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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라이프」와 카파를...
사진이라면 기껏해야 고등학교 졸업앨범이나 여행지에서 찍은 기념사진 정도밖에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전설적인 전쟁사진가 로버트 카파가 찍은 그 유명한 「어느 스페인 병사의 죽음」은 어디선가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스페인 내란이 한창이던 1936년 9월 5일, 참호를 뛰쳐나가던 병사가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을 머리에 맞고 막 쓰러지고 있는, 문자 그대로 ‘결정적인 순간’을 잡은 그 사진이다. 처음에는 프랑스판 「뷰」지에, 그리고 그 2년 뒤에는「라이프」지에 실려서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 그 박진감 넘치는 한 장의 사진은 부다페스트 출신의 무명 사진가 로버트 카파(본명은 앙드레 프리드만)의 일약 세계적인 사진가로 만들었다.
전 세계의 2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장의 같은 사진을 동시에 보고 있는 정경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기에 조금 두려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프 잡지인 「라이프」에 실린 사진들이 실제로 그랬다. 1936년 11월 23일, 46만여 부로 시작한 「라이프」는 1년 후에는 100만 부를 발행했고, 전성기였던 1965년에는 정기구독자 수가 800만을 넘어섰다고 하니까, 서점과 거리에서 팔리는 가판 부수까지 합한다면 1천만 부를 족히 넘겼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볼거리나 읽을거리가 귀했던 당시에 잡지 한 권을 30명씩만 돌려본다 해도 같은 사진을 본 사람이 어림잡아 2∼3억이 넘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라이프」가 이처럼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 것은 다루고 있는 내용도 그렇지만, 그 잡지가 매주 엄청나게 많은 사진들을 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확실한 기억이나 상상력과 같은 협잡물이 끼어 들 여지가 없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생생하고 명료하게 보여준다고 하는 사진의 효용성을 「라이프」 창시자 헨리 R. 루스는 잘 인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삶(Life)을 본다. 위대한 사건을 목격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을, 높은 긍지를 가진 사람들의 동작을 본다. 눈에 익숙하지 않은 것 ― 기계와 군대, 대 군중, 정글과 달 표면의 그림자를 본다. 인류가 성취한 업적 ― 회화와 탑과 발견을 본다. 남성들이 사랑하는 여성들, 그리고 수많은 어린이들 …… . 본다. 그리고 보는 일의 기쁨을 찾아낸다. 보고 놀란다. 보고 배운다 …… ”
「라이프」지 창간호에 실린 루스의 선언이었다. 「라이프」가 물론 하루아침에 땅에서 솟아난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서 창간된 최초의 근대적인 사진잡지 「뷰」가 계기가 되었고, 그것은 「뷰」를 창간한 루시앙 보젤이 사망했을 때 루스가 “만일 「뷰」가 없었다면 「라이프」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는 전문을 보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 「뷰」가 창간된 것은 1926년. 이 잡지를 만들기 위해서 보젤은 유럽 전역에서 가장 유능한 저널리스트와 최고의 사진가들을 모아 들였다. 창간호에서 그는 말한다. “「뷰」는 프랑스에서 새로운 관습을 만들어낼 것이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진으로 보도한다고 하는 관습이다. ……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사진과 기사가 들어오고, 그것은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전달되어 인간의 삶의 모든 것을 ‘눈’으로 보여줄 것이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정치적 사건들을 찍은 사진을 가득 실은 페이지, 충격적인 사진에 의한 르포르타쥬, 여행기, 화제의 재판의 분석, 최신의 과학적인 발견, 주의 깊게 선택된 사진들 ……. 「뷰」는 실제로 1931년 ‘소비엣 러시아 분석’을 시작으로,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을 다룬 ‘미국은 싸운다’, ‘이태리 - 11년째의 파시즘’, ‘중국 탐사’ 등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기록한 사진과 함께 정세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시도했다. 