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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스페이스 임향자 대표
타임스페이스 임향자 대표
누군가는 '착한 사람'과 '훌륭한 사람'을 이렇게 구분한다 했다. 착한 사람은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성실히 하는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함으로써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고….
그 '사람'을 살짝 기업으로 바꾼다면 (주)타임스페이스는 분명 훌륭한 기업이다. '사진을 실어주는 것만으로 고마운 줄 알라'고 할 정도로 '찍사'의 주가가 바닥이던 때 '그래? 그럼 사진의 값어치는 내가 챙기지 뭐.' 하며 분연히 떨쳐 일어난 것이 20년 전. 이 세월이 고스란히 사진계의 발전과 같은 보폭을 이뤄왔기 때문이다. 그 영광의 한가운데 광고에 필요한 이미지를 공급하는 회사인 (주)타임스페이스 임향자(53) 사장이 있다.
사진 전공한 이미지 공급업체의 유일한 여사장
일반적으로 '필름 대여업'으로 불리는 이 업체는 수준 높은 사진을 필름이나 디지털 파일 형태로 저 장해 놓았다가 온/오프라인을 통해서 광고나 출판 등 필요한 곳에 저작권료(로열티)를 받고 공급해주는 컨텐츠 사업.
요즘이야 이미지가 들어있는 CD를 사용하기도 하고 생생한 장면을 잡기 위해 바로 현지로 날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외국을 나가는 일 자체가 생소하던 그때 장엄한 폭포나 열대의 사막을 어디서 공수하겠는가. 모두 그런 이미지가 담긴 필름을 빌릴 수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니 이미지 공급업은 쉽게 말해 사진가와 광고·기업·출판회사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인 셈이다.
임 사장은 이런 이미지 공급업체 대표 가운데 유일한 여사장, 게다가 드물게 사진을 전공했다. 지금은 내로라 하는 여성 사진가도 한둘이 아니지만, 카메라가 재산목록의 반열에 오르던 그 옛날에는 사정이 달랐다. 그런 때 그는 어찌하여 사진에 빠졌던 것일까?
"고등학교 때 사진서클이 눈에 띄더라고요. 공부하기 싫은 참에 들로 산으로 싸돌아다닐 수 있었으니 얼마나 좋아요(웃음). 마침 교사를 시작한 언니가 첫 월급을 받더니 작은 카메라를 샀지 뭐예요. 장롱 속에 고이 모셔 놓은 카메라를 몰래 들고나와 찍고 돌아다녔죠. 집 마당 평상에서 뒹굴고 있는
조카도 찍어봤다가 한가로이 누워있는 멍멍이도 찍어봤다가, 얼마나 재밌던지."
당시 지도선생님은 동네사진관 아저씨. 체계적으로 배우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과는 날이 갈수록 친해졌다. 게다가 암실에서 서서히 상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그 벅찬 감동이라니….
첫 지도 선생님은 동네사진관 아저씨
사진이 좋으니 대학도 사진을 택했다.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이때도 마침 갓 결혼한 언니 부부가 서울로 올라간 터라 유학이 허락됐다. 대학에 들어가 사진을 전공하다보니 보상도 따랐다. 크고 작은사진 콘테스트에서 입선하는 일이 줄을 이었다. '싹'이 있어 보였던지 어머니도 쌈지 돈 탈탈 털어 카메라를 한 대 사주셨다. 한창 사진에 열이 올라있을 무렵, 그에게 전환점이 찾아왔다.
