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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이명동 사진상 수상자 “이갑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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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이명동 사진상 수상자 이갑철
2005 제6회 이명동 사진상 시상식 12월 2일 거행
제6회 이명동 사진상 시상식이 12월 2일(금요일) 오후 3시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열린다. 올해의 수상자는 이갑철씨, 수상자에게는 300만원의 상금과 금메달, 상패가 수여된다.
시상식 : 2005년 12월 2일 한국프레스센터 20층 내셔널프레스클럽
운영위원 : 구본창, 김녕만, 서영수, 육명심, 최봉림 (가나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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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과 반동 전시작
심사평
사진을 통한 자아의 발견
- 이갑철의 사진세계
아마 우리 사진계에서 이갑철만큼 사진을 통해서 자기발견에 성공한 사진가는 드물 것이다. 그에게 사진은 어떤 진지한 예술가가 예술을 한낱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내면으로의 긴 여행을 하듯 그렇게 자기를 찾아가는 하나의 탐구의 수단이었다고 하겠다. 그의 사진집을 펼쳐보고 있으면 가까이서 지켜보아온 입장에서 그가 처음 출발한 원점으로부터 이제까지 20여년 지나온 과정이 주마등(走馬燈)처럼 눈에 선하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한계는 사고의 한계이고 또한 사고의 한계는 언어의 한계이다’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그의 사진가로서의 작업과정은 사진을 찍어가는 가운데 사진이 언어처럼 내면적인 사고와 서로가 하나로 맞물려 상호간에 작용하면서 돌아감을 차츰 자각해 나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어린아이의 성장과정에서 언어능력이 발달하면서 아울러 사고활동이 발달하고 반대로 사고능력이 각성되면서 또한 언어활동이 확장되듯이 그런 경험을 그는 사진을 통해서 그렇게 단계적으로 한 걸음씩 차츰 차츰 쌓아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사진을 시작해서 처음에 만난 사진가가 까르띠에 브레송이었다. 그는 브레송에게서 사진의 참맛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체험했다. 브레송의 사진은 그 어떤 사진가들보다 그에게 체질적으로 맞았다. 특히 ‘결정적 순간’의 셔터찬스(shutter chance)는 종래의 정태적(靜態的)인 공간적 화면구도가 인간본래의 생명감을 옥조이는 속박임을 알았다. 즉 작은 신발이 큰 발에 딱 맞지 않는 불일치의 한계를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생생한 자아의 생명체는 공간과 시간이 결합된 시공간(時空間)적 존재임을 인지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카메라와 그의 몸과의 일치의 체험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을 답습해서 사진을 찍어가는 가운데 화면 속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모두가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밀접한 유대를 이루고 있는 관계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상호관계 속에서 시공간적으로 어울려 한통속으로 돌아가는 생생한 일상적 현실이 곧 그 자신이 발을 딛고 현존(現存)하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임을 알았다. 이러한 자각현상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지적인 자각과는 다른 예술가 특유의 작업을 통한 본능적 직감(直感)이었다. 그런데 이갑철은 얼마 후 브레송의 사진에서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어릴 때 사 입은 옷이 커가면서 작아지듯 사진을 통한 그의 내면의식은 자각의 눈을 떠감에 따라 브레송 사진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브레송 사진의 장점인 너무나 빈틈없는 ‘완벽성’의 한계였다. 그는 브레송의 완벽하게 꽉 짜인 시공간적 완벽성이 오히려 삶의 생생한 리얼리티(reality)를 고스란히 담아내는데 한계가 있다는 괴리감이 생겼다. 이는 그가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의 사진을 만났을 때 그 자신의 다소 막연했던 느낌이 확신으로 단번에 일깨워졌다.
