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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기 사진집 `On The Tab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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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티넘 입자가 만들어 내는 깊고 무수한 반짝거림
'사진가' 하면 대개는 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메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는 그런 사람을 연상하게 된다. 사진은 누가 뭐라 해도 우연에 의해서 결정되고, 사진가는 언제 어디서인가 우연의 여신에 조우하게 될 행운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필름을 넣은 카메라를 항상 목에 걸고 돌아다니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정창기가 카메라를 손에 들고 있는 것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을 뿐 아니라, 그가 카메라를 메고 사냥감을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다니는 모습은 상상해본 적도 없다. 왜냐 하면 그는 그저 어쩌다 마주치게 될지도 모를 우연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손을 뻗치면 닿는 가까운 일상의 장소에서 대상을 찾아내어, 그것을 자신의 감성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해서 사진으로 찍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얼마 전에 유행했던 말처럼, '찍는' 사진이 아니라 '만드는' 사진이라고 불러야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일 지도 모른다.
그는 오래 전부터 어느 살림집에서나 볼 수 있는 빈 포도주 병이나 유리 그릇 같은 가사용품이나, 또는 꽈리, 담쟁이 넝쿨, 강냉이, 심지어는 콩나물 같은 채소나 식물들을 소재로 해서 사진을 찍고 있다. 말하자면 가까운 생활주변에서 눈에 띄는 소재들을 선택해서 그것을 스튜디오의 테이블 위에 늘어놓고 촬영하는 것이다. 특히 식물에 대한 그의 집착은 거의 편집광적인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철저하다.
물기를 잃기 시작한 양파나 반쯤 썩은 사과 같은,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런 정물들에 그토록 그를 매달리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무엇이 그처럼 지치지도 않고 같은 일을 반복하게 만드는 것일까?
정물은 말할 것도 없이 사진의 표현사에 있어서 오래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장 전통적인 장르 가운데 하나다. 가난한 사진가도 손쉽게 소재를 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크기가 작고 움직이지도 않는 정물이라면 장시간 노출이라고 하는 초기의 기술적인 제약을 견뎌낼 수 있다는 점이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의 활동범위가 턱없이 확대되고, 사람의 눈길을 끌만한 사건이나 볼거리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요즘, 정물사진은 일부 상업적인 사진가들이 다루는 다소 진부한 영역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창기가 다루고 있는 정물들은 물론 지극히 일상적인 사물들이다.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그런 소재들을 선택한 것은 물론 그가 게으르거나 사진 솜씨가 모자라서가 아니다. '일상日常'이란 대체로 생명력이 고갈되어 있는 상태거나, 또는 무기력하고 속된 현실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창기는 그런 정물들로부터 그들이 갖고 있는 다른 하나의 속성, - 마치 제단祭壇에 올려지는 제물과도 같은 신성神性을 끌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정물을 다른 장소에 옮겨서 습관적으로 유지되는 일상적인 성질을 해체시키고, 그것을 사진이라고 하는 일종의 비의적秘儀的인 행위를 통해서 물질의 속성을 하나의 정신적인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정물사진은 언제라고 흐트러져버리고 말 듯한 미묘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그의 사진에서 일종의 소녀적인 순결성 같은 것을 읽어내려 하는 것은, 이처럼 엄격하게 계산된 광선과 흑백의 색조色調와 대상의 형질形質들이 만들어내는 상처받기 쉬운 균형감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사진이 갖고 있는 이러한 금욕禁慾과 절제節制의 안쪽에 있는 다른 하나의 얼굴을 읽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폭력이다. 