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우는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 대학교와 독일 부퍼탈 대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하였다. 독일에서 거주하면서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다수의 초대전을 가진 바 있으며, 국제무대에서의 활발한 활동으로 세계적으로 그 역량을 인정 받고 있는 작가이다.「AURA」, 「천경우1998-2001」, 「this appearance」, 「EIDLON」, 「INTERVALS」등 한국과 유럽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으며,「서울발 사진통신」, 「The Third Asian Photography」, 「오덴세 포토트리엔날레」외 다수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사진가 천경우
우리가 사물을 알아보려면 반드시 그 사물의 외부에 빛이 있어야 한다. 대상은 그렇게 외부의 빛에 기대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물은 제 스스로 존재의 빛을 내비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천경우 사진을 보면서 느껴지는 이 기이한 느낌은 무엇일까? 마치 사진의 대상이 자신의 존재의 무게만큼 희미하게나마 미미한 빛을 스스로 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아닌가! 이렇듯 희미하고 모호한 이미지가 자아내는 무거운 존재감은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대상의 존재감은 기술적으로는 장기노출에 의해 획득되어 지는 것일 터인데, 이 장기노출과정은 단순한 사진적 테크닉을 넘어 작가의 사유와 철학이 담겨있는 중요한 프로세스로기능하고 있다. 셔터 릴리즈를 누르는 순간은 사진이 완성되는 순간이 아니라 사진이 시작되는 순간이라는 천경우의 말에는 오랜 시간동안 사진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사진은 무엇을 담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작가의 숙고와 성찰이 고스란히 묻어있다.사진의 태동기에는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촬영의 과정은 극복되어야 할 지루한 과정으로 여겨졌고, 기술의 발전에 따라 그 촬영의 과정은 급속도로 단축되었다. 이제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 모델이 한 자리에 수분에서 수 십분 동안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수 분, 수 십 분이 몇 백분의 일초로 단축된 것이다. 그러나 천경우는 옛날의 촬영에서나 있었던 느린 촬영의 과정을 현시점에서 다시 되살리고 있다. 조금은 다른 방식, 그러나 커다란 본질적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 방식으로.
심상치 않은 깊이를 지니고 있는 천경우의 사진을 보면서, 과연 작가는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작업에 임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였다. 어느 정도 내가 예상했던 대답이 나올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올지 은근한 호기심도 생겼다. 사진작가와의 대화 두 번째 작가인 천경우를 만나기 위해 전시가 열리고 있는 한미 사진갤러리를 찾았다.
김응수 (이하 김) :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사진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예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제야 뵙게 되네요. 사실 보름정도 일찍 대화의 시간을 갖으려 했었는데 스페인에 계시는 바람에 전시 막바지에 뵙게 되네요. 스페인에는 무슨 일로 가셨나요?
천경우 (이하 천) : 올해 처음으로 스페인의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an) 에서 현대사진, 비디오 아트 페어인 DFOTO 2004가 열렸습니다. 이 페어의 주최측인 오르도네츠 팔콘 예술재단에서 3명의 아티스트를 공식 초청했는데 그 중 한 명으로 참석했습니다. 빌 비올라, 스기모토, 안드레이 세라노 등 300여명의 주요 작가들이 참가했고, 저는 ‘18X1 Minute’라는 비디오 퍼포먼스를 4일 동안 현지인 144명과 함께 했습니다.
김 : 선생님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잘 알려진 작가입니다. 대부분의 전시를 유럽에서 했는데 혹시 활동무대의 중심을 해외로 염두해 두고 계신 건지요?
천 : 독일에 거주하면서 작업을 하다 보니 유럽에서 전시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꼭 유럽만을 활동무대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 사진이 특정한 문화적 컨텍스트 속에서만 읽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제 사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는 것도 작가로선 흥미로운 일이지요.
외국에서 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김 : 국내에서 사진공부를 할 만큼 하고 해외로 떠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유학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요?