"100피트 짜리 필름 사서 잘라 쓰던 때였잖아요. 그런 때 일본대학 사진과 학생들이 여기서 전시를 했어요. 새로운 경험이었지요. 게다가 그렇게 손에 달고 살던 카메라를 보니 모두 일본제인 거예요. 니콘에 캐논, 미놀타, 전부 그래요. 일본에 가면 사진의 '뭔가'를 얻을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당연히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런데 임 사장 배포가 더 컸다. '사진과 결혼하겠으니 결혼비용을 지금 내 놓으라.' 했으니 말이다. 물론 부모님의 대답은 'NO!'. 그러니 1973년부터 시작된 유학생활은 사무치는 고생담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때 고생 '쫀쫀하게' 했죠. 한국사람이라고 하면 방도 잘 안 빌려주던 때였으니까. 그래도 어떡해, 생활비까지 벌어야 하는 처진데. 새벽같이 우에노 역에 나가요. 왜 새벽기차 타러 가는 사람들 아침 못 먹고 나오잖아요. 이들 상대로 우동을 파는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를 했지요. 처음엔 말도 서투르
니까 우동을 들고 있으면 손님들이 이리 가져와라, 저리 가져가라 코치를 했죠. 거기서 끝나면 아침에 학교 갔다가 마치면 교수님 스튜디오로 달려가서 조수노릇하고 집에 오면 밤 12시. 다시 새벽 4, 5시에 나가고 그랬어요.”
목표가 있어 버틸 수 있었던 일본 유학시절
이렇게 대학, 대학원을 마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그 중에 고생을 못 견디고 중도 포기하는 이들도 숱하게 보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분명한 목표 의식. 때문에 임 사장은 지금도 유학을 떠나는 후배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유학 가면서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 있었어요. 무슨 일이있어도 일본에 있는 동안 개인전을 꼭 열겠다는 것이었어요. 그 약속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국 와보니 별 것도 아니었지만.”(웃음)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등룡문인 니콘살롱에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 끝내 초대전을 갖고 드디어 귀국했다. 83년이었다. 그 당시는 해외로 나가는 것이 어려웠던 시기라 유학에서 돌아온 선배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후배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 귀국전을 하기도 하고, 당시로서는 새로운 사진워크숍을 열어 외국의 사진가를 불러와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이듬해 모교인 중앙대 사진학과에 출강했다. 학생들의 눈을 틔울 목적으로 해외 유명사진가 전시회도 여러 차례 열었다. 그 즈음 임사장에게 제2의 전환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국에서 전시를 하면서 여기저기 잡지사에서 제 사진을 좀 쓰자는 요청이 오더라구요. 꽤 여러 페이지 실렸어요. 그런데 사진가에 대한 예우가 전혀 없는 거예요. 어떻게 된 거냐 했더니 돌아온 대답이 '여기에 이름 석자 올려준 것만으로 대단한 영광으로 알아야지 무슨 소리냐.'는 거였어요. 사진가를 너무 우습게 알더라구요. 이건 아니다, 분노가 치밀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때도 일본의 유명 풍경사진가의 전시회를 열고 있던 중이었다. 어느 광고 회사의 디자이너가 찾더니 사진 좀 쓸 수 없느냐고 물어왔다.
"퍼뜩 떠오르는 것이 외국잡지들을 들여와서 파는명동 뒷골목이었어요. 그대로 찢어서 광고사진을 만들던, '해적판'이 난무하던 때였잖아요. '아, 사진을 쓰려는 사람과 사진을 찍는 사진가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면 되겠다.'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더라구요. 사진을 전공했으니 뭔가 사진쪽에 좋은 일도 해야겠다는 의무감도 있었고…."
바로 일본으로 날아갔다. 교수님의 자문을 구했다. 사진가의 입지를 높이고 사진이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고 쓰일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고 했더니 몇몇 에이전시를 소개해 주었다. 이미 일본에서는 이미지를 공급해주는 '스탁포토 에이전시'들이 자리를 잡은 터였다.
"그때부터 동경 시내에 있는 에이전시는 다 방문했어요. 그런데 앞이 캄캄해졌어요. 어디도 선뜻 '예스' 라고 대답해주는 곳이 없었어요. 우리가 뭘 믿고 한국에 사진을 내주겠냐는 거죠. 처음은 완전히 실패였죠. 그래서 가고 또 가고, 한 곳 뚫고 두 곳 뚫고, 어떤 곳은 거래를 트기까지 7년이나 걸렸다니까요."
이름 석자 올려주는 것만도 영광?
그렇게 해서 85년 충무로에 (주)타임스페이스가 탄생했다. 역시 동생을 안타까이 여긴 언니의 쌈짓돈이 종자돈. 직원 1명과의 출발이었다. 하지만 일본 에이전트의 깐깐함은 한국사회의 무지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안팎의 벽과 좌충우돌했던 경험 하나.
