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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한국 사진의 현황과 전망
1997년, 한국 사진의 현황과 전망
사진이 도래한 1980년대 중반이래, 한국의 근대사는 오랜 식민지 시대로부터의 해방과 분단, 뒤이어 발발한 동족상잔의 전쟁, 빈곤과 폐허, 정치적 사회적 혼란, 독재정권과 민주화 투쟁 등, 연속된 고난과 격동으로 점철되어 나왔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5층 건물 이상의 높이에서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진가들은 수백 년 동안 지혜로운 선비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실을 외면하고 자연의 경관에 심취해 있거나, 아니면 그런 현실에 대항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빈민촌, 창녀, 노동자, 전쟁고아, 농민, 반정부 시위... . 카메라는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과 경제발전이라는 절대적인 명제로 인해 희생을 강요당하는 민중을 구원하기 위한 무기였고, 사진가는 구국투사였다. 그리고 반세기에 걸친 이러한 흐름은 내부로부터의 반성도, 또는 외부에서의 어떤 도전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 한국사진의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한국의 사진은 이처럼 한편으로는 아마추얼리즘과,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과 빈곤과 억압으로 빚어진 사회적 현실을 기록하고 고발하는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두 갈래의 계보를 따라 이어져 내려 왔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사진가들이 사진이라는 매체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구사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서 폐쇄적인 가치관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사진환경에 기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술 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우리가 문화적인 암흑시대를 보낸 60년대는 팝 아트, 미니멀 아트, 컨셉추얼 아트와 같은 미술의 새로운 동향들이 커다란 조류를 형성해서 움직이던 시기였다. 그리고 사진은 그들의 예술표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매체로서 자유롭게 교차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사진에는 그러한 경향을 체험하거나 소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지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960년대 중반까지의 미국의 사진이 대학에서 학생들이 배울 수 있는 현대사진사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세계적인 사진의 움직임에 동조하는 아무런 징후도 한국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의 대학에 최초로 사진과가 개설된 것은 1964년이다. 이후, 경제발전이 유발한 사진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1970년대 초부터 전국의 각 대학에 속속 사진과가 신설되었고, 1996년 현재 전국의 5개의 4년제 대학을 비롯해서, 17개의 2년제 전문대학, 4개 대학원에서 사진전공의 과정을 두고, 매년 2,000여명에 이르는 전문인력을 배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팽창의 속도가 질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급격하게 늘어난 교육기관에 1960년대 이후에 태어난 젊은 사진가들이 교원으로 대거 진출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의 대부분은 사진에 대해서 금욕적인 태도로 일관해 온 이전의 세대와는 다른 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랐으며, 사진에 대해서 보다 자유롭고 강한, 젊은이다운 호기심과 활력을 가진 세대다. 또한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개방정책이 시행되는 1980년대에 해외유학을 통해서 이질적인 문화를 체험하고 돌아왔다는 사실도 한국사진에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시대의 스타일을 바꾸어 놓는 것은 언제나 신선한 변화를 갈구하는 젊은 욕구다. 한국사진에서의 변화의 최초의 조짐은 서울올림픽이 치러진 해에 구본창을 비롯해서, 김대수, 최광호, 하봉호, 이주용, 임영균 등 미국과 유럽,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젊은 사진가들로 구성된「사진-새 시좌」(1988, 워커힐 미술관)전에 의해서 극적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사진은 내용과 형식에서 종래의 사진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들이었다. 이들의 사진의 방법이 기성의 사진가들에게는 물론, 동시대의 사진가들에게 조차 쉽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어떤 수준의 리얼리티를 그려내거나 현실에 대한 의견을 세련된 어투로 말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사진의 어휘만으로는 부족했고, 그를 위해서는 시각적인 현실의 모습을 가공하거나, 인접한 예술의 언어와 행위를 사진의 제작과정에 포함시키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이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가지고 폭넓게 수용되어 나갔다. 이 전시에 맞추어 열린 세미나를 통해서, 사진에 있어서의 포스트 모더니즘의 개념과 국제적인 상황이 최초로 소개(1988, 김승곤)되고, 이들 새로운 경향의 사진들에 대한 이론적인 배경이 만들어졌다.
