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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남우의 이론 / 평론가와의 대화 6편 - 이경홍
배
남우의 이론
/
평론가와의 대화
7
편
–
이경홍
- Interview 7, 이 경 홍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사진학과를 졸업(학사)했고, 프랑스 국립 파리 제1대학교 빵떼옹 솔르본느 조형학부에서 철학부 석사학위를, 같은 학교에서 철학부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연구 논문으로는 <앙리 까르티에-브레쏭의 개념에 의한 사진영상에 나타난 찰나미학연구> (1988년, 철학박사 학위논문, 프랑스 파리 제1대학), <사진 활동 안에서 보는 작업의 역할>(1999년, 현대사진 영상학회 논문집 VOL. II)이 있다.
<대성당의 빛>(1998, St. Eulade 문화회관, Nevers, France)을 비롯하여, <노스탈지아>(2004, 부산프랑스문화원, 한국)까지 17회의 개인전 경력이 있고, [Traveling art museum-찾아가는 미술관](2003, 국립현대미술관, 전북부안예술회관 등 15개소, 한국)를 비롯한 5회의 단체전 경력이 있다. 작품 소장은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사진18점을, 국립현대미술관(과천)에서 사진5점을 영구소장하고 있다. 현재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序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화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절대화 되어서도 안 되는 것
배남우 :
선생님께서는 국내사진계에서 이론을 공부하기 위해 서양으로 유학을 떠났던 첫 번째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뚜렷한 Role Model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이론을 위한 유학을 선택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다고 해서 이론을 가지고 무언가 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었을 테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당시 유학을 결심하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경홍 :
제가 한창 사진을 공부했었던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국내에는 사진에 대한 자료가 너무나 빈약했었고, 사진학과에는 대학원 과정도 없었기 때문에 공부를 계속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환경이 안 됐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사진학과에 제대로 된 이론 강의도 없어서, 비록 제가 사진학과 소속이기는 했지만 다른 학과의 이론 강의를 수강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철학과에서 미학이론 강의를 들었던 적도 있었고, 신학대학에서는 신학과 관련된 강의를, 미술대학에서는 서양미술과 동양미술을, 연극영화과에서는 영화미학을 청강하거나 혹은 정식으로 수강신청을 하여 강의를 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론을 공부하는데 있어서는 여러 면에서 부족한 점들이 많았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단계를 밟아나가기 위해서는 유학을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내와는 달리 서양의 경우에는 학문의 바탕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15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어도, 국내사진계에는 제가 프랑스에서 공부했었던 것들을 활용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전혀 형성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특히 제가 한국에 돌아와서 가장 크게 놀랐던 점은 롤랑 바르트를 비롯한 몇몇 유명 철학가들과 그들의 이론이, (유명 철학가가 사진에 관한 책을 내면 학계나 대중들의 관심들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만) 마치 하느님처럼 절대적인 대접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롤랑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라던지, 필립 뒤바(Philippe Dubo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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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던지,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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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유럽의 철학가들이 사진에 관한 책들 그리고 논문들을 쓴 것들이 있습니다만, 그러한 저서들과 논문들을 우리가 ‘사진이론’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롤랑 바르트의 경우에는 <카메라 루시다>를 쓰고 난 이후, 사진 박사학위에 대한 논문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적도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롤랑 바르트를 ‘사진이론가’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롤랑 바르트는 한 사람의 철학가로써 사진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표현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롤랑 바르트가 쓴 <카메라 루시다>에 대해, "<카메라 루시다>는 사진에 대한 롤랑 바르트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지, 결코 사진 그 자체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의 경우처럼, 어떤 철학가가 사진에 대해서 개인적인 논문을 발표한다거나 책을 발표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논문이나 책이 결코 절대화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화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절대화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롤랑 바르트나 필립 뒤바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서 그것이 절대화 되는 순간, 그들의 이론은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니까요.
하지만 유독 국내에서는 서양의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거나, 과장하여 해석하고 또 그것을 전체화 시키는 오류를 범할 때가 많은데, 제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시기에는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가 그러한 확대해석의 대표적인 케이스였습니다. 당시에는 대학원 학생들이 논문을 쓸 때에도, 논문의 주제가 유명 철학가들이 썼던 책들과 논문에 대한 것으로 몰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제가 대학원에서 그러한 논문을 지도했을 때에는 학생들의 반발도 무척 심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강의했던 것은 학생들이 전적으로 믿고 있었던 것과는 상반된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제가 그러한 관행을 바로 잡기 위해 나설 입장도 되지 못됐던 것이, 당시에는 유학을 다녀왔다고 해서 이론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표명한다거나, 이론을 통해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특별히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위에서 먼저 저를 견제해왔는데, 심지어는 논문도 쓰지 말고, 책도 쓰지 말고 조용히 강의나 하며 지내라는 얘기를 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견제에 대해 제가 굳이 반박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을 토론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만약 토론을 한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이론에 대해 편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제대로 된 토론도 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배남우 :
이론은 적(敵)이 많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당시 상황이 그 정도로 어려웠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있은 후, (물론 대외적인 활동에는 관심이 없으셨다는 말씀은 해주셨지만) 선생님께서는 어떠한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경홍 :
지금까지도 그래왔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겠지만, 제가 가장 충실히 임해야 할 일은 교육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제가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수업을 통해 학문에도 여러 갈래의 길이 있음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학생들 각자가 자신의 성격에 맞게 실기를 할 사람은 실기를 하고, 이론을 할 사람은 이론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일입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 잡힌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말이죠. 하지만 이론 할 사람은 이론을 하고, 실기 할 사람은 실기를 한다고 해서, 사진학과에서 이론과 실기가 서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론과 실기는 함께 가야하는 것이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둘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의과 대학에서 의술(醫術) 뿐만 아니라 여러 학문을 다양하게 배워야 하는 것이지, 어느 특정한 하나의 학문만 배워서는 의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가지만 배워서 무턱대고 환자를 수술 한다거나, 치료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부(神父)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신학 대학에서 신학을 비롯해서 불교와 같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 하고, 종교와 관련된 학문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제가 강의를 통해 학생들에게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도 맥락입니다. 사진 자체로서만 가지고는 의미가 될 수 없고, 사회에서 사진 하나만 떨어트려놓고 "사진이 최고야."라고 말해서도 안 되므로, 학생들 스스로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 하고, 책도 찾아서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또한 예술은 테크닉(technic)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의 신비(神秘)를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신비를 알기 위해서는 사진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으므로, 강의를 통해 미술사, 미학, 시(詩), 음악, 영화, 하다못해 도교에서 하는 얘기 그리고 신비신학(神秘神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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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하는 얘기와 같은 타 학문에 대한 이야기들도 많이 합니다. 이처럼 전반적인 것들을 폭넓게 이야기 해주면서, 학생들이 각자 자기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제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봅니다.
배남우 :
다양한 학문을 소개함으로써 학생들이 사진을 폭넓게 바라볼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에는 선생님께서 강의하시는 내용을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경향도 있을 것 같습니다. 특정 이론에 대한 선입견이 강하게 자리 잡아 있을 경우에는, 그것을 바로 잡아 준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 같고요.
