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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이명동 사진상 수상자로 김승곤씨 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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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자 사진평론가 김승곤(순천대 석좌교수)
이명동 사진상 운영위원회(위원장 김기찬)는 제5회 이명동 사진상 수상자로 사진평론가 김승곤(65세. 순천대학교 석좌교수)씨를 선정, 11월 22일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내셔날프레스클럽에서 시상식을 갖는다.
한국사진문화발전에 이바지한 사람을 선정하여 해마다 시상식을 갖는 이 상은 보도사진가 이명동 선생의 업적을 기려 후배들의 성금으로 마련한 독특한 상으로서 올해에는 1980년대 이후 사진평론과 전시기획, 한국사진의 국제교류에 앞장서온 김승곤 교수에게 돌아갔다.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상금 300만원과 금메달 한 냥이 수여된다.
글 / 진동선 (사진평론가)
불모한 평론의 지평
이 땅에서 사진평론을 말할 때는 아직은 채 여물지 않은 나락을 깨무는 느낌이다. 일백 년 한국사진의 역사에서 평론이 하나의 독립적 분야로서 존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진이 그 가치와 존재 이유를 아직까지도 자각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대구에 근거지를 두었던 구왕삼이라는 사진평론가가 있었고, 서울에 이명동이라는 사진평론가가 있었으며, 역시 서울에 최병덕이라는 사진평론가, 전주에 권진희라는 사진평론가가 있었다고 역사는 말한다. 그러나 인접 분야에서 거론되어지는 평론가의 모습과 같았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그들이 자신의 시대 속에서 자신의 관점에 따라 사진적 담론 행위를 펼쳤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진교육기관 하나 없는 척박한 토양과 사진 이론서 하나 변변치 못한 상황에서 그들은 신문지상을 통해서, 혹은 미약하지만 사진저널을 통해서 미명의 한국사진을 말하고, 예술을 말하고, 미학을 말했다. 특히 이명동은 가장 강력하게 동아일보라는 확실한 저널을 통해서 한국사진의 당면 문제들을 공론화하고 이슈화했던 사진평론가다. 우리가 평론이 반드시 논문체계여야 할 이유도 없고, 또 반드시 장문의 분석적, 비평적 논리적 텍스트여야 할 필요성이 없다고 한다면 이명동을 비롯한 그 시대 진보적 인사들이 펼친 평론 행위는 비록 자칭, 타칭이었을지언정 우리의 역사 속에서 사진평론가의 위치를 마땅히 부여받아야 한다.
그러나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냉정하게 평론 혹은 비평이라는 담론 체계가 자칭, 타칭으로 말해질 수 없는 영역이고, 또 담론 행위가 반드시 학문과 논리 그리고 전문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어떤 테리토리(territory)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80년대 이전까지 이 땅에서 사진평론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즉 평론 및 비평 행위를 고도의 이론적 토대를 갖춘 이론 전공자, 혹은 그에 견줄만한 학문적 과정의 이수자가 전문적으로 행한 담론 행위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때까지 단 한 명의 평론가도 갖지 못한 나라였다는 것이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우리는 불모의 아카데미 안에서 비평적 담론과 텍스트 생산을 위한 전문적인 학습 기회란 그저 꿈이었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평론 행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학문적 성과로서 자리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다.
그의 출현은 평론의 전문성 시대를 예고
이 땅에서 평론에 대한 진정한 자각과 평론의 정당성을 부여 받은 시기는 1980년대이고, 그 출발점은 1983년 일본에서 사진이론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김승곤이었다. 그는 이 땅에서 첫 번째 사진이론 전공자였으며, 또 이 분야 첫 번째 유학파였다. 그의 출현은 평론의 전문성 시대, 그야말로 이론적 토대를 갖춘 전문성이 있는 평론가의 시대를 예고했다. 그 점에서 구왕삼, 이명동은 자생적 한국사진의 1세대 평론가들이라고 할 수 있고, 또 그들이 펼친 평론은 근대적 사진평론(modern criticism)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엄청난 시간의 간극 후에 나타난 김승곤의 경우는 사진평론의 2세대 주자였고, 또 그의 평론은 현대적 사진평론(contemporary critic)이었다. 이는 양자의 질적 차이라기보다는 비평의 토대 및 체계 그리고 담론의 시대성 차이였다. 그러나 그런데도 사진평론가 김승곤의 출현은 축복받지 못했다. 사진적 연고가 없는 단기필마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당장 어찌해 볼 수 없는 한국적 상황들이 가로놓여 있었고, 동시대 사진문화와도 조우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 그를 에워 싸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지방 미술대학에 사진실기를 가르치거나, 인심 쓰듯 주는 사진대학의 시간강사로 전전하는 일 뿐이었다.
