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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진에 관한 몇 가지 단상 / 김승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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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승곤(사진 평론가, 아이포스 대표)
I.
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시골 국민학교 3학년이었다. 어른들은 어수선해 있었고, 중학교에 다니던 누님은 울었다. 총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 해 여름 우리 가족은 더 작은 시골로 피난을 갔다. 어느 날 짚 차 한 대가 하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적막하고 눈부신 신작로 길을 달려왔다. 소련군인과 인민군 병사들이 타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동네 어귀에 있는 집 지붕에 못 보던 깃발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나의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 가족은 꼬박 사흘을 걸어서 더 먼 곳으로 피난을 갔다. 그곳은 아버지의 고향이었는데, 우리 가족이 도착했을 때, 지주였던 할아버지는 심하게 매를 맞고 집을 쫓겨나 어느 작은 농가 골방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 뒤로 나는 허리를 못 쓰게 된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의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허리를 펴고 앉아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동네에서는 팔목에 붉은 띠를 감은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녔고, 저녁에 아버지는 나와 사내 동생을 대리고 집에서 한참 떨어진 옥수수 밭으로 들어가 숨기도 했다. 온몸은 모기에 물린 자리로 온통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지만, 어디서나 잠은 달콤했다.
두 번 째 여름이 지나고 전쟁은 끝났다. 우리는 원래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국방색의 경찰관들이 밧줄로 묶인 사람들을 ‘쓰리쿼터’에 싣고 읍내를 돌기도 했고, 날이 둔한 칼로 자른 듯 한 사람의 머리를 양손에 들거나, 잘려진 귀를 잔뜩 담은 책상서랍을 받쳐든 농부들이 소탕작전이 끝난 경찰들의 행렬의 맨 앞줄에 서서 넋 나간 걸음걸이로 시내를 행진했다. 경찰서 앞에는 어른 키만한 말뚝이 여러 개 박혀 있었고, 늘어선 말뚝마다 사람의 머리가 하나씩 얹혀져 있었다. 그 얼굴들은 새하얗게 핏기가 빠져 있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빨치산 두목들의 머리라고 했다. 시체는 산성 밑, 야산 골짜기 어디에나 널려 있었다. 시체를 볼 때마다 누님은 토했다. 나는 열세 살이 되어 있었다.
그리네이드 란쳐 탄을 신체의 중심에 맞고 분해된 베트남 해방군 병사의 시체를 찍은 사진을 본다. 그 시체를 한 손으로 들고 들여다보는 미군 병사를 본다. 걸레처럼 갈갈이 찢겨진 그 시체에서 온전하게 달려 있는 것은 머리뿐이다. 온통 불바다로 변해버린 사이공의 대로상에서, 공포로 표정이 일그러진 민족해방군 장교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막 방아쇠를 당기려 하는 베트남 경찰국장의 옆얼굴을 본다. 그리고 그의 곧게 뻗은 손에 쥐어진, 손잡이가 상아로 만들어진 권총을 본다. 눈을 가린 호주군 포로의 목을 군도를 치켜들고 지금 막 내려치려는 일본군 장교,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스페인 시민 군 병사, 내란이 한창인 짐바부에에서 넝마처럼 길 위에 널려져 있는 흑인 병사들의 시체, 북아일랜드의 폭탄테러 희생자의 육편들을 비닐 주머니에 주워 담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의 테러를 받고 두부가 파괴된 스페인 고관의 시체……. 이미 죽어 있거나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순간의 수많은 사진들. 나는 이들 사진을 보면서 언어를 잃고 전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런 사진들로부터 시선을 돌려버릴 수 없는 것일까.
사람들은 특별한 용기를 가진 전장의 사진가들만이 찍을 수 있었던, 역사를 결정하는 위대한 순간들을, 일상 가운데에서는 볼 수 없는 특권적인 광경을 눈으로 보고자 욕망한다. 이런 사진에는 죽음과 파괴에 대한 인간의 잠재적인 본능을 일깨우는 요소가 있다. 우리가 그 순간을 잡은 사진에 충격을 받는 것은, 그것이 보는 사람의 문화에 의해서 형성된 의식의 필터로 걸러지기 이전의 본능적인 부분에 직접 와 닿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부녀자를 폭행한 다음, 아직 살아 있는 그들의 허벅다리를 총검으로 찌르고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일본군, 민족해방전선 병사의 절단된 머리를 잡고 웃고 있는 베트남 병사들의 ‘기념사진’. 무엇이 그들을 카메라 앞에 서도록 만드는 것일까. 무대에 선 배우처럼, 그들은 ‘전리품’ 앞에서 하얀 이를 들어내며 웃고 있다.