천 : 우선 어릴 적부터 다양한 문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유학이라기보다는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어요. 제 자신에 변화를 주고 싶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저와 다른 문화권에 있는 제 자신은 분명 '다른 나'라고 생각합니다. 유럽의 역사와 현대음악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 중 독일 아방가르드 음악에 관심이 많았죠. 벤야민의 이론을 접한 것도 독일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계기였지만 결정적인 것은 제가 충분히 사색하고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보장되는 곳이 유럽, 그 중에서도 독일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제가 독일에서 공부하고 거주하고는 있지만 단순히 유학이 목적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 : 해외에서 공부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참 많습니다. 특히 독일 같은 나라는 학비가 들지 않는다는 면에서도 상당히 매력적인 곳인데요. 사진교육에 있어서 한국과 독일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천 : 유학은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 하겠죠. 그것이 학위를 취득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문화를 체험하고 자신의 세계관과 시야를 넓히기 위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에는 유학이 일단 우리나라를 떠나서 다른 문화권을 체험하고 그 쪽 문화와 내 감성을 비교해보면서 자신의 생각과 감각이 깊어지고 넓어질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아무래도 결과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 합니다만, 독일 같은 곳에서는 결과와 함께 과정도 중시 여겨지는 분위기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결과가 나쁘면 아무것도 인정이 안 되지만, 그곳에서는 오히려 과정이 불분명하면 결과가 인정이 안 됩니다. 자신의 입장과 생각이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나온 결과물은 그 결과가 좋다고 하더라도 단발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경우, 학생 스스로들 혹은 학생과 교수들 사이에 지속적인 토론이 이루어집니다. 물론 어떨 때는 대화 없이 이루어진 결과가 대화가 있었던 결과보다 좋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프로세스가 길어야 한다면, 토론은 스스로의 논리성을 채워나가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좀 더 심층적인 사유를 하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에서 교수는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라 학생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역량을 끌어내도록 도와주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 : 음... 교육방식이 우리나라와는 좀 다르긴 하군요.
천 : 물론 단정적으로 좋다 나쁘다를 말할 수는 없고 각각의 장단점이 있겠습니다만 다르긴 많이 다르죠. 한국에서 공부할 때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과제를 내야 했었는데 여기에는 상당한 기술적 트레이닝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반면, 독일의 학교는 대부분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한 학기를 끌고 갑니다. 물론 학생들이 자칫 게을러질 수 있다는 문제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만큼 학생들의 자율성에 맡기는 것이기에 여기에는 또 다른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매체 중심의 교육이 아닌 매체를 이용한 내용에 중심을 두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명확한 이미지가 주는 해석의 자유로움
김 : 이번 전시사진을 보면, 사진의 입자가 상당히 굵어서 이미지가 선명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장시간 노출로 인해서 더욱 흐릿하고 뚜렷하지 않은 경계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표현의 요소들이 사진의 내용적 측면과 절묘하게 잘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흡사 사진의 인물들은 입자가 되어 금세라도 먼지처럼 흩어져버릴 것만 같다는 느낌을 주는데, 밝은 빛 아래 형상을 뚜렷하고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진보다 이렇게 어둠의 공간 속에서 경계가 모호하고 번지는 듯한 인물의 사진이 인간실존의 모습을 포착하는 데에는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 실존의 모습은 사실 그리 뚜렷하고 명확하게 보여 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요. 내용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도 결정적 중요성을 띄고 있는 장기노출 방식을 사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천 : 보통 현실성, 명확성이라는 사진의 특성상, 수용자가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사진을 처음 대할 때 사진 속의 인물을 자신이 아는지, 모르는지, 또는 이 인물이 싫다든지, 좋다든지 하는 생각을 바로 갖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생각들이 작품에 대한 수용자의 자유로운 느낌을 구속하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불명확한 이미지가 보다 자유로운 해석의 폭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물이 누구인지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불명확성을 위해 고민했고, 사진의 순간을 느린 시간으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어차피 제게 있어서 사진 속의 인물이누구이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수용자가 가지고 있는 경험체계에 의해서 사진을 폭 넓게 해석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하지요. 하나의 시간의 덩어리, 그러니까 지속의 덩어리를 놓고 볼 때 시간의 양이라는 것이 얼마 만큼이냐는 문제는 두 번째이고, 기본적으로 제가 시간을 늘린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의도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으면 좋겠다 하는 욕구가 있죠. 또 사진이라는 매체가 우리에게 많이 익숙해져 있고 그 사진의 프로세스를 다 알고 있지요. 카메라 앞에서 낯설어 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것은 이제 거의 볼 수가 없지요.
