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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정 / 동물·에피소드 I
2001년 10월 10일(수) - 10월 23일(화)
대안공간 풀
정은정의 정물, 혹은 죽음에 관한 유머
해골, 깨어진 그릇, 모래시계, 시든 꽃 등을 메타포로 하여 성경의 한 구절인 '헛되고 헛된' 삶을 재현하는 정물의 한 양상이 있다. 17세기 이후 풍미한 이러한 정물의 한 분파를 미술의 역사는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라는 현학적인 라틴어를 사용하는데, 이 말은 '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를 갖는다. 영원한 젊음과 사랑, 명예와 풍요로움을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을 비웃으며, 덧없는 삶의 운명을 환기시키는 메멘토 모리는, 그러나 어차피 조만간 사라질 삶은 양껏 즐겨야 한다는 억압된 쾌락주의의 이면(裏面)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물로서의 이 메멘토 모리의 융성은 독일어의 정물이라는 용어를 축어적으로 번역한 영어, '스틸 라이프 still life'로서의 정물, 다시 말해 '움직이지 않는 정적인 생명'의 묘사로서의 정물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는 불어, '나튀르 모르트 nature morte'의 확립을 가져온다. 이것은 '죽어서 움직이지 않는 자연'이라는 뜻으로, '여전히 살아있음'을 강조하는 영어의 '스틸 라이프'와는 달리 사물의 죽음을 강조하는 장르로서의 정물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정은정의 정물은 '스틸 라이프'와 '나튀르 모르트'의 사이를 오가며 엮어내는 복잡한 의미망이다. 우선 닭, 오리, 돼지, 젖소, 생선 등, 그녀가 연출을 행할 정물의 대상들은 모두 다 '죽어서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다 죽음의 시각적 기호를 지니고 있다. 가금류와 돼지는 털이 말끔히 뽑혀 있으며, 젖소의 머리는 몸통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생선의 몸통은 잘려나갔거나 혹은 물고기의 호흡공간인 물이 부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의 기호 곁에는, '여전히 살아 있음'을 연출하는 기호들이 항상 존재한다. 닭들은 눈을 뜨고 있으며, 눈을 감았다면, 사람처럼 잠자는 모습을 연기한다. 그렇지 않으면 줄에 목을 매 자살을 꾀하고, 검게 타버린 따라서 죽음의 기호를 육화한 닭은, 살아 있음으로, 검은 알을 낳는다. 젖소의 머리는 트랙터가 있는 제 살던 초원에서 하늘을 응시하고, 커다란 물고기는 수초가 있는 물위로 머리를 드러낸다. 돼지는 정면을 응시하고, 빨간 별 무늬 소파에서 힘껏 기지개를 켠다. 죽음의 기호를 간직한 동물들이 삶의 기호를 연출하는 모습은 한편으로 유머로 충만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섬뜩하기도 하다.
사실, 죽음을 잉태한 삶의 메타포는 '메멘토 모리' 이후 상투적인 것이 되었다. 1930년대 미국의 농업 안정국 Farm Security Administration 소속의 러셀 리가 찍은 농촌 아낙네의 거친 손, 도로시어 랭이 포착한 시름에 찬 얼굴, 그리고 워커 에반스가 찍은 비참한 무덤들도 경제 사회학적 문맥을 제거한다면, 죽음을 내재한 삶의 이미지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삶을 잉태한 죽음의 메타포는 부활, 순교자의 죽음이라는 종교적, 문학적 메타포 외에는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다. 특히 시각적 이미지에서는 더욱 희귀하다. 이 희소성 때문에 정은정의 정물은 우리에게 유머러스한 섬뜩함을 전폭적으로 안겨준다.
그러나 정은정의 섬뜩한 유머는 전적으로 삶을 간직한 죽음이라는 이미지의 희귀성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검의 불쾌감을 맛보면서, 죽음이 안겨주는 긴장감에 몰입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죽음의 고통을 이겨내려는 무의식적 선택에서 연유한다. 어린 시절의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주검을 마주 대하며 행하는, 범상치 않은 의지적인 연출 행위에서 비롯된다.
