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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남우의 이론 / 평론가와의 대화 3편 - 윤준성
배
남우의 이론
/
평론가와의 대화
3
편
–
윤준성
- Intro
비평을 하는 방법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론의 기본 베이스를 넓게 잡아 비평의 다원성을 추구하는 방법론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 예술에서 통용되는 여러 이론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그 이론을 연구하면서 예술에 접목시켜 나가는 방법론이 그것이다. 결국은 자신에게 맞는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겠지만, 만약 이론가/비평가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가, 순수하게 자신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면, 후자의 단계를 밟아나가며 서서히 이론의 폭을 넓혀 나가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는 먼저 번 최봉림과의 인터뷰를 통해 논의되었던, “어떤 이론이 현대 예술에 유용한 해석의 틀을 제공한다고 하여, 그것이 모든 예술을 설명할 수 있는 만능 처방식의 이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라는 부분과는 다른 맥락이라고 본다.
사진 이론/비평가와의 대화, 그 세 번째는 윤준성과의 인터뷰로 진행되었다. 윤준성은 라캉의 이론을 현대 사진과 미디어 아트에 적용시켜 왔는데, 이처럼 한 사람의 이론을 현대 예술에 꾸준히 접목시켜왔던 사례는, 국내에서 좀처럼 찾아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더군다나 라캉의 이론이 후기 구조주의 이후로 널리 알려지고 자주 언급되고는 하지만, 정작 실제로는 제대로 읽히지(독해되지) 않은 이론 중 하나이기 때문에, 어떠한 식으로 현대 예술에 적용되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인터뷰를 통해, 윤준성이 라캉의 이론을 현대 예술에 어떤 형태로 접목시키려 하는지 살펴보고, 그가 연구하고 있는 디지털 사진과 미디어 아트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통해, 여전히 좁혀질 줄 모르는 사진과 디지털 사진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배 남 우
- Interview 3, 윤 준 성
서강대학교에서 생명과학과 화학을 공부하였고(B.S),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 산업디자인학과에서 사진디자인을 전공하였다.(M.F.A) 이후 뉴욕대학교(New York University)와 국제사진센터(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의 협동 석사과정에서 사진과 미디어아트에 관한 실제와 이론을 공부하였고(M.F.A) 동 대학원에서 현대미술이론을 전공,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Ph.D)
뉴욕대학교의 정보기술연구소(Institute of Information and Technology)의 네트워크/웹 그룹(Networking & Web Group)과 예술/테크놀로지 그룹(Art & Technology Group)에서 연구원 및 조교로 근무하였으며, 록펠러재단(Rockefeller Foundation)과 미국국방부(Department of Defense, U.S.A)의 멀티미디어 프로젝트에 부 프로듀서(Associate Producer)로 참여하였다.
현재 숭실대학교 정보과학대학 미디어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매체미학과 매체/정보디자인, 미디어아트에 관한 연구를 한다.
序
배남우(이하 배) :
선생님께서는 라캉의 이론을 현대 사진이나 미디어 아트에 적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계십니다. 서양의 유명 이론가 한 사람의 이론을 현대 예술에 총체적으로 접목시켜 나가는 것이,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터라 무척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글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라캉의 이론만큼이나 그와 연관된 선생님의 글 역시 선뜻 이해하기 힘든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대학원에서 이루어지는 라캉과 관련된 이론 수업을,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경향도 있고요. 여러 이론들 중, 선생님께서 라캉의 이론을 분석의 틀로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윤준성(이하 윤) :
일반 대중들이 제 글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제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평의 종류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저널비평과, 학회와 같은 아카데미 안에서 통용되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 학술비평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저도 저널비평 쪽에 글을 쓴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대중들을 대상으로 글쓰기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반 대중들이 많이 읽는 잡지에 이론이나 비평과 관련된 글을 싣는 것이 저와는 잘 맞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글 쓰는 사람의 성격과도 연관된 문제이기도 한데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글을 쓰는 것은 제 능력 밖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 저는, 이론/비평과 관계된 글은 학회지를 대상으로 쓰고, 강의는 이론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본 지식을 갖추고 있다 생각하는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만약 대학원 과정의 수업을 통해서도 학생들이 라캉의 이론 강의를 힘들어 한다면, 그것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진 이론에 관한 교육이 다른 학문과는 달리, 체계적이고 전통적인 방법론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라캉의 것이 아닌 여러 다른 미학 이론과 철학 이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체계적으로 단계를 밟아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매학기 매번 다른 이론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대학원 과정의 수업에서도 학생들이 이론 수업을 어려워하는 것이죠.