그는 삶을 도모하기 위해 1983년 임향자와 더불어 성산동에 포토 에이젠시 <타임스페이스>를 오픈한다. 그리고 그곳에 TS 갤러리라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지식인을 향한 이론 강좌와 외국 사진 전시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일도 주위의 질시와 음해로 편할 날이 없었다. 친일파 일본 앞잡이라는 소리도 나오고, 사진 찍을 줄도 모르면서 사진이론을 떠든다는 소리도 나왔다. 모든 것이 연고 없음에 대한 홀대였다. 국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이고 사진작가로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카데미에서 소외되고 사진계 안에서도 소외되었다. 아마도 임향자라는 중앙대 출신의 절대적 동반자가 없었더라면 그는 눈길 받기 어려운 존재였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는 묵묵히 포토에이젠시 일을 병행하면서 사진이론의 장을 열어갔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그의 지식과 의지에 공감하는 일군의 젊은 작가들이 하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1983년 TS 갤러리에서 앤셀 애덤스를 비롯한 외국 작가 전시를 했을 때 그때부터 찾아왔던 배병우를 비롯 김장섭, 정주하 등이 그들이었고, 또 신구전문대에 강의를 나갔을 때 우연히 알게 된 구본창 등이 그들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1988년까지는 그는 사진계 변방에 있었다. 당시 이론 분야 삼각편대를 이루고 있었던 육명심, 홍순태, 한정식의 명성만큼이나 그는 반대로 어두운 그늘에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나의 기억 속에 김승곤은 1988년 5월 워커힐미술관에서 개최된 <사진, 새시좌전>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이 역사적인 전시 공간에서 특강을 했다. 현대사진의 흐름에 대해서, 포스트모더니즘 사진에 대해서, 그리고 신디 셔먼, 로버트 메이플소프에 대해서 강의를 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일찍 떠나 강의 내용은 대학원 동료에게서 들었다. 그가 특강에서 했던 말은 너무도 생소했다. 물론 오다가다 포스트모더니즘, 기호학에 대해서 들은 바 있었을 것이나 현대사진의 흐름과 그 이미지들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해서는 낯설게 다가왔다. 대학원 졸업을 앞둔 시기, 2년 동안 배운 것이 70년대 이전의 순수사진이었다. 로버트 프랭크, 마이너 화이트까지였고, 사진예술론을 배우고, 사진미학을 배웠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사진, 후기구조주의, 기호학에 대해서는 공부한 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바로 이때 처음으로 김승곤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새겨 넣게 되었다.