"이건 진짜 비밀인데. (웃음) 이 사업의 첫 관문은 돈이었어요. 당시에 외화유출이 금지되던 때였거든요. 일본 에이전시에 사용료를 지불해야 다시 사진을 받을 수 있는데 돈을 보낼 수 없는 거예요. 이 사업은 신용이 목숨이잖아요. 그러니 어떡해요, 반칙이라도 해야지. 바지단 같은데 돈을 꿰매가기도 하고, 아무튼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 비즈니스 초창기에는 슬라이드 툭툭 내던지며 '쓰고 갖다 주는 건데 뭐 이렇게 돈을 많이 받느냐' 고 하죠. 실랑이도 많았어요."
다행히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수요도 많아졌고, 88 서울올림픽을 치르면서 저작권에 대한 인식도 넓어져서 일하기에도 한결 수월해졌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어려운 시기를 지나올 수 있었던 바탕은 '사람'에 있었다는 것이 임 사장의 설명.
"사진만 알았지, 경영에 대해서는 완전 까막눈이지 않았겠어요? 그런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주위 분들 덕분이죠. 경영 컨설팅을 해주신 분이 있어요. 그분이 저를 세무사 사무실에 데려가서 회사 설립 절차를 밟아주고, 그 높은 은행 문턱을 낮춰주기도 하고,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땐 조언도 해주고…. 저는 힘들 때 그저 직원들 앞에서 그 어려움을 내색하지 않은 것이 전부였지 않나 싶어요."
사진 비즈니스의 길 열어 뿌듯
이제 타임스페이스는 매출 50억 원을 향해 나가고 있고 직원 규모도 30명, 충무로 제일의 이미지 공급회사로 돌진해나가고 있다. 지난 9일 새로 개편한 온라인 사이트 '포테이토(www.fotato.com)'는동북아시아 최고의 이미지 콘텐츠 사이트로 인정받고 있고, 지난해에는 세계적 최고의 이미지 공급사인 '게티 이미지스(gettyimages)'의 한국 마스터 에어전시를 따냈다.
하지만 비슷한 기간 동안의 광고회사들의 성장 속도에 비하면 아직 미약하다. 여기에 임 사장의 또 다른 모습이 담겨있다. 허약한 사진이론 바탕을 보완해야겠다 싶어 '도서출판 타임스페이스'를 만들고, 또 사진평론의 부재를 안타까이 여겨 계간 「사진비평」을 창간하기도 했다. 돌아보니 그에게도 옛날 사진을 시작했을 무렵엔 입상 경험이 적잖은 자극이 되었다 싶어 99년에는 젊은 후배들을발굴하는 '사진비평상'을 제정해서 6년째 접어들었다. 이 모두 '돈'과는 거리가 먼 일들이다.
"좀 더 '빡빡하게' 운영을 했더라면 이보다 덩치는 커졌을지 모르죠. 하지만 나 혼자 크는 것보다 사진이 제자리를 잡도록 하는 것이 전공자로서 제 의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도 여기까지 왔으니, 이만하면 행복한 사람 아닌가요? 게다가 후배들에게 사진 찍는 것만이 아니라 사진으로 비즈니스 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 같아 사실 좀 뿌듯하기도 하구요.”
뒤늦게 결혼한 남편 김승곤(국립순천대 교수. 사진비평가) 씨와 양수리에서 야채를 길러 먹는 맛이쏠쏠하다는 임 사장. 시원한 웃음과 함께 술을 마실 수 없는 체질이었으면 참 불행했을 것 같다고 고백하는 그는 오늘도 '속 좁은 여자' 소리를 듣지 않으려 대외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했다. 아, 잊을 뻔했다. 임 사장은 지금껏 사진가의 길을 포기한 적이 없다 했다. 다만 미뤄두고 있을 뿐이란다.
타임스페이스 임향자 대표와 직원들
●
글 /
손정미
(내일신문 기자)사진 / 백지순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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