제가 라캉의 이론을 선택한 이유는 매스미디어의 일종인 사진이, 사진만의 독특한 성질을 발전시켜 예술의 영역에 포함되었을 때, 사진을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론이 라캉의 이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정신분석학으로서의 이론이 아니라 좀 더 확장된 형태의 철학으로써, 새로운 매체인 사진의 의미를 규명해 나가는데, 설명하는데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죠. 사진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론이나 방법론들은 주위에 산재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론가 혹은 비평가가 그러한 방법론들을 잘 취사선택하여 적절한 대상에 응용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라캉을 선택했지만, 다른 분들은 저와는 다른 이론을 선택할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겠죠. 하지만 이론 자체는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고, 이론을 어떤 대상에 잘 교합시키느냐는 글 쓰는 사람의 역할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라캉의 이론은 정신분석학이 아니라, 철학에 더 가까운 것
배 :
일반적으로 라캉의 이론을 떠올릴 때, 철학으로서의 의미보다는 정신분석학으로서의 의미를 더 강하게 떠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적용대상도 작가의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불안함을 밝힌다거나, 그와 같은 불안함이 표현된 작가의 작업을 분석하고 이해하는데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쓰신 저서나 논문에서는 그와 관련된 부분을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선생님께서 라캉의 이론을 언급하시며 쓰신 글에는, 다른 사람들은 적절한 적용대상이라고 여기지 않는 대상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이론가나 비평가가 독일의 현대사진작가인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사진을 유형학, 사회학, 그리고 문화적 관점에서 말했던 것과는 달리, 선생님께서는 구르스키의 사진에 라캉의 이론을 응용하여 글을 쓰신 점이 그렇습니다.
윤 :
먼저 이미지(image)를 읽고, 분석하는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지는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지가 우리에게 보여 지려면 회화, 조각, 그리고 사진과 같은 미디어(media)를 통해야만 보여 질 수 있습니다. 근대(modern)까지만 해도 이미지를 분석할 때 주로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이미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라는 부분이었습니다. 도상학(iconography)이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지요. 이와 같은 이미지 읽기의 방법에서는 ‘어떻게’라는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작가의 의도나 생각을 읽어내고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라캉의 단계에 이르면, 작가의 의도나 생각은 이미지를 읽고 분석하는데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미지가 미디어를 통해 내 앞에 놓여 져 있을 때,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이미지가 나에게 어떤 의미와 영향을 주는가?” 라는 문제로 바뀌게 됩니다. 예를 들면 뒤샹이 변기를 내놓았을 때, 물론 뒤샹이 어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변기를 내놓았을 수도 있겠지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굳이 뒤샹의 의도를 알려는 노력을 할 필요 없이, 전혀 다른 식으로 볼 수 있고 또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뒤샹의 변기는 고급 예술이 일상적인 예술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고, 동시에 작가라는 주체 중심에서 작품을 보는 관객에게로 무게 중심이 옮겨간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작품을 볼 때, 작가의 생각보다는 작품 자체만을 놓고 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라캉의 이론은 비록 라캉 자신이 그의 저서나 논문을 통해 직접적으로 예술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시각 예술에서 작품과 관객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응용되는 이론입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미학 이론과 라캉의 이론이 함께 맞물리면서 연결지점이 생겨났고, 그러면서 미학자나 이론가/비평가들이 라캉의 이론에 주목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제가 독일현대사진에 라캉의 이론을 접목시켜 본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구르스키를 비롯한 독일의 현대사진 작가들이 생산하는 이미지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연구를 하다 보니, 이론가의 입장에서 라캉의 이론을 한 번 적용시켜 본 것이죠. 그런데 이를 두고 읽는 사람들이 엉뚱한 대상에 이론을 적용시켰다고 말한다거나 어색해 하는 것은, 라캉의 이론에 대하여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구조화해서 생각하는 사고방식, 우리가 사물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고, 반응하는 방식, 그리고 현상을 지각하는 방식에 대한 방법론들이 사유의 단계로 넘어가게 되면, 철학과 맞물린 상태가 됩니다. 라캉의 이론을 정신분석학이 아닌, 철학에 더 가깝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의 경우처럼 정신병 환자를 다루는 방법론 이라 던지, 아니면 그와 관련된 케이스 스터디(case study)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특히 다른 학문에서는 보는 것의 문제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라캉은 심도 있게 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깊이 있게 연구하고 천착했던 철학자입니다. 지금은 제가 라캉을 좋아해서 그의 이론을 연구하고 또 사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이론을 고집할 생각은 절대로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꾸준히 자신의 논리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여러 학문과 이론을 연구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 :
중의적 의미의 용어들이 많기 때문에, 단호하게 “라캉의 이론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하기 힘든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와 선입견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될 것 같기도 하고요.