새 시좌전에 이어 열린「사진, 89-90」(1990, 한마당 화랑)이나 「혼합매체」(1990, 금호미술관)전은 구상과 추상, 현실과 허구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이었다. 이 전시에서는 무의식이나 우연의 개입에 의한 인간의 의식 내면에 존재하는 잠재적인 영역에 대한 탐구가 적극적으로 시도되었다. 사진은 믿어왔던 것보다 훨씬 자유로운 매체이고, 사진이 대상으로 해야할 세계가 무한한 깊이와 넓이를 가진 처녀지로서 대부분 남아 있다는 사실이 사진가들에게 바르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사진의 수평」전 작품 중 일부
1991년 11월, 2, 30대의 50여명의 젊은 사진가들에 의한 대형 그룹전이 개최되었다. 이「한국사진의 수평」전은 2, 30대의 사진에 대한 열정과 억제하기 어려운 욕구들이 자연발생적인 하나의 힘으로 분출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배병우, 김장섭 등을 주축으로 한 젊은 사진가들이 그 때와 장소를 만들었다. 1991년(토탈미술관)과 1992년(서울시립미술관), 1994년(공평 아트센터)의 세 차례에 걸쳐 열린 수평전은 한국의 사진에서 지금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가를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의 사진을 향해서 발신하는 최초의 국제적인 사진 이벤트였다. 연 200여명의 사진가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이 대규모의 사진전은 그때까지의 감상적인 아마추얼리즘과 금욕적인 리얼리즘의 주술에 묶여있던 한국의 사진을 자유로운 예술의 공간으로 풀어놓을 새로운 세력으로서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근대주의 포멀리즘에 대한 반체제적인 표현들이 본격적으로 시도된 것이다. 전시장의 벽과 바닥은 지하적이거나 순도가 낮은, 대중적이고 속된 이미지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억제되었던 인간의 감각을 모든 방향을 향해서 한꺼번에 개방시켜 놓은 듯한 힘을 느끼게 하는 거친 것들이었다. 대부분 1960년대 이후에 태어난 참가자들은 대학이나 또는 외국의 체험을 통해서 흡수한 새로운 사진의 가치관과 방법론을 다양한 형태로 실천함으로써, 품성 바른 기성의 사진이 애써 외면해 온 새로운 표현에 정당한 시민권을 부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들이 청년기를 향해서 성장해 나간 1980년대는 고도의 경제성장과 그에 따르는 사회와 의식구조의 변화, 그리고 지구 규모로 진행된 급격한 이데올로기의 해체(한국이 건립된 이래 지금까지 반공이 국시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와 그 밖의 세계의 여러 곳에서 진행된 문화적인 변화의 규모와 속도를 거의 리얼타임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많은 표현자들이 비 재현적인 작품이나 설치, 또는 매체의 혼용과 같은 형식상의 실험적인 방법으로, 또 성과 페미니즘을 주제로 하거나 대중사회와 현대문명에 대한 비평을 내용으로 하는 작품들을 출품하고 있었던 것도 그러한 시대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옮겨놓는 일보다, 자신의 상상력이나 현실에 대한 의견을 사진의 프로세스 가운데에 개입시키는 쪽에 비중을 두었다. 대상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아진 이들의 작품은 사진이 어쩌면 외계의 현실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줄 정도였다.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와, 유럽 7개국으로부터 50여명의 젊은 사진가들과 함께, 이들 지역의 대표적인 평론가들이 참가해서 열린 이 국제전은 동시대의 표현자로서의 일체감과 자신감을 한국의 젊은 사진가들에게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힘을 앞세운 표현과 외국의 경향을 무분별하게 모방한 듯한 작품들이 눈에 많았다는 지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품이 자유분방한 기운으로 넘쳐 있었고, 그런 활기야말로 한국의 사진이 가장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점, 그리고 지금까지 젊은 사진가들이 자신의 신념을 실천할 수 있는 아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할 때, 작품의 완성도와는 무관하게 한국의 사진이 한차례는 거쳐야 할 단계로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들 젊은 사진가들의 전시가 일으킨 파장은 곧이어, 1945년부터 반세기 동안의 사진을 조망한 「한국사진의 흐름」(1994, 예술의 전당)전을 비롯해서, 「아, 대한민국」(1994, 자하문미술관), 「94 사진, 새 바람」(1994, 현대아트갤러리), 「신체 또는 성」(1995, 갤러리 눈), 「사진-오늘의 위상」전(1995, 경주선재미술관), 「한국사진의 지평」전(1994, 현대아트갤러리), 「새로운 바람」(1995, 리쿠르트화랑, 동경), 「사진의 조각」(1996, 금호 갤러리),「젊은 바람」전(1996, 대구문화예술회관),「사진-새로운 시각」전(1996, 국립현대미술관)과 같은 여러 지역에서 여러 차례의 대규모 그룹전들을 미술관에서 잇달라 실현시키는 촉매제로서 작용했다. 