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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남우의 이론 / 평론가와의 대화 7편 - 이경률
배
남우의 이론
/
평론가와의 대화
8
편
–
이경률
- Interview 8, 이 경 률
1992년 프랑스 투르 대학 예술사 학사학위와 1993년 동 대학 예술사(현대미술/사진예술)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995년 파리 팡테옹 소르본 제1대학 예술사 박사과정 D.E.A 학위와 2000년 동 대학 예술사(사진예술)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다수 대학에 출강 중이다.
저서로는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2002)와 <철학으로 읽어보는 사진예술>(2005), <현대 사진미학의 이해>(2006)과 역서로 필립 뒤바의 <사진적 행위>(2004)가 있다.
序
작가론과 작품론은 근본적으로 이해의 폭이 다른 학문.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들은 모두 다르고 또한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의 관점들은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함.
배남우 :
간간히 저서를 내는 이론가나 비평가들은 많지만, 저서를 통해 자신의 이론적 시각을 일관성 있게 이어나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저서의 내용이 각각 다른 단행본의 형태로 존재하는 경우는 많아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것이지요. 선생님께서는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 <철학으로 읽어보는 사진예술> 그리고 최근의 <현대 사진미학의 이해>까지 존재론적인 접근에 기반을 둔 작가론을 일관되게 유지해 오셨는데, 예술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방법에 있어서의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작가론과 작품론은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경률 :
저 같은 경우에는 지금까지 공부를 해 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 존재론과 작가론인데, 그러다 보니 인식론과 작품론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관점과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다르다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 이전에 코드(code)에 대한 문제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성이 있을 것 같네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이론가나 비평가들과는 코드가 틀리므로, 작품론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제 작업을 바라보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코드는 문화적인 코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생각하는 관점을 말하는 것이고, 코드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학문적인 관점이 이론가 개개인들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야기되는 문제를 말합니다. 서로 코드가 틀리게 되면 이해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구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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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후기구조주의는 서로 다른 것이므로, 당연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각각의 관점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방법도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내가 구조주의를 연구한다고 해서 구조주의의 안쪽에만 머물며, 모든 것을 구조주의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려 한다면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오류는 후기구조주의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똑같이 범할 수 있겠지요. 구조주의 관점만으로는 구조주의 영역 안에 있는 것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에, 구조주의의 벽을 벗어나서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외의 것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죠.
예술에 있어서 작품론과 작가론의 경우도 앞서 말씀 드린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의 경우와 똑같습니다. 흔히 작품론을 이야기 할 때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분석중심의 그리고 과학중심의 인식론과 관념중심의 관념론을 해석의 틀로 사용하는데, 작품론은 기본적으로 결과로 나타난 예술작품 그 자체를 인식론적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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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이해하려는 관점을 말합니다. 그래서 작품을 볼 때에도 작가를 배제한 채 작품의 형식적인 면과 작품에 객관적으로(혹은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분석하여, 그것을 과학적으로 규정화 할 수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작품론을 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관점으로 작가론을 이해하려 할 때 발생합니다. 작품론과 작가론은 근본적으로 이해의 폭이 다른 것이므로, 작품론적인 관점으로는 작가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작가론은 작품이 가지고 있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작품이 있게 된 배경을 들추어내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이미 결과로 드러난, 그래서 명확히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을 연구하는 작품론과는 달리, 작가론에서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영역 바깥의 것들을 더욱 중요시 여깁니다. 따라서 존재론적인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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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작가론의 주요 담론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작가가 느끼는 것들은 명확하게 규명하고 정형화하여 설명할 수 없는, 그래서 존재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인식론적인 관점과는 정반대의 영역에 있는 반-플라톤적인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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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예술작품을 보는 것이 작가론이며 존재론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방법론에 있어서도 소쉬르의 이원론적 관점
5)
으로는 작가론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근본적인 배경을 밝히고 이해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론이 ‘인덱스론적(index) 방법론(혹은 지시론적 방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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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하지만 보통사람들의 대부분은 작품론에 익숙해져 있고, 이론가나 비평가들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예술작품을 대하는 코드가 저와 다르기 때문에, 작가론을 연구하는 저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중요하게 다루고 있고 또 연구하고 있는 것들이, 우리나라의 제도권에서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작가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범위와 폭을 조금 넓게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생각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익숙한 논리적인 벽을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은 모두 다르고 여러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작품론이던지, 작가론이던지, 인식론이던지, 존재론이던지 서로의 관점은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배남우 :
작가론과 작품론의 관점이 서로 상반되듯이, 각각을 다루는 이론가나 비평가의 역할도 다를 것 같습니다.
이경률 :
작품론을 다루는 비평가들은 예술작품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정답을 찾아내려는 사람들이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나가야 할 부분이 생성-존재론7)에 기반을 준 작가론이기 때문에, 저의 주된 작업은 짙은 안개 속에 묻혀있어서 명확하게 인식하기 어려운 창작의 근원적인 배경을 들추어내어 밝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작의 주체인 작가 자신은 창작의 배경을 남들에게 설득력 있게 표현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존재론적으로는 그러한 배경이 분명 존재하므로 이를 들추어내어 규명하는 것이 바로 작가론을 다루는 비평가가 해야 할 역할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작가론을 하는 비평가들은 작가를 절대로 사회적인 의미의 틀에 끼워 넣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열화 된 기준을 가지고 작가들을 재단 한다던지, 작가 개개인들의 능력에 순위를 매겨 재단하지도 않습니다. 비평가의 역할은 “작가는 왜 이 사진을 찍었을까?”하는 어떤 근원적인 원인을 밝혀주는 것이지, “이 사진은 무엇이다.”라고 규정하는 식으로 의미 부여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작가를 대변해주는 스피커와 같은 역할을 통해, 작가를 띄워주는 것이 비평가가 해야 할 역할은 아니라는 것이죠.
