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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원 교수의 조선족의 생활양식의 지속과 변동 - 오늘의 조선족 - 3. 조선족 사회의 문제점과 발전 방향
Ⅱ. 오늘의 조선족
3. 조선족 사회의 문제점과 발전 방향
(1) 인구의 변화
: 자료를 조사 중임
손자와 함께 살고 있는 유두익(64세), 안련옥(59세)부부. 2004. 2. 동명
연해지구에 취업한 아들과 결혼한 한족며느리는 이집의 손을 이어주고 있다. 아들은 현재 한국으로 취업을 했다. 2004. 2. 우창
한족에게 팔린 조선족 가옥, 문련과 초가집이 묘하게 가슴에 다가온다. 2004. 2. 우창
(2) 교육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처음부터 학교를 설립하였다는 사실은 일제에 의해 건설된 마을에서도 우선적으로 학교가 지어졌다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민족의 교육에 대한 열정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개혁개방이후 농경지를 떠나 대도시나 연해지구로 떠난 조선족의 비율은 괄목할 만큼 상당한 숫자에 이르며 그것이 더욱 취학 아동의 수를 급감시켜 농촌의 교육이 황폐화되었다. 그래서 농경문화에 바탕을 둔 조선족사회에서 농촌의 붕괴는 조선족의 붕괴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것은 도시화 “초기농민들의 대규모 도시 진출로 민족 언어에 대한 교육장의 부재로 청소년들의 80%가 우리말을 상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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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반성에서 1989년 북경조선어학교를 설립하고 도시청년의 민족 언어 상실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각 도시마다 북경조선어어학교 분교가 설립되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고 1990년 석가장시 조선어학교를 시작으로 91년 심양, 92년 목단강시, 92년 하얼빈시, 94년 단동시, 95년부터는 학교이름을 한국어 학교로 바꾸어 장춘, 98년 내몽고, 길림, 2000년에 해구에 언어예술학교등을 설치하였다. 이 학교들이 지향하는 교육목표는 “민족의 정체성의 확립을 통해 우리민족이 당명한 문제점들을 풀어나가면서 21세기를 살아가는 민족의 진로를 찾는 교육이다. 조선족사회의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세대들로 하여금 개인의 창의력과 개성을 충분히 개발하면서 민족의 앞날을 책임지는 사명감을 갖고 중국의 개혁개방실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다민족국가의 여러 민족 사회구성원들과 협력하는 가치관을 이끌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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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농촌이나 중·소 도시에서는 조선족 학교가 줄어들었지만 조선족의 인구가 늘어난 대도시나 연해지구 등에 조선족학교의 설립이 늘어나게 되었다.(통계자료 조사 중) 그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각 개인의 적성에 맞는 교육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조선족의 자질 함량과 연결되어 다방면에서 우수한 인재를 배출할 수 있으며 조선족 전체의 발전 계기가 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본 연구자가 다녀본 바에 의하면 농촌의 교육환경은 참담한 수준이었지만 대도시는 물론 중소도시에도 현대화 된 교육환경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고 심지어 중등학교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을 유치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물론 중국의 경제 발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한어 조기 교육이 목표이지만 타켓은 한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중소도시 등에서도 인근 지역의 학생들이 몰려와 상당한 수준의 교육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의 학교 등과 자매결연 등을 통하여 자발적인 학교발전을 모색하고 있으며 결연이 된 학교들과 상호 방문과 협동을 통하여 모자라는 것들을 보충하고 있었다. 그러한 결과로 최근 중국 공업계의 명문인 하얼빈공대에서도 인구비례로 볼 때 가장 많은 학생수를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이 대학의 간판이라고 할 수 있는 우주항공을 위한 국방대학 분야의 박사 과정의 학생 31명 중에서 조선족이 3명이나 된다. (정확한 데이터 등의 자료는 현재 수집 중에 있으며 보완할 것임)
하얼빈공대의 기숙사, 오른쪽의 건물은 박사생, 그 다음이 석사생, 마주 보이는 건물은 학부생들의 기숙사이다. 하얼빈공대는 청화대학, 복단대학과 함께 중국의 명문대학에 속한다. 2004. 5. 하얼빈.
조선족 중학교가 있는 이곳은 인근의 조선족들이 몰려와 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사진은 등교를 하고 있는 학생들과 마을의 아침풍경. 2004. 2. 삼차구.
방학중 보충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 2004. 2. 삼차구
빔프로젝트를 이용한 수업을 받고 있는 하얼빈 제1 중학교의 수업광경. 2004. 5. 하얼빈
1927년 신민부에서 설립한 신창소학교가 모체가 된 해림시 조선족 실험소학교에서는 방학 중에도 바이올린을 공부하는 음악반 학생들이 연습에 열중 하고 있다. 2004. 2. 해림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가고 있는 아이들, 중학교인 이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은 140명이 넘는다. 2004. 5. 삼차구
교육을 위해 고향을 떠나 진정부의 식당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 가족. 2004. 2. 삼차구
농촌 조선족의 교육에 대한 위기를 걱정하고 있는 최영철(의사), 권혁순(강동소학교 교장) 부부. 2004. 2. 명성
(3) 탈북자와 그 자녀
북한과 중국은 일제치하에서부터 한국전쟁까지 혈맹의 관계를 다져왔으며 같은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중국의 경제가 최악의 상태였던 “60년대 초 약 20만 명의 조선족이 북한으로 건너갔으며 중국정부는 몇 년간 국경을 개방한 상태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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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당시 중국에서 건너온 이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환대했다.