라이프지의 사진가 마가렛 버크화이트는 여순 반란사건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시체를 구덩이로 옮기는 노인의 모습을 ‘잘 보이도록’ 연출시켜서 찍고 있었다. 편집자는 그들이 찍어오는 무수한 사진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기 좋은’ 한 장의 사진만을 고를 것이다. 이 모든 전쟁의 사진들은 모든 사람들의 보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생산된다.
전쟁을 ‘기념’하는 날이 되면 시청 앞이나 어느 지하철역 구내에서는 다시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빛 바랜 흑백사진들이 전시될 것이다. 그것은 지금 누리고 있는 안정된 생활기반의 전면적인 파괴를 초래할 전쟁을 억제시키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전쟁은 이데올로기가 서로 다른 국가 간에 일어난다. 따라서 어떤 중립적인 사진가의 눈길에 드러난 순간이라 할지라도, 정치성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으로 우리 눈앞에 재현되는 일은 기대할 수 없다. 그것을 보는 사람과 무관하게 그냥 전쟁을 보도한 전쟁사진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국가체제에서는 사진은 자국의 국민에게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불리한 입증능력을 가진 시각자료로서 기능할 수 있는 위험한 매체가 된다. 만일 마산의 반정부 시위에서 눈에 최류탄이 박힌 희생자의 사진이 공개되지 않았더라면, 계엄군의 군화에 짓밟히는 시위군중의 사진이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역사의 흐름은 그 방향과 변화의 속도에서 전혀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 어느 쪽이거나 사진은 여전히 인간의 의사와 행동을 결정하게 만드는 가장 설득력 있는 매체다. 그리고 기억은 한 장의 사진에서 받는 충격의 정도에 비례해서 강도와 지속성이 결정된다.
II.
전쟁의 양태는 확실하게 변했다. 베트남전을 마지막으로 전쟁사진은 끝나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지역과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초월해서, 전 세계 인류의 가치관의 전형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시각장치로서 기능하던 라이프지가 월남전의 종결과 때를 맞추어 폐간된 것은 상징적인 일이다. 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현실은 포탄이 작열하는 굉음과 포연 냄새가 제거된 의사적인 현실(psuedo event)로 바뀌었다. 그것은 도식화된 시뮬레이션(simulation)으로, 그리고 처음부터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버츄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가 현실의 자리를 메꾸어 나갔고, 우리들의 일상공간에는 방향 지워진 전쟁의 이미지만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걸프전쟁을 상기한다. 그것은 우리와는 무관한 세계에서 일어난 ‘가상의 전쟁’이었다. 그 전쟁이 치러지는 동안, 우리는 수 백 마일 떨어진 방공호를 향해서 정확하게 겨냥된 미사일에 피격 당한 이라크인 희생자들의 사진은 볼 수 없었다.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병사도, 검붉은 불꽃을 넘실거리며 타오르는 건물도, 울부짖는 어린이들의 모습도 없었다. 우리가 본 것은 마치 피크닉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 있는 표정으로 사막에 가설된 천막병영 앞에 서서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는 다국적군 병사들과, 밤하늘에 완만한 오색 불꽃의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무수한 예광탄이었다. 수없이 반복되는 그 메마른 광경은 차라리 아름답게 연출된 무대장치였다. 다국적군 대변인과 CNN의 리포터가 그 무대의 주인공이었다.
그 전쟁은 인류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파견된 다국적군이 이교도 후세인을 징벌하기 위해서 치러진 정의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 관한 뉴스는 지극히 한정된 내용의 정보만이 제공되었다. 국내의 TV들은 CNN으로부터 다운받은 내용들 - 미국의 정치가나 장성들의 인터뷰, 또는 미국방성에서 발표하는 전과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국의 어느 신문기자도 다큐멘터리 사진가들도 전장을 취재하거나 그곳 사진을 찍어 보내지 않았다.