프로이드는 유머를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적대적인 힘을 무화시키려는 본능의 지적인 발화행위로 해석했다. 다시 말해 유머는 죽음과 같은 고뇌의 시련을 거부하려는 자기보존 본능을 지적으로 계발된 언어로 포장하는 것이다. 정은정의 정물이 갖는 섬뜩함과 유머는 죽음과 같은 보편적이고, 본능적인 두려움을 고도로 연출된 시각 언어를 통해 길들이고, 이겨내려는 시도에서 비롯한다.
유년시절, 뇌막염을 앓은 작가는 줄곧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고, 완치가 된 후에도 그 강박 관념적인 두려움에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벗어날 수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죽음을 앞둔 사람이 받는 천주교의 대세를 받았고, 5학년 때 뇌막염은 재발한다. 유머라는 지적 행위로 죽음의 고뇌에 대처할 수 없었던 소녀는 그녀의 곁에 있는 죽음이라는 현실에 애써 눈을 감았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주로 다니는 길 어디에 장의사가 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가 그곳을 지날 때면 한참 전부터 다른 곳을 보거나 눈을 감아버리곤 했다." "내가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어릴 적 정신적 외상을 '여전히 살아있음'을 표상하는 '스틸 라이프'의 유머로써 극복하게 된 계기는 "미국에 간지 4년" 되던 해였다.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차이나 타운을 걷고 있던 내게 길거리에 털이 뽑힌 채 쌓여있던 닭들은 그렇게도 무서워하던 죽음의 모습이 그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 그 홀딱 벗고 누워있던 닭은 이전에 죽으면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끝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생생하게 떠있는 닭의 눈에는 어떤 나이브한 영혼이 머물러 있는 듯했다. 그후로 죽은 동물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것들에게서 아직 남아 있는 어떤 기운을 찾는 것이 내 작업의 시작이 되었다. 그러면서 가끔은 생선의 강한 눈빛에서 언젠가 지하철에서 느꼈던 사람의 시선을 볼 때도 있고, 돼지머리를 보면 마치 돼지가 'Don't worry, Be happy'하는 것만 같았다."
정은정이 죽음이라는 숙명적인 위협을 거부하기 위한 방책으로 택한 유머러스한 발화행위는 다름 아닌 "죽은 동물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것들에게서 아직 남아 있는 어떤 기운을 찾는 것"이었다. 작가는 주검 속에 있는 생명의 기운을 유머러스한 이미지로 연출하기 위해 주검을 치장하고 조작했다. 죽은 동물을 매만지면서, 'Don't worry, Be happy'라는 팝송의 충고를 유머러스한 시각언어로 집요하게 전이시켰다. 유머는 '메멘토 모리'로서의 정물을 '스틸 라이프'의 정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 그 사이에 언제나 개입했던 것이다.
정은정의 유머러스한 주검들의 정물은 따라서 엽기 취미도, 지적 유희도 아니다. 그것은 유년시절에 입었던 정신적 외상의 상흔을 지우는 작업이며, 삶과 죽음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무의식적 사유행위이다. 죽음의 두려움을 거부하면서, 죽음을 공포를 길들이려는 이중적 욕망의 산물이다. 정은정의 정물에는 죽음의 고뇌를 자기에게서 내쫓으면서, 죽음의 불안에 익숙해지려는 모순된 욕망이 깔려있다. 예술을 성적 욕망의 승화 sublimation라고 프로이드는 말했지만, 정은정에게 있어서 예술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두려움 없는 죽음을 향유하려는 욕망의 승화인 셈이다.