1995년 전후 북한 경제의 추락과 자연재해로 인해 극심한 식량난에 부닥친 북한의 주민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탈북을 시도했고, 중국의 동북삼성 조선족이 살고 있는 도시와 농촌 어디에서도 쉽게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의 여자들은 농촌의 조선족 노총각과 결혼 내지는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고 마을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자녀를 출생하였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외교공관의 진입과 중국국경을 탈출하여 제3국을 경유한 탈북자들이 늘어나면서 중국당국의 삼엄한 조사와 북송 등으로 부모가 없이 조부모의 손에 길러지고 있는 아이들의 문제가 커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정식으로 결혼한 부부가 출생한 자녀 외에는 호적에 올릴 수 없다, 그래서 탈북자는 중국의 공민이 아니기 때문에 조선족 남편과 혼인신고를 할 수 없고 태어난 어린이는 무적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조선족 남편 중에는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호적을 만들거나, 어려운 환경에서도 돈을 마련하여 탈북여인의 한국행을 돕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 중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탈북한 아내(37세)와 97년에 혼인을 하여 초등학교 2학년생인 딸이 태어났지만 탈북자 색출이 심각해지자 전 재산보다 많은 돈을 빌려 2002년 7월에 베트남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가도록 하였다. 그녀는 현재 한국에 살고 있으며 수시로 전화를 통하여 안부를 묻고 돈을 부쳐와 이자는 갚아나가고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사례는 양강도에 살고 있든 북한 여인은 99년 남편이 사망하자 7살 난 아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흑룡강성 발해에 정착하면서 농촌 총각과 동거를 했다. 그러나 그녀의 한국행에 대한 노력은 혼인을 해서 잘 살기를 바라는 시어머니와 문제가 생겨 이혼을 당하였다. 그 후 부인이 한국에 가서 4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는 유부남과 다시 동거를 시작했다. 동거의 조건은 한국으로 갈 때까지 서로 돕고 살자는 것이었다. 그러한 동거생활에서도 그녀는 자립을 위해 목재소에서 남자들과 함께 노동을 하였고 동거남의 형이 한국으로 가면서 부탁한 87세의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다. 2003년 6월 그녀가 한국행을 결심하자 동거남의 외삼촌으로부터 노인을 잘 공경해주어서 고맙다고 하면서 한국에 가서 잘 살라고 격려금으로 6,000위엔을 받기도 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먼저 가보고 자식을 데려간다며 심양을 거처 약 7개월 동안 죽을 고비를 겪으며 여러 나라를 전전하면서 한국으로 왔고. 아들은 한국에서 보조금으로 받은 돈으로 부로커를 통해 40일 만에 한국으로 데려왔다.
농촌 총각의 장가 문제로 야기된 탈북여인과 조선족 청년의 결혼은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에서 설자리를 잃고 있으며 그간에 출생한 자녀들의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다. 그리고 조선족들 사이에서 탈북자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고 중국당국의 철저한 수색으로 그들을 보호하는 문제도 심각한 수위에 놓여있다.
(5) 농촌과 도시 그리고 집중촌
: 자료 조사 중
남편이 사망한 후 7살난 아들과 탈북한 여인, 이 여인은 두번의 동거생활을 거쳐 한국으로 온 후 아들까지 불러왔다. 1999. 11. 발해.
탈북여인과 결혼한 조선족, 이 마을에는 결혼 수속을 할 수없는 이들에게 출산을 허가하지 않고 있다. 1999.11. 발해
탈북자인 엄마가 북한으로 압송된 후 할머니와 살고 있는 어린이. 2004. 2. 우창
(5) 코리안 드림
: 자료 조사 중
도로공사를 위해 이면도로도 없이 길을 막은 공사 현장. 2004.5. 해륜.