이경홍 :
학생들이 제가 강의하는 내용을 어렵게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우리의 교육환경 자체가, 어렸을 때부터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중, 고등학교까지의 과정들이 하나의 개인으로써 독립하기 위한 교육과정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들 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는 식의 교육이지, ‘나’를 찾기 위한 교육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특히 중, 고등학교 시절의 청소년기에는 학생들이 사춘기를 겪으면서 많이 힘들어 하는데, 우리의 교육환경 하에서는 학생들이 사춘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제대로 도와줄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해결하지 못한 채,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해서 사진을 공부한다는 점입니다. 사진학과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교육은,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왜 고통 받아야 하는가?”와 같은 실존적인 문제를 먼저 풀어주지 않고서, 처음부터 “사진은 이렇다.”라고 학생들에게 선언을 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럴 경우에는 학생들이 이론적인 수업을 부담스러워하고 어려워할 뿐만 아니라, 실제 사진 작업을 할 때에도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에는 사진과 관련된 것들 외에도, 앞서 말씀드렸었던 여러 학문에(심리학, 종교, 미학, 철학 등과 같은) 대한 이야기들을 함께 하다 보니, 학생들 사이에서 강의의 내용이 어렵다거나 황당하다는 이야기들도 나오고, 특히 저학년일 경우에는 전혀 이해를 못하는 학생들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큐멘터리(documentary)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다큐멘터리 사진은 단순히 겉모습만 찍는 것이 아니다.”라는 얘기를 하면, 학생들 사이에서 “사진은 기록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겉모습만 찍으면 되는데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와 같은 반응이 나올 때도 있다는 것이죠.
Hyeres, Henri Cartier-Bresson, 1932
Parade-Hoboken, New Jersey, Robert Frank
From [The Americans]
앙리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은 <포토저널리즘의 장래>라는 글에서, “나는 다큐멘터리 사진과 같은 기록적인 사진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오직 사진을 통한 내 시적(詩的)인 표현에 있다.”라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브레송의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한 말인데,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저널리즘에 있어서의 시적(詩的)인 표현’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혼란스러워 할 때가 많습니다.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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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경우에는 “My own intuition”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는데, ‘intuition’이라는 표현을 처음 들어봤다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어떤 학생들의 경우에는 로버트 프랭크가 얘기했었던 ‘직관’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누구나 다 아는 얘기를 왜하느냐는 이의를 제기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직관’이라는 것은 단순히 ‘알고 있다.’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학에서의 이론 강의는 학생들이 갖는 “왜?”라는 질문을 지속적으로 풀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브레송은 왜 사진은 ‘시적인 표현’이어야 한다고 말했는지, 로버트 프랭크는 왜 ‘직관(intui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사진에 있어서 직관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풀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과정이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어렵게 생각되겠지만, 다양한 학문과 관점을 통해 개념을 이해하려는 노력에 익숙해지고 난 이후에는, 학생들 스스로 사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배남우 :
하지만 학생들이 그러한 과정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꾸준하게 이론 강의를 접할 수 있어야할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 그럴 만한 환경이 사진학과에 조성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 어려운 점으로 작용할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전공필수’라는 명목으로 저학년에 한번 고학년에 한번 정도 꼴로 띄엄띄엄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경홍 :
지적하신 문제는 국내의 학제시스템 자체가, 애초에 미국식으로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비롯된 문제라고 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은, 경제적인 이윤 추구를 우선시 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학제시스템도 과정보다는 최종적인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똑같은 자본주의 국가라고 해도 우리의 경우에는 미국과 환경이 또 다르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미국식 학제시스템을 받아들여 그 쪽으로 가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갑작스럽게 시스템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것을 찾아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 우리로서는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겠죠. 유럽 같은 경우에는 대게 1년이 한학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기본과 원칙에 충실한 상태에서 심도 있는 공부를 할 수 있고, 학문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반면 우리의 경우에는 자체적으로 학제시스템을 갖춘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서양의 것을 모방하는 입장 이다보니, 학문의 기본이나 과정에 충실하기 보다는 결과 지향적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즉, 이론 강의보다는 사진 작업을 중심으로 한 실기 위주의 강의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작품이라는 것은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본적인 과정에 충실해야 하는 것인데, 이론이 배제된 상태에서는 아무리 실기를 잘한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작품을 완성할 수 없다고 봅니다.
학생들 스스로 이론을 하겠다는 의지와 열정도 매우 중요
대학원 교육을 통해 이론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 현실성 있는 대안
배남우 :
사진학과에서 제대로 된 이론교육을 받기위해서는 여전히 유학을 통한 서양의 교육 시스템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실기 위주의 수업 방식에서 벗어나 이론과 실기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론학과를 개설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이론가와 비평가로 구성된 교수진이 작가 교수진과 동등한 입장에서 강의를 진행할 수 있고, 사진 이론과 비평을 필요로 하는 인력을 체계적으로 육성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경홍 :
현실적으로 사진학과 내에서 모든 이론 강의를 개설할 수는 없습니다. 교육부 자체의 영향력이 막강한 나라가 한국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자율적으로 강의를 개설하기 보다는 교육부의 관장 하에서 교육 정책을 세워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이론 강의를 개설하려해도 자잘한 부분에서 걸릴 때가 많아, 강의 개설까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생각할 때에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마련해준 시스템 안에서만 공부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벗어나 학생들 스스로 이론에 대한 부족함을 해결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학생들 스스로 이론을 하겠다는 의지와 열정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대구 지역의 대학들은(제가 몸담고 있는 경일 대학교를 포함해서) 서로 연계가 되어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원하면 얼마든지 다른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이론 강의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론에 대한 부족함 혹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실제로 학생들이 타 학교까지 찾아가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이론 강의를 수강하는 일은 거의 없는데, 이는 스스로 찾아서 하고자하는 적극적인 의지가 학생들에게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사진이론학과의 개설보다는 대학원 교육을 통해 이론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 더욱 현실성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학부 과정에서는 아직 학생들이 사진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많고, 학생들 스스로도 무엇을 해야 할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황인데, 이러한 상태에서 이론학과를 개설해 학생들로 하여금 이론을 전공해 개념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학부에서는 실기를 위주로 하면서 어느 정도 이론을 함께 병행해 나가다가, 학생들 스스로 이론을 공부해야할 필요성을 느끼면 대학원의 석사나 박사과정을 통해 심도 있게 이론을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또한 사진이론을 꼭 사진학과를 통해서만 하라는 법도 없기 때문에, 미술학과나 철학과에서도 얼마든지 사진이론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학문들 사이에도 서로 문호를 개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이를 위해서는 꾸준한 교류가 이루어 질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고 교수진을 구성해야 하는데, 만약 대학원 과정을 통해 이론이 활성화 된다면 그러한 환경이 얼마든지 조성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됐을 때에 ‘사진학과/비사진학과’, ‘이론전공/실기전공’과 같은 학과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이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이 학부에서 4년 동안 사진을 공부하다 보면, 그 중 몇몇 학생들은 이론에 대한 궁금증을 느끼게 되어 주위의 영향 없이도 스스로 책을 찾아 읽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자세하게 알고 싶은 학생들은 대학원에 진학해 실기 보다는 이론에 중점을 두고 공부를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2년 동안의 석사 과정동안 이론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박사 과정까지 올라가서 최소한 6년에서 최대 10년 까지는 꾸준히 공부를 해야, 어느 정도 성취감도 느낄 수 있고 또한 이론적인 계기도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유명해지고 돈을 벌고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평생을 거쳐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 단시간 내에 시간을 정해 놓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학에서는 하나의 생을 통해서도 모자랄 정도로, 열정과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해야 하는 것이 ‘과학’이라는 얘기를 하는데, 학문도 똑같습니다.