윤 :
물론 라캉이 얘기한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도 있지만, 저는 라캉의 이론을 오해해서 다르게 해석한다고 해도 나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라캉 자신이 직접 쓴 글이 아니라, 라캉이 강의한 내용을 학생들이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세미나 시리즈), 진짜 라캉이 그렇게 얘기했는지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 나름대로의 자의적인 해석을 더하여, “나는 라캉이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 같다.” 라고 말한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닙니다. 글을 쓰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해서 더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면, 더 나은 방법론이 될 수도 있겠죠.
비평을 읽을 기회가 줄어드는 것은, 글을 쓸 만한 인적자원이 부족하기 때문
배 :
화제를 조금 돌려 보도록 하죠. 국내사진계에서는 이론가/비평가가 매체에 싣는 글들의 성격이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리뷰와 비평이 그러한데요, 물론 글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도 리뷰와 비평을 구분하여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이론가/비평가가 글을 쓰는데 있어서 자율권을 갖지 못하다보니, 리뷰도 아니고 비평도 아닌 어정쩡한 글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윤 :
리뷰는 작품을 중간에 두고, 글 쓰는 이가 그 언저리를 관찰하면서 작품의 불분명한 부분을 명확하게 밝혀주는 작업입니다. 반면 비평은 글 쓰는 이가 전체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의 중간 중간에 작품을 삽입하는 작업이죠. 그런데 현재 국내에서는 이와 같은 리뷰와 비평의 의미에 대해서 대중들이 혼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주요 매체가 이론가/비평가에게 요구하는 글의 성격이, 대중적으로 많이 읽히는 드라마 비평, 가요 비평, 영화 비평의 성격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대중적 취향의 영화 비평을 예로 들면, 학문적인 근거를 제시하며 비평을 전개해 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영화를 설명해주고 영화를 쉽게 볼 수 있는 가이드라인(guide line)을 알려주는 리뷰적 성격이 강합니다. 이러한 포맷을 답습하다보니 대중들이 리뷰와 비평을 혼동하는 경향이 발생하는 것이죠. 사진의 경우, 누구나 카메라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회화처럼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미디어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대중과 가깝게 맞닿아 있다는 인식이 강합니다. 그래서 글이나 비평 자체가 대중적 취향을 고려하여 하향평준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대중의 취향에 맞추기 위한 글을 쓰도록 글 쓰는 사람을 계속 몰아가다보니, 비평도 리뷰도 아닌 애매한 글이 생산되는 것이죠. 제가 미국에서 석사과정에 있을 때는 잡지에 리뷰나 비평과 연관된 글을 쓴 적이 있었지만, 그러한 글쓰기를 중단하게 된 것은 잡지사에서 제게 요구하는 글과, 제가 쓰고자 하는 글이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잡지사에서 이론 하는 사람들한테 글을 써달라고 할 때, 구수한 글을 써달라고 요청 한다는 것은, 마치 갤러리가 작가에게 팔리기 좋은 작업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똑같다고 봅니다. 막상 겉으로 표현 하지는 않지만, 이론가/비평가의 입장에서는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이론, 비평, 리뷰 그리고 전시 서문과 같은 글의 구분이 명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이론가는 이론가로써, 리뷰어는 리뷰어로써 각자 스스로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는, 미술의 경우가 비평과 관련된 글들은 책이나 논문 형식으로, 리뷰나 정보 전달 형식의 글은 잡지에 실리는 식으로, 리뷰와 비평이 잘 분리되어 안정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배 :
마지막 부분에 미술의 경우를 예로 들어 주신 부분과 관련하여 신수진 선생님께서도 선생님과 같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저는 비평이 논문과 같은 학회지를 중심으로 소개되기 보다는, 대중에게 읽힐 수 있는 인쇄 매체에 꾸준히 소개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비평은 글 쓰는 이의 주관적인 성향과 판단을 뚜렷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이론적 성향이 강한 학회지 보다는, 어느 정도 주관적인 표현이 가능한 잡지와 같은 인쇄 매체에 비평을 실어서, 대중과 함께 호흡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만.
