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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지는 병사의 진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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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의 카타루니아에 있는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로버트 카파 ‘이것이 전쟁이다(This is War)’ 전시장에 걸린 ‘쓰러지는 병사’.
그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20세기의 전쟁사진의 상징과도 같은 이 사진이 최근 연출된 것이라는 스페인 연구자의 발표가 나왔다.(Manu Fernandez, AP/July 22, 2009)
이 기사를 보도한 것은 스페인에서 발행되는 조간신문인 ‘엘 페리오디코’지는 카파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뒤로 넘어지는 병사(falling Spanish Civil War militiaman)를 찍었다고 알려진 시간과 장소(1936년 9월 5일,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세로 무리아노)에서는 그날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 사진의 정식 명칭은 인민전선 병사의 죽음(Loyalist Militiaman at the Moment of Death, Cerro Muriano)
연구 결과, 실제로 이 사진이 촬영된 것은 프랑코 장군의 군대와 왕정파인 공화군이 대립하고 있던 새로 무리아노 전선으로부터 55km(34마일) 정도 떨어진 에스페호 부근이라는 것. 전쟁사진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이 사진은 너무 완벽한 타이밍이나 포즈나 구도 때문에 오래 동안 연출(staged)과 비연출이라는 대립되는 의견이 끊이지 않았다.
인민전선의 병사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찍은 이 사진은 전쟁사진의 최고 걸작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이 사진의 진위 문제는 오래 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으나, 1996년, 마리오 브로톤스라고 하는 스페인의 역사가가 쓰러지는 병사가 어깨에 걸고 있는 탄환 케이스의 형태를 조사한 결과, 그가 세로 무리아노에서 전사한 가르시아(Federico Borrell García)라는 것을 밝혀냈고, 그의 동생도 그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날조 문제는 일단락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던 것이 2009년 7월 17일, 페리오디코의 발표로 진위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게 된 것이다.
1939년부터 4년 가까이 계속된 이 스페인 내전은 나라를 정치적으로 양분했고, 5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냈다. 헤밍웨이의 원작을 영화화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는 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 영화에서 주연했던 잉그릿 버그만은 우연하게도 바로 카파의 연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아무튼 카파는 이 사진 한 장으로 단번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사진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36년, 프랑스의 뷰(Vu)지와 뒤이어 미국의 라이프지에 이 사진이 실렸을 때, ‘공화군의 병사가 치명적인 총격을 받고 쓰러지는 순간’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연구자들은 카파가 말한 곳에서 사진이 촬영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병사들도 실제를 총격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카탈루니아 신문(El Periodico) 기자인 알로스(Ernest Alos)는 “이 사진들이 실제로 일어난 어떤 사건과도 부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라이프의 지면
역사학자인 프란시스코 모레노는 카파의 그 사진에 나오는 7개의 언덕과 2채의 농가의 위치와 몇 개의 길들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그것이 에스페호의 동쪽의 지형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ICP(The 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의 설립자이자 카파의 친동생인 코넬 카파는 이 사진이 진실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과거 25년 동안 노력해왔으나 그들의 과학적인 분석을 뒤집을만한 자료를 찾아내지 못했다.


쓰러지는 병사의 상체 부분을 확대한 사진
뷰 지에는 정확하게 같은 장소에서 쓰러지는 병사의 사진이 함께 게재되었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있다.