배남우 :
문제는 대학원의 석사나 박사 과정을 통해서도, 이론이 활성화 될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실상 학부와 마찬가지로 대학원에서도 이론보다는 실기가 중심이 되는 경우도 많은데, 이론가보다는 작가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이경홍 :
저희 대학원(경일대학교 사진학과) 같은 경우에는 생긴지 10년 정도 됐는데, 다른 학교의 대학원에서는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잘 모르지만, 저희 학교 같은 경우에는 학생 본인의 능력이 된다고 하면 이론을 장려하는 편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대학원에서 이론과 비평을 강의하고 있는데, 실제로 학생들이 이론으로 석사 학위도 많이 받았고, 그 쪽 분야에서 글을 쓰는 학생들도 더러 있습니다. 이처럼 대학원에서는 학부의 실기 중심교육과는 달리,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실기를 하면 실기를 하고, 이론을 하면 이론을 할 수 있는 선택을 학생들 스스로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와 같은 선택의 자율성이 학부와 대학원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실기와 이론을 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비율을 살펴보면, 실기 쪽의 비율이 높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학부과정에서처럼 실기만 위주로 한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사진을 통해 ‘이론을 위한 이론’을 한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롤랑 바르트나 필립 뒤바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모르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그들처럼 사진을 통해 이론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기본적으로 철학적인 바탕 없이는 굉장히 힘들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이론을 공부 하다보면 국내자료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서양의 자료들도 찾아서 읽어야 하는데, 그들의 자료를 공부하고 연구하기 위해서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중 하나는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하고, 뿐만 아니라 자료를 읽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론적인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철학이나 미학 그리고 미술사 쪽으로 깊게 들어가야 하는데, 이것 또한 절대로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엄청난 인내와 시간이 요구되기 때문에, 경제적인 뒷받침이 해결될 수 있는 환경과 이론을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이론 하자.”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 아닐까요? 덧붙여 사회적인 분위기도 고려해야 하는데, 현재 한국 사회 내에서 사진이 많이 확장 되고 있고 또 인정받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진문화가 일반화 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는 국내의 환경 하에서는 ‘이론을 위한 이론’보다는, 각 대학원들끼리 특정 연구 주제를 가지고 함께 고민해본다던지 하는 식으로, 우리의 실정에 맞는 현실적인 방안을 강구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한국 사진사’라는 주제를 가지고 각 대학원에서 과거의 사진사, 그리고 현재의 진행 중인 사진사에 속하는 작가들을 선별해, 그들의 작업을 미학적으로 분석한다던지 비평을 한다고 하면 이를 통해서도 충분히 이론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현재 사진과 관련된 학회는 ‘한국사진영상학회’와 ‘한국사진학회’ 이렇게 두 개의 학회가 있는데, 여기에 하나를 더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론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진미학학회(가칭)’같은 학회를 만들어 이론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 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학회를 통해 학술지를 출간하거나 책을 출간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배남우 :
이론가들이나 비평가들이 모여 따로 학회를 조직할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 지금까지 인터뷰를 진행해 오면서 이론가/비평가 개개인들이 서로 뜻을 모아 이론과 비평을 활성화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서로 공통분모로 묶을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실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유로 인해 개개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론가/비평가들 스스로도 서로에 대해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부분도 있고요.
이경홍 :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그렇듯이, ‘학문’도 기본적으로 각자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무엇인가 말할 기회가 생기고, 서로가 다른 것들을 가지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인데, 저는 이러한 토론문화도 학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배제한 상태에서, 서로가 합리적으로 임했을 때 가능한 얘기겠지요. 제가 생각할 때에는 이론가/비평가들이 함께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는, 서로 만나 토론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자주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 문화 자체가 합리적인 토론에 익숙한 문화가 아니다보니 그런 것도 하나의 현실적인 어려운 점이 되는 것 같습니다. 토론을 하기 위해서는 토론을 위한 기본적인 기반도 갖추어야 하고, 각자 합리적인 토론을 할 수 있는 준비 기간도 필요한데, 이러한 환경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가 만나게 되면 각자의 의견 차이로 인해 감정적인 면에 치우친 토론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배남우 :
어떻게 보면 ‘사진이론’ 이라는 것을 따로 구분하려는 현상은 국내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인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왜냐하면 서양에서도 ‘사진이론’만을 다룬 이론서들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현대예술의 중심이라는 뉴욕의 대형 서점에 가 보더라도, 사진집은 많이 있을지 몰라도 정작 사진만을 다룬 이론서들은 찾기 힘들다는 것이죠.
카메라 옵스큐라, 렌즈를 통과하여 거울의 굴절을 거쳐 유리판에 새겨진 상이 모사된다,
가노(A. Ganot)의 <물리학 개론>(1855)
이경홍 :
사진이 발명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었던 카메라 옵스큐라
5)
는 화가들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기 때문에, 사진이 발명된 이후에도 많은 것을 회화의 영역에서 따올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난 이후(20세기 초반), 회화와는 다른 사진만이 갖고 있는 속성들을 발견한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 때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은 기존의 예술에서 이미 보여주었던 것들, 예를 들어 사진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회화적인 속성들은 배제한 채, ‘사진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기존의 예술을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늘 새로운 예술을 추구한다.”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는데, 여기서 사진을 ‘새로운 예술’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무척 흥미로운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을 기존의 예술과는 다른 ‘새로운 예술’이라고 표현했던 이유가, 그것이 기본적으로 삶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믿음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회화, 조각을 비롯한 여타의 다른 예술들도 “삶으로부터 온다.”라는 얘기를 하지만, 유독 당시에는 “모든 사진은 삶으로부터 와야 한다.”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특히 스트레이트 사진
6)
이나 포토저널리즘을 추구하는 사진가들 사이에서 그러한 인식이 강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진이 아무리 ‘새로운 예술’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예술을 이론화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예술들에서는 보여줄 수 없는, 사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영역이 분명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진만을 위한 이론’을 정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죠. 물론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가능하겠지만, 제가 볼 때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또한 사진은 그 범위가 너무나 광범위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이론을 따로 만든다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 사진은 기본적으로 기계와 같은 도구적 장치에 의한 결과물이므로, 과학을 비롯한 최신 테크놀로지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마다/개인마다 서로 다른 사진에 대한 고유한 영역과 계층을 형성할 수 있고, 과학의 발전과 시대의 발전에 따라서도 서로 다른 영역과 계층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미술은 미술일 뿐이지만, 사진은 예술을 위한 창작의 수단 이외에도 활용할 수 있는 분야가 무척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진만을 위한 이론보다는 사진이 응용되는 각각의 분야에 따라 이론을 세부화 시킬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저널리즘을 가지고 이론을 한다 던지, 어떤 특정 작가를 가지고 이론을 한다 던지, 아니면 패션사진을 가지고 이론을 한다 던지 말이죠. 패션사진만 하더라도 그 속에 다양한 장르의 사진들이 있기 때문에, 패션사진 속에서도 또 다른 이론으로 나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순수사진, 현대사진, 사진사도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배남우 :
국내에서는 사진이 예술을 표현하는 여러 매체중의 하나로써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미술과 따로 분리되어 ‘사진학과’라는 독립된 학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미술이론’과 ‘사진이론’을 구분하게 된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진이론만의 독자성을 주장해서도 안 되겠지만, 여전히 미술과 사진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과 미묘한 갈등이 존재하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경홍 :