적어도 카메라의 보급이 일반화된 90년대 이후에는 모델이 자신의 의도를 반영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모습이 있고 숨기고 싶어 하는 모습이 있는데, 그 때문에 사진을 찍을 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순간적으로 거짓을 하게 되지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실제적인 심리상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여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러한 것이 무너지는 시간의 양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쉽게 말해서 행복하지 않은데 사진 찍기 위해 몇 초간 웃을 수는 있죠. 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속되면 그것이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오 분이 될 수도 있고 십 분이 될 수도 있는데요. 결국 그 시간의 양은 사진의 대상과 제가 같이 채워가는 교감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Five hour intervals, 2001
사진의 명백성 혹은 사진의 가면
김 : 선생님 사진은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을 이미지화하는 사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존재하는 것들은 사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모습들의 총화도 아니고 하나의 멈추어진 이미지도 아니죠. 시간 속에서 실재하는 대상과 그 대상의 공간적 표상인 이미지는 질적으로 다른 겁니다. 말하자면 음악은 악보와는 다른 거죠. 사진은 어떤 면에서 폭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은 하나의 강렬한 순간 이미지로 시선을 사로잡고 있으면서 늘 대상과 1대1 대칭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명확한 지칭기능을 수행한다고 생각되어지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생각은 상당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진은 늘 순간만을 보여주지만 사진에 찍히는 대상은 시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죠. 사진은 존재의 지속을 드러내지 못하고 존재를 공간 속에 표상하는 기능만을 수행할 뿐입니다. 사진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은 바로 그 공간적 표상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상을 공간적 표상으로 환원하여 인식하게끔 하는 사진의 능력에 있죠. 선생님의 사진은 사진의 이러한 폭력성을 빗겨가고자 하는 듯 합니다. 왜냐하면 대상이 지니고 있는 지속을 사진 속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고, 또 멈추어진 이미지를 대상과 동일시하려는 사진의 음모(물론 무의식적이고 미시적인 층위에서 작동하는 것이겠지만)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흐르는 시간과 멈추어진 사진이미지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어떠한 지 궁금합니다.
천 : 질문 안에 이미 저의 대답이 많이 들어가 있네요. 사진은 포착이며 멈추어진 이미지라는 건 훈련되어진 인식방식이죠. 사진을 이야기할 때 '멈춤'이라든지 '순간'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것 외에는 우리가 사진에 대해 듣고 본 것이 없기 때문일 거에요. 과연 멈춤이라는 개념이 가능한 것인가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현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재'라는 것은 하나의 점일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늘 흐름 속에 존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 '현재'는 과거가 되어 버리죠. 사진과 대상의 대칭관계가 적어도 그 대상이 인물인 경우에는 불가능한 것이, 이미지가 어떠한 인물을 재현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대상을 명백하게 재현한다고 생각되곤 하는데 이 사진의 명백성은 일종의 가면이죠. 사진의 명백성이 가면이기 때문에 폭력적일 수 있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을 합니다. 문제는 사진을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경험을 많이 못한다는 거에요. 사진도 하나의 특수한 언어방식입니다. 사진의 언어방식은 얼마든지 많을 수 있어요. 사진은 이미지 자체로 언어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언어방식으로 이미지를 생산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은 하나의 필터와도 같은 각자의 축적된 경험체계를 가지고 그것을 읽어나가는 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각자 다른 방식일 겁니다.
김 : 선생님 사진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은 어둠, 침묵, 지속입니다. 바로 이 어둠, 침묵, 지속은 명확한 이미지에 가려졌던 대상의 아우라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선생님 사진을 보면서 아우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주 아우라라는 말을 합니다만 아우라는 그런데 명확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존재의 아우라 또한 선생님 사진의 이미지처럼 흐릿하고 모호한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아우라를 명확하게 지칭하려하면 할수록 역설적으로 아우라와 더 멀어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왜냐하면 지칭은 공간과 순간에 관계를 갖고 있는 반면 아우라는 시간과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존재가 시간 속에 있지 않다면, 또 인간에게 기억이 없다면 아우라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우라는 시간을 사는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일종의 시간-느낌이 아닐까 합니다. 선생님 사진에서 시간의 개입에 의해 공간적 표상이 흐릿해 질수록 좀 더 대상존재에 대한 참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선생님 사진을 언급하는 글을 보면 아우라라는 말이 빠지지 않더군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아우라에 대해 말씀을 좀 해주시죠.