윤 :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 저도 동감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진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데, 그러한 관심들이 단순히 사진 작업과 전시에만 치우친다면 안 되겠죠. 따라서 인쇄 매체를 통해 이론과 비평이 꾸준히 소개되면서, 이에 대해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갈 수 있다면, 사진과 이론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좋은 방법론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기대를 하기 힘든데, 이론 쪽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소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도 별로 없기 때문에 인쇄 매체에서 비평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사라져가는 것이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론가/비평가가 이론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대학원에 자리를 잡고, 대학원생들에게 매체를 통해 비평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면서, 인쇄 매체와 비평 사이의 적절한 연결 고리를 찾아 나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실 예로 미국에서는, 이론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을 필진으로 활용하여, 대중적인 취향에 휩쓸리지도 않고 지나치게 학술적이지도 않게끔 거리를 유지하면서, 예술과 비평에 대한 대중의 활발한 소통을 유도하는 형태로 매체가 발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를 국내에서도 적절하게 응용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국내의 인쇄 매체에서는 글 쓰는 사람의 기준을(특히 이론과 비평의 경우) 대학원생 수준으로 낮추려 하지 않기 때문에, 사진과 이론/비평 사이의 간극이 계속해서 벌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사진만의 이론적 준거 틀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
사진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오픈시켜야
배 :
사진은 오랫동안 스스로를 회화의 형식에 동화시켜 왔습니다. 그래서 사진에 대해 말할 때에도, 회화를 대하듯이 작품의 적절한 제목과 주제, 그리고 적절한 해석을 찾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윤 :
질문하신 내용은 오래전부터 논의가 되어 왔었던 부분이고, 어떻게 보면 회화와 사진 사이의 해묵은 낡은 논쟁이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예전부터 회화에 대해 생각할 때, 그것이 작가의 생각을 거쳐서 나오고, 완성되기까지 제작 시간도 오래 걸리며, 구성도 작가의 의도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회화가 가장 높은 단계의 예술이라고 여겨왔습니다. 사진이 회화보다 선예감이 매우 좋음에도 불구하고 갖는 지극한 콤플렉스가 여기에 있지요. 그동안 회화 쪽에서 발달된 개념이라 던지, 회화 쪽에서 생산되는 담론을 추종하면서 살아왔고, 또 거기에 자꾸만 맞추려다 보니까 되질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는 것이 뭔가요? “카메라로 찍어야만 사진인가?” 하면서,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인화지에다 직접 피사체를 배치하여 거기다가 빛을 비춘다던지(rayograph), 아니면 사진을 찍기 전에 연출해서 구성하는 것조차도 회화에서 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죠. 이런 식으로 회화를 쫓아오면서 생긴 순기능은 그러면서 나름대로 새로운 방향성을 찾아 나갈 수 있는 방법들이 생긴 것이고, 역기능은 그렇게 하니까 계속해서 회화 쪽의 아류로 남아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극복이 안 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회화와 사진 사이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다 보니 또 무슨 문제가 생기냐하면, 사진이 갖고 있는 사진만의 장점이 있는데, 장점 자체가 하나도 발휘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회화처럼 되지 못하니까 판화처럼 에디션을 만든다던지, 사진을 액자에 담는다던지 하는 것들 자체가, 사진이 회화로부터 이상한 것만 배워가지고 온 것인지도 모르죠. 왜 그럴까요? 바로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높여 작품의 가격을 올리기 위함입니다. 물론 작가들의 생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제가 그러한 점까지 건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작가 스스로 작업을 위해 한번 살아보겠다고 한다면, 다른 방향으로 나갈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Untitled", Felix Gonzalez-Torres , 1991
offset lithograph on paper, endless copies
Walker Art Center
대표적인 예로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1957-1996)
1)
