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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준초이 `멜라 스튜디오`
양재천 근처에 자리잡은 준초이-멜라 스튜디오
멋진 공간을 갖고 있는 준 초이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양재천 근처에 자리잡은 준초이 스튜디오는 단순하지만 기능성과 미(美)를 동시에 갖춘 공간이다. 준초이(이하 최명준)는 아주 치밀하고 엄격하기로 유명한 사진가이다. 그동안 일본과 미국의 광고사진 일선에서 고군분투하면서 쌓아온 스타일일 것이다. 하지만 막상 사진가 최명준을 만나보니 소문과는 다르게 자상하고 따스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인간적인 희노애락을 느끼며 살아온 사진가 최명준에게서는 진한 인간 냄새가 풍긴다.
스튜디오 입구
■ 인터뷰
안녕하세요.
네 반갑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금의 '준초이스튜디오'는 언제 오픈하신 겁니까?
작년 3월에 오픈 했습니다.
멜라(mela)란 인물사진 브랜드를 최근에 새로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누구나 어느 시점이 되면 ‘의미’를 찾기 시작합니다. 광고인으로서 ‘의미’를 찾기 시작하면 힘들다는 주위사람들의 말을 많이 들어왔죠. 여러 사람의 지혜와 도움으로써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요. 광고 일을 많이 했지만 허(虛)하다는 생각을 자주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서 오는 따뜻함을 느낄 수 없었죠. 우리는 실(實)하지 않은 것을 실한 것처럼 위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진실하고 연륜이 느껴지는 인물사진을 위한 브랜드를 새롭게 만든 것이지요.
주위에서는 최 선생님을 한국에서 사진의 가격을 올려놓으신 장본인중의 한명이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요. 미국에서 막 귀국했을 때의 한국의 광고 사진계는 어떠하였습니까?
우리나라에는 거품이 있는 기업들이 많아요. 미국에서 제가 경험한 시스템을 똑 같이는 아니지만 비슷하게라도 적용시키려고 애썼습니다. 당시의 한국 사정이 미국 시스템을 그대로 적용하기엔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때 제가 느꼈던 한국 광고계의 문제점은 새로운 것을 해보려는 의지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상품촬영을 하는데, “이거, 2, 30분이면 되지, 뭐!” 하는 식이었죠. 그 당시에는 웬 만한 수준을 필요로 하는 사진들은 모두 외국 사진가들이 맡아서 찍었습니다. 지금도 외국의 DOP(Director of Photography)와 같은 사진가들이 와서 많은 한국 일들을 하고 갑니다. 나는 무엇 하나를 찍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광고시장에서는 모두 빠른 작업을 요구하더군요. 빠른 것이 경쟁력이 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작업도 그에 맞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댜. 이것을 무시하게 되면 오히려 더 많은 경비와 시간을 낭비하게 되죠.
어느 한 외국 사진가가 말하더군요. 한국만큼 빠른 곳도 없지만 한국만큼 느린 곳도 없다는 말을요. 이 말은 기획이나 사진촬영은 빨리 하지만, 결과적으로 결과물은 더 늦게 나온다고 말이죠. 한 예로, 어느 대기업의 직원들이 빠른 시간에 결과물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허술한 결과에 만족하지 않는 그 기업 총수의 한마디에 처음부터 다시 촬영을 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지금의 기업 총수들은 기업 2세대들입니다. 모두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왔고, 자녀들도 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죠. 외국의 광고물들을 직간접적으로 학습해온 그들의 센스나 안목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꼭 총수의 지시 때문이 아니라 할지라도 다시 수습해야 하는 상황들이 자주 발생하곤 하죠. 또 우리나라에는 ‘산탄식’ 디자이너들이 많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한 번 해보자’는 그런 식이죠. 이것은 치밀하고 충분한 사전조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인이 갖고 있는 시간과 능력, 에너지는 정해져 있습니다. 이것을 한 곳에 집중할 때 위력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튜디오의 외곽
※필자가 예전 학생시절 스튜디오에서 어시스턴트로 생활할 때의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실정하고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긴 하지만.)
“미국해외로케 촬영이 있었는데,스탭들과 함께 촬영현장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모델이 나타나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꽤 잘 알려진 모델이었는데,알아보니 ‘프라다’에서 촬영을 하고 있어서 놔주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프라다’ 측에서는 이쪽의 모든 경비를 다 보상하겠다면서 끝내 모델을 보내주지 않았다.스탭들과 함께 외국까지 가서 한 컷도 촬영하지 않고 계약한 돈을 받은 셈이다.포토그래퍼는 유명 모델을 찍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을 말하였지만은..여러 장면도 아니고 단 한 컷을 만족스럽게 찍기 위해서 그 만큼의 시간과 경비를 부담하면서까지 작업하는 그들의 환경을 보며 참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뉴욕으로는 언제 가셨나요?
197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82년까지 있었구요. 뉴욕에는 82년에 가게 되었죠.
일본은 어떤 계기로 가시게 되었죠?