두 장의 사진을 겹치게 해서 합성한 사진
이 전시와 함께 발행된 도록(This Is War! Robert Capa at work)에 글을 쓴 것은 카파의 전기를 쓴 리처드 웰란(Richard Whelan). 그런데 그마저도 자신은 이 사진이 진실이라는 것을 믿고 있지만, 그것이 진실이라는 확신은 갖고 있지 않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에서의 전시 기획자의 말처럼, 그 사진이 누구에 의해서 찍힌 것이건, 그것은 당시의 전쟁사진에 대한 역사적인 문맥을 보여주는 것이라는데 더욱 큰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항가리의 유태인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전설적인 전쟁사진가 로버트 카파(1913~1954, 본명 Friedmann Endre Ernő)는 스페인 내전을 비롯해서,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유럽 전선), 제1차 중동전쟁 등을 취재했으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취재하던 중 지뢰를 밟아 베트남에서 사망했다.
카파(Endre Ernő Friedmann)는 1931년 독일 베를린의 사진통신사에서 암실 담당으로 일했으나, 1933년 유대인 박해를 피해서 다시 부다페스트로 돌아갔다가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기 위해서 1936년 7월에 스페인으로. 그 석 달 뒤인 9월에 문제의 ‘쓰러지는 병사’의 사진을 촬영, 프랑스 뷰 지에 발표함으로써 일약 유명해지는데, 자신의 이름을 로버트 카파로 바꿔서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브레송과 비슷한 시기에 중일전쟁을 취재. 1939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영주권을 얻는다. 멕시코와 북아프리카 전선, 이태리 전선 등을 취재. 1943년 라이프 지와 계약. 이듬 해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참조)를 촬영했다. 이때 100여 컷을 촬영했으나 프린트 기사의 실수로 현재 11만이 남아 있다(이 사진들은 http://www.skylighters.org/photos/robertcapa.html에서 볼 수 있다) 같은 해 파리 해방을 취재. 1946년 미국시민권 취득했다. 1947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빗 씨무어, 조지 로저 등과 함께 뉴욕에서 매그넘을 결성한다. 1954년 라이프 지의 의뢰로 베트남에서 종군 중 지뢰를 밟아 4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산화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 들고 있던 피 묻은 카메라는 현재 일본의 한 미술관에 보존되어 있다.
“피의 바다에서 살아남은 자만이 샴페인을 마실 수 있다.”라고 했던 그는 전장에서 병사들의죽음의 순간들을 기록한 전쟁사진가다. 전쟁과 죽음을 두려워했고, 그래서 항상 쾌활한 술꾼인 것처럼 가장했다. 친구와 여자를 사랑했고, 인생의 즐거움을 추구한 그는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알프렛 히치콕이 감독한 ‘이창(Rear Window)’은 여우 잉그릿 버그만과 사진가 카파 커플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이 영화에서 실제 주인공을 맡았던 그레이스 켈리(모나코 왕비)와 카파의 실제 연인이었던 잉그릿 버그만이 같은 해(1982년)에 사망한 것도 너무나도 우연한 일이다.
1947년 카파, 브레송과 함께 매그넘을 창설한 씨무어(David Seymour, 본명은 Szymin)의 사진들은 내년(2010년 9월에 열릴 예정인 씨무어의 회고전에서 발표된다. 씨무어라는 이름보다도 심(Shim)이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불리는 그는 카파가 베트남에서 산화하고, 그 2년 뒤인 1956년, 스에즈 위기(1956년, 스에즈 운하를 둘러싸고 에집트와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가 일으킨 전쟁) 때 이집트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사망한다.
스페인 내전 때 카파가 찍은 대량의 네거티브(126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무렵, 파리의 스튜디오에서 분실되었고, 누군가가 그것을 갖고 있다는 소문은 전부터 있었다. 카파는 스페인 내전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각지와 아시아, 미국 등지를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취재했다. 스페인 내전 당시 찍은 사진들은 그가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던 시점에 분실되어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작년에 네거티브가 가득 들어 있는 3개의 멕시코로부터 온 슈트케이스가 코넬 카파 손에 들어옴으로써, 존재가 비로소 밝혀진 것이다. 그 케이스 안에는 카파 뿐만이 아니라 타로와 씨무어의 네거티브도 함께 들어 있었다. 주로 1936년에서 1939년 사이에 스페인에서 촬영된 것들이다. 정작 카파 자신은 베트남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을 때까지 그 가방의 존재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멕시컨 슈트케이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이 멕시컨 슈트케이스로 불리는 ‘보물상자’는 어떤 경로로 맥시코로 흘러 들어갔고, 왜 그것이 이제 나타나게 되었는가다. 1990년대 들어 그 가방의 존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들이 있었다. 가장 유력한 정보는 카드보드로 만들어진 세 개의 케이스 안에 들어 있던 네거티브들이 당시 스페인 내전에 관여했던 어느 맥시코의 외교관이자 장군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것은 파리와 마르세이유를 거쳐 맥시코로 들어갔고, 2007년 말, 카파의 동생이자 ICP의 창설자인 코넬에게 반환될 때까지 그곳에서 누군가(맥시코 장군의 손자일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의 손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 했던 진짜 미스터리는 1936년에 찍혀진 ‘쓰러지는 병사’가 과연 연출된 것인가였다. 그 병사가 공화당의 군인인지, 아니면 왕당파 군인이었는지조차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똑 같은 장소에서 같은 포즈로 쓰러지는 두 명의 병사는 동일인인가 하는 점도 의문이었다. 사실 이런 명확하지 않은 일들에 대한 의문은 1970년대 중반부터 제기되어 왔었다. 무엇보다도 카파는 생전에 이 문제에 대한 질문에 단 한 번도 명확한 답변을 내어놓은 적이 없었다.
나이틀리(Phillip Knightley, “The First Casualty: From the Crimea to Vietnam; The War Correspondent as Hero, Propagandist, and Myth Maker의 저자)는 스페인 전쟁을 취재하면서 카파와 같은 호텔에 묵은 적이 있는 남아공의 저널리스트 갤러거(O.D.Gallagher)가 며칠 동안 취재거리가 없었던 카파가 그들의 취재에 편의를 제공해주던 공화당정부의 관리에게 그림이 될 만한 ‘꺼리’가 없다고 불평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결국 관리들이 카파를 가까운 전선의 참호로 데리고 갔고, ‘그곳에 있던 몇 명의 병사들에게 포즈를 취하게 해서 그림이 될 만한 사진을 찍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카파가 찍은 다른 사진들
맥시컨 슈트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수 천장에 이르는 네거티브는 당시 스페인에서 촬영된 것으로, 어쩌면 이 ‘병사’ 사진의 진위나 찍혀진 정확한 장소 등에 관한 억측과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전후의 컷이 포함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뉴욕 타임즈의 사이트에서 이 슈트케이스에 담긴 이미지들의 일부를 볼 수 있다. http://www.nytimes.com/slideshow/2008/01/27/arts/20080127_KENN_SLIDESHOW_index.html) 수복 전문가들에 의해서 현재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복원되어가고 있는 70년 전의 네거티브 가운데에는 타로가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들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1937년 이전까지는 타로는 주로 정방형 포멧의 롤라이플랙스, 카파는 장방형의 라이카로 찍었다.)