의 경우를 생각해 보도록 하죠.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는 미니멀리즘을 얘기할 때, 언급되곤 하는 작가인데 사진을 프린트해서 쌓아놓은 후, 관객으로 하여금 하나씩 가져가도록 하는 작업을 전시를 통해 선보인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식의 도전적인 작업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매체가 사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사진은 아쉽게도 스스로의 장점을 포기한 채 회화와 크게 다를바 없는 매체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진 비평을 한다고 했을 때, 과연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사진의 물질적인 이야기를 빼면(프린트가 좋다/나쁘다 등등), 사진 안에 있는 내용과 같은 도상학적인 얘기 이외에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도상학적인 이야기도 할 수 없습니다. 도상학은 작품의 일정 주제, 또 그 안에 포함된 개별 형태, 개별 형태의 상징물, 상징, 알레고리에 대한 일종의 ‘형상 프로그램’을 파악하고, 다시 그 모든 개체를 종합하여 해석하도록 하는 방법론인데,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라캉 이후로는 도상학이 더 이상 이미지를 읽을 수 있는 방법론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진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이론가나 비평가들이, 회화가 갖고 있는 담론을 가지고 사진에 대해 접근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사진적인 담론을 찾아내려고 노력할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각자 선택해야할 문제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후자 쪽이 맞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그러한 담론을 찾아가기 위해 사진이 노력해야할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배 :
매체 자체의 성격에 있어서, 사진은 근본적으로 미술과는 전혀 다른 매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사진 비평을 할 때에는 사진만의 이론적인 준거 틀을 확실하게 제시해야,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윤 :
저는 현재, 우리가 사진적인 준거 틀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사는 역사적인 기록이자 지금까지 흘러오는 하나의 맥락이므로,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이 없습니다. 즉, 사진사는 준거 틀이 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사진적인 메카니즘 역시 준거 틀이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메카니즘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계조가 어떻다, 컬러가 어떻다, 인화가 어떻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사진의 준거 틀이 될 수 있을까요? 흔히 우리가 사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표현들을 한 번 보세요. “시원하다”, “깨끗하다”, “장엄하다” 와 같은 표현 외에 어떤 것이 더 있냐는 얘깁니다. 이처럼 지금 우리가 사진적인 준거 틀 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모두 지극히 표면적이고, 감상적인 것 들 뿐입니다. 따라서 절대로 이론적인 틀이 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입니다. 서양의 경우 미술 비평은 그 동안 쭉 이어져 오면서, 지금도 계속해서 확장해 나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진이 있으면 사진까지 함께 가고, 여기에 새로운 미디어 아트가 있다고 한다면 미디어 아트까지 함께 가고 있는 상황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현재 어떻게 나가고 있냐하면, 사진 비평이 중간을 딱 막아서서 가로막고 있는 상태입니다. 작업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회화와 같은 예술이 되고자 하면서, 이론이나 비평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회화와 다른 사진만의 독자성을 찾으려 하는데, 저는 그러한 독자성을 왜 찾으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미술 쪽에서 공부를 한 사람들이 사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는 한번 자세히 볼 필요가 있지만, 우리는 그 사람이 미술 쪽 출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세히 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사진 비평은 사진 쪽 출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다른 쪽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을 단순히 사진 쪽에 잘 맞지 않는 준거 틀이라는 이유로 배제하려 한다면, 실제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지금 상태에서는 다른 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굳이 사진적인 근거를 요구하기 보다는, 그들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도록 오픈시켜야 하는 상태라고 봅니다. 동시에 사진 쪽에 있던 사람들도 밖으로 나가서 다른 쪽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통 없는 비평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미술을 비롯한 다른 분야와 사진이 서로 활발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배 :
선생님께서는 사진 비평을 위한 이론적인 근거를 확립하기 보다는, 미술과 사진이 서로 허물없이 소통할 수 있는 방법론이 필요하다고 보시는 건지요.