이처럼 크고 작은 단체전들이 1990년대 초를 중심으로 한 5, 6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개최되고 있고, 또 많은 전시 타이틀에 ‘새로운’이나 ‘바람’ 같은 다소 선동적인 수식어가 붙어 있다는 사실만 미루어 보아도 이 시기에 열린 그룹전이 가진 열띤 분위기나 젊은 사진가들이 의도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자주적인 그룹전은 왕왕 지금까지 사진이 축적시켜온 개념과 기술을 답습하기보다는, 그들에 대한 부정의 형태로서 나타나는 일이 많았다. 새로운 세대의 사진가들은 그처럼 금욕적이었던 이전의 사진에 반발이라도 하는 것처럼 잡지나 문자, 플라스틱, 돌맹이, 천이나 나무 조각, 가족사진 같은 바로 가까운 곳에서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일상적이고 특별한 의미를 읽을 수 없는 그런 소재들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작품 속에 끌어들였다. 유제를 바른 커다란 켄버스에 프린트하거나 등신대의 셀프 누드를 만들어 전시장 입구에 세워두는 등, 보다 직접적으로 감상자를 자극하고, 순수한 사진예술을 통속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리기 위한 모든 가능한 방법들이 시도되었다.
이 시기에 김대수, 유재학, 구본창, 박진호 등은 스스로의 신체나 그 밖의 다른 매체를 통해서 자아의 역사를 탐구해 내려가는 두드러진 작업들을 보여주었다. 의식의 내면을 기록한 이들의 사진으로 인해서 외부세계를 대상으로 해온 종전의 다큐멘터리 사진의 개념은 보다 넓은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사진이라고 하는 매체 그 자체에 대한 검증으로 보이는 박홍천, 김장섭, 이상윤, 이경민, 정영혁 등의 실험적인 작업, 김영길의 심상적인 세계는 종래의 풍경사진의 차원에 다른 깊이를 주었다. 조희규, 문주, 홍수자, 김영진, 정재규, 고명근, 염은경, 이규철 등은 혼합매체나 인스톨레이션과 그 밖의 현대미술의 맥락 가운데에서 작업을 시도했고, 이주용, 권순평, 어상선, 서지영 등이 섬세하고 감성적인 터치의 하이브리드한 정물사진을 잇달아 내놓았다. 이전의 사진이 강한 이념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에 반해서 이들 사진은 개념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또한 1990년대의 사진의 두드러진 특징은 김정하, 최정화, 육태진, 최승훈, 김명아와 같은 일군의 표현자들의 작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의 사진이 카메라의 프레임에 들어오는 대상을 가장 중요한 성립조건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물리적인 현실 그 자체를 대상으로 찍고 있지 않은 이들의 작품의 출현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비록 과격한 외관을 가지고는 있다고 할지라도 이들의 작품은 사진가의 의도를 정해진 코드에 따라 읽어내려 가기만 하면 되는, 주름과 시름으로 일그러진 얼굴이나 지저분한 담벼락에 붙은 찢어진 선거용 포스터를 찍은 이전의 사진들과는 어떤 점에서나 구별되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이들의 작품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사건이나 현상의 구조적인 성질에 관한 언급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그 메시지를 해독하기 위해서는 감상자들은 현대라고 하는 시대의 문맥에 대한 동질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했다. 이들에 의해서 속되고 천박스러운 것, 감각적인 것, 페티시하고 그로테스크한 것들이 표현의 전면에 과격하게 모습을 들어냈다. 그것은 폭력적이긴 했지만 명백한 전략과 질서를 가지고 있었다.
키치한 분장으로 몸을 감싼 자신의 신체를 가학적으로 카메라와 대결시킴으로써 존재의 리얼리티에 대한 확신을 손에 넣으려는 기금안, 일상적인 환경 속에서 같은 여성의 나체를 채집자와 같은 깨인 눈길로 스트레이트하게 기록하는 김옥선을 빼놓을 수 없다. 말할 것도 없이 동성애, 에이즈, 매스미디어가 만들어 내는 가상현실, 가족과 가정, 자본주의, 대중문화, 소외, 인종, 환경의 문제들과 함께 페미니즘은 현대예술이 다루고 있는 가장 첨예한 이슈다. 목록은 얼마든지 더 준비되어 있다.