『사진과 사회』의 저자 지젤 프로인트는 1932년, 125쪽의 기사와 438매의 현장감 있는 사진으로 구성된 이 잡지의 특집기획을 통해서 프랑스의 대중들이 나치즘의 출현과 위협에 대한 최초의 경고를 받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로버트 카파는 같은 헝가리 출신의 앙드레 케르테스와 마틴 뭉카치, 마이네 크루루 등 당시 유럽의 초일류 사진가들과 함께 바로 이 잡지의 사진부문 스탭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이 잡지를 위한 취재로 찍은「어느 스페인 병사의 죽음」이 1936년 「뷰」지에 최초로 발표되었고, 그를 일약 세계적인 전쟁사진가로 유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스페인 내란이 종식된 후, 카파는 중국에서 중일전쟁을 취재한 데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과 아프리카 각지의 최전선을 좇아 종군했다. 1944년 6월 6일, 제2차 세계대전사에서 ‘가장 긴 하루’로 일컬어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비오 듯 쏟아지는 적의 포화를 뚫고 오하마 해안으로 진격하는 미군 해병들을 겁에 질려 떨리는 손으로 찍은 심하게 흔들린 사진 「노르망디 상륙작전」도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참혹한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두 번 다시 전쟁을 찍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3년간에 걸친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포성을 멈춘 이듬해인 1954년, 카파는「라이프」의 의뢰를 받아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월남으로 향한다. 이미 패색이 짙어진 프랑스군을 따라 타이빈 지구를 취재하던 카파는 5월 24일, 논둑에 매설된 지뢰를 밟아 그 자리에서 폭사하고 만다. 그의 손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지뢰를 밟기 직전에 찍은 필름에는 전차를 앞세우고 넓게 트인 초원을 산개해서 전진하는 20여명의 프랑스군 수색대원들과 그 위로 펼쳐진 파랗게 갠 하늘이 담겨 있었다. 41세의 그에게 있어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마지막 전장이었다.
‘니치 독일’ 하면 누구나 ‘인류의 적’인 그들이 저지른 비인도적인 만행의 가지가지를 머리에 떠올리게 된다. 거기에 반해 적진으로 진격하는 미군병사의 모습은 얼마나 성스러운 것인가. 우리는 독일군 병사(그들은 히틀러와 동격이다)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다. ‘적’을 배제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가령 폭력적이고 때로는 비열하게 보이는 행위라 할지라도 연합군(독일과 그 동맹국들로부터 많은 약소국가를 해방시킨)의 그런 행위를 용인해야 한다는 논리가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쟁은 중간 항이 없이 모든 것을 ‘이쪽’과 ‘저쪽’의 두 가지만으로 갈라놓는다.
파리 해방 직후, 독일군 협력자로 낙인 찍힌 한 젊은 여성이 주위를 에워싼 승리자들의 비웃음과 야지를 받으며 걸어가고 있는 광경을 찍은 카파의 「독일군에 협력한 여성」도 한 번 보면 결코 쉽게 잊혀지지 않는 사진이다. 머리털을 무참하게 깎여버린 모습으로 가슴에 안은 젖먹이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내몰리듯 걷고 있는 이 여성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기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보따리를 손에 든 그녀의 아버지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앞에서 걸어가고 있다. 그 여성이 사랑했던 독일군 장교는 어쩌면 누구보다도 전쟁을 증오했고, 어떤 다른 남성보다도 그녀에게 충분히 사랑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카파가 아닐지라도 보도사진가라면 누구나 그처럼 좋은 그림이 되는 장면을 단 한 컷만 찍고 끝냈을 리가 없다. 오래 동안 카파를 연구해온 리처드 위란에 의하면 같은 필름에는 삭발 당한 그녀의 어머니도 함께 찍혀 있었다고 한다. 그 사진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편집자만이 얘기할 수 있다. 어쩌면 편집자는 거기까지가 ‘승리’와 ‘배신에 대한 징벌’을 상식적인 독자들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한계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전쟁의 진정한 희생자에 관해서, 그리고 합리화된 집단적 잔인성에 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진실은 이렇게 해서 우리들의 시선에서 배제되어버린 것이다. 저널리즘은 세계를 바라보는 인류의 시선을 끊임없이 길들여 왔고, 그래프 저널리즘이 쇠락한 지금도, 신화를 구축하는 시각의 메커니즘은 보다 은밀하고 보다 효과적인 형태로 여전히 가동되고 있다.