윤 :
그렇게 매체의 장르를 구분하게 되면, 유화는 유화 비평가, 조각은 조각 비평가, 판화는 판화 비평가, 이런 식의 이상한 비평들이 생겨나지 않을까요? 따라서,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매체자체가 자유스러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진 비평이라고 하는 것은, 사진이라는 매체에 너무 얽매여 있기 때문에, 사회적인 담론 확장도 안 되고 늘 자기 것만 찾기 바쁜 상황입니다. 비평뿐만 아니라 사진 자체도 비평과 똑같습니다. 한 번 예를 들어보죠. 3 ~ 4년 전, 사진 학회에서 디지털 사진이 사진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상당히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사진의 전통성을 중요시 여기셨던 분들은, 광학적 빛을 통해서 필름에 상이 맺히고 그것이 은염을 통해 프린트 되어야 사진이라고 얘기하면서, 그러므로 디지털 사진은 사진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이런 주장은 “오일(oil)을 써야만 회화다.” 라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사진에 대한 이러한 고정 관념 자체가, 사진이 스스로 소통의 통로를 막아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물론 사진만의 특수성을 강조할 수는 있지만, 그러한 특수성에 기인하여 사진적인 담론을 생산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다른 매체에서 사진에 대해 접근해왔던 이야기들을 잘 들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고, 거기에서 생산되는 이야기들을 우리도 생산할 수 있도록 동참해서 함께 가야 하는 형태지, 사진 쪽 이야기만 따로 분리해서 한다는 것은 상당히 힘들지 않나하는 생각입니다. 마치 자동차 서비스 센터에서 각 메이커 별로 순정 부품을 취급한다고 광고하는 것처럼, 사진 비평도 사진만의 순정 부품만 골라서 비평을 해야 한다는 것은, 그렇게 고르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합니다. 현재 사진관련 대학원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예전에는 학부에서 사진을 공부한 사람들이, 대학원까지 학업을 이어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여러 다른 전공의 출신들이 대학원에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진계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밑바탕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볼 때에는 최근의 젊은 분들 중 이론을 하는 분들이나, 작업을 하는 분들 사이에서는 많은 부분이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사진전공 석사학위를 받는 데에 있어서 사진을 사용하지 않고, 비디오를 사용한다던지 하면서 점차적으로 범위를 확장해 나간다는 것이죠. 예전에 신디 셔먼이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스스로를 화가(Painter)라고 말해 논란이 됐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경우에도 비디오로 작업을 했지만 “나는 사진가다.” 라고 말하며, 자신의 작업이 비디오가 아닌 사진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방법론을 갖추는 것, 그리고 갖추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진적인 방법론을 발달시키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중들은 그것을 보고 비디오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논쟁을 유발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고, 그것에 대한 여러 질문들이 오고가며 갑론을박이 벌어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 그런 것이 현재에 있어서 가장 필요하고 또 바람직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불명확한 이유로 디지털 사진에 대한 반목을 갖는 것이 문제
배 :
최근에는 디지털 사진도 순수 예술의 한 장르로써 인정받고자, 과거 사진이 스스로 고급 예술이 되기 위해 밟아왔었던 전철을 똑같이 되밟고 있는듯합니다. 하지만 디지털 사진이 예술이냐/아니냐에 대해서는 여전히 여러 의견들이 분분한데, 그것이 ‘포토샵’이라는 소프트웨어적인 툴로 완성되어진 가상의 것이라는 부분이 늘 걸림돌이 되는 것 같습니다.