절대적으로 우세한 화기들과 최첨단 전자무기로 무장한 다국적군이 장비나 전술에 있어서 이라크군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다. TV를 보는 많은 사람들은 전쟁이 일주일 이내에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물론 그렇게 쉽게는 끝나지 않았다. 항간에서는 군사비 지원 문제나 군수물자 창고에 넘쳐나는 구식무기를 완전히 교체하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도 전쟁종결의 시기를 결정하는데 작용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걸프전은 피비린내 나는 사진 대신, 몇 장면의 인상적인 이미지를 우리들의 뇌리에 남겼다. 이라크군이 파괴한 쿠웨이트의 유전지대에서 하늘을 가리는 연기와 함께 치솟아 오르는 검붉은 불길, 번질거리는 원유로 뒤덮인 사막, 걸프 해안에서 기름을 뒤집어쓰고 죽어 있는 갈매기의 시체와, 이라크군의 생체 화학무기에 의해서 대량으로 학살당한 쿠르드족의 시체를 찍은 사진들이 그것이었다. TV 모니터에서는 포로로 잡힌 다국적군 병사에게 무릎을 꿇게 하고, 부당한 침략전쟁에 대해서 참회를 강요하는, 몸에 꼭 맞는 군복 허리에 권총을 차고 짙은 콧수염을 기른 후세인의 모습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과격한 국수주의자 후세인과, 호전적이고 맹목적인 이라크인들에 대한 이미지는 대부분 이렇게 해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이러한 영상들에 대해서 전혀 상반된 켑션을 붙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몇 개의 다른 경로를 통해서 들어오는 사진들은 이들 진실에 관한 정보가 얼마나 허망한 바탕 위에서 유통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쿠웨이트의 유전이 누구 손으로 파괴된 것인지 그 진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으며, 번들거리는 검은 기름을 뒤집어쓰고 죽어 있는 걸프만의 갈매기는 이 전쟁이 발발하기 2년 전, 유조선에서 유출된 기름으로 희생된 갈매기의 사진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1991년 9․10월호의 아메리칸 포토지에는 ‘괴로움을 함께 나누는 광경(a view of compassion)’이라는 켑션이 달린 사진들이 실려 있다. 부상 당한 이라크군 포로들을 치료해 주고 있는 다국적군의 모습을 찍은 이 사진은 미군 포로들에게 가해진 후세인의 ‘야만적인’ 행위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의 ‘인도적인’ 태도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야전병원인 듯한 텐트 안에서는 외과수술이 행해지고 있고, 화면 앞쪽에서 상체를 반쯤 일으킨 이라크 병사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윗 쪽을 치켜보고 있다. 조금 유심히 관찰해 보면, 치료를 기다리는 그의 양 손이 단단해 보이는 와이어로 묶여 있고, 그것이 그가 누워있는 침대의 아래쪽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으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이 이라크 부상병이 양손을 묶어 두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인물이었거나, 아니면 포로에 대한 다국적군의 취급이 그다지 인도적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III.
사진은 아무런 노이즈도 없이 현실 그 자체와 현실이 내포하는 가치를 표상하는 것으로 신봉되어 왔다. 수많은 사진들이 전쟁의 비참함과 그 시련을 극복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사진은 언제나 우리가 무엇을 지켜야 할 가치로 생각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척도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사진은 지금 진실과 세계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으로서의 소박한 교의를 벗어난 곳에서 새로운 이데올로기 장치 가운데 짜여 들어 가고 있다. 한 때 인류의 시선을 잡고, 공통의 세계관을 형성시켜 나가던 사진은 점점 더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아니 달라진 것은 사진이 아니라, 전쟁의 양상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맨손에서 칼로, 화살에서 총으로, 장거리 대포에서 미사일로……. 살상 거리와 규모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확대되었다. 지금은 적군의 얼굴도, 끔찍한 시체를 보아야 할 필요도 없다.
걸프 전쟁. CNN의 화면의 시간만이 먼 기억 속의 무성영화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그 전쟁 동안 가족과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 저녁을 먹으며 TV화면에서 흘러나오는 그 한글로 번역된 전쟁을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IV.
그러나 다시 6월, 전쟁의 계절이 오면 나의 뇌리에서는 언제나 방아쇠가 당겨진 것처럼, 내가 보아온 수많은 참혹한 시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의 모습은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트라우마로서 나의 의식 깊은 곳에 생생하게 찍혀 있다.

이경모, 남편을 찾는 여인, 이경모 사진집 [격동기의 현장] (눈빛 출판사)
나의 눈앞에 지금 한 장의 사진이 펼쳐져 있다. 전라남도의 어느 곳에선가 찍혀진 사진이다. 등에 아기를 업은 젊은 여인이 길 바닥에 즐비하게 눕혀진 시체들 가운데에서 경찰관이었던 남편의 시신을 찾고 있는 사진이다. 희생자들의 손과 발목에는 아직 새끼줄이 묶여 있다. 그들의 시신은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라이프지의 ‘영웅적’인 주검들과도, 걸프만의 ‘청결한’ 사체와도 다르다. 이름 없는 그들의 몸은 썩어가고 있다. 그들은 누구이고 무엇을 위해서 죽었는가. 그곳에는 애국적인 영웅들의 주검을 위한 장엄한 진혼곡도 없다. 1997년, 나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본 글은 1997년 가나아트지에 실린 원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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