1990년대에 나타난 이런 사진들을 보는 한, 사진가가 지켜야 할 기준 같은 것은 아무데도 없는 것 같았다. 일부의 사진가의 눈에 이런 전시들이 마치 알맹이가 없는 깜짝 쇼나 싸구려의 아이디어 전시장과 같은 인상을 주었던 것도 이들이 그 기준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취한 방법은 소비사회와 매스미디어에 의해서 지배되는 권력구조에 대한 새로운 유형의 경쾌한 지적 비판이었다. 그것은 길거리 사진에 의한 현실비판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이들은 결코 억지로 감정을 고양시키거나 눈물을 강요하려 하지 않는다. 사진은 물리적인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현실의 배경을 이루는 시대와 시대에 대한 정신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들은 자신이 보는 현실 그 자체보다도 자신이 그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첨예하게 표출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진이 어떤 방법으로 현실에 관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런 강박관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문제야말로 가장 절실한 문제였던 것이다.
누구의 눈에나 사진은 지금까지의 안정된 중심을 상실했고, 그 표현의 백터가 무한한 공간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으로 비쳐졌다. 그 사진들은 사진가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진이 추구하는 목표나 방법이 이미 완성되어버린 것도, 또 영원하거나 절대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시켜 주었다. 이 새로운 경향의 사진들을 전통적인 사진의 문맥 가운데에서 읽거나, 한두 가지로 그 성격을 정의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봇물처럼 터져 나온 이런 거칠고 반사진적으로 보이는 표현들에 대해서 우려나 위기의식을 느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진의 중심이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다. 폭발적인 에너지를 보인 90년대의 사진가들 가운데에는 엄격한 태도로 사진의 정통성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눈앞의 액츄얼리티에 지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사진가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새로운 유형의 사진의 출현에 의해서 한국사진의 축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그때까지의 지나치게 몸에 꼭 맞는 옷을 벗어 던짐으로써 사진이 자유로운 예술매체로서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사진은 지금까지의 기계성과 자동성과 객관성과 중립성이라는 특성만이 아니라 허구성과 표층성과 조작성과 같은 다양한 성격을 가진 매체라는 것이 정당하게 인식되고 표현자들에 의해서 새로운 가능성이 시도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풍경을 넘어서」(1991, 소나무갤러리), 「대동산수」(1993-1996, 코닥포토살롱), 「관점과 중재」(1994, 예술의전당)전이나 「한국사진의 현단계」전(1994, 인데코화랑), 「한국인」(1995, 인데코화랑), 「사진은 사진이다」(1996, 삼성포토갤러리)전 등은 젊은 활기만으로 자칫 균형감각을 잃기 쉬웠던 1990년대의 사진의 충격을 완충시키는 균형장치로서 기능했다.
감성보다는 의식을 각성시키는 한국의 풍경을 찍는 민병헌, 홍일, 함성호, 오종은, 최강일, 배병우, 권태균, 이완교, 김태오, 여돈호, 현관욱, 한정식, 오상조, 최영돈 등과, 다큐멘터리의 사진가인 이상일, 정주하, 오형근, 정재한, 강용석, 정동석, 김용호, 김녕만, 김석중, 양종훈, 임동숙, 황헌만, 이기원, 김동욱, 강운구, 양성철, 조승환, 이동준, 임영균, 조문호, 조승래, 전미숙, 이용환, 변금숙, 김영섭, 최광호 등이 사회와 인간과 삶을 중심에 놓은 수준 높은 작업들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도 사할린(1994, 문예진흥원), 베트남(1995, 조선일보 미술관),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삶의 모습과, 탄광촌(1993, 세종문화회관)과 농어촌의 현실, 정박아나 무의탁 노인 수용시설을 인간애를 가지고 기록하고 있는 윤주영과, 20년이 넘도록 한국과 아시아 지역의 민속신앙(1995, 그레이스 백화점)이라는 한가지 테마를 줄기차게 추구해온 김수남은 사진의 정기능과 함께, 정통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하고 가치 있는 해답을 제시해 주었다. 해외의 권위 있는 수상과 전시를 통해서 이들이 펴온 사진활동의 가치가 바르게 평가되었다는 사실은 한국사진의 현실을 가늠하는데 있어서 많은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은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활동의 무대를 해외로 넓힌 사진가의 수도 늘고 있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정재규, 성남훈, 김미현 등은 모두 해외유학이 자유로워진 1980년대 중반 전후에 외국으로 건너간 사진가들이다.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가하는 등 미국을 거점으로 폭넓은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정진은 가장 성공한 사진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95년, 한국 미술의 역량과 현재의 상황을 소개하기 위해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개최된 대형 그룹전의 사진부문에 배병우(1995, 미토예술관)와 주명덕(1995, 나고야미술관)이 참가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의 사진을 주도했던 주명덕과, 젊은 세대의 기수인 배병우는 한국의 풍경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신성과 역사성의 원천을 향해서 파내려 가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80년대말, 한국사진의 전기를 만드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젊은 세대의 사진가 가운데 한 사람인 구본창은 섬세하면서도 농밀한 감성으로 내면의 역사를 시각화한 작품전(1994-1995, 서미 갤러리)을 잇달아 열었고, 황규태는 천상적인 아름다운 풍경을 통해서 현대문명의 위기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전시(1994, 워커힐미술관)했다.