천 : 아우라에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와 작품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가 있겠습니다만, 질문은 작품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에 대한 것 같군요. 사람에게 있어 아우라는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간의 흐름을 배제할 수 없죠. 그리고 어떤 대상앞에 내가 있느냐에 따라서 변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작업에 있어서 저와 대상간의 교감은 아주 절대적입니다. 분명히 저와 대상이 마주하고 있는 그 순간, 그 대상이 제 앞에 있었기 때문에만 나올 수 있는 일회적인 아우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진적 행위는 보이는 대상에서 자신의 시각을 찾아내는 것이지만 저는 보이는 것을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대상성에서 자유로워지려고 합니다. 대상과 제가 같이 참여하고 키워가는 시공간 속에서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있어요. 그것을 명확하게 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만 그런 확신이 있을 때에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과로 나올 때 만족하는 거지요. 테크닉컬한 경험이 있으면 기술적으로 어떠한 결과가 나올 거라고 추측할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분위기를 가진 결과가 나올 거라고 명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저는 대상을 가지고 계속 실험해 보면서 뭔가를 찾아가 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게 있어 작업은 어떤 분위기와 이미지의 효과가 나올까 하는 기대감과 호기심을 확인해 나가는 과정이었죠. 시간이 축적되어서 나오는 이미지를 미리 내다볼 수는 없지요.
김 : 음...대상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축적된 시간의 이미지를 찍는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군요.
천 : 제 사진에서 찍는다는 표현은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것 같지 않네요.
김 : 그렇군요. 찍는다기보다는 이미지를 드러낸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군요.
천 : 네. 그 표현이 더 적합한 것 같네요. 저의 작업은, 비유하자면 한 장의 종이에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얇은 종이에 그려진 그림을 계속 겹쳐나가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설명중인 천경우씨
셔터를 누르는 순간은 사진이 시작되는 순간
김 : 일반적인 사진 작업과 본인의 작업은 어떠한 면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 : 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죠. 개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 시간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시간을 감지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아는 불행을 안고 있죠. 언젠가 죽음이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잖아요. 전 시간이 철저하게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사진을 이야기할 때에 멈춤의 미학, 결정적 순간의 미학을 이야기 하죠. 가령 까르띠에 브레송의 'take the best moment, waiting for the best moment' 같은 말이나 사진은 찰나의 미학이라는 말은 사진을 공부할 때 늘 상 듣는 이야기일 겁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러한 순간은 어쩔 수 없이 단편적인 파편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진은 몇 백분의 일초, 몇 십분의 일초의 순간으로 이미지가 결정 되지요. 하지만 저에게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은 사진이 결정되는 순간이 아니라 사진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제게 있어 사진행위는 셔터를 마구 누르면서 뭔가를 찾아가는 행위가 아닙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부터 대상과 저는 함께 시공간을 채워가게 되지요. 그 시간동안에 일어나는 일회적인 것들은 고유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조형적으로 이런 저런 모습을 찾으려는 의도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주어진 시간 동안에 채워지는 것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스타일을 찾거나 어떤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인물을 찾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김 : 작업을 하는데 있어 영향을 준 사람이 있나요? 꼭 사진가가 아니라도 화가나 철학자나 음악가들 중에서요.
천 : 특히 한두 명을 이야기할 수는 없죠. 여러 사람으로부터 다양한 영향을 받았으니까요. 구체적으로 누구누구라고 얘기하기 어려운데 구지 말한다면 폴 비릴리오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제가 감성적으로 가장 많이 공감하는 사람은 존 케이지입니다. 저 스스로 혼자서 고민한 부분이 많았는데 위의 사람들은 제게 어떤 확신을 주고 씨그널을 준 사람들이죠. 그리고 조선시대의자연관, 시간관에 관심이 많아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제가 가지고 있는 감성의 정체성을 찾을 수밖에 없는 거죠.
김 : 개인적으로 선생님 사진을 보면서 드가와 세잔이 생각났습니다. 이 사람들의 그림에는 시간과 운동이 들어가 있죠. 혹시 미술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지는 않았나요?