1991년 ‘한국사진의 수평전’으로 이론을 구현
아마 그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상당수 전공자들이 그를 몰랐을 것이고, 그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론에 관심이 있는 대학원생들조차 그를 모르고, 그가 말했던 후기구조주의, 기호학을 몰랐다고 한다면 당시 얼마나 이 땅의 평론이 척박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김승곤은 부상한다. 한국현대사진의 분수령을 이루었던 <사진, 새시좌전>과 더불어 그도 떠오른다. 그리고 그의 부활은 중학동 “노란 대문(배병우의 작업실)”에서 그리고 마침내 1991년 11월 <한국사진의 수평전>으로 나타난다. 1990년 봄. 나는 노란 대문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사진평론가 김승곤. 그는 배병우를 중심으로 구본창, 김장섭, 김대수, 임영균, 한옥란, 이주용 등, 이제 막 서른을 넘어섰거나 서른 중반에 다가서는 젊은 작가들의 중심에 섰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수평전이라는 큰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세 번의 수평전. 1991년의 장흥 토탈미술관, 1992년의 서울시립미술관, 1994년의 공평아트센터까지 3회에 걸친 수평전은 그의 이론적 토대로 막을 올린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를 정점으로 배병우, 김장섭, 구본창 등이 포진한다. 당시 김승곤이 사진평론가로서 희망했던 것들은 세 권의 도록 속에 녹아있다. 무엇보다 현대사진의 새로운 흐름과 이 땅의 진보적 사진문화, 그리고 한국사진의 국제화, 세계화에 대한 열망이 일차적인 희망이었다. 그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두 번째 수평전부터 아시아 국가들과의 사진교류에 헌신한다. 두 번째 수평전 “아시아의 눈”은 그가 꾸며낸 아시아 지역 현대사진의 교류였다. 그리고 그 여세는 1994년 동경 가디언 가든 화랑의 <한국의 새로운 바람전>으로, 그리고 또 1996년 동경도사진박물관 로 이어졌다. 그런 역사가 바로 엊그제, 중국 핑야오 국제사진 페스티벌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가 일본을 축으로 아시아 국가들과 관계 맺고 교류했던 일들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다. 지난 여름 그와 동행하여 일본에 갔을 때 얼마나 오랫동안 그가 그들과 인간관계 그리고 사진관계의 일을 돈독히 했는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일본사진협회가 그 뜻을 기려 권위의 국제상을 수여할 정도라면 가히 그의 노력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김승곤의 노력은 전시를 통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가 진정 이 땅에서 이루고 싶어 했던 것은 척박한 우리의 사진 인프라 개선이었다. 사진가들의 창작 여건을 개선하고, 사진의 지식, 전통, 역사가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우리 집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힘에 부치는 일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우회하여 사진이론서 출간부터 먼저 관심을 갖는다. 타임스페이스에 출판 영역을 강화하고 일반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기초 이론서와 사진전공자들이 보아야 할 전문서 출간에 매진한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바라 런던/업턴의 『사진학 강의』, 그리고 고쿠보 아키라의 『뉴욕 아트 스케치』, 이토 도시하루의 『최후의 사긴가들』, 이이자와 코타로의 『사진의 힘』 등 수십 권의 사진이론서들이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1998년 여름. 평론계 후학들을 이끌고 계간 《사진비평》을 창간해 낸다.
돌이켜보면 《사진비평》창간은 그였기에 가능했던 일이고, 또 그였기에 세상에 나타날 수 있었던 평론의 얼굴이었다. 그 점에서 《사진비평》은 그가 일군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일 것이다. 창간 이후에도 그는 여러 노력을 했다. 비평저널로서 인접 학문과의 상호교류를 시도했고, 비평을 위한 메타 비평을 생각했으며, 그리고 분야별, 지역별 심층 비평을 추구하기도 했다. 훗날 경제적 이유로 휴간을 맞이하고, 또 온라인으로 새롭게 태어났어도 그 의지는 소멸되지 않았다. 젊은 작가들의 발굴 및 지원을 위해 작품상을, 또 미래 사진평론의 근간을 위해 평론상을 지금까지 지속시키고 있다. 모든 것이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동강사진축제를 통해 사진미술관 건립의 꿈 현실화