윤 :
앞부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사진을 깨끗하게 프린트해서 액자에 담는다거나, 흰 장갑을 끼고 마치 고귀한 예술 작품을 만지는 것처럼 행동하는 방법론 자체는, 사진이 고급 예술을 흉내 내는 하나의 방식일 뿐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 왔던 사진이 디지털 사진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포토샵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작되어 창작된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봅니다. 소위 디지털 사진을 속되게 표현하는 포토샵 작업에 대해 이야기해 보죠. 암실에서 손을 왔다 갔다 하면서 버닝 & 닷징 하는 것과, 컬러 네거티브 필름을 C-Print 하기 위해 컬러 필터를 여럿 거는 것, 이런 행위들과 포토샵 작업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는 얘깁니다. 또한 작가들 중에서도 이제는 포토샵으로 작업하지 않는 작가들은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작가들이 왜 포토샵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지, 그리고 포토샵 과정을 거쳐 생산된 사진과 일반 사진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그러한 문제에 집중을 하여 차이점을 들추어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봅니다. 디지털 사진이 포토샵 작업으로 인해 생산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 예술이다/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는 이처럼 디지털 사진에 대해서 불명확한 이유로 반목을 하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캔버스위에 물감을 계속해서 덧칠하고 또 덧칠하는 회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배 :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예술 작품을 설명함에 있어서, 아직은 그러한 것들을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밝힐 수 있는 이론적인 바탕이 부족한 듯싶습니다. 실제로 관련 글들을 읽어봐도 이야기의 초점이 주로 기술적인 면에 치중되는 경우가 많고요.
윤 :
외국도 마찬가지지만 아직은 초기 단계에 있기 때문에, 지금도 계속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디지털 사진뿐만 아니라, 컴퓨터로 생산된 이미지의 애매모호함에 대한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상태지요.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 자체는, 사진이 그동안 미적인 대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느냐/없느냐로 싸워왔던 문제와 똑같다고 봅니다. 생각해보면 매체 미학의 기반을 이루는 단초가 되는 것이, 늘 사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기계로 인해서 생산된 이미지 그 자체로서의 단초는 사진이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디어 아트건 뉴 미디어 아트건, 사진에 대한 이야기부터 풀어나가려고 하는데, 실질적으로 사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진에 대해서는 짧게 소개한 후 넘어가고, 주로 컴퓨터와 기술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매체 미학과 미디어 미학에 대한 연구도 이론적인 바탕이 될 수 있겠지만, 디지털 사진을 좀 더 폭넓게 분석하고 말할 수 있는 준거 틀을 마련해 나가기 위해서는, 초창기 다게레오 타입을 비롯한 초기의 사진들에 대해, 당시 사람들이 바라봤었던 시각과는 다른 현재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디지털 사진을 설명할 때, 유용하게 응용될 수 있는 부분이 나오리라는 생각도 들고요.
배 :
선생님께서는 가장 최근에, 단토(Arthur C. Danto)
2)
를 언급하시면서 해석의 다원성으로 인해, 우리가 예술 작품이 재현해 내고자 했던 실제(the real)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는 내용의 논문을 쓰셨습니다. 해석의 다원성이란 문제가, 인터뷰의 앞부분에서 작품과 관객 사이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던 부분과 같은 맥락인지 궁금합니다.
윤 :
단토가 했던 이야기는, 말하자면 예술 해석의 중심성에 대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작품 자체에 대한 미적 대상으로서의 규정 자체가, 예전에는 “~이러이러해서 그것이 예술작품이다.” 라는 식이었다면, 지금은 그러한 규정이 없어졌다는 것이죠. 단토가 주장했던 ‘예술의 종말(the end of art)’ 라는 것이 그런 의미입니다. 예전에는 예술에 대해서 “이렇게 봐야한다.”, “무엇을 의미한다.” 와 같은 교육적인 측면과 지시적인 측면이 강했다면, 지금은 예술 해석이라는 것이 비평가가 할 수 있는 해석도 있고, 일반 대중들이 할 수 있는 해석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눈앞의 이미지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에 집중이 되어 있고, 이와 같은 관객 중심의 예술 해석이, 사회 속에서 중요한 역할 하게 된다는 의미로 썼던 논문이었습니다.