사진은 다른 예술과는 달리 사진을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는 면면들이 무척 다양합니다. 회화나 조각, 그리고 영화 같은 경우에는 ‘닫혀진 창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진은 ‘열려진 창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회화, 조각, 영화와는 달리 의미의 영역이 계속해서 확장되는 표현 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을 이론화 시키는 것이 힘든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열려진 창문으로써 의미의 확장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를 모두 포괄할 수 있고 또 포용할 수 있는 ‘사진만을 위한 이론’을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주위의 여러 학계에서 사진에 대한 해석을 다양하게 제시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기호학적인 측면에서 사진을 다룰 수 있고,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사진을 다룰 수도 있고, 미학적인 측면 그리고 정신분석학적인 측면에서도 얼마든지 사진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사진에 대한 해석들이 이처럼 다양한 학계에 의해 제시될 때, 사진에 대한 이론도 풍부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MOMA(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2006
(c)Nam-Woo Bae
MOMA(Museum of Modern Art),
Photography Section in 3rd Floor, New York, 2006,
(c)Nam-Woo Bae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하게 해야 할 부분은, ‘사진’이 없이는 이론도 나올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사진 없이 이론 그 자체만으로 혼자서 존재한다거나, 순수학문으로써 이론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진이 이론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서로를 따로 구분해서 “이론이 최고다.”, “사진이 최고다.”라고 말하며 우월성을 따지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뉴욕의 MOMA(Museum of Modern Art)
7)
같은 경우, 앗제(Eugène Atget)
8)
의 사진집 4권을 출판하면서 그 속에 앗제의 사진뿐만 아니라 앗제에 대해 쓴 박사 학위 논문들도 함께 실었습니다. 이는 앗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앗제에 대한 이론과 사진이 모두 필요하기 때문에 함께 실었던 것이지, 당시 MOMA에서 사진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도 아니었고, 사진보다 이론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이론과 사진은 늘 함께 가야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유학시절 솔르본느 대학의 철학과에서 공부를 했을 때에는, 철학과 내의 교수진들 중 실기를 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다 이론을 전공하는 사람들뿐이었죠. 하지만 제가 박사 과정을 시작할 무렵 저의 지도교수님께서는, “네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것은 인정 하겠는데, 단 조건이 하나 있다. 그 조건은 바로 네가 사진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시며, 가능하면 논문을 발표할 때 제가 작업한 사진들도 함께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논문을 썼었던 당시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저는 늘 이론과 사진을 함께 병행해오고 있습니다. 사진도 많이 찍고, 전시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읽고, 생각도 많이 하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이론과 사진, 둘 중 어느 하나를 더 잘하기 위함은 절대로 아닙니다. 제가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던 것도 박사학위를 받아 유명한 이론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사진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과 신비감이 사진을 공부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학문을 하기 위해 사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론을 하기 위해 사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진을 통해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참 좋았기 때문이었으니까요.
학문은 전체적으로 폭넓게 봐야 비전(vision)이 나올 수 있는 것
배남우 :
선생님과 인터뷰를 진행해 오다보니, ‘전문성’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봐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전문성’의 사진적인 정의가 그렇듯이, 어느 한 가지 일에 몰두하거나 연구하는 것을 보통 ‘전문성’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하지만 이영준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이야기를 나눈 바 있지만) 앞으로의 작가나 이론가는 어떤 특정한 사물이나 사회현상에 대한 ‘전문가’이면서 작가를 하던지 평론가를 하던지 하는 식으로 변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경홍 :
질문을 통해 지적하신 것처럼, 전문성이라는 것이 어느 특정한 한 가지만을 잘했을 때에만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아는 프랑스의 어느 학자가 한국에 와서 서울과 지방의 몇몇 대학에서 특강을 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한국의 대학교수들이 하나같이 물어봤던 것이 “당신의 전공 분야는 무엇입니까?”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전문성에 대해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 분 같은 경우는 철학을 전공했는데, 서양철학이 주 전공이지만 지금까지 출간했던 책들은 모두 중국철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본인 스스로 서양철학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여러 철학들을 비교하다보니까, 상대적으로 서양철학과는 극(極)에 위치한 동양철학, 그것도 중국철학에 대한 책을 쓰게 됐는데 그렇다고 자신이 중국철학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라는 것이죠. 움베르토 에코 같은 경우에도 영화에 대한 글도 쓰고, 소설도 쓰고, 에세이도 쓰는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글을 썼지만, 그 사람한테 “당신은 기본적으로 기호학자니, 기호학에 대한 글만 써야 한다.”라고 얘기하면 그가 받아들일까요? 장 폴 사르트르(Sartre, Jean-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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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철학가지만 희곡과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활동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사르트르한테 “당신은 철학가니까 철학만 해야 한다.”라고 얘기한다면 안 된다는 것이죠. 저 같은 경우에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제가 그의 전문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을 선택한 이유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평생 동안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에 대해서만 연구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국내에서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프랑스의 경우에는 박사학위를 받는 예술가들이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자신들의 창작 행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이론을 공부하지만,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이론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전문가를 만들어야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분리해 낼 수 있다 생각하고, 직업상의 문제에 있어서도 요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자꾸만 세부적으로 분리해 내려하다 보니까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건데, 이제는 더 이상 한 우물만 판다고 해서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학문은 전체적으로 폭넓게 봐야 비전(vision)이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학문을 하다보면 여러분야로 확장 될 수도 있고, 하나의 학문으로 더욱 깊게 파고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폭넓게 봐야 할 때는 폭 넓게 봐야 하고, 집중적으로 해야 할 때는 집중적으로 해야 하지, 둘 중 어느 하나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서양의 경우에는 미학의 종류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데 미학만 알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서양의 미학자들은, 철학도 공부하고 미술사도 공부하고 하다못해 심리학적인 것도 공부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음악이나 시 그리고 인류학적인 것에 대해서도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미학 본연의 입장에 충실하지 못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의사들 같은 경우에도 환자를 치료하는 입장에서 계속 연구를 하다보면 서양의학뿐만 아니라 동양의학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고, 연구한 이론을 학술지에 논문의 형태로 발표할 때가 있는데, 그렇다고 이들을 이론가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본연의 입장은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술이 학문과 다른 점은, 그것이 이데올로기(ideology)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또한 시스템(system)화 하려하면 절대로 예술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술과는 달리 이론의 경우에는 자꾸만 이데올로기화 하려는 경향이 있고, 시스템화 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할수록 이론 본연의 역할에서는 점점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배남우 :
선생님께서는 지금까지 단 한권의 저서도 쓰지 않으셨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전시를 통해 완성하는 것처럼, 이론가가 자신의 생각을 저작을 통해 완성하고 또 정리해 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경우에는 어쨌든 오랜 유학기간 동안 이론을 공부하셨고 여러 번에 걸쳐 개인전도 하셨는데, 그 동안 책을 내고자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는지요?