중앙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좀더 사진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당시 대학교 때 성적이 좋지 않아서 그랬는지(하하), 원서를 넣는 곳마다 불합격 통지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려서 결국 일본대학 합격통지를 따냈습니다. 학교 다니는 동안 내내 장학금을 탈 정도로 정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셨군요. 중앙대는 언제 졸업하셨나요?
76년 입니다.
오사와 도시코 님의 사진이 사무실 한켠에 세워져 있다.
일본에서 계실 때 지금은 돌아가신 '
오사와 도시코
'란 분의 많은 도움을 받으셨다고 들었는데요? 어떤 분이셨나요?
제가 유학할 때 큰 도움을 주신 중앙대 황성규 교수님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저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십니다. 저에게 많은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주셨죠. 돌아가시기 일년 전에 제가 병원에서 모시고 나와서 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환자복을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으신 후에 촬영에 임하셨죠. 그 뒤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와서 가족모두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그 장례식장에 내가 찍어드린 사진들을 크게 확대한 사진들이 깃발처럼 펄럭펄럭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그 분 장례식장에는 하루에 700명 정도의 사람들이 문상을 하고 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습니다. 아무튼 그분은 돌아가시면서도 나에게 크나큰 자부심을 심어 주신 고마운 분입니다.
뉴욕에서 생활하면서 힘드시지는 않았는가요?
무엇보다도 언어 문제가 가장 컸습니다. 어시스턴트로 들어가고 싶어서 리스트들을 뽑아서 일일이 전화를 걸어보긴 했지만, 제가 미리 준비한 말들만 하게 되고 상대방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으니 일이 잘될 리가 없었죠.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서 리스트에 뽑은 스튜디오 앞에 있는 전화박스까지 가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지금은 휴대폰이 많이 보급되어 있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두 블록마다 공중전화기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아무튼 그곳에서 전화를 걸어 창문 밖으로 내 모습을 직접 보게 만들거나 만나주도록 부탁했죠. 리차드 아베돈 같은 유명한 사진가의 스튜디오에서는 일본인 어시스턴트를 채용하고 있었어요. 그쪽 사람들은 일본인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죠.
고생고생 끝에 어안 지글리라는 사진가 밑에서 조수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맡은 일만큼은 성실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 그쪽 사회에서 신의를 쌓아갔습니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일본에서 6년 가까이 생활하고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그런 것도 덕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는 당시 사진을 배우겠다는 생각만으로 무보수로 일하겠다고 했지만, 월 75달러를 주더군요. 그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것은 미국의 최저임금이었고 그마저 주지 않고 사람을 부리면 위법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어시스턴트 일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지글리는 그런 나를 많이 이용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친분 있는 사진가들 일에 나를 조수로 보내기도 했구요. 지글리는 그 대가로 하루 70달러를 받으면서 나는 단돈 1달러도 받지 못했습니다. 눈치로 짐작은 했지만 그냥 모른 채 하고 있었죠. 지글리의 동료 사진가들도 그 점에 대해 알고 너무 한다는 말들을 했습니다. 아무튼 그것을 계기로 나는 이 세계의 다른 일면도 보게 되었고, 미국의 여러 사진가들을 알게 되었지요. 그 뒤로 자네트라고 하는 독일 사진가와 일을 했는데 그는 아주 엄하긴 했지만 마음이 무척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두 번째로는 역시 경제적인 문제였죠. 내가 그때 사용할 수 있는 돈은 하루에 5달러에서 6달러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사고 싶은 책이 있어도 살 수 없어서 서점에서 보기만 했습니다. 어느 날 서점에서 블랙 북 내용을 베끼고 있었는데 서점 직원이 다가와서 그것이 금지된 행동이라고 하면서 자기 사무실 구석진 곳으로 데려가더군요. 겁도 나고 창피하기도 했지만, 그가 하는 말이 이곳에서 책을 복사하라고 하는 거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직원의 오빠도 사실은 이민을 와서 가난하게 사진을 배우고 있다는 말을 하더군요. 아무튼 그녀의 고마운 배려로 난 편안하게 사진 책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한 번은 조수시절 너무 힘들어서 밖에 나와 있다가 길거리에 떨어져있는 담배꽁초를 집어서 피운 적이 있었죠.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엠뷰런스가 오더니 저를실어 가려고 하더군요.(웃음) 저는 질색을 하며 스튜디오 안으로 뛰어들어간 적이 있는데, 그 당시 제 몰골이 어땠는지 아마 짐작할 수 있겠지요?
한국으로 돌아오시게 된 계기는요?
우여곡절 끝에 뉴욕 맨하탄에 준 초이라는 스튜디오를 차렸습니다.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 그것도 맨하탄에 자신의 이름으로 스튜디오를 낸 것만으로도 가슴 뿌듯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뉴욕에서 두 번째로 함께 일했던 자네트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에겐 동양적인 감성과 성실함이 있다. 네가 한국에 돌아간다면 최고의 사진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요.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면 거기서 뿌리를 내려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면 넌 실패한 것이다.” 라고 덧붙이더군요. 나는 그분 말씀을 듣고 한국의 사진시장에 대해서 여러 모로 조사를 했고, 여러 가지를 고민한 끝에 결국 귀국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어떠한 때에 가장 희열을 느끼셨습니까?