천 : 글쎄요. 별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이미지를 통해서 자극받은 것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글이나 생각들에 자극을 많이 받았죠. 존 케이지 같은 경우에도 그의 음악보다는 그의 생각에 공감을 했죠. 물론 그 사람의 작품들도 관심이 있었습니다만, 중요한 건 그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시간으로 그린 사진
김 : 선생님 사진에서 드러나는 깊이감은 표현의 방식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 : 제가 어렸을 때 제 외삼촌이 동양화를 그리셨는데 그 때 저는 늘 옆에서 먹을 갈아드렸었습니다. 그때는 이해를 못했었는데 그 때의 그 수묵화의 어두운 톤이 지니고 있는 깊이감을 막연하게나마 좋아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멜로디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기억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죠. 우리가 첫 번째 음을 잊어버린 다면 두 번째 음밖에는 못 듣지요. 세 번째 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네 번째 음을 들었을 때 하나의 멜로디로 형성이 되는 거죠. 시간성은 기억에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미지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경험체계에 의해서 하나의 인터프리테이션을 요하는 것이지 이미지는 이미지 자체로 이미 설명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말하고 싶어요. 어떻게 보면 사진이 굉장히 구체적이고 설명적이기 때문에 사진 안에 보여 지는 것은 그 자체 이외에는 없잖아요. 하나의 사실 자체죠. 그러한 사진의 사실성은 벗어날 수 없는 상자인데요. 제가 외삼촌 그림을 보면서 느낀 것이 숲을 그리기 위해서는 어두운 색을 한번에 진하게 칠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엷은 톤을 계속 덧칠했다는 거죠. 그러면서 깊이감이 생기는 것이었지요. 제 작업도 이러한 덧칠의 작업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 사진의 덧칠은 시간의 덧칠이지요.
김 : 우리가 통상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라고 하잖아요. 설명을 듣고 보니 선생님 사진은 찍는다는 표현보다는 카메라로 그림을 그려나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네요.
천 : 카메라가 아니라 시간으로 그린 거죠. 제가 작업을 할 때 항상 대상에게 먼저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신 앞에 내가 있지만 당신 스스로가 당신의 얼굴을 시간으로 그린다고 생각하라고 이야길 해요. 사진을 찍는 행위는 '사진가와 모델' 의 역할분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동등한 입장에서 채워나가는 시공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제 사진 앞의 인물들은 '모델' 이라는, 사진가의 주문을 기다리거나 능력에 맡겨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역할을 갖게 되며,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긴 시간도 무리 없이 보내게 된다고 봅니다.
김 : 이제껏 선생님 사진의 대상은 거의 인물입니다. 다른 대상이 아닌 인물을 작업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천 : 인물을 대상으로 하게 된 것은 필연적이라고 봐야겠네요. 인물이 아니면 느끼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런 작업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지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거죠. 촬영하는 동안 대상과 저는 하나의 시공간 속에서 예기치 않은 감성의 결합이 이루어짐을 느낍니다. 똑같은 형태를 찍어도 인간이기 때문에 매번 다를 수 밖에 없어요. 동일한 인물이라도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는 거에요. 저는 그 안에서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물론 보는 사람은 제 사진이 다 비슷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순간 이미지’에서 ‘시간 이미지’로의 이행
김 : 사진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가 어렵지 않게 대상을 명확하게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인데, 바로 이 점 때문에 보들레르는 예술의 이름을 얻고자 하는 사진을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었죠. 선생님 사진은 통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명확한 사진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하게 되기 까지 꽤 오랜 시간의 고민의 과정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현재의 작업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말씀해 주시죠.
천 : 저는 인물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계속해서 회의감이 들더군요. 사진은 하나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고, 그 장면을 내가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선택에 대한 나의 스타일과 취향은 변할 수밖에 없는데, 중요한 건 대상이 인물이라는 거에요. 좀 전에 사진이 폭력적이라 말씀하셨는데 단편적인 인물사진을 계속 찍어나간다는 건 폭력의 연속이지죠. 촬영을 하면서 막연하게나마 희망사항이 있었는데, 이런 것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기술적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것이었습니다. 19세기 문학작품이나 작가들의 생각, 특히 비릴리오 책을 보면 한 인물과 로댕과의 대화가 있어요. 거기서 로댕이 "불가능하지만 시간을 응집해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 힌트들을 보면서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작업이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지요. 사진에서 움직이는 형상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셔터가 느릴 경우에는 움직이는 효과가 나오잖아요. 저는 그런 것은 원하지 않았어요. 그러한 것은 하나의 효과이면서 결과인데 중요한 것은 프로세스죠. 사진작업을 할 때에는 항상 그 대상과 그 시간만큼은 마주하고 있어야 하죠. 회화나 음악은 그런 것을 배제하고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들이죠. 반면 사진은 그 자리, 그 시간, 그 인물과 마주해야 한다는 필연성이 있습니다. 이 필연성이 제게는 각별하게 다가왔습니다.