김승곤은 마침내 우리의 당면 문제인 사진미술관 건립에 나선다. 이 문제가 얼마나 중차대안 사안인지에 대해서 그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사진박물관의 당위성은 이미 논의되어 왔기 때문에 굳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있었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사람은 바로 그였다. 한 나라의 예술적, 문화적 역량이 작가들의 숫자, 생산된 작품의 숫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으로서, 가치로서, 유산으로서 굳건한 반석 위에 역사적인 모습으로, 예술의 모습으로, 그리고 국력의 모습으로 보존되고 전시되었을 때 비로소 역량인 것이다. 그는 사진미술관 건립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박한 시대적 소명으로 보았다. 그래서 1997-98년에 사진미술관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한다. 위로는 원로 사진가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아래로는 후학들에게 연구 및 세미나를 준비시킨다. 그렇게 해서 서너 차례 토론회가 개최되고 상당한 기초 자료가 마련된다. 그러나 돌연, 한 순간 “98사진영상의 해”의 출현으로 물거품이 된다. 사진영상의 해가 독자적으로 사진박물관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했기 때문이고, 여기에 그가 끼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는 몹시 낙담했고 그리고 좌절의 쓴맛을 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진미술관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동강사진축제. 어쩌면 그에게 동강사진축제는 일종의 승부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승부를 걸고 싶었던 사업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 년에 단 한차례 치러지는 사진축제 같았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하면 지자체의 힘을 빌려서라도 사진미술관을 건립하겠다는 그의 집념의 승부수였다. 물론 동강사진축제는 많은 사진계 인사들의 의지가 결집된 결실이다. 지난 4년 여 동안 사진인들의 의지가 모아졌고 그 뜻이 통하여져서 국제사진행사로 자리 잡았으며, 또 마침내 염원했던 동강사진박물관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사진평론가 김승곤이 여기에 쏟은 열정이 얼마나 지대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나는 잘 알고 있다. 대가 없는 사업에 사명감 없으면 못할 일이었고, 역사적 책무 없으면 버틸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는 몇 차례 고비들을 극복하고 마침내 운영위원장으로서 동강사진박물관을 태동시키는 산파역할을 한다. 이 또한 그의 열정과 의지가 없었다면 이루기 어려운 역사적 성과였다.
소장 평론가로서 그와 더불어 평론의 길을 걸어온 것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그와 그 길을 걸으면서 평론에 대한 관점, 평론가의 태도, 그리고 몇 가지 이해관계 때문에 그를 떠난 적이 있고, 또 두세 차례 소원한 관계를 유지한 적도 있다. 위계로 보았을 때 무례함이고, 일종의 배반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행복했다. 연배의 문제가 아니고, 이기고 지는 문제도 아니었지만 돌아오는 상황은 언제나 그의 인품 때문이었다. 그는 온건하고 다감하며 그리고 수용적이다. 언제나 후배 평론가들에게 무한 친화력과 포용력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성격이 유하다는 말은 아니다. 너무도 실전적이어서 서로 부딪히면 누가 산적한 과업들을 헤쳐갈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 분별력이 그런 모습을 낳게 했다. 전투는 용맹스러운 자가 하고 지휘는 지혜롭고 친화력 있는 자가 해야 한다는 말처럼, 그의 인품은 소장 평론가들을 아우르는 덕목이 되었고, 늘 온화한 미소, 따뜻한 마음씨, 후덕한 포용력에, 무슨 일이 생기면 맨 먼저 달려가는 버팀목이 되었다.
평론은 이제 막 나락이 여물 무렵이다. 평론가 김승곤이 필마단기로 걸어왔던 때에 비하면 무척 풍요로운 정황들이다. 비빌 언덕도 있고, 지지하는 세력도 있고, 뜻을 펼칠 무대도 있다. 그래서 이따금 그가 일찍이 대학에 자리를 잡았다면, 또 저널을 가졌거나 주변에 강력한 우군들이 있었다면 한국사진이 어떻게 변했을까를 생각한다. 당연히 지금보다 나아졌을 것이다. 사진평론가로서 그가 근 20년 외길 인생에서 펼쳤던 일들을 돌이켜보면 자명한 일이다. 그는 욕심 부리지 않았다. 그저 평론 분야의 주춧돌이 되고 싶어 했다. 나 같은 소장 평론가들은 그 주춧돌을 발판 삼아 조금 도약했을 뿐이다. 일본에 평론가 이나 노부오를 기리는 이나 노부오 상이 있다. 매우 권위 있는 상이다. 우리도 언젠가 평론가 김승곤을 기억하는 김승곤 상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후학들이 그 빛을 영원히 기리는 빛나는 상으로 자리했으면 좋겠다.
