식하고 내가 느끼는 것은 내가 행하고 있는 사진이며, 내가 찍은 다른 사진들과 그것과의 관계이며,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내가 경험한 다른 사진들과 그 사진과의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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