그의 사진행로에서 두 번째 만남은 윌리엄 클라인이었다. 그는 클라인을 통해서 일상적인 시공간을 뛰어넘는 생명력의 강력한 활기(vitality)가 자신의 가슴속에 솟구치고 있음을 새롭게 인식했다. 그는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의 사진’미학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시공간적인 범주안에 던져진 존재임을 자각했으며 한걸음 나아가 현실 한가운데서 ‘결정적 순간’의 셔터찬스를 사진을 통해 숱하게 체험하면서 결국은 그 한계를 감지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예감이 확실한 자각으로 눈 뜬 것은 클라인의 사진이 결정적인 촉매(觸媒)역할을 하였다. 이점이 곧 그에게서 사고의 한계를 사진이 뛰어넘는 새로운 단계라 할 수 있겠다. 그는 클라인과의 사진적인 만남으로 자신의 뿌리인 생명과 생명이 끊임없이 분출하는 강력한 에너지(energy)를 파악하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브레송 사진의 화면속에 등장하는 대상들이 어디까지나 상호간에 이루고 있는 ‘너와 나’와의 조화로운 관계가 저마다가 분출하는 강력한 생명력으로 맞부딪히는 대립관계로 뒤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다분히 프로이드(Freud)의 합리적인 이성체계의 밑바닥에 깔린 무의식의 세계로 통하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프로이드적인 새로운 인간상을 사진으로 파악하면서 등장인물들에게서 내비치는 생명의 에너지가 더 이상 브레송의 사진에서처럼 4각의 프레임(frame)안에 안주하지 않고 그 밖으로까지 자꾸만 분출한다는 사실에 눈길이 미치게 되었다. 그리고 화면속에서 ‘너와 나’의 관계가 단순히 화해와 조화 전부가 아니라 갈등과 분열 그리고 혼돈의 대결관계마저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냉엄한 현실임을 새삼 재인식하게 되었다. 그런데 클라인의 눈을 통한 세상 바라보기를 따라서 현실을 파악하게 된 그는 결국 얼마 안가서 그 한계점에 다시금 다다랐다. 클라인 사진의 한계는 아무리 주인공들이 분출하는 생명력이 화면 밖으로 뻗어나아갈만큼 폭발할지라도 상호간의 관계는 단순한 2분법적인 관계에 머물러있는 단순한 차원의 현실파악이었다. 그가 여기서 직시한 것은 클라인의 사진을 통한 현실파악이 생동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현실사이에 미처 구체적으로 메꾸어지지 않는 괴리(乖離)였다. 이는 바로 공간적 차원의 한계였다. 클라인 사진이 아무리 격렬하고 폭발적인 생명력이 화면에 넘치고 또한 다양하고 복잡할지라도 화면속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너와 내’가 마주 대하는 단순한 이분법적인 결합구조에 지나지 아니했다. 그가 클라인에게서 느꼈던 한계에 대한 해답을 얼마 후 랄프 깁슨(Ralph Gibson)에서 찾았다. 깁슨이 현대사진에 끼친 공헌은 새로운 차원의 공간발견이다. 깁슨의 새로운 시도는 일상적인 3차원을 뛰어넘는 미지(未知)의 공간탐구이다.
이갑철 자신의 내면세계로 향한 사진적 탐구는 브레송을 통해 카메라와 몸과의 시공간적인 일치가 이루어졌다면 클라인을 통해서는 카메라의 다이나믹(dynamic)한 시공간적 파악을 토대로 몸의 뿌리인 생명과 생명력의 일치를 확고하게 한 것이다. 그 다음 깁슨과의 만남은 일상의 일반적 시각체계(視覺?系)에서 완전히 일탈(逸脫)하고 전도된 별천지(別天地) 의 시각이 의식전환의 촉매가 되어 그의 내면세계 가장 깊은 곳에 이제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심층적 무의식의 눈을 뜨게 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사진을 통해서 제1단계는 몸의 발견을, 그 다음 단계에서는 생명력의 발견을, 3단계에 가서는 무의식의 심층세계를 자각하게 된 것이다. 깁슨의 눈을 통해 그가 세상을 내다보니 이는 마치 색유리조각을 대고 보는 것처럼 세상이 완전히 별천지로 보였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것은 유구한 5천년의 역사를 통해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면면히 이어져온 이른바 칼. 융(Carl. Jung)이 말하는 집단적 무의식의 세계였다. 그런데 깁슨이 보는 방식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니 이미 브레송을 거치고 클라인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본 사진적 체질에는 이내 그 한계가 보였다. 