- 최봉림(사진평론가)
예술이란 무엇일까? 과연 고등학교 국민윤리 책에서 배운 것처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인가? 그럼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현대 예술에 있어 고전적인 방법의 예술만을 예술이라 하기엔 예술의 의미가 매우 포괄적으로 변했으며 그 다양성은 너무나 많다. 예전엔 추하고 타부시 되었던 소재도 오늘날에는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탄생한다. 그러다 보니 극한의 소재와 내용으로 많은 논란거리를 만드는 경우가 외국에서는 종종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자극적 소재나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을 드물었으며 심지여 미술교사가 자기의 홈페이지에 본인과 아내의 누드를 올렸다고 해서 법적인 조치를 받는게 현실이다.
오늘 인터뷰한 정은정은 이제까지 가장 타부시 되었던 소재중 하나인 사체(死體)를 소재로 해서 촬영을 했다. 작품의 내용은 잘 모른다 치더라도 떡하니 잘려 있는 물고기 머리의 포스터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정은정 인터뷰>
이번 전시의 계기는 어떤 것인가요?
- 이제까지 공부를 했던 것을 정리하는 의미이죠. 또 거의 처음으로 사진가 정은정의 존재에 대한 알림이기도 하고요.
전시내용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엔 자극적이고 힘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 네, 원래는 일반인들에게 이해를 돕고자 비디오로 작업을 해서 준비하였어요. 작업과정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이었는데 꼭 억지로 제 의도를 관객에게 주지 시키는거 같아 거북했어요. 또 사진이란 매체와 비디오란 매체가 동시에 있는 것도 혼란스러울 거 같아 설치하지 않았지요.
되려 여러 관객의 다양한 시각을 보고 있노라면 재미있어요. 저랑 공감대를 느끼는 관객도 있었고 전혀 반대의 생각을 하는 관객도 있고… 하지만 일반 관객들께서 현대미술의 철학을 이해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작품을 설명한 안내문을 준비해 놨어요. 다행이 반응이 좋아요.
어릴적 죽음의 공포에 대한 극복을 위한 작업이라고 작품서문에서 밝히셨는데 왜 하필이면 그 극복의 오브제가 동물의 사체인가요?
- 사실 사람의 사체를 쓸 수는 없잖아요? 죽음의 대한 공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건 사람의 사체인 거 같아요. 하지만 전 아직도 사람의 사체를 본적이 없어요. 처음으로 이런 작업을 하게 된 계기가 된 동물은 닭입니다. 미국에서 푸줏간에 걸려 있는 털만 싹 뽑힌 닭을 봤어요.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어떻게 보면 유머스럽기도 하더라구요. 육감적인 느낌도 주고… 처음에 닭을 사용해서 작업을 하다 생선 종류로 바꿔 봤어요. 거기다 털이 뽑힌 닭의 피부는 생선은 그 나름대로 유머러스하면서 능글맞은 표정을 보여주는 듯했죠.
생선을 작업하다가 보니 눈빛이 아쉽더라구요. 강한 눈빛을 주는 동물을 원했어요. 눈에서 기가 나오는… 그래서 포유류 쪽을 선택했죠. 소의 눈을 보고 있자면 꼭 소머리가 내게 '너도 언젠간 죽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거 같아요. 우리의 모습이 반영된 거 같죠.
사실 죽은 동물들을 이용해 작업한다는 건 생명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또 그런 동물들에 대해 죄책감 같은건 느끼시지 않나요?
- 저는 생각이 달라요. 전 그 동물들과 내가 같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만약 어떤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촬영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들을 단순히 피사체로 생각하지 말고 그 사람들과 같이 호흡하고 융화가 되어야 참된 의미의 작업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제가 찍지만 그 찍을 순간을 제공하는 건 동물들의 사체이니깐요. 말하자면 동물의 사체와 난 협력자의 관계지요.
작업할 때 어려움이 많았을 거라 생각되는데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요?