한국의 사진환경은 각일각 변화하고 있으며, 현실에 대한 사진가들의 대응의 태도도 함께 변하고 있다. 우리가 원하건 말건 외부와의 관계를 통해서 스스로의 위상을 정립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의 사진가들은 더 이상 한국적인 현실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지역적 문화적인 제한을 극복하기 위해서 한국성을 획득하는 일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 개인과 역사와 신화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한국성 -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보편적인 표현으로 실현시켜 나갈 것인가, 그것이 이 시대의 사진가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기획과 운영에서 드러난 몇 가지 중대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사진가들에게 전시공간을 제공할 수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 삼성 포토스페이스의 존재가치는 작지 않다. 한 나라의 문화예술적인 역량을 가늠하려 할 때, 미술관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단 한군데의 공립의 사진미술관도 없다. 한국의 문화와 예술의 맥락에서 사진은 완전하게 배제되어 온 것이다. 우리나라가 축적해온 경제적 문화적인 역량이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대미술에서 사진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생각할 때, 사진미술관은 고사하고 사진전문 갤러리의 모든 벽면 길이를 합해도 300m도 되지 않는 현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 사진가들 자신이 아무런 의지도 행동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 아직도 많은 사진인들은 아무런 무력감도 자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 후반에서 지금까지 그 안쪽에 커다란 잠재력을 쌓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사진은 그 힘을 밖으로 발산할 수 있는 통로가 존재하지 않는다. 외국에서 빈번한 사진전, 사진전문 큐레이터, 평론가들의 횡적인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이미 튼튼한 회로를 형성하고 있으나, 우리에게는 그러한 국제적인 교류와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한국은 국제적인 사진의 장면에서 사각지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 교육과 행정과, 무엇보다도 사진가 자신이 풀어가야 할 과제다.
사진이 도래한 시기를 볼 때 한국은 서구나 일본에 비해 수십 년이 뒤떨어져 있다. 또 사진의 표현사의 중요한 변화와 발전의 단계에 있어서도 역시 상당한 시차를 두고 있는 추경험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그 차이를 좁히는 것이 누구에게나 절망적인 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젊은 사진가들에게 있어서 사태는 그렇게 비관적인 것으로만 비추어지지는 않는다. 적어도 몇 사람의 사진가들은 금세기가 지나가기 전에 한국에 사진 미술관을 설립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한국이 전쟁의 위험과 잦은 정치적 혼란, 자유의 많은 부분이 제약된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단기간에 걸쳐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실현시켰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1996년, 한국 사진사상 최초로, 6개 사진단체와 전국의 주도적인 사진가들로 사진미술관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들이 벌이는 활동들은 아마도 20세기의 마지막 몇 해를 남겨놓고 있는 한국의 사진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의 사진의 장면에 어떤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조망하기 위한 이 글은 한국의 사진이 미증유의 활기를 띤 19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현상을 역사적인 범위 안에서 바라보고자 한다면 대상의 전체가 시야에 들어오는 시간적인 거리가 필요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짧은 글에서는 당연히 언급되었어야 할 많은 중요한 사건과 사람들이 누락되어 있고, 그들로 다른 하나의 리스트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짧은 글에서 부적당한 관점이나 표현이 있었다면 그 책임은 필자의 몫이다.
1997년
김 승곤
(사진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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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한국사진의 모습
동시대 한국사진의 모습 (The moment of strangeness)
국내 최대의 사진전문 포털사이트인 아이포스 웹진에서는 각 미디어와 화랑의 전시담당자, 프로사진가, 전국의 각 대학 사진학과 교수 및 전공자, 미술계와 광고 디자인계, 출판 편집인,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인사, 국내 유수 기업의 최고경영자와 임원, 사진동호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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