이는 깁슨의 사진이 비록 3차원을 뛰어넘은 미지의 자유분방한 신비적 시각이지만 조형적 시각질서의 공간구조라는 기본 틀이 생동하는 삶의 리얼리티(reality)와 인간의 생명력이 분출하는 강력한 에너지(energy)를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클라인의 눈에 비친 깁슨사진의 한계인데 반대로 깁슨의 입장에서의 클라인은 사진에 등장한 대상들 사이의 상관관계가 단순한 2분법을 벗어나지 못한 단조로운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갑철은 제3자의 입장에서 이 두 사진가를 동일선상에 놓고 상호보완(相互補完)의 새 길을 모색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했을 때 그가 자신의 내면세계 가장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우리 나름의 민족적 집단무의식이라는 사진의 내용과 형식이 제대로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클라인의 사진적 아류(亞流)에서 벗어나며 깁슨의 사진모방이 아닌 그만의 독자적인 사진세계를 새롭게 탄생시킬 수 있었다. 실로 이것이 얼마나 많은 세월의 긴 과정을 단계적으로 뛰어넘어서 마침내 도달한 목표달성인가. 거의 모두 거의 대부분의 사진가들이 평생을 걸고 사진의 길을 가지만 이 가운데서 거의 다수가 한낱 남의 아류(亞流)라는 딱지를 끝내 떼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갑철은 아주 예외적으로 아류라는 덫에 걸리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인 사진세계를 당당히 구축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과 비결은 바로 이것이다. 사진가로서 항상 주체적인 자아를 앞세우고 사진을 거기에 맞추어 간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사진의 기본축은 항상 자아라는 주체였다. 물론 사진과 자아라는 양자의 관계는 때로는 자아가 능동적일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수동적일 때도 있는데 이갑철이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은 그가 항상 주체적으로 자아를 관조하는 시선을 어느 상황에서나 자신에게서 떼지 아니한 점이다. 그러므로 결국은 본인이 항상 주체적으로 사진을 이끌어 나아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어떤 사진들이나 능동적으로 수용해서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자기화(自己化)할 수가 있었다.
글 / 육명심 (사진가)
이갑철
1959년 진주생
1984년 신구대학 사진과 졸업
개인전
1984년 거리의 양키들 (한마당 화랑, 서울)
1986년 Image of the City (한마당 화랑, 서울)
1988년 타인의 땅 (경인미술관, 서울)
2002년 충돌과 반동 (금호미술관, 서울)
2002년 이갑철 사진전 (한미사진미술관, 서울)
단체전
1994년 사는 이야기, 사진, 그림, 판화, 조각, 퍼포먼스 (유경갤러리, 서울)
서울 문화 일기 (환원미술관, 서울)
서울 정도 600년 기념 사진전 (예술의 전당, 서울)
VISIONS FROM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KOREA
(pima Community College Center for the Arts_tuson AZ)
1995년 이 세상 아이들 (삼성포토갤러리, 서울)
우리의 환경 사진전 (예술의 전당, 서울)
1996년 사진은 사진이다 (삼성포토갤러리, 서울)
제1회 대한민국 환경 사진전 (서울 외)
Human Breath (Korea Cultural Center LA, U.S)
젊은 사진가 전 (인데코화랑)
1997년 한국 사진가 초대전 (노신대학 미술관, 중국)
1998년 한국 사진의 역사전 (예술의 전당, 서울)
1999년 한국 우리사진 오늘의 정신전 (문예회관 미술관, 서울)
2000년 FOTOFEST 2000 (Williams Tower Gallery, Houston Texas, U.S)
2002년 서울 판화 미술제 2002 (예술의 전당)
사진가 초대전 (몽펠리에시, France)
한국 현대사진의 조망 강원도 영월시)
2003년 흔경 (가 갤러리, 서울)
2005년 한국사진가 3인전 (Gap City, France)
파리 포토전 (파리, France)
작품소장
한마당 화랑
금호미술관
동강사진박물관
과천국립현대미술관
사진집
충돌과 반동 (다른세상)
한국의 정원 ‘선비가 거닐던 세계’ (다른세상)
이갑철사진집 (한미사진문화출판사)
우리시대 찻 그릇은 무엇인가? (다른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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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철 Lee, Gap Ch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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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갑철 사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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