저격을 받고 쓰러지는 병사를 찍은 카파의 사진이 어쩌면 연출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지금까지 여러 차례 제기되어 왔다. 실제로 그 사진을 찍은 필름의 연속된 컷에는 같은 병사가 찍힌 다른 장면들이 몇 장 더 있었기 때문이다. 1936년 9월 23일호의 프랑스판 「뷰」지에는 이 「스페인 병사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동일한 장소에서 찍힌 또 한 장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 두 장의 사진에서, 쓰러지는 병사의 배경을 이루는 능선과 그 능선 위의 구름의 형태, 지형 등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사진들이 거의 같은 시각, 같은 위치, 같은 카메라 각도에서 찍힌 것이라는 사실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병사는 서로 다른 사람이다. 따라서 어느 쪽이 먼저 총탄을 맞았건, 거의 동시에 찍힌 것이 분명한 이 두 장의 사진 가운데 한 장에는 먼저 쓰러진 병사의 시신이 찍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사진에도 병사의 시체는 물론 그 시체를 끌고 간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을 찍은 같은 필름에는 ‘쓰러지는 병사’ 자신이 마치 연기 연습이라도 하는 것처럼 다른 병사들과 함께 참호를 뛰어나가는 장면과 총을 들고 기념사진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장면들도 함께 찍혀 있었다고 한다. 그런 행동이나 자세가 총알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긴박한 전장 터에서는 실제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 ‘걸작 사진’의 진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사실관계를 묻는 사람들에게 카파 자신은 끝내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만일 그들의 추리가 사실이었다면, 카파는 그것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던 일에 대해서 지금쯤 가슴을 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꾸며진 것이라 할지라도 카파의 나머지 업적이 부정되거나, 전쟁을 기록한 수많은 사진의 신뢰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진은 한 사람의 병사의 죽음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에 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강렬한 메시지를 전해준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카파는 전쟁과 폭력을 증오했고, 재기에 넘치는 매력적인 인간이었다. 나는 그런 그가 사진사에 남겨놓은 위대한 업적을 깎아 내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는 전장에서 바로 옆에서 쓰러지는 병사의 죽음을 보고 실신할 정도로 소심한 지극히 인간적인 사진가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장의 사진이 대규모의 유통구조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었을 때 미치는 그 가공할 영향력에 관해서인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진도 결코 투명한 눈으로 바라볼 수 없다. 바라보기 위한 틀(여과장치)을 규정짓는 것은 개인의 문화사이고, 그것은 대부분 일상생활에 범람하는 다양한 간접적 체험(매체)들을 통해서 형성된다. 저널리즘(카파)은 진실 그 자체보다도 다만 그런 매체를 통해서 전쟁을 가장 이해하기 쉬운 모습으로 보여주는 쪽에 무게를 두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라이프」를 탄생시킨 루스는 명문 예일대학 출신으로 독실한 장노교파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또 공화당의 지지자였고 자본주의의 신봉자인 동시에 열렬한 애국자였다. 그의 잡지는 실질적으로 미국 내셔널리즘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미국의 도덕과 가치관과 경제적인 이익과 정치적인 이념을 대변했다. 그는 자신의 독자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대중들을 교화시켜야 한다는 강한 신념과 의무감을 갖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2억이 넘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의 교의를 거의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했다. 만일 그것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루스는 전쟁과 죽음에대한 공포을 환기시키고, 정의가 얼마나 큰 희생 위에 실현되는가를 인식시키기 위해서 ‘어느 스페인 병사의 죽음’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거짓말도백 번 말하면 진실이 된다’ 라는 말은 프로패건더의 효용성을 숙지하고 있었던 히틀러가 남긴 명언이었다)
전쟁에 의해서 빚어지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전쟁에 의해서 무엇인가가 파괴된다는 사실이다. 전쟁에서의 어느 한 쪽의 승리는 다른 쪽의 저항의 의지를 완전히 압도할 만큼 많은 것들을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파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전쟁사진은 그처럼 파괴되어 가는 무엇인가를 찍은 사진이다. 그러나 전쟁을 기록한 사진은 전쟁의 참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줄 수는 있지만, 몇 장의 사진만으로는 전쟁이 빚어내는 공포와 추악함의 모든 국면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사진은 선혈과 조각난 육체와 폭력과 파괴의 한 부분을 드러내 보여줄 수는 있지만, 인간의 파괴에 대한 본능적인 욕망이나 어느 경우에도 살아남으려고 하는 강한 의지, 견디기 어려운 긴 고통과 모든 사람들의 깊게 상처받은 영혼을 기록할 수는 없다. 어떤 사진도 천 명의 죽어 가는 병사들의 신음소리와 천 명의 죽은 자의 육신이 썩어 가는 냄새를 찍어서 전해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걸작사진을 게재한다 할지라도 「라이프」가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은 어차피 단편적인 허구의 세계에 불과하다. 문자로 된 기사도 허무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일정한 교화와 순치 능력을 갖춘 허구라는 사실이다.