북안시로 가는 도로의 모습, 얼마전까지 흑룡강성 오지의 도로는 대부분 이와 같았다. 그 기간 북안으로 가는 길은 교통이 두절되어 있었다. 2004. 5. 해륜
(6) 조선족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
행사를 지켜보면서 좋아하는 장면들을 디지털카메라에 담고 있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2004. 5. 하얼빈
중국에서의 여행은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중국의 열차는 왠만하면 10시간 이상 이 걸리고 보통 16시간에서 20시간 이상 타기 때문에 침대차가 보편적이다. 침대차는 4인실과 3인 칸이 있는데 4인실은 방으로 차단되어 있어서 프라이버시가 침해받지 않아서 좋지만 3인 칸은 객실 모두가 3층으로 된 침대가 오픈 된 채로 구성되어 있어서 같은 줄에 탄 사람들은 승차한 후 서로 인사를 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밤이 되면 자기 자리로 올라가기 때문에 그 곳에서 만난 동포들과는 자연스럽게 친근해 진다. 그리고 모두가 지루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서로간의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고 많은 정보를 얻기도 한다. 특히 조선족에 대한 연구가 목적인 본인은 항상「조선족의 오늘」을 가지고 다니면서 이야기의 실마리가 풀릴만하면 책을 전달하면서 정보를 수집하게 되고 연구방향에 대한 실마리를 찾게 된다. 목단강의 채여인과 심양의 서탑에 있는 진양개장집의 김여인도 열차에서 우연히 같은 칸을 타게 되어 만났다.
①진양개장집 김여인
김씨 아주머니는 함경도 출신으로서 흑룡강성 계동현 오성촌에서 농사를 짓다가 12년 전 심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녀의 집은 상당한 부농이었으나 새로운 영농 기법을 도입하여 시작한 농사를 망치고 가사가 기울자 남편과 어린 아들 딸과 함께 대도시인 심양으로 이주하여 온갖 험한 일로 전전하면서 어렵게 식당을 개업하여 지금은 남부럽지 않는 규모로 성장하였고 아들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딸과 남편과 같이 진양개장집이라는 식당을 경영하고 있는데 가장 안타까웠던 일은 심양으로 온 초기에 생활난으로 허덕이다가 자식들을 바로 공부시키지 못한 일이 가장 가슴이 아프다며 이제 손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해주고 싶다고 하였다.
그녀는 고향의 오빠를 만나러 가는 열차에서 우리와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녀의 오빠는 간암말기의 환자였고 한족에게 시집간 딸을 두고 있었는데 사위가 장인의 병이 위중하자 치료비로 선 듯 인민폐 10만 위엔을 내어놓았는데 그녀의 오빠(55세)는 “내 병은 불치의 병이다. 아내가 옆에 있다고 해서 치료할 수도 없다. 그 돈으로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 와서 자식들과 아내의 노년에 대비해라” 고 하며 부인을 한국에 취업
시키고 자신은 혼자서 자취하면서 병 치료를 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꿈에서 만난 오빠가 너무도 생생하여 이 세상에서 마지막 만남이라고 생각하고 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기차에서 만난 그녀의 기색은 말이 아니었다. 오빠의 아들인 조카는 탈북자와 만나 살림을 차렸는데 일도 잘하지 않고 가정도 돌보지 않아서 더욱 더 마음고생이 크다면서 탈북자들과의 삶의 가치관과 문화적 차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또 다른 질녀는 한국에서 5년간 취업하여 돌아왔는데 한국에서 생활과 보고 들은 것들이 자신의 인생관을 바꾸어 놓았다며 도저히 집에 있는 남편과는 이상이 맞지 않아서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남편을 피해 다니고 있으며 곧 이혼을 생각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었고 답변을 하기가 어려웠다.
심양에 들리는 길에 식사도 할 겸 식당에 들렸는데 그곳은 한국인들의 호감을 살만큼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었고 식사의 내용과 밑반찬 등도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느껴보지 못할 만큼 한국적이었다. 그녀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오빠의 소식을 묻는 우리에게 슬픈 목소리로 고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오빠는 사망한 후였고 망자는 한국에 있는 부인에게 연락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돈이 무언지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꿈에 오빠를 보았다며 간암에 걸린 오빠를 위문하러가는 김여인. 2004.2. 목단강.
② 한국으로 시집가는 채춘월
그녀의 사연은 대부분의 조선족 여인들이 거치고 있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40대로 보이는 그녀는 중국에 있는 남편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서울, 대구등지에서 3년간 음식점의 종업원으로 일을 하다가 2003년 2월에 불법체류자로 잡혀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 중국에 온 후 그녀는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남편과 이혼을 하고 지금은 목단강시에서 혼자 살고 있는데 한국으로 가는 방법으로 위장결혼을 선택했다고 하며 비자 신청 차 심양의 한국영사관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앞으로 10여일이 지나면 비자를 발급 된다고 한다. 그녀는 이야기를 마친 후 잠자는 것 외의 대부분의 시간을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얼굴은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한국을 다녀온 후 남편과 이혼하고 다시 한국으로 시집을 가기위해 영사관을 다녀오는 조선족 여인. 얼굴에 온갖 상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2004. 2. 목단강
46)
황유복,「21세기 중국조선족의 발전방향과 그 대안적 모색」,『제9회 조선족벌전 학술심포지움과 워크숍』(장춘, 2003).
47)
황유복,「21세기 중국조선족의 발전방향과 그 대안적 모색」,『제9회 조선족벌전 학술심포지움과 워크숍』(장춘, 2003).
48)
최삼룡,「21세기를 지향하는 민족지성인의 마음가짐」, 『조선족공동체의 력사, 현황과 진로 국제학술대회』(연길 교려학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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