- 역시 제일 큰 어려움은 동물의 사체를 구하는 게 어려웠어요. 미국에서는 동물의 사체에 털이 있는 체로 유통하는 것은 불법으로 되어 있어서 어디 가서나 껍질이 확 벗겨진 것만 구할 수 있었어요. 차이나타운에서도 꼭 가죽은 벗겨서 주더라고요. 한번은 소머리를 구하느라 3개월이나 헤매다가 아미쉬(18세기의 생활방식을 고집하는 기독교 종파) 마을까지 간적도 있어요. 주로 시골로 구하러 다녀서 많은 여행을 하게된 느낌이어요. 주변 친구들도 많이 저 때문에 많이 고생들 했었고요.
보통 이런 타부시되는 소재로 작업을 하는 작가들, 예를 들면 위트킨(Joel Peter Witkin)같은 작가들을 보면 그 생활 자체가 그 특이한 소재들과 호흡을 함께하는데 본인도 그런 점이 있나요?
- 음… 제 자신이 좀 남들과 다른 거 같기도 해요. 제 생활에서 보면… 우선 제겐 커다란 냉동고가 있어요. 오브제들이 상하지 않게 보관하기 위해서… 그리고 항상 그런 오브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긴해요. 하지만 생활이 별나다거나 별난 외모를 해 가지고 다니는 건 제 자신이 원하지 않아요.
요즘 사회적으로 엽기문화가 유행이고 이런 타부시 되는 소재를 이용한 전시도 아마 유일한거 같은데 본인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저는 제 작업이 그런 사회 현상과 연결되어 생각되어 지는 건 원하지 않아요. 보는 관객에 따라선 제 작품이 엽기적이라 생각될 수 도 있지만 제 작업은 제 자신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벋어나기 위한 제 개인적인 바람이 밑바탕이 된거죠. 전 어릴적 죽음에 대한 공포가 항상 나를 위축되게 만들었죠. 심지어 장의사 가게 앞으로도 못 지나갈 정도였어요. 미국에 있을 때는 새벽에 한국에서 오는 전화 때문에 매번 놀라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작업을 하면서 그런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많이 사라졌어요. 요즘은 장례식에 혼자서 조문을 갈 수 있을 정도이니까요.
영화 '식스센스'에서 귀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8살 소년 콜은 그 능력 때문에 두려움 속에 갇혀서 살아가던 중 역시 귀신인 말콤박사를 만나 그 두려움을 떨치고 치유하는 법을 알게 된다. 그 방법은 결국 귀신을 피할 수 없으면 귀신과 친해지는 것이었다. 죽음이란 누구나가 갖는 보편적이면서 가장 궁극적인 공포일 것이다. 누구나 피해 갈 수 없고 짧건 길건 때가 되면 맞이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를 살아 가는 것이지만 보통의 젊은이라면 죽음의 공포를 그렇게 강하게 느껴본 적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려서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정은정에게는 죽음이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공포였을 것이다.
(죽음의 공포를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죽음의 공포에서 오는 패닉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그런 그녀의 절박한 상황에서 극복을 가능하게 해 준건 그녀의 작업들이었으며 그 동물들의 사체가 결국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
이미 현실이 된 죽음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라고 속삭인다. 그 동물들의 죽은 모습은 그녀 자신에게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고 죽음을 어렵지 않게 받아 들어야 한다고 말하며 결국 죽음에 대해 더 이상 병적인 공포를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이런 작업의 소재가 상처치유의 일반적인 접근방법은 아닐지 몰라도 작가 본인의 정신적 상처가 이번 작업을 통해 치유되고 그 치유됨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도록 전시를 한다면 이 얼마나 진정한 포스트모던 예술이 아닌가 말인가?
still life라...
still
2007.06.29
제 필명은, 단순한 단어적 느낌으로 사용하지만
정은정 작가의 작품은 직접 대면하기엔 약간
섬뜩할 수도 있는 연출이군요.
동물에 관심이 많아 여러 인터뷰 중 먼저 읽었는데..
작가분은 죽음에서도 끝나지 않은 무언가를 느끼고 표현하시네요.
어떤 만화의 대사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이 없는이상
제게 죽은 동물은 그저 고깃덩이처럼 느껴지네요.
그저 살아있고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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