처음에는 하루 중에 제일 평온한 시간을 찾아서 원시적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해가 질 때를 기다려서 해가 넘어가는 시간에 한 장의 사진을 만드는 작업을 했지요. 인물들에게는 각자 시간의 양을 선택하게 했구요. 그 작업을 하면서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촬영방식에서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시간의 깊이감을 느꼈지요. 하지만 그러한 작업은 매일 매일의 날씨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상당히 불완전한 것이었죠. 나중에는 노 컷 컨디션을 제가 라이팅을 만들면서 진행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촬영조건에 대해서 자유롭게 된 것이지요.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천천히 자연스럽게 발전된 것 같아요.
김 : 해외에서는 선생님의 사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까?
천 : 미술관 큐레이터나 평론가들을 만나면 이런 식의 사진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해요. 사진 뿐 아니라 작품을 탄생시킨 사고방식이 서양에는 없는 것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제 작업의 프로세스는 상당히 개념적이죠. 그런데 실제 이루어지는 순간만큼은 전 모든 걸 놓거든요. 물론 기술적인 환경 같은 것들은 다 의도적이죠. 하지만 셔터가 이루어지면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시간에는 전 모든 걸 내려놔요. 사람의 관계와 똑같은 거죠.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50%밖에는 안 되죠. 아니 50%도 안 되죠. 그 쪽 사람들이 얼마나 알고 하는 얘긴지는 모르겠지만 종종 동양적인 사고나 배경들에 대해 많이 얘기해요. 그것은 분명히 그 사람들의 관점일 거에요. 저한테는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는 것도 흥미로운 것 중 하나죠. 결국은 사진도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방식 중에 하나이고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 작품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해서도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김 : 제가 보기에는 사진에서 드러나는 선생님의 시간관은 동양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베르그송적인 것에 가깝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지속의 일회성, 멈춤과 순간은 거짓개념이라는 생각, 지속하는 존재를 공간적으로 표상하려는 것에 대한 회의는 베르그송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선생님의 생각은 이러한 생각과 상당히 일치하는 듯 하군요. 기억은 파편적인 음을 멜로디로 인식하게 만든다는 예는 베르그송이 언급했던 것이기도 하구요.
천 : 이태리 작가의 작품에서 캐톨릭적 사고와 감성을 배제하고는 이야기 할 수 없듯이 한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제게 한국적 감성, 철학을 배제하고 지식으로 간접 체험할 수밖에 없는 서양의 사상에 전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유한과 순환으로 시간을 대하는 사고의 차이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나기도 합니다.
베르그송의 영향을 전혀 안받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만, 그의 철학은 제가 가지고 있는 사고의 범위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어요. 베르그송은 제가 작업을 하기 전이 아니라 작업을 하게 되면서 관심에 의해서 접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베르그송보다는 제가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는 훗설이 도움이 많이 되었죠. 물론 지속성에 대한 생각에는 분명히 베르그송과 연관성이 있죠. 하지만 중요한 건 제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동양적인 것, 한국적인 것에 베이스를 둘 수밖에 없다는 거죠. 제가 어떤 것에 영향을 받았다고 몇 가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살면서 내가 체험했던 모든 것들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서로 내 안에서 얽히고 반응하면서 작품 속에 드러났다고 말하는 편이 더 옳은 듯싶습니다.
김 :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좀 더 자주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고, 비디오 퍼포먼스 작업도 한국에서 조만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천 : ‘18x1 Minute’는 가장 단순한 형식이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6월 중순 이틀간 홍대 앞 아티누스 갤러리 마당에서 한국 사람들과 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아직 시작하는 저에게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 역시 생각들을 되새겨 보는 흥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대담을 나누는 천경우씨와 김응수씨
● 대담 및 정리 / 김응수 (사진비평 객원편집위원)글쓴이 김응수는 제5회 사진비평상 평론부분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사진비평, fotato.com 객원편집위원 및 사진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국내 최대의 사진전문 포털사이트인 아이포스 웹진에서는 각 미디어와 화랑의 전시담당자, 프로사진가, 전국의 각 대학 사진학과 교수 및 전공자, 미술계와 광고 디자인계, 출판 편집인,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인사, 국내 유수 기업의 최고경영자와 임원, 사진동호인 등 27만6,823명에게 사진문화에 관한 유익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