이경홍 :
한편으로는 논문을 쓴다거나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사진뿐만 아니라, 미술사, 신학, 문화인류학, 시학 쪽으로도 공부를 하다 보니까 저 나름대로의 신념이 형성됐는데, 그것은 바로 “본질적인 것은 표현이 안 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글로 본질을 표현하려고 하면, 그것은 저 멀리 달아나 버리니까요. 또한 이론적인 글과 비평적인 글은, 시나 소설과는 다른 영역의 글 이라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개인적인 성향 때문이기도 하고, 신념이라면 신념일 수도 있는데, 이런 이유로 인해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굳이 책을 쓴다고 해도 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고요. 또한 책을 쓴다고 했을 때에는 그것 자체로 의미가 절대화 되어버리고 시스템화 되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저로 하여금 책을 저술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끔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글로써 표현한다고 해서 희열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론이나 비평이 아닌, 창작의 영역에서 소설을 쓴다던지 시를 쓴다고 했을 때에는, 충분히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고 봅니다. 사진을 비롯한 조형예술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보는데, 생각이나 언어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을 때 느끼는 희열감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이론을 하게 되면 자신이 창작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표현과 비전(vision)이 개입되기가 힘들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론에는 ‘개성’이라는 것이 개입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배남우 :
주어진 것의 진상을 알기 위해 껍질을 한 켜 한 켜 벗겨 나갈 때, 이론가는 벗겨낸 껍질에 관심을 갖는 반면, 예술가는 계속 껍질을 벗겨나가면서 저쪽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다는 니체의 표현도 있습니다만
10)
, 글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사진으로는 표현할 수 있는 본질이란 무엇인지 무척 궁금합니다.
이경홍 :
그것은 일종의 느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느낌은 오지만 그것을 글로써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죠. 사진으로 표현할 때에는 신비에 가까이 가는 느낌이 있는데, 글로써 표현했을 때에는(시를 쓰는 경우는 또 다른데)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텍스트가 안고 있는 이러한 한계성 때문에, 제 전시에 대한 모든 글들을 시(時)로 썼었습니다. 하지만 사진과 함께 수필을 적는다거나 시를 쓴다거나 하는 형식으로, 사진과 텍스트가 서로 보완 관계를 이룰 수 있는 형식이라면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최근에 출간되는 책들을 보면(어떤 면에서는 한국적인 상황일 수도 있지만) 사진이 많이 들어가고 각각의 사진에 대한 글을 쓴 책들이 많은데, 텍스트만으로는 한계성이 있지만 여기에 사진이 함께 결합되다보니 대중에게 좀 더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배남우 :
이미지와 텍스트가 결합된 책 같은 경우 글을 쓴 주체가 원래 수필가나 소설가라면 모르겠지만, 그러한 형식의 책이 대중에게 인기가 있다고 해서 이론가가 엄정한 글쓰기를 하기보다는 시장의 논리에 맞춰 읽기 쉬운 글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가들 사이에서도 부정적인 견해가 많습니다.
이경홍 :
제가 말씀드렸던 것은 상업적인 면에서 얘기 했던 것이 아니라, 순수한 입장에서 사진과 텍스트와의 관계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고 안하고의 문제는 개인에 따른 것입니다. 책을 많이 팔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진과 텍스트와의 결합을 얘기한다면,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서양과는 다르게 우리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성향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성향에 맞출 필요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도 일종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맞는 성격의 것도 찾아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우리 기질에 맞는 새로운 형식의 책들이 나오고 있으니까, 그것을 발전시켜 줄 필요도 있다는 것입니다. 텍스트 없이 사진 하나만 놓고서는, 아무리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의미를 100% 전달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텍스트만을 통해 어떠한 의미를 완벽하게 전달할 수도 없습니다.
Full view of the Serra Pelada gold mine, Brazil,
Sebastião Salgado, 1986
Powerhouse Mechanic, Lewis Hine, 1920
예를 들어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경우에는 원래는 노동 경제학자였는데, 자신의 이론을 아무리 잘 설명해도 그 의미가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지만, 사진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증명한 이후로는 경제학자의 지위를 버리고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루이스 하인(Lewis Hine)
11)
의 경우에도 살가도와 똑같은 계기로 사진가가 되었는데, 사회학자였던 그가 자신의 이론을 학계에 발표 했을 때에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 했지만, 그것을 사진으로 표현하고 난 이후에는 사진 자체가 사람들에게 하나의 충격으로 전달되었습니다. 루이스 하인이 말하고자 했던 당시 사회 상황에 대한 그의 이론이, 사진과 함께 결합된 형태가 된 이후에는 하나의 법안으로 즉시 통과되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저는 이것이 사진과 텍스트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진작업들이 살가도와 루이스 하인의 경우와 똑같은 형태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이 또 하나의 독재가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텍스트와 사진이 어떠한 형태로 결합했을 때, 텍스트는 텍스트대로 확장이 되고 사진은 사진대로 확장이 될 수 있을지 다 방면에 걸쳐 시도를 해봐야 한다는 것이죠.
