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 교수의 조선족의 생활양식의 지속과 변동 - Ⅳ. 변화의 기점에 선 조선족 - 3. 빛을 주는 사람들
Ⅳ. 변화의 기점에 선 조선족
3. 빛을 주는 사람들
① 무순 경제문화교류협회 박수빈 회장
무순은 한국기업이 심양, 대련 다음으로 많은 공업도시로서 박수빈 회장과 무순 조선족 경제문화교류협회는 독특한 업적보다 요녕성의 큰 도시에 있는 대부분 조선족 경제문화교류협회의 전형적이고 평탄한 협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소개한다.
박회장의 가계는 증조부가 연해주로 가서 1920년 러시아군에 입대를 하였고 10월 혁명의 혼란한 틈을 타서 루마니아의 조선인부대 수백 명과 함께 기병으로 무장을 하고 연해주에 살고 있는 가족을 이끌고 당시 황무지인 훈춘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훈춘에서 출생하였고 1947년 부친이 중국 해방군에 입대해서 52년 전역하면서 무순에 정착하였다. 1961년 대련이공대학 화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요양공업대학에 조교로 있다가 1963년 무순조선족 중학교 교원으로 조동되어 교사로 근무하다가 82년부터 99년까지 교장이 되어 1999년 정년퇴직을 한 후 무순시 경제문화교류협회 회장을 맡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협회는 1992년 한중 수교 후 조직되었으며 한국의 합작을 유도하기 위해 대외를 붙였는데 1996년부터는 대외를 삭제하고 대내의 활동만을 관장하고 산하에 조선족 기업가 협회, 조선족 문화인 협회, 도라지 무용단, 아리랑 촬영사롱과 양로원이 있다.
협회가 한일 중 가장 큰 것 중의 하나가 조선족 기업인과 정부단체 등의 협찬금을 모아서 양로원을 건설한 것이다. 큰 병이 들지 않으면 자식들과 같이 살지 않으려고 하는 중국 조선족의 특성에서 큰 부담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양노원의 건설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협회가 하는 일은 첫째 조선족 내부에 문제가 발생하면 법을 찾기보다 대화를 통하여 설득하고 협상하여 해결을 하는 것이다. 둘째는 한국기업들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임직원을 구할 때 적당한 사람을 소개해 주고, 학교입학 등 자녀 교육에 대해서 상담하며, 한국기업과 조선족 합작사 사이의 갈등과 마찰을 조절해 주는 것이다. 셋째로는 조선족들이 산업시찰 등으로 한국에 가고자 할 때 지원해 주는 일이다.
협회의 재원은 민족사무위원회를 통한 재정지원이 년 만 여원과, 회원들의 회비, 기업인회의 지원금 그리고 업무처리에 따른 수수료 수입인데 그중에는 정부기관의 번역료, 여행사를 소개하여 생기는 수수료, 유학생의 선발에서 생기는 수수료 등이다. 지출은 독자적인 건물이 없어서 박회장이 퇴임한 조선족중학교의 건물을 무료로 빌려 쓰고 있으며, 회장 부회장(11명) 중 정년퇴임을 한 4명이 맡아서 업무처리를 하기 때문에 인건비를 쓰지 않고 기타 경상 잡비만 사용하기 때문에 큰 애로는 없는 정도로 재무구조가 되어있다.