김승곤 (金升坤, Kim, Seung-kon)
1940년 11월 26일 출생
● 학력
1959∼66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문학과 입학 및 졸업(문학사)
1961∼63 육군 8사단 병기중대 복무, 만기 제대
1974∼78 일본대학 예술학부 사진학과 입학 및 졸업(예술학사)
1978∼79 일본대학 예술연구과정 수료
1979∼81 츠쿠바(筑波)대학 대학원 예술연구과 입학 및 졸업(예술학 석사)
● 논문
『사진에 있어서의 몇 가지 논점』 (1986, 예술과 비평),
『사진기호학 시론』 (1986, 예술과 비평),
『대중문화와 사진의 지체현상』 (1987, 예술과 비평),
『현대사진의 상황』 (1987-1989, 월간 미술세계),
『사진예술의 한계와 극복』 (1987, 예술과 비평),
『거울의 숲』 (1992, 예장),
『한국현대사진의 장면』 (1998, 코리아나),
『잔인한 사진의 정치학』 (2000, 자유·진리) 외 논문 등 200여편 발표.
● 학술활동
1991 제1회 국제심포지움「글로벌리제이션 시대를 향해서」주제발표, 코오베(神戶),일본
1993 유네스코 아시아/퍼시픽 컬쳐센터 사진콘테스트 심사위원, 도쿄(東京)
1994 제1회 「도쿄국제사진비엔나레」심사위원, 도쿄(東京), 일본
1994 ’96 대만사진학회 학술심포지엄에서 발제, 타이페이(臺北), 대만
1999 헝가리국립사진미술관 초청강연, 부다페스트, 헝가리
2001 일본사진가협회(JPS) 주최 『제1회 국제사진심포지움』초청강연, 도쿄
2002 교토조형예술대학 초청강연, 교토(京都), 일본
2002 사이타마현립 근대미술관 초청강연, 사이타마(崎玉), 일본
2004 오오사카예술대학 초청강연, 오오사카, 일본
● 전시·이벤트 기획 주관
1984 『Ansel Adams, 요세미티 스페셜 프린트』전, T. S. 갤러리, 서울
1986 『나라하라 잇코(奈良原一高) - 빛과 그림자』, 워커힐미술관, 서울
1987 『쿠와바라 시세이(桑原史成), 한국-격동의 4반세기』, 조선일보사미술관, 서울
1991∼94 『11월 - 한국사진의 수평』, 장흥 토탈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공평아트센터, 서울
1985∼92 『일본 현대사진전』, 일본문화원 실크갤러리, 서울
1986 심포지움『현대사진의 상황』, 주한일본대사관 문화광보원, 서울
1987 심포지움『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사진』, 워커힐 미술관, 서울
1993 『한국사진의 새바람』, 가디언가든, 도쿄, 일본
1994 『김수남, 아시아의 하늘과 땅』, 그레이스 백화점, 서울
1994 『한국 현대사진의 흐름』, 예술의 전당, 서울
2001 『은염사진의 시대는 끝났는가』, 매일경제신문, 서울
2002 『사람·바람 - 한국사진의 지평』, 센다이 미디어테크, 센다이(仙臺),
사이타마(崎玉)현립 근대미술관, 사이타마, 일본
2002∼04 『제2, 3회 핑야오 국제사진페스티벌』커미셔너, 핑야오(平遙), 중국
2003 『한일청년작가 IN & OUT』, 니콘살롱, 코니카갤러리, 도쿄(東京), 일본
2003 서울발 사진통신 , 가디언 가든, 도쿄(東京), 일본
그밖에 국내외에서 다수의 사진전과 사진 이벤트를 기획·주관·주최하는 등, 사진을 중심으로 활동 중.
● 수상
1986 제2회 서울문화예술평론상 사진부문
2001 제8회 대한사진문화상 학술평론부문
2004 2004년도 일본사진협회상 국제상
● 기타 경력
1996∼97 제22, 23회 서울사진대전 추진위원장, 서울시립미술관,서울
1997∼98 한국사진미술관 건립추진위원회 사무국장
1998∼00 서울시립미술관 운영자문위원
1999∼00 제2의 건국 범국민 추진위원회 위원
2001∼04 『동강사진마을』운영위원. 『동강사진축전』운영위원
1986∼00 연세대학교, 중앙대학교 대학원, 홍익대학교 대학원, 상명대학교 대학원 강사 역임
1998∼03 『사진비평상』심사위원장
1994∼현재 도서출판 타임스페이스 대표
1998∼현재 계간「사진비평」주간,
2004 『동강사진마을』운영위원장
2002∼현재 순천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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