그럴 때가 자주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곳에서 느끼게 됩니다. 특히 인물사진을 찍을 때 그런데요. 사람보다 아름다운 피사체는 없어요. 광복 50주년 맞는 1998년, 문화공보부에서 대한민국을 빛낸 세계적인 예술가 14인을 사진에 담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요. 세계각지에서 활동하는 우리나라의 유명한 예술인들을 만나면서 많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사진작업 환경도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특히 광고시장은 더욱 그 변화가 빠른데, 이런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대응해 나가실 생각인가요?
현시점에서 '왜 디지털인가' 에 대해 논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시스템들이 디지털화 되어있는 시점에서 말이죠. 저는 오래전부터 포토샵 등을 직접 다루며 작업해 왔습니다. 스튜디오 안의 장비들도 많이 디지털화 되었죠.
지금은 마치 수직으로 상승하는 그래프처럼, 사진의 모든 분야에서 급격한 디지털화 과정을 겪고 있는데요. 칼리브레이션(Calibration)의 상위개념인 CMS(Color Management System)와 같은 개념에 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 꼭 사진 분야만의 변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네. 맞아요.
주변에 많은 지인을 두고 계신걸로 알고 있는데요. 앞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 인가요?
특별히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어요. 크게 성공한 사람이나 유명한 사람들보다는 보통 나의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선생님을 존경하는 많은 젊은 사진학도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씀은요?
예전에는 ‘나를 따르라’라는 식의 독재자 같은 말들을 해왔는데요(웃음) 지금은 딱히 전해줄 말이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벽돌을 쌓아 가는 과정을 겪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일정기간 푹 빠져 있을 각오를 가지고요. 사진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처음 입문할 때에 많은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아무런 과정 없이 한순간에 유명해 질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기존 광고시스템의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든 자신 나름대로의 작업을 하면서 유명한 포토그래퍼가 되기를 희망하든 아까 말한 벽돌을 쌓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도사진가도 광고시장 종사자들의 직업수명은 대체로 길지가 않아요. ‘과정’을 거치지 않는 사진가는 그만큼 더 빨리, 일순간에 무너져버리고 말게 됩니다. 반대로 그 과정을 충실히 쌓았다면 오래 살아 남을 수 있는 거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진가는 누구입니까?
으음.. 과거에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교과서적인 대답이 있었죠. 카슈나 어빙 팬 같은 사진가를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세실 비튼이나 헬무트 뉴튼 같은 사진가를 좋아합니다. 개인적으로 지금은 카슈의 사진이 왠지 답답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시고 싶은 일이나 계획은요?
광고시장에는 ‘반짝 광고’가 많습니다. 광고는 금방 질리는 경우가 많아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는 이미지는 범람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이미지들이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죠. 그래서 더 이상 생산해낼 새로운 이미지도 드뭅니다. 그래서 연륜이 느껴지고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는 인물사진을 찍고 싶어요.
앞으로의 전시계획은 없으신가요?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전시회를 가져볼까 생각 중입니다.
그렇군요. 그때 꼭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약속이 있으신 데도 긴 시간동안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최명준 선생께서는 준 초이-멜라 스튜디오에서 최근에 만든 광고사진 작품들을 보여주고, 스튜디오의 내부를 자상하게 안내해 주셨다.
가지런히 각종 자료들을 모아놓은 책꽂이
준초이-멜라의 운영이사이자 부인 박희숙 씨와 비지니스에 대한 상의를하고 있는 사진가 최명준
스튜디오 전경
작업장에서의 사진가 최명준
직원들과 함께
준초이-멜라 스튜디오에서는 최명준 선생님 외에 3명의 포토그래퍼와 2명의 어시스턴트가 같이일하고 있다.
소품 및 메이크업 테이블
스튜디오의 채광창과 편안해 보이는 쇼파
■ 준초이-멜라에서 제작한 사진들
기업 브로셔 사진들과 제품사진들
취재/ 표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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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사내방 ]
[2005.02.22] 최명준 (사진가, 준초이 스튜디오)
2005.02.22
[ 출판 ]
메이드 바이 준초이 -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사진의 비밀
2004.08.26
최명준(준초이) Jun Choi
내 마음이 머무는 곳
위대한 의자, 20세기의 디자인
위대한 의자, 20세기의 디자인 - 사진 준초이
최명준(준초이) Jun Choi
준초이, 백제 사진전
국내 최대의 사진전문 포털사이트인 아이포스 웹진에서는 각 미디어와 화랑의 전시담당자, 프로사진가, 전국의 각 대학 사진학과 교수 및 전공자, 미술계와 광고 디자인계, 출판 편집인,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인사, 국내 유수 기업의 최고경영자와 임원, 사진동호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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