박회장은 소학교 당위서기로 정년퇴직한 부인 김복순(65세)와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는데 큰 아들은 무순에서 공기업을 경영하고 있으며 둘째는 형의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박수빈, 2005. 5. 무순
②강철거인 박정길 (65세)
현재 료녕성 철령시 서양씨름팀 고문으로 있는 박정길은 한때 국내외 서양씨름경기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초중 2학년 때 료녕성 씨름 경기에서 우승을 따낸 이후로 성급 시합에서 금메달 15개, 전국 시합에서 금메달 6개, 국제시합에서 금메달 2개를 따냈으며 료녕성과 철령시 서양씨름 감독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우수한 선수들을 양성했는데 그의 제자들 역시 전국규모의 대회에서 많은 금메달을 따냈으며 각지에서 씨름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박정길은 1940년 료녕성 개원현 소가사촌의 조선족농민 가정의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집안 살림이 가난해 굶주림이나 겨우 면하면서 자랐지만 그는 신체가 튼튼하고 힘이 셌으며 성격이 활달하였다. 하학 후 학교 운동장이나 강가 모래톱에서 소꿉친구들과 씨름을 많이 했는데 힘이 세고 씨름을 잘한 그는 언제나 일등이었으며 상급생들도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당시 요녕성에서 조선족이 비교적 많이 집거해 있는 개원에서는 조선족 체육활동이 활발히 전개돼 해마다 조선족 운동대회가 열렸다. 박정길은 중학교 2학년을 다니던 그해 조선족 운동대회 사회조 씨름에 참가하여 1등을 따내 인기화제가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초중2학년에서 심양체육학원 예과반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해 가을, 심양시에서 중국식 씨름경기가 열렸다. 학교에서는 아직 정규적으로 씨름을 배우지 못한 박정길에게 별로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큰 경기에서 담양과 경험을 쌓게 하기위해 그를 경기에 참가하도록 하였는데 처녀출전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 후 그는 심양시와 요녕성에서 열린 중국식 씨름경기에서 3년 연속 우승을 독차지했다. 중국식 씨름에서 성과를 따낸 그는 또 서양씨름에 흥취를 느끼고 서양씨름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는 서양씨름에 대한 이론과 기교를 탐구하고 훈련을 거듭하였고 1960년 20살에 전국 서양씨름경기에 참가하여 74㎏급 우승을 차지하였는데 이것은 료녕성에서 전국 씨름경기에 참가한 이래 처음으로 따낸 금메달이었으며 전국 씨름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낸 첫 조선족이었다. 그때부터 박정길의 이름은 전국 체육계에 널리 알려졌다.
박정길의 능력과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길림성에서는 부성장이 직접 나서서 우월한 대우를 조건으로 길림성에 올 것을 요구했지만 요녕성에서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1962년에 료녕성 체육팀에서는 경제난으로 서양씨름항목을 취소되자 박정길을 금방 길림성팀으로 데려갔다. 1963년에 열린 전국 서양씨름대회는 수준 높은 명선수들이 가장 많이 모인 대회였다고 평가되고 있는데 22세의 박정길은 82㎏급 우승을 따냈다.
1964년에 아세안게임의 전신인 “신흥력량운동회”가 인도네시아에서 열렸는데 박정길은 중국 대표팀으로 경기에 참가하여 우승을 차지하였고 경기가 있은 후 외국의 선수들은 “적어도 7, 8년 사이에는 아세아에서 박정길을 넘을 선수가 없을 것이다.”고 고개를 저었으며 당시 아세아에서 서양씨름의 왕관을 독차지하던 일본과 인도네시아에서는 박정길의 씨름법에 대해 연구를 하기도 했다. 그 후 일본에서 열린 국제 서양씨름 초청경기에서 박정길은 82㎏급 우승을 차지하여 1년 사이에 두 차례의 국제시합에서 금메달을 따낸 쾌거를 이룩하였다.
이때가 박정길의 씨름 선수로서 황금시절이었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전까지 성급 경기에서 금메달 15매, 전국 경기에서 금메달 6매, 국제경기에서 금메달 2매를 따냈다.
1966년, 박정길이 세계 정상에 오를 꿈을 무르익고 있을 때 뜻밖의 재난이 들이닥쳤다. “남한에 친척이 있고 국제경기에 참가할 때 북한과 남한의 선수들과 가까이 지냈으니 틀림없이 특무활동을 했다.”는 것이 그의 죄증이며 나라를 배반한 특무분자라는 감투가 씌워져 영웅으로부터 죄수로 전락하였다. 목에 큰 간판이 걸리고 시도 때도 없이 거리에 끌려 나가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다.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햇볕이 들지 않는 퀴퀴한 지하실에 갇혀 자백서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이런 비인간적인 생활은 1970년에 가서야 비로소 해제되었다.