물론 독자들은 사진이 보여주는 진실의 깊이에 대해서 언제까지나 같은 정도의 신뢰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많은 독자들은 그것이 어느 각도(시점)에서 찍혔는가, 편집자에 의해서 어떤 장면이 선택되었는가, 구성과 배열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또 그 사진에 어떤 문자(설명)가 부가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한 장의 사진이 갖는 진실은 순식간에 반전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라이프」의 쇠락은 광고수입의 격감과 라디오, TV 같은 전파매체의 보급과 확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사진이 반드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리고 현실에서 일어난 현상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한 프로포션으로 복제하는 사진의 기능이 어디까지나 기표記標적인 수준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바르게 이해하기 시작했던 데에 보다 큰 원인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다시 카파의 얘기로 돌아가자. 「라이프」가 창간된 1936년은 그래픽 저널리즘 시대의 막이 열린 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40년대 전반은 사진 매체가 다른 무엇보다도 정치와 광고와 선전에 충실하고 효과적으로 봉사했던 시기였다. 노르망디의 D데이의 사진을 찍은 것은 카파 자신이었지만, 그것은 ‘진실’과는 관계없는 그런 봉사를 위한 하나의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진이 편집이라고 하는 검열 시스템을 거쳐서 독자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카파의 눈은 독자들의 시선과 일치하게 된 것이다. 편집자가 잡지의 표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다. 카파가 위대한 전쟁사진가로 기록되는 것은 그의 사진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는 것’을 통해서 세계와의 통로를 구하려 했던 사람들의 욕망에 의해서, 전쟁과 시대의 요구에 의해서, 상업주의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그리고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카파 자신에 관한 수많은 에피소드들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필요하다면, 그를 그냥 장난기 많고 사람을 속이는 경솔한 겁쟁이쯤으로 기술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 헝가리 출신의 유태인 사진가 카파는 제2차 대전의 연합국 측의 전쟁의 목적이 자신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는 절박한 자각을 갖고 있었다. 전장에서 비록 소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있기는 했지만, 사진을 찍는 것은 국적과 인종적인 아이덴티티가 불안정한 마이놀리티(상당기간 그는 무국적자였고 이방인이었다)로서의 그에게 있어서는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 전까지 얘기를 나누던 병사가 바로 옆에서 총탄에 맞아 숨지는 것을 보면서도, 때로는 공포 때문에 실신까지 하면서도 인간적인 좌절이나 자기분열에 빠지지 않고 전쟁사진가로서의 역할을 끝까지 수행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1972년 12월 9일,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의 1면에 나타난 ‘「라이프」 죽다. 향년 36세’ 라는 제호의 기사는 전세계 언론과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실제로는 12월 28일자가 마지막 호였다). 1978년 10월 「라이프」는 월간지로 모습을 바꾸어 복간되지만, 그것은 이미 이전의 ‘위대한’ 「라이프」가 아니었다. 「라이프」는 아마도 지구상에 있었던 어떤 잡지보다도 많은 전쟁과 주검을 보여준 잡지였을 것이다. 눈으로 보고자 하는 인류의 욕구를 충족시켜온 그래프 저널이 월남전의 종식과 때를 맞추어 그 화려한 ‘삶’을 마치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월남전 이후, 걸프전이나 코소보의 전황을 전하는 어떤 ‘생생한’ 전쟁사진도 본 일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도 의아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밤하늘에 형광색 포물선을 그리며 소리 없이 날아가는 미사일의 궤적을 리얼타임으로 비쳐내는 CNN의 중계 화면을 사람들은 마치 축제날의 불꽃놀이라도 즐기는 것처럼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일상의 잡담을 나누면서 바라본다. 모든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노이즈가 제거된, 위생적으로 처리된 모니터 화면만이 신기루처럼 떠 있을 뿐, 그곳에서는 비릿한 피 냄새도 없고 포탄이 작렬하는 굉음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다시 「라이프」와 카파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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