結
배남우 :
이경홍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했던 부분은, 이론교육에 대한 서울과 지방 사이의 격차, 지방에서 이루어지는 이론 교육에 대한 무관심, 특히 지방의 경우 이론을 전공한 사람들이 아닌 실기를 전공한 사람들에 의해 이론 강의가 이루어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들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타 지역에 대한 무관심만큼 무서운 것도 없으니까요. 막상 인터뷰를 진행하다보니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이야기가 된 것 같은 아쉬움은 들지만, 오히려 이론과 사진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전의 인터뷰들을 통해서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고민해 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이경홍 :
아시다시피 사진계에서는 서울이외의 지역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웃음) 그래서 저 같은 경우에는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실망할 것도 없으니까 기대할 것도 없고, 잘 되면 좋고 잘 안된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진문화라는 것은 절대로 사진하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또한 서울에서 많은 전시가 열린다하여 서울사람들 만의 것도 아닙니다. ‘문화’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유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만 봐도 사진이 얼마나 많이 대중화되어 있습니까? 어디를 가도 사진이 걸려 있고, 심지어는 호텔 로비에서도 사진 전시를 할 정도로 그들에게는 사진이 친근하고 익숙한 문화로써 인식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도시 뿐만 아니라 지방에 가도 전시들이 참 많은데, 아무래도 도시 같은 갤러리 공간이 없으니까 중세에 만들어진 성(成)같은 곳에서 사진 전시를 비롯한 여러 전시가 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아주 작은 마을의 구청에서도 공간을 활용해 다양한 전시가 열리고, 또 그러한 전시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즐기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시골이라고 해서 그 사람들의 문화적인 수준이 결코 낮은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국내의 경우도 언제까지나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을 위주로 모든 일들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서울과 지방이 서로 이분화 되기보다는, 다 함께 존중 받으면서 동등한 기회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배남우 :
긴 시간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
필립 뒤바(Philippe Dubois)
: 벨기에 영화 비평가로 파리 제3대학과 벨기에 리에주 대학 교수이다. 영화와 사진 등 영상 이미지에 대한 많은 글을 썼으며, 주요 저술로는 특히 사진영역에서 1981년
에 실린 [Figures de ruine, Note pour une esthétique de l'index]가 있고, 1983년 영상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장을 연 <사진적 행위, L'acte photographique>와 1990년 이 책의 증보판인 <사진적 행위와 다른 시론들 L'acte photographique et les autres essaies>가 있다. - <사진적 행위>, 필립 뒤바, 사진마실
2)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 기호학자인 동시에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볼로냐대학교의 교수이다. 1932년 이탈리아 서북부의 피에몬테주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1954년 토리노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했으며, 1956년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미학적 문제〉라는 논문으로 철학 학위를 취득했다. 이 학위논문을 발간함으로써 문학비평 및 기호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62년 토리노대학교와 밀라노대학교에서 미학 강의를 시작했으며, 최초의 주요 저서인 <열린 작품 Opera apertas>(1962)을 발간해 현대미학의 새로운 해석방법을 제시했다. 이어 <제임스 조이스의 시학 Le poetiche di James Joyce>(1965), <예술의 정의 La definizione dell'arte>(1968) 등 새로운 이론서를 발표해 문학비평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66년 상파울루대학교와 피렌체대학교에서 시각커뮤니케이션을 강의했으며, 1967년 <시각커뮤니케이션 기호학을 위한 노트>를 출간했다. 1968년 인간의 사고와 문화행위, 이념구성 등에 다양하게 관련되어 있는 기호를 개념, 유형, 의미론, 이데올로기 등으로 명쾌하게 분석 정리한 <텅빈 구조 La struttura assente>를 발간했으며, 이어서 <내용의 형식 Le forme del contenuto>(1971)을 발간한 후 이 두 저서의 내용을 증보해 영문판 <기호학이론 A Theory of Semiotics>(1976)을 발간함으로써 세계적인 기호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1971년 볼로냐대학교의 기호학 조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세계 최초의 국제기호학 잡지 <베르수스>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1974년 밀라노에서 제1회 국제기호학 회의를 주관했으며, 1975년 볼로냐대학교의 기호학 정교수 및 커뮤니케이션·연극학 연구소장으로 임명되었다. 기호학과 미학의 세계에 열중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출판사에 근무하는 여자 친구의 권유로 소설을 집필하게 되었다. 당시 원자핵의 확산과 환경오염 등으로 인한 세기말적인 위기를 문학으로 표현해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그는 2년 반에 걸쳐 집필을 완료해 1980년 첫 번째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 Il nome della rosa>을 발표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논리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경험주의 철학과 자신의 기호학 이론을 유감없이 발휘한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어 1988년 두 번째 장편소설 <푸코의 진자 Il pendolo di Foucauilt>를 발표해 프랑크푸르트 북 페어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았으며, 1994년 자전적 작품인 세 번째 장편소설 <전날의 섬 L'isola del giornoprima>을 발표해 작가로서의 재능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움베르토 에코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서 퍼스널컴퓨터에 이르기까지 기호학·철학·역사학·미학 등 다방면에 걸쳐 전문적 지식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를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 에스파냐어까지 통달한 언어의 천재이다. 이러한 이유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이래 최고의 르네상스적 인물이라는 칭호를 얻고 있다. 현재는 볼로냐대학교에서 건축학·기호학·미학 등을 강의하고 있으며, 세계 명문대학의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파리 제4대학인 소르본에서의 강의활동과 미국 예일대학교 교수 폴 드 만(Paul de Mann)과 함께 하는 예일 학파로서의 학술활동은 유명하다. 그의 기호학이론은 오늘날 세계 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문학이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 <두산 Encyber 백과사전>
3)
신비신학(theologia mystica)
: 그리스도교 등에서 인간의 영혼과 신과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숨은 교류(交流)현상을 연구하는 신학의 한 부문. 특히 가톨릭신학에서는 한 분야로 자리 잡았는데, 대개는 수덕(修德)의 3단계인 정화(淨化)·조명(照明)·일치(一致)를 거쳐 신비적인 신과의 교류에 이른다고 본다. 십자가의 요한(판 데 라 크루스), 아빌라의 테레사데헤수스, 토마스 아켐피스, 보나벤투라 등이 가톨릭의 신비사상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 <두산 Encyber 백과사전>
4)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1924- )