박정길은 정신과 육체적으로 잔혹한 학대를 받았지만 감금이 해제되자 다시 훈련장을 찾았다. 훈련장은 그에게 가장 친근한 마음의 안식처였다. 그는 먹장구름이 조만간 걷힐 것이라고 확신하고 재기할 날을 위해 훈련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에게 너무나 잔혹하였다. 그 이듬해 그는 정치적으로 오점이 있다는 터무니없는 구실 때문에 훈련 팀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고향인 개원으로 돌아가 선반기공장의 단조공으로 되였다. 공장의 작업량은 매우 과중해 퇴근할 때면 온몸이 나른했지만 그는 체력단련을 하면서 체력을 유지하였다.
30세가 훨씬 넘었지만 해마다 열리는 조선족운동회의 씨름경기 우승은 늘 그의 독차지로 되었다. 그 누구도 박정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개원현에서는 부득불 씨름 우등상을 두개 설치해 다른 씨름군들의 열정을 격려했다.
1981년에 불혹의 나이에 들어선 박정길은 철령지구 텔레비죤대학 부속학교 교장 직을 맡았다. 개혁개방이 실시됨과 더불어 중국의 체육운동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10년 동란으로 체육 분야에서도 인재가 많이 부족했다. 요녕성 체육운동위원회 강기부주임은 5, 60년대 씨름판을 휩쓴 박정길 선수가 개원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심양에서 일부러 개원으로 찾아왔다. 그는 박정길의 손을 잡고 새로 설립되는 요녕성 서양씨름팀 감독을 맡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훈련장은 박정길이 오매에도 그리던 곳이었다. 훈련장으로 다시 돌아갈 날이 오기를 오매불망 그리던 그였지만 10년 동란 때 너무나 강한 충격을 받아 선뜻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강기부주임은 박정길의 아내까지 동원하여 2년 동안 끈질기게 설복하여 승낙을 하고 1983년에 요녕성 서양 씨름팀의 책임감독으로 부임하였다. 동란의 상처 속에서 그의 성격은 더욱 성숙되었으며 열정은 선수시절 못지않았다. 그는 특별대우를 마다하고 매일 선수들과 한 침실에서 먹고 자면서 훈련에 몰두하여 요녕성 서양씨름팀의 재기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고 1985년 천진에서 열린 전국 서양씨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따냈다. 박정길은 청년시절의 금메달 선수뿐만 아니라 금메달 감독으로 다시 한번 전국 서양씨름계를 놀라게 하였다.
1987년에 박정길은 철령시 시장의 초청으로 다시 고향인 철령으로 돌아왔다. 오래 동안 객지 생활을 해온 그는 가정의 따스함이 그립기도 했지만 자기를 위해 고생한 아내의 부담을 얼마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철령에 온 그는 갓 설립된 철령시 씨름의 감독을 맡았다. 그는 8명의 종자선수를 선발하여 2년간 준비한 끝에 전국 청소년 서양씨름경기에서 금메달 1매, 은메달 1매를 따내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철령과 같이 자그마한 고장에서 전국시합에 참가하여 이와 같은 성과를 거둔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후 박정길의 제자들은 전국 씨름경기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1991년에 금메달 2매, 단체 1등, 1992년에 금메달 3매, 은메달 2매, 단체 1등을 따냈다. 1993년에는 철령시와 조양시의 선수들로 구성된 요녕성팀이 전국시합에서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를 따냈다. “한 선수가 금메달을 따내기도 힘들지만 제자들을 지도하여 금메달을 따낸다는 것은 더욱 대단한 일이다. 박정길은 두가지 영예를 한몸에 지녔으니 실로 대단한 사람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박정길에 대해 찬탄을 금치 못했다. “나는 금메달을 받은 감독의 지도를 받지 못했지만 금메달을 따냈는데 금메달 선수인 내가 금메달 선수를 키워내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라며 자신의 성과를 당연한 일로 간주하고 언제나 자신을 낮추었다.