배 :
하지만 해석의 다원성이란 문제가, 자칫 잘못하면 모든 해석이 정당화 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즉, 밀도가 떨어지는 해석들도 다원성을 이유로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주관적인 인상들만을 나열해놓는 인상 비평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윤 :
차근차근 설명해서 그 해석이 논리적인 틀을 갖추게 되고,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다면, 제대로 된 해석으로써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석의 다원성이란 이런 맥락에서 성립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짤막하게 툭툭 던지는 말로 해석하는 것은 단순한 느낌 혹은 단상일 뿐이지, 해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크게 중요시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러한 느낌에는 논리적인 접근을 할 수 없는 한계성이 있으니까요.
배 :
매회 인터뷰를 진행 하면서 느끼는 점이 많지만, 특히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통해서는 그 동안 머릿속에 고정 관념처럼 담아두었던 부분들에 대해, 좀 더 유연한 태도로 다시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음을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특별히 계획하고 계신 일이 있다거나, 끝으로 정리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윤 :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최근에는 작가들도 석사학위는 기본적으로 취득해야 하는 과정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론가나 비평가의 역할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대학원 정도의 과정에 있는 젊은 작가들이라면 자신의 작업 내에서 스스로 문제점들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문제점들이 사회적으로 확장될 수만 있다면, 굳이 사진 쪽이 아니더라도 여러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자기 작업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또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논술 능력도 키워야 한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전시 서문은 작가 스스로 쓰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요? 어떻게 보면 이론가나 비평가들이 주례 비평을 쓰지 않아도 되는 가장 좋은 해결책이 될 수도 있겠죠.
제 개인적인 계획으로는 앞으로도 디지털 사진 쪽으로 계속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저는 축구를 볼 때 지는 팀을 응원하는 편인데, 지금은 디지털 사진이 약자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렇지만, 언젠가 디지털 사진이 전통적인 은염 사진을 앞질러, 은염 사진이 약자의 입장이 된다면 은염 사진의 편에 들 생각도 있습니다.(웃음)
배 :
긴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1)
1957년 쿠바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작가 펠릭스 곤잘레즈-토레스(Felix Gonzalez-Torres)는 지난 1996년 에이즈로 사망했다. 쿠바에서 태어나, 푸에르토리코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으로 건너와 교육을 받은 그는 미국 내 라티노 커뮤니티에서 3세계 출신으로서의 정체성을 배양 받은 정치의식이 강한 작가이자, 70년대 이후 부활한 개념 미술을 지향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아이디어, 과정을 중시하고, 말 그대로 작품에 대한 개념을 중시하여 예술가의 마음을 작품으로 간주한 경향으로서의 개념 미술은 펠릭스-곤잘레스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부재 속에서 존재에 대한 흔적을 찾아 나서는 작업을 하였고 정치적 이슈에 대해 가장 공격적이었으며 초기 개념 미술이 배제했던 개인적 감정의 활력을 작품에 부여했고, 자신과 동세대 중에서 가장 개념미술의 현대적 적용에 있어서 뛰어났던 그는 설치와 퍼포먼스 등을 통해서 라틴 아메리카 문화와 동성애 문화에서의 예술과 정치와의 관계를 가장 탁월하게 설파해낸 작가이다.
2)
아서 단토(Arthur C. Danto) - 분석철학의 본고장 미국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젊은 시절 한 때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가, 인생의 진로를 철학으로 옮겼다. 그는 웨인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미술과 역사를 공부했고 1949년부터 1950년 사이 단토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파리에서 공부했다. 그는 1951년 귀국해서 컬럼비아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며, 1966년부터 그 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되었고, 미국 철학회 부회장과 회장, 미국 미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그는 컬럼비아 대학의 Johnsonian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1984년 이래로 '네이션'지의 미술비평을 담당하고 있다. 분석철학자인 단토는 헤겔과 니체를 진지한 자세로 연구했다. 이후 그가 예술철학으로 이행하면서 헤겔주의적 역사주의를 예술의 본질을 정의하는데 도입함으로써 다원주의 시대를 위한 비평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인터뷰 기획 및 진행 : 배남우
본 인터뷰의 저작권은 배남우씨와 fotato.com에 있습니다. 따라서 인터뷰의 무단 배포와 전제를 금하며, 관련 사항은 배남우씨와 fotato.com으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배남우씨는 현재 상명대학교 예술, 디자인 대학원 순수사진학과 휴학 중이며, 제 7회 사진비평상 평론부문 우수상을 수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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