: 1924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1942년 바젤에서 헤르만 아이덴벤츠에게서 사진을 배웠고, 취리히에서 마이클 볼겐징거로부터 대형카메라와 스튜디오 조명을 배웠다. 1932-44년 까지는 취리히 글로리아 영화사에서 사진가로서 일했으며, 1946년부터 취리히에서 거리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1947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운 좋게도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의 아트 디렉터 알렉세이 브로도비치를 알게되어 패션 및 광고 사진을 찍었고, 틈틈이 <라이프(Life)>, <룩(Look)>, <포춘(Fortune)>,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를 위해 프리랜서 일을 했다. 커머셜 일이 늘어나면서 종종 해외 촬영을 가곤 했으며, 바쁜 와중에서 개인적인 작업을 틈틈이 했다. 미국을 잠시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1948년 프랑스 파리로 가게 되었는데, 이 때 그곳에서 훗날 <미국인(The Americans)> 출간을 도울 로베르 델피를 만나게 된다. 로버트 프랭크를 현대사진의 아버지라고 말하고, 그를 현대사진의 선각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형식과 내용면에서 이전의 사진과 분명한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면에서 그의 사진은 전통적인 사진이 요구했던 전경, 중경, 원경의 정확한 샤프니스와 디테일 그리고 균형적 구도를 파괴했다. <미국인(The Americans)>의 사진은 입자가 거칠고 노출, 구도, 포커스를 제대로 맞추어 찍은 것이 없다. 대다수 사진이 떨렸거나 대상이 프레임 가장자리로 밀려난 사진들이 많았고, 앵글 또한 광각렌즈에 의존하여 원근감이 왜곡되거나 기형적인 모습의 이미지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식에 놀라고 혁명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이유는, 그것이 오히려 전통적인 사진보다 더 역동적이고, 더 솔직하고, 더 현대적인 모습으로 보여 졌기 때문이다. 비록 전통적인 사진어법으로서는 용인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한 기법과 형식들이 오히려 현실을 말하는데 세련되게 느껴졌다.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은 그 시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헤게모니들을 전면에 나타내고 있다. 현실의 모습을 강력한 정치, 사회, 문화적 메타포로써 드러낸 그의 사진들은, 50년대 비트 세대들이 바라본 세상의 모습 그대로였다. 물론 <미국인(The Americans)>을 찍기 전까지 비트 세대의 리더였던 젝 케루악이나, 앨런 긴스버그와 교류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은 비트 문학과 똑같은 사회적 상징성을 보여주었다.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집 <미국인(The Americans)>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집 <결정적 순간>과 함께 20세기 가장 영향력이 컸던 사진집이다. - <사진사 드라마 50-영화보다 재미있는 사진이야기>, 진동선, 푸른세상
5)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 ‘어두운 방’, 즉 ‘암실’을 뜻하는 카메라 옵스큐라가 실제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가 그의 피렌체 동료들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와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와 함께 기하학적 선원근법을 개념으로 정착시킨지 거의 한 세기쯤이 지나서부터였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원근법의 고전적 법칙인 물체에서 방사되는 광선이 한 점으로 수렴되어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되며, 그때 그 방사된 광선들이 수렴되면서 이루는 원뿔 혹은 피라밋 형의 정점은 바로 우리 눈의 위치와 일치한다는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알베르티는 <회화론(On Painting)>(1435)에서 이 단면을 하나의 창(窓)에 비유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림을 그릴 때 어떻게 하는가 하면, 우선 그리기에 앞서서 그리려는 화면 위에 원하는 크기에 따라 정확한 각도의 사각형을 그려놓고, 그리고 나서 그려야 할 대상을 향해 열려진 창처럼 그 사각형을 바라보면 된다.” 알베르티의 이론상의 창은 곧 현실화 되었는데, 수직적으로 곧게 세워진 유리창의 중심에 일치하도록 설치된 시준판을 통해 그 유리창 위에 비치는 상을 보고 단지 따라 그리기만 하면 되었다. 처음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 있을 만큼 큰 방이었었던 카메라 옵스큐라는 운반할 수 있는 형태로 축소되기 전까지는 유용한 것이 되지 못했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르러서 카메라는 두 개의 상자를 잇대어 한 끝에 렌즈를, 다른 한 끝에는 광택을 없앤 종이나 젖빛 유리를 끼운 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18세기 이후에 와서야 카메라 옵스큐라는 예술가들의 표준 장비로 쓰일 만큼 충분히 개량되게 된다. 예술가들은 <카메라 옵스큐라>라는 물리적 장치의 도움으로 자연을 보다 정확하게 모사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사실성에 대한 갈증이 보다 더 충족되자, 사실과 모사와의 간극을 사람의 손에 쥐어진 연필로 좁힌다는 것에 갑갑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손으로 그리지 않고서도 빛 스스로가 카메라 속에 맺힌 상을 그려놓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상들이 사진을 발명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 <사진의 역사>, 뷰먼트 뉴홀, 열화당
6)
스트레이트 사진(Straight Photography)
: 사진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스트레이트 사진은 회화주의 사진에 대한 반발로서 나타난 경향으로, 회화와 구별되고 사진만의 고유한 특성을 구현하려는 예술 사진의 한 시도였다. 회화주의를 거치면서 기계적 기예(Mechanical Art)라는 오명에서 서서히 벗어난 사진은, 이제 스트레이트 사진을 통해 사진만이 가질 수 있는 재현양상, 사진만이 갖는 특성을 공표함으로써 회화에 대한 종속성, 회화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벗어나려 했다. 간단히 말해, 스트레이트 사진은 회화의 생산 원칙과 인상주의 화풍의 재현 효과를 예술사진의 모델로 삼았던 회화주의가 생각하지 못했던 사진의 독자성, 사진의 자율성을 구현하려는 사진예술운동이었던 것이다. 스트레이트 사진을 옹호한 사진가들은 광학과 화학 작용의 기록을 통해 쉽게 보장된다고 여겨지는 객관성, 육안을 뛰어넘는 선명도와 같은 사진적 재현의 특성을 온전히 실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현실에 대한 ‘직접적이고’, ‘직선적인’ 촬영을 선택했고, 인화의 과정에서는 회화주의 사진이 애호하는 인위적 트릭을 가능한 한 피하고자 했다. 스트레이트 사진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스티글리츠가 보여준 완벽한 촬영과 밀착인화에 대한 완벽한 기예는 이렇게 사진의 ‘순수성’, ‘순수사진’이라고 스티글리츠가 믿은 것에 도달하는 필수적인 방편이었다. - <세계 사진가 32장면, 1826-1955), 최봉림, 디자인하우스
7)
MOMA(Museum of Modern Art)
: 뉴욕현대미술관은 록펠러(Abby Aldrich Rockfeller)를 위시한 대부호 세 명의 자금 출연으로 1929년에 문을 열었다. 초대 관장은 독일의 전위적 예술 운동과 형식주의 미학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은 알프레드 바(Alfred Barr)였고, 그는 1943년까지 관장직을 맡으면서 “현대미술의 연구를 고무, 발전시키고, 현대미술을 산업과 실제 생활에 적용시키며, 대중교육을 행하는”예술 프로그램을 가동시켰다. 그의 재임 기간 중, 뉴욕현대미술관은 사진과 관련된 두 가지 중요한 기획을 했다. 그 첫 번째는 1937년에 기획된 사진발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였으며, 다른 하나는 1940년 11월, 미술관 사상 세계 최초로 ‘사진부’를 설립한 것이었다. 초개 관장이었던 알프레드 바는 1927년 처음으로 교편을 잡았던 웰레슬리(Wellesley) 대학교수 시절부터 사진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그는 근, 현대미술사 교과과정을 개정하면서 사진 과목을 포함시켰고, 1927년과 1928년의 유럽 여행 당시에는 사진을 현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매체로 여긴, <뉴 비전(New Vision)>의 모홀리 나기를 방문했고, 쾰른에서 열린 국제보도사진전 <프레사>를 참관했다. 그의 사진에 대한 관심은 1929년 뉴욕현대미술관의 관장직을 수락하면서 작성한 ‘취지서’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바, 여기에서 그는 이미 ‘사진부’의 개설을 계획하고 있었다. - <세계 사진가 32장면, 1826-1955), 최봉림, 디자인하우스, (MOMA의 역사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알고 싶은 사람은 http://www.moma.org/about_moma/history 를 참조하기 바란다.)
