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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브레송의 사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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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공식적인 사진술의 발상국이다. 아를르에서 매년 치러지는 페스티벌이나 파리의 사진월간, 페르피냥의 포토저널리즘 축제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사진축제다. 1850년대부터 사진을 찍으면 정부에 두 장씩 제출하도록 법이 정해놓고 있다. 200만 매가 넘는 시점에서 보관 장소 문제로 사진을 받고 있지는 않지만 이 법률은 아직도 살아 있다. 그래서 누구나 사진, 하면 프랑스를 떠올린다.또 있다. 프랑스라고 하면 먼저 ‘문화와 예술’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떠오른다.
하지만 그쪽 사정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부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강제로 뺏어간 고문서를 반환하지 않거나, 문화상을 지낸 문학의 대가가 젊은 시절 캄보디아에 신혼여행을 갔을 때 앙코르와트에서 석상 한 개를 훔쳐 나오다가 붙잡혀서 옥살이를 한 것도 그렇다. 그런데 며칠 전에 보도된 기사로 프랑스 정부 망신살이 뻗혔다. 지난 7월 9일, 프랑스의 주요 일간지인 르 몽드(Le Monde) 지는 1991년에 무려 500매가 넘는 까르띠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의 사진을 프랑스 정부가 파기했다는 사실을 보도한 것이 세계 뉴스를 타면서 부터다. 그 사실을 처음 신문사에 알려온 것은 브레송의 미망인인 마르틴느 프랑크(Martine Franck) 할머니. 그녀는 매그넘의 사진가이기도 하다.
정확하게는 551매의 사진들이 파기되었다고 한다. 그 중 426매는 1955년에 루부르 미술관에서 열린 브레송의 첫 전시 때 걸렸던 작품들이다. 1954년에 프린트된 그 사진들은 주로 1930년대에 브레송이 모스코바와 미국, 인도, 중국에서 찍은 사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카드보드에 풀로 붙여져서 나무로 된 패널에 고정된 형태로, 허술하긴 허술했다.

Tamil Nadu, Madura, 인도, 1950.

Last Days of the Kuomintang, 상해, 중국, 1949

Moscow Gymnasts, 모스코바, 소련, 1954
그 작품들은 5년간 세계 여러 곳에서 전시되었다. 순회전이 끝난 1960년, 브레송은 이 역사적인 작품들을 모두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작품들은 1968년까지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지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작품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영원히 ‘매장’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브레송은 그 작품들을 CNAC(National Centre of Contemporary Arts)로 옮겨주도록 정부에 요청했고 1970년대 중반, 그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브레송은 이 때 1970년에 전시했던 새로운 작품 125점을 추가로 기증했고, 그 사진들은 문제가 생길 때까지 CNAC의 지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1991년 어느 가을날, 프랑스 문화성의 담당 관리들이 브레송을 찾아와서 지하 수장고에서 습기로 심각하게 손상된 작품들을 전량 파기해도 좋은가를 물었다. 열악한 보관상태 때문에 이미 작품들이 심하게 손상된 것을 알고 있었던 브레송이 오랜 침묵 끝에 무거운 어조로 파기해도 좋다고 대답하는 것을 옆에 있던 프랑크가 들었다.
그러나 2001년, 브레송은 완전히 파기되어 없어졌어야 했을 자신의 작품들이 여기저기의 고물상과 옥션 같은 곳에서 팔리고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프랭크는 정부에서 작품들을 파기할 때 그들이 약속했던 대로 작품을 완전히 자르지 않고 버렸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551점의 작품은 당시 완전히 파기되었으며, 작품의 불법 유출이나 누군가가 그 일로 인해서 이익을 취했을 것이라는 억측을 부인하고 있다. 만일 브레송의 작품들이 암시장(black market)에서 팔리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다른 루트로 흘러나온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그뿐 아니다. CNAC의 관장인 알레망 꼬스노(Director, Claude Allemand-Cosneau)는 브레송의 작품을 파기했을 당시에는 자신들이 사진을 예술작품(work of art)로 생각하지 않았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프랑스와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
브레송은 그런 프랑스 정부를 신뢰하지 않았고, 자신이 죽은 다음에 정부 기관이 자신의 아카이브를 갖게 되는 것을 극도로 우려했다. 1995년 브레송이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면서 재단이 설립되었다. 프랑스에서 자신의 재단을 설립한 최초의 사진가였다.브레송 재단은 프랑스 정부에 대해서 브레송의 사진들을 완전한 형태로 파기하지 않고 그냥 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정식으로 요구했다고 한다.
몇 해 전 우리나라의 공립미술관 수장고에 들어갈 일이 있었다. 지금 작고한 사진가의 작품들이 습기를 머금어 표면에 파도가 일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다. 1950년대에 제작된 브레송의 빈티지 프린트라면 아무리 못해도 한 장에 십 만 불이 넘는다. 그걸 쓰레기처럼 그냥 버렸다고 한다. 겨우 반 세기 남짓 지났을 뿐인데, 그땐 사진이 ‘예술’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만 있자. 10만 불×521장=??. 얼른 계산이 안 나온다.
고집쟁이 할아버지 브레송

마르틴느 프랑크,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까르띠에 브레송, 1992
“나의 생일날, 앙리가 선물로 무엇을 줄까 물었다. 나는 당신이 그린 초상화를 주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바로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바로 등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의 시야에 세 개의 다른 이미지가 한꺼번에 들어왔다. 나는 침대에서 얼른 내려가 35mm 렌즈를 단 라이카 M3로 그를 뒤에서 찍었다. 그림에 열중한 그는 내가 자신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이 사진을 발표한 것은 그가 아흔 살이 되었을 때였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사진 찍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런 그가 나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그것은 여권에 붙이기 위한 사진이었다.”

프랑크가 찍은 브레송, 1972
글/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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