사실 그의 사진이 갖고 있는 연약함은 조금만 틈을 보이면 언제라도 보는 사람의 가슴에 날카로운 트로머trauma의 날카로운 일격을 가할 수 있는 파괴적인 힘을 숨기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는 아직은 얘기하지 말자. 다만 지금은 그가 속물俗物들을 신성한 제단에 올려놓음으로써 우리들의 일상에 대한 자동화된 지각구조를 이질적인 차원의 것으로 바꾸려 한다는 것을 읽어내면 된다. 그리고 속물적인 것들의 시적詩的인 구성으로 일상을 뛰어넘는 지각의 수준을 실현하려는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작업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예술적인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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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를 만들 때의 그를 보면 그가 남다른 끈기나 섬세함, 사진의 솜씨 같은 것 말고도 남다르게 타고난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재료를 준비하고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조미료를 배합하고 오븐에 넣어 적당한 열이 속속들이 스며들기를 기다렸다가 근사한 냄새가 나는 먹음직스런 요리를 내놓을 때의 지복至福에 넘치는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진이 바로 그렇다. 그는 정물들을 선택하고 테이블 위에 배열하고 조명의 각도를 섬세하게 움직여 그림자의 위치와 크기를 조절하고 초점판유리를 들여다보고 그들이 형성하고 있는 상호관계를 미세하게 조절하며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를 수없이 오가는 행위를 반복한다. 그리고 멈춰 서서 결심한 다음 숨을 죽이고 셔터를 누른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출현하게 되는 한 장의 사진에는 그런 시간과 행위의 경과들이 높은 순도純度로 농축된 상태로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정물사진의 세계는 이쪽 편에 서서 눈앞에 펼쳐지는 전체 장면을 관망하는 스팩터클한 세계와는 다르다. 정물은 물체의 관계를 한정된 범위 내에서 조직하고 대상화시키는 행위다. 거기에는 물체를 물체로서 바라보는 시선과, 그 물체와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전제前提된다. 정창기는 사물들과 아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다. 모르긴 해도 대부분 2~3미터 안쪽의 거리일 것이다. 결코 기발함이나 신기함을 노리지 않고, 오직 주의 깊게 선택해서 배열하고, 그들 안쪽으로 광선을 스며들게 해서 고운 은의 입자粒子로 형상을 정착시키는 일에 온 신경을 집중시킨다. 그것은 사진 이외의 요소가 모두 배제된 사진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을 찍을 때 그는 사진 속으로 충분히 몰입해 있다. 어느 순간 그는 사물의 눈을 갖게 되고 사물처럼 생각하고 어느 사이엔가 사물 그 자체로 전도顚倒되어버리고 만다.
그의 흑백사진은 잘 빚어진 술처럼 보는 사람을 감미롭게 만든다. 그곳에는 거역하기 어려운 우울함이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감광지의 제조기술이 발달한 요즈음에는 아주 적은 양의 은만으로도 좋은 화질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고 화상의 지지체支持 도 섬유계에서 처리속도가 빠른 플라스틱 같은 것으로 진화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정창기는 그런 과학의 성과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구하기도 힘들고 별로 효율성이 높지 않은 플래티넘 인화지를 고집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섬세한 심성을 표현하는 데에는 더없이 잘 선택된 재료임에 틀림없다. 장면이 예민하면 예민한 것일수록 똑같은 감응感應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그의 정물들은 처음부터 모호模糊함을 속성으로 지니고 있고, 그는 사물들이 보여주는 그런 불확실한 성질을 작은 금속의 알맹이가 흩뿌려진 공간 위에 정착시킨다. 정물과 빛과 그림자와 시간의 변화와 함께 그의 내부에서 생기生起하는 그런 감응을 받아내는 것으로 플래티넘의 미세한 입자粒子들이 만들어 내는 무겁고 깊은 무수한 반짝거림 이외의 다른 어떤 매개체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풍부하고 깊이 있는 그라데이션 가운데에서는 시간마저 아주 애매하고 느린 속도로 진행하고 있다.
