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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문화대혁명 사진자료집, 한국 최초로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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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문화대혁명 사진자료집, 한국 최초로 발간
편저자 류은규


강타 파는 주덕해(조선족) 연변자치주 주장. 최석린 (조선족) 연길현 제 1서기를 옹호하는 보수파로서, 홍소병으로 참가한 나이 어린 소년들이 상처를 입은 모습
“1966년 당시,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한족(漢族)과 조선족의 비율은 2대 8. 조선족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문화대혁명’은 이 지역의 조선족에게 우리 고유의 민족성을 버리고 중국공산당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도록 만들었다. 중국에 사는 200만 우리동포 조선족.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항상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중국 전체를 광란과 공포로 도가니에 빠트린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다. 50대 이상의 조선족 가슴 속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조선족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그 시기에 대해서 나는 알고 싶었다.
1966년부터 76년까지 10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들이 지금도 그 때를 두려워하는가? 아무리 자료를 찾아도 나오지 않고, 내 물음에도 입을 다물어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는 그 시대를 살아온 조선족들……. 속타는 마음으로 시대의 실마리를 찾았다녔던 나는 드디어 연변의 한 사진가를 만나 베일에 가려져있던 그 시대의 모습을 보았다!” - 류은규
‘홍색 공포’에 떨었던 조선족사회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이나 풍습은 이 시기 모두 말살되어버렸다. 만약 집안의 어느 구석에서 한글로 쓰인 편지라도 발각되면 홍위병에게 혼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집안에 있는 손때 묻은 소중한 책도 사진도 모두 태워버렸다. 그것이 조선족이 중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이었다.

1966년 5월 룡정2중 홍위병들이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내놓으라고 투쟁 준비를 하는 장면

1967년6월21일 룡정체육장 조명시설경기장에서 두 반란파조직 사이에 무단적 투쟁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70여명이 죽고 1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야간에 투쟁하려 가는 장면
남한이나 북한에 친척이 있으면 조선 특무(간첩), 공산당을 위해 소련에 갔다 온 사람은 소련 특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일본 공장에서 일했다고 해서 일본 특무, 교사들은 노동자와 대립되는 계급이라고 해서 지식분자라는 굴레를 썼고,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자들이라는 이유로 가차 없는 감금과 폭행을 당했다. … 아직 중학에 다니는 학생 홍위병들은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교장이나 교사들을 구타하거나, 며칠 동안이나 교문 앞에 세워놓는 수모를 주기도 했다. 심지어는 교장 선생님을 하수도 구멍에다 집어넣기도 하고, 무거운 철판을 목에 걸게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홍위병들은 수많은 문화유산과 사당, 절, 교회당과 같은 유서 있는 건물들과 목사, 신부, 스님 등을 봉건주의, 미신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파괴하고 타도했다.
‘계급대오정리’(階級隊伍整理) 출신이나 무산계급혁명체제에 속하지 않는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을 처리함으로써 계급 진영을 깨끗이 한다는 뜻)를 시작하면서부터, 선량한 우리 민족의 지식인들이 변절자나 특무, 반혁명분자, 악질 분자로 몰려서 투쟁 대상으로 비판을 받아 타도되었으며, 감옥에 갇힌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는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다가 울분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 … 계급대오를 정리하는 가운데서 붙잡혀 나온 이른바 ‘계급의 적들’은 연변에서만 수만 명이 되며 이 광적인 ‘운동’을 거치는 동안 맞아 죽은 사람, 불구가 된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이 2천명 가까이 되었다.” - <중국조선민족 발자취 총서 7, 풍랑> ‘연변의 [문화대혁명]’ 정판룡에서 발췌
연변의 특수성
1952년, 중국 정부로부터 소수민족자치를 인정 받은 연변. 그런데 이곳에서 왜 한족과 조선족 사이에 이토록 격심한 민족분쟁이 일어났을까? 그 이유는 바로 모택동(毛澤東)의 유일한 조카로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모원신(毛遠新)이 연변에 와서 일으킨 민족갈등이었다. …
모원신은 선동했다. ‘조선족은 믿을 수 없다’, ‘조선어의 수명은 기껏해야 10년 내지 15년이다’, ‘연변 문화대혁명에 외국(북한)이 손을 뻗쳤다’, ‘연변에서는 다시 한 번 대 동란과 대 분화가 일어나야 한다’, ‘조국의 동북변방 연길에 몸서리치는 반혁명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10년의 약속

왼쪽부터 이용호(조선족) 선전부 강타 대표, 왕충해(한족) 기술창 강타 조직, 박영일(조선족) 트럭공장, 최석린 (조선족) 연길현 제 1서기, 권여경 (조선족) 연길현 현장, 이중래 (조선족) 연길현 현위 재모정치부 주임
“사진을 당신에게 주겠으나, 바로 공개하면 절대로 안 된다. 반드시 내가 사망한 후 공개를 해달라.”는 것이 그 분의 요구였다. 나는 그 분과 약속을 하고 나서야 그가 찍어서 감춰둔 필름을 건네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만일 이 사진이 그의 생전에 유출되면 당국에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고, 그 사진들이 그 만큼 중요한 가치가 있는 자료라는 뜻이다. 아마도 그 분은 자신의 생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평생을 목숨 걸고 감추어둔 사진들이, 자신이 죽고 난 후에 당국에 압수되거나 흐지부지 흩어지거나, 아니면 소각되어 없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이 사진의 운명을 나에게 맡긴 것이 아닐까? 태어난 나라와 세대는 달라도 이 사진의 가치를 알아주는 한 사진가인 나에게….
그 분 이름은 황영림 선생님. 나는 1999년에 조선족 100년사 사진자료집을 준비하면서 황 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그와 만난지 10년 만에 황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이 사진집을 낸다.
연변 문화대혁명은 수천 명에 달하는 인명을 앗아갔고 조선족 가슴에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대로 연구도 되지 않은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나 기록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이 생생한 사진으로 남게 되었다. 그것을 정리해서 펴내는 나 자신도 사진가이며 역사를 기록하는 자다. 우리의 10년의 약속이 여기에 이루어져서, 그 시대를 알고 싶어 하는 후세의 사람자들에게 이 기록을 남기게 된 것을 더없이 다행으로 생각한다.
편저자 류은규는 청학동과 중국 조선족 등에 관한 다큐멘터리사진 작업을 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23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잊혀진 흔적’ 등 7권의 사진집과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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