리오 세그레에서 촬영된 카파와 타로의 네거티브
타로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카파와 함께 바르셀로나로 날아갔다. 동료들 사이에서 그녀는 ‘갈색 머리’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처음에는 거의 함께 행동했고, 그들이 찍은 사진들은 공동의 이름으로 스위스(Illustrierte)와 프랑스(Vu)에 보내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결별하고 서로 별도로 행동한다. (그녀가 카파의 프러포즈를 거절했다고 한다.) 타로는 그 후, 주로 유럽의 여러 잡지들에 사진을 기고하는 한 편, 헤밍웨이, 조지 오웰 같은 유럽에 있던 지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반파시즘 활동을 전개했다.

Fred Stein, 게르다 타로와 로버트 카파의 다정했던 한 때, 1935년 파리

게르다 타로(Gerda Taro), Paris, 1935, by Fred Stein. (Photo: FredStein.com)
세계 최초의 여성 전쟁사진가로 평가되는 타로(Gerda Taro, 본명은 Gerda Pohorylle)은 독일 슈트리트가르트의 유태계 폴란드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35년, 파리에서 카파와 운명적으로 만나 그에게 사진을 배우면서 한 때 사랑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카파와 타로는 공동으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해서 여러 잡지들에 사진을 공급했다. 그녀는 브루네테 전선에서 후퇴하는 공화군을 가까이에서 취재하기 위해서 부상병을 후송하는 자동차에 올라타는 순간, 후진하던 탱크 한 대가 그 자동차를 덮쳤고, 중상을 입은 그녀는 다음날 사망한다. 1937년, 아직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였다. 카파는 항상 말했다. “당신 사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If your pictures aren't good enough, you're not close enough.)” 라고.

촬영자 미상, 코르도바 전선에서 종군하는 게르다 타로와 병사, 1937(Image credits: Wikipedia. Sources: The New York Times and American)
타로는 스페인에서 탱크에 깔렸고, 카파는 베트남에서 지뢰를 밟아 사망했다. 씨무어는 카파가 죽은 지 2년 뒤인 1956년, 스에즈 분쟁을 촬영 중 숨졌다.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이 슈트케이스의 필름은 그렇게 70년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과학적인 분석이나 연구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카파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대표적인 걸작사진에 대해서 여러 차례 질문을 받았고, 그 질문에 언제나 침묵으로 대답했다고 한다. 그 사진이 설사 연출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쓰러지는 병사’가 주는 전쟁에 대한 메시지가 부정되는 것도 아니고 약화되는 것도 아니다. 카파는 위대한 전쟁사진가이고, 그가 남긴 불후의 명작들은 전쟁을 상징하는 영원한 이콘으로서 인류의 역사상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글/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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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 대한 답글입니다 |
아이포웹진 |
2009.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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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아이포스웹진에 관심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레드 슈타인은 독일 드레스덴의 유태인 집안에서 1909년에 태어났습니다.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법학 전공을 마쳤으나, 1933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아내와 함께 파리로 탈출해서 그곳에서 사진을 시작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뉴욕을 중심으로 아인슈타인, 조지아 오키프, 브레흐트, 드쿠닝, 달리, 샤갈, 헷세, 헬렌 켈러, 앙드레 말르로, 카라얀, 스타이켄, 아서 퀘스틀러, 카스트로, 후르시초프, 미로, 펄 벅, 네루 등 수많은 예술가와 과학자, 정치인들의 초상사진을 찍었습니다. 같은 유태인으로 고향을 쫒겨난 카파와는 파리에서부터 가까이 지냈다고 합니다.
1967년 58세를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http://www.fredstein.com/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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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서요 |
진명 |
2009.08.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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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게르다 타로와 카파의 사진을 찍은 프레드 스타인은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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