생각만 좋으면 프린트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단언하건데 정창기는 어느 누구보다도 프린트 그 자체에 내포된 은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매력을 충분히 알고 있는 사진가임에 틀림없다. 서서히 광선을 흡수하는 필름, 그리고 인화지 위에 다시 금속질의 모습을 드러내는 형상들 ……. 요란하기만 한 사진들이 범람하는 요즘 같은 세상에 시간을 듬뿍 들여서 만들어낸 정교한 백금 프린트를 보는 일은 그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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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엔 그는 지극히 여린 감성의 소유자다. 그럼에도 사진에 있어서는 그는 확고한 자신의 세계를 갖고 있어서, 자신의 영역으로부터 한 발짝도 더 다른 곳으로 내딛으려 하지 않는다. 그가 '우울한' 사진들을 버리고, 잘 나가는 다른 사진가들과 마찬가지로 가령 돈이 되는 사진에 전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그렇게는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언젠가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자신의 딸을 찍은 그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가 사실은 인물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사진가였다는 것을 듣고는 있었지만, 사람을 찍은 사진은 그때 처음 보았다. 건물 옥상의 희고 네모난 콘크리트 벽과 조그만 철문을 배경으로 손을 앞으로 모은 모습으로 서 있는 소녀가 어쩐 일인지 나의 뇌리에 흔적처럼 깊이 남아 있다. 주위를 감싼 정적과 강렬한 그림자光線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납처럼 검게 내려앉은 하늘에 떠 있는 유난히 흰 구름이 만들어내는 컨트라스트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정도의 사진을 찍는 사진가가 그렇게 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여느 사진가처럼 그림이 될만한 사람을 골라서 초광각 렌즈로 바짝 다가가 플래시를 터뜨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드락이나 헤비메틀 같은 그런 감각적이고 스캔덜러스한 사진은 찍지 못하는 사람이다. 격렬하게 몸을 움직여야 하는 스포츠 사진가로서의 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사람을 찍건 정물을 찍건 본질적으로 그의 사진은 잔잔하고 단정한 소품과도 같아서 아무리 오래 들여다보아도 사람을 진력나게 만드는 법이 없다. 그의 사진에서는 가령 1930년대의 파리에 떠돌던 클래식한 감수성 같은 것이 느껴진다. 고전적인 라이팅에서도 그렇고 차분한 프린트의 톤에서도 그런 시대의 향기 같은 것이 풍겨 나온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사진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오직 블록을 쌓아올리는 데에만 온 정신을 파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정물 위에 부어지는 빛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를 몸을 낮게 숙인 채 들여다본다. 마치 덜 아문 상처자리를 어루만지듯 조심스럽게 그들의 위치를 조절한다. 그렇게 해서 노출이 주어지고 결국은 인화지 위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맨드라미며 양귀비며 칸나의 사진들을 손에 들고 바라보면서 그는 숨을 내쉰다. '내가 원했던 것은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정물들은 말하기 시작한다. '라이팅의 각도는 어때요?' '배열 위치도 이쯤이 좋았지요?'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사진에 연약하게 흔들리는 시간과 빛의 흐름, 독특한 공기감 같은 것들에 둘러 쌓인 그들이 최상의 상태에서 안정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흔히 보아온 정물이고, 특별한 것도 없는 사진이지만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누구의 사진이라는 것을 금새 알아차린다.
사진가들은 일반적으로 사진이라고 하는 감응장치나 사진행위 자체의 의미를 천착穿鑿하기보다는 신기함이나 흥미로운 사건을 찾아내고 재빨리 셔터를 누르는 일, 사진의 표면에 무엇이 찍혀 있는가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해 빛을 느끼고 그것을 감광유제에 축적시키는 일에 지루할 정도로 긴 시간을 들이는 정창기의 작업은 하나의 상을 정착시키는데 무려 여덟 시간의 햇빛을 아스팔트 위에 쌓아야 했던 초기의 사진의 원점에 관해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만든다.
김승곤(사진평론가, 계간「사진비평」주간)
▣ 작가 소개
정 창 기 (1955년생)
경력
1976 서라벌 예술대학교 사진과 졸업
1984 TOKYO VISUAL ARTS 졸업
1988~ 서울 예술 대학 사진과 강사
전시 경력
개인전
1990 제1회 개인전 , 수 갤러리
1996 제2회 개인전 , 서남 미술관
1998 제3회 개인전 , 담 갤러리
1999 제4회 개인전 , Ellen Kim Murphy 갤러리
2002 제5회 개인전 , Gallery Lux
그룹전
1988 현대 사진가8인전, 후지 포토 살롱
1992 한국 사진의 수평전, 서울 시립 미술관
1993 D M Z전 , 서울 시립 미술관
1993 관점과 중재전, 예술의 전당
1994 한국 현대 사진의 흐름전, 예술의 전당
1995 현대 아트갤러리 개관 7주년 기념전
1996 Art at Home전, 서미 갤러리
1996 Photography as it is전 ,삼성 포토 갤러리
1997 서울 사진 대전, 서울 시립 미술관
1998 July 7인전, 담 갤러리
1998 풍경 98, 동아 갤러리
1999 한,중,일 사진 교류전, 후지포토살롱
2000 서울판화미술제, 서울시립미술관
2002 서울판화미술제, 예술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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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기 Jung, Chang K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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