1992년에 철령시에서 체육계 명인집을 묶었는데 “강철거인”이란 제목으로 박정길의 사적을 소개하였다. 그것은 그가 강인한 의지로 특출한 성과를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훈련과 경기에서 한번도 부상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공한 남편의 뒤에는 현숙한 아내가 있다는 말이 있다. 박정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개원조선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한 안재복은 조선족 여성의 미덕을 소유한 전형적인 현처양모이다. 장기간 남편과 해어져 사는 고독을 이겨내며 교원으로서의 책임감과 가정의 중임을 훌륭히 완수했다. 그는 낮에는 학교에서 개구쟁이들과 씨름해야 하고 퇴근해서는 어린 자식들을 돌보고 가정 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생산대 쌀값을 갚기 위해 안재복은 셋째 아이를 출산한지 보름도 채 안돼 가마니기계 앞에 앉아 가마니를 400여장 짜서 팔기도 했다. 이런 일을 두고 박정길은 늘 아내에게 미안하며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안재복은 1992년 철령시 체육계에서 선출한 “현숙한 아내”로 당선되기도 했다.
65세의 나이답지 않게 신체가 꿋꿋하고 목소리가 우렁찬 박정길은 지금도 철령시 서양씨름팀 고문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씨름팀 감독을 맡고 있는 제자들을 도와 씨름선수들의 훈련계획의 작성과 경험의 전수 등으로 오늘도 보람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③신라왕족의 후손 금정그룹 박명겸(朴明謙66세)회장
본계시 평산구 서광로 7호에 있는 금정빌딩에 들어서면 금정 중개 유한 책임공사, 금정여행사, 본계 거인광고, 본계 신라섭외관광학교의 사무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12층의 회장실에 있는 박명겸 회장은 한국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신라왕족의 후손이기 때문에 신라섭외 관광학교를 설립했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는 박가보에서 출생하여 소학교 1학년까지 그곳에서 보냈다. 8살에 가족을 따라 본계시로 이주하여 소학교 중학교 본계사범대학 중문과를 졸업하고 본계시 설계일보 기자(3년)를 거쳐 본계시 행정관리국에 근무하였고 1994년 본계시 정무 부국장을 끝으로 정년 퇴직을 한 후 부동산, 금유, 기업합작 등에 눈을 돌려 부를 축척하여 자산이 인민폐로 15억 정도가 되는 본계시의 재벌이 되었고 지금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직업훈련과정인 본계 신라 섭외관광학교와 관광사업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틈틈이 본계시의 관광이나 수필을 집필하여 도서를 발간하고 있다. 37)학교는 년 120명 정도 관광 전문 인력을 배출하고 있으며 관광은 본계시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국, 일본,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유럽, 러시아, 마카오 홍콩, 미국 등의 세계 각국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국내 관관으로는 국내외 관광객을 대상으로 수동의 자연동굴과 오녀산성, 집안, 관문산 풍경구 등을 전문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심양으로 들어와서 본계 수동을 거쳐 고구려의 유적인 환인의 오녀산성과 집안의 광개토대왕비와 압록강을 거쳐 이도백하 백두산을 통해 연길로 나가는 일정을 추천하고 있다. 그의 꿈은 앞으로 여행자유화의 시대를 맞아 한국의 여행사와 손잡고 고등학생들의 수학여행 같은 대규모 행사를 집행할 수 있는 파트너를 구하고 싶다고 한다.
그는 1남 2녀의 자식을 두고 있으며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여 본계시에서 사회의 동량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튿히 둘째 딸은 여행사를 책임지고 있다고 한다. 인터뷰 말미에 박가보에 대해서 질문하자 박가보에서 국가간부나, 군인 등으로 너무 많은 사람이 빠져나가 마을 자체가 예전같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 전망하면서 떠나간 사람들이 마음만은 조선족으로 남아있고 싶어 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38)
37) 저서로 본계 유람수책(本溪遊覽手冊) 풍림엽우(楓林葉雨) 등이 있다. 38)2005년 1월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였음.
국내 최대의 사진전문 포털사이트인 아이포스 웹진에서는 각 미디어와 화랑의 전시담당자, 프로사진가, 전국의 각 대학 사진학과 교수 및 전공자, 미술계와 광고 디자인계, 출판 편집인,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인사, 국내 유수 기업의 최고경영자와 임원, 사진동호인 등 27만6,823명에게 사진문화에 관한 유익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