8)
으젠느 앗제(Eugène Atget, 1857-1927)
: 원래는 극단의 단역 배우였으나, 1888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났던 1927년까지 수차 보정이 제대로 안된 렉틸리니어(Rectilinear) 렌즈가 장착된 8x10인치 목제 카메라로 오스만의 정미 사업과 함께 확정된 파리의 건물과 기념물, 파리의 외곽 지대, 특정 건물의 실내와 계단, 장식물, 그리고 상점의 진열창 등을 약 8,500장의 원판 사진으로 남겼다. 오스만 이후의 파리, 다시 말해 대규모 도시 계획과 정비를 거친 파리의 모습에서, 앗제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대상은 ‘구체제’의 문화 양상들이었다. 19세기 내내 계속된 혁명적 상황 속에서, 또한 오스만 이후에도 계속된 파리의 변모 속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던 ‘구체제’의 대상이 그의 가장 중요한 사진적 모티브였다. 앗제는 사라진 혹은 사라져가는, 조만간 사라질 수도 있는 대상이라면 사진으로 남겨둘 자료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앗제가 사진이라는 시각적 자료를 통해 보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파리와 파리 주변의 대상은 결코 미학적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앗제의 사진적 선택을 결정지은 것은 문화재 보전을 담당하는 제도의 지식 체계와 그의 사진을 1차 자료로써 활용할 화가, 건축업자, 실내 장식업자의 현실적 필요성이었다. 그는 프랑스 국립 도서관, 파리의 역사 도서관, 그리고 파리의 카르나발레 역사 박물관 등이 구입할 만한 사진, 즉 이 공공 문화 기관들이 역사적, 문화적 보존 가치가 있다고 판단할 만한 대상, 그리고 회화의 제작, 건축의 개보수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실제적 대상을 모티브로 삼는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시각적 정보를 제공하고, 자료의 유용성에 봉사하려는 그의 사진은 느린 촬영 속도와 호의적이지 못한 촬영 여건 탓으로 종종 ‘우발적인 대상’을 기록했는데, 초현실주의가 애호한 용어를 빌면, 이 ‘객관적 우연’은 사진의 본래의 생산 의도를 전복시켰다. 자료로서의 대상은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객관적 우연’이 시선을 사로잡는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앗제가 죽기 몇 년 전에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랬듯이, 새로운 미학적 시선은 앗제 사진의 생산 문맥을 고려치 않고, 그 자료 사진들이 우발적으로 동반하는 평범한 현실 속에 내재된 초현실주의적 양상에 주의를 집중했다. 그가 죽은 직후, 만 레이(Man Ray)의 조수였던 베르니 에봇(Berenie Abbot)은 앗제의 많은 사진을 소장하게 되었고, 이후 열정적으로 ‘앗제, 파리의 사진가’를 홍보했다. 1928년에는 <살롱 앙데팡당, Salon Indépendant>전에, 1929년에는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대형 전시회, <영화와 사진, Film und Foto>에 그녀는 앗제의 사진을 선보였다. 이러한 유통 경로를 통해 앗제의 ‘자료’사진들은, 사진의 회화주의가 종언을 고하고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과 독일의 ‘신객관주의’, 모홀리 나기로 표상되는 ‘뉴 비전’이 예술 사진의 주류를 형성했을 때조차 사진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베르니 에봇과 워커 에반스(Walker Evans)는 ‘아우라가 말끔히 소속된’, 객관적이고 차가운 앗제의 ‘기록’을 통해 사진들의 사진 작업 방향을 탐색했다. - <세계 사진가 32장면, 1826-1955), 최봉림, 디자인하우스
9)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 1905년 6월 21일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2세 때 아버지와 사별하여 외조부 C.슈바이처의 슬하에서 자랐다. 아프리카에서 나병 환자의 구제 사업을 벌여 노벨평화상을 받은 A.슈바이처는 사르트르 어머니의 사촌이다. 파리의 명문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 다녔는데, 동급생 중에는 M.메를로 퐁티, E.무니에, R.아롱 등이 있었다. 특히 젊어서 극적인 생애를 마친 폴 니장과의 소년시절부터의 교우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평생의 반려자가 된 시몬드 보부아르와의 해후도 그 때의 일이다. 졸업하고 병역을 마친 후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루아브르의 고등학교 철학교사가 되었다. 1933년 베를린으로 1년간 유학, E.후설과 M.하이데거를 연구하였다. 1939년 9월 참전하였다가 이듬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1941년 수용소를 탈출, 파리에 돌아와서 문필활동을 계속하다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메를로 퐁티 등의 협력을 얻어 <레탕모데른 Les Temps Modernes>지(誌)를 창간하여 전후의 문학적 지도자로서 다채로운 활동을 시작하였다. 사르트르의 문학적 주장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1946)에서 자세하게 드러나는데, 그가 말하는 ‘문학자의 사회 참여’란 니힐리즘의 그림자가 짙은 세계관과의 사이에 비약을 느끼게 하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는 역시 전쟁의 체험에 따른 사르트르 자신의 주체적 변화가 있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전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사르트르의 발자취는 이른바 ‘사회참여’ 사상으로 일관해온 것이라 하겠으나, 특히 1940년대부터 1950년대에 걸쳐 그는 그 때까지의 개인주의적인 실존주의에 의한 사회참여의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더욱 경향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 <두산 Encyber 백과사전>
10)
<철학으로 읽어보는 사진예술-현대영상사진과 존재>, 이경률, 사진마실
11)
루이스 하인(Hine, Lewis Wickes, 1874-1940)
: 미국의 사진가. 루이스 하인에게 있어서 카메라는 사회 개혁을 위한 연구 수단이자, 기계적 도구였다. 위스콘신의 오슈코시(Oshkosh)에서 태어난 하인은, 시카고 대학, 컬럼비아 대학, 그리고 뉴욕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1904년 뉴욕 항구를 통해 미국 엘리스 섬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의 사진을 촬영하면서, 사진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9년에는 ‘국립유아노동위원회(National Child Labor Committee, NCLC)’를 위해 일하는 사진가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루이스 하인은 미국의 여러 산업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미성년 노동자들의 모습들을 촬영한 사진 작업을 진행했고, 그것은 이러한 관행을 끝내기 위한 NCLC의 법안 통과를 위한 로비 활동에 사용되었다. 1906년에서 1908년 사이, 그는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잡지인 [The Survey]를 위해 일하는 프리랜서 사진가로도 활동했다. 1908년에는 펜실베니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 연구 모임인 [The Pittsburgh Survey]를 위해, 피츠버그의 철강 단지들과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촬영하는 사진작업을 진행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그리고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루이스 하인은 유럽에서 활동했던 미국적십자회의 활약상을 촬영했다. 1920년에서 1930년 초반사이 루이스 하인은 [Work Portraits] 시리즈를 완성했는데, 이 작업을 통해 그는 현대 산업사회가 형성되는데 기여한 인간들의 모습을 강조했고, 여기에는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건축했었던 노동자들의 사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의 대공황이 일어났었던 기간에 그는 다시 미국적십자회를 위해 일했는데, 미국 남부지역의 가뭄을 지원하는 구원활동을 기록하는 작업을 했고, ‘테네시강 개발공사(Tennessee Valley Authority, TVA)’를 위해 테네시 동부 산악지역의 사람들을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또한 산업사회가 변화하는 모습을 연구하고, 그러한 변화가 노동자들의 고용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연구하는, ‘공공사업 촉진국(Works Progress Administration, WPA)’에서 주도한 국가조사 프로젝트의 수석 사진가로도 일했다. 국립기록물 보전소(The National Archives)에서는 미성년 노동자들과 미국적십자회의 활동을 기록한 사진들, 노동자들의 사진들, 그리고 WPA와 TVA를 위해 촬영했던 사진들을 포함한 2,000장여 가까이 되는 하인의 사진을 소장하고 있다. - [Wikipedia 백과사전, http://en.wikipedia.org]
인터뷰 기획 및 진행 : 배남우
본 인터뷰의 저작권은 배남우씨와 fotato.com에 있습니다. 따라서 인터뷰의 무단 배포와 전제를 금하며, 관련 사항은 배남우씨와 fotato.com으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배남우씨는 현재 상명대학교 예술, 디자인 대학원 순수사진학과 휴학 중이며, 제 7회 사진비평상 평론부문 우수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인터뷰를 읽고
감상자
2007.06.10
마지막에 문화에 대한 얘기가 와닿는군요.
사진전시뿐 아니라 모든 문화가 수도권에 집중된게
현실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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