배남우 :
결과로서 드러난 이미지보다는, 원인으로서의 내재된 배경 혹은 동기가 선생님께는 더욱 중요하다는 말씀이신지요?
이경률 :
사진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에 있어서 작품을 있게 한 근본적인 배경은, 작가의 내부에 작가 자신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없는 형태로(마치 안개처럼) 존재합니다. 그리고 작가의 내부에 안개처럼 뿌옇게 형성되어 있는 그러한 배경들을, 작가 자신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못할 것입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이처럼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대상과의 교감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작가가 가지고 있는 ‘직감’과 같은 것으로써, 이런 것들은 존재론적인 방법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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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사진은 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표현매체라고 할 수 있는데, 작가의 직감을 순간적으로 이미지화 하는데 사진만큼 탁월한 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사진은 인화되어 나온 사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상(像)을 우리가 뷰 파인더로 확인하는 모든 것들까지도 모두 포함합니다. 그런데 제가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들이 작품론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치 미국의 유명한 TV시리즈인 C.S.I 과학수사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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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에 나와 있는 작품으로부터 분석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들이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어야 하는데, 작가론의 영역에 있는 것들은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작품론에서는 결과물로 드러난 사진으로부터 형식주의 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면(마치 C.S.I 과학수사대의 대원들이 증거물을 분석하여 범인을 유추하는 것처럼), 작가론에서는 작가의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해 제가 사진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재현매체, 표현도구와 같은 사진의 물질적인 부분에 대한 것이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 “저것은 사진이다.”라고 지칭되는 순간에 일어나는 이해의 과정에 관한 부분입니다. 관객의 눈앞에 놓여져 있는 것이 아무리 카메라를 가지고 포착한 이미지라 하더라도, 그리고 카메라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흐린 이미지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관객에게 그러한 이미지가 카메라로 촬영된 것이 아닌 것으로 인식되면 그것은 사진이 아니라 조형물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카메라로 촬영된 것은 아니더라도 실제 사진과 똑같이 그림을 그린다거나 영상으로 사진과 똑같이 작업 했을 때, 관객이 그러한 작업을 보고 “아, 저 이미지는 카메라로 촬영된 사진이다.”라는 판단을 내린다면 사진적인 담론의 대상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사진에 대해 생각하는 관점은, 매체중심 그리고 물질중심의 사진에 대한 관점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하고 조심해야할 것은 학문에 대한 획일적인 관점.
배남우 :
선생님의 저서 <철학으로 읽어보는 사진예술>을 읽다보면, ‘니체는 주어진 것의 진상을 알기 위해 껍질을 한 켜 한 켜 벗겨 나갈 때, 이론가는 껍질에 관심을 갖는 반면, 예술가는 계속 껍질을 벗으면서 저쪽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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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우리가 양파의 알맹이에 해당하는 작품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내용인데, 작품이 있기 이전의 근원적인 배경을 연구하는 것이 작가론이라면, 결국 근원적인 배경에 해당되는 본질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모순에 빠지는 것이 아닌지요?
이경률 :
우리는 일반적으로 양파의 껍질을 계속해서 벗겨 나가다보면, 껍질의 가장 깊숙한 안쪽에는 양파의 씨앗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양파의 껍질을 예술작품이라 하고, 껍질의 가장 깊숙한 안쪽에 있는 양파의 씨앗을 예술작품을 있게 한 근본적인 배경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작가가 직감적으로 무엇인가를 느껴서,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고, 사진을 찍어 작품을 만든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예술작품은 양파의 껍질을 벗겨 놓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양파의 껍질 안쪽에 무엇인가 묻어 있듯이, 예술작품에도 무엇인가 작가의 의도가 배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그렇게 계속 양파의 껍질을 벗겨 나가다보면, 언젠가는 근본적인 원형이 구체적으로 눈앞에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벗겨낸 양파의 껍질을 보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양파 자체에는 씨앗이 없습니다.
양파의 껍질과 알맹이의 비유를 통해 예술의 이중적인 측면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본질’에도 두 가지 측면의 본질이 있습니다. ‘현상학적인 본질’과 ‘존재론적인 본질’이 바로 그것이지요. 만약 본질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현상학적인 본질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의 본질은 항상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 되겠죠. 그런데 이는 곧 모든 현상에는 일종의 정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는 작가나 예술 작품에 있어서도 창작의 동기에 해당하는 명확한 정답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인사동에 가서 전시를 본다고 했을 때, 그것이 사진이건 회화건, 조각이건 간에 반드시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정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전시를 보는 것과 똑같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때의 비평가는 그러한 정답을 작품과 관객의 중간에서 매게 역할을 하면서 설명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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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본질에는 그러한 본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나는 본질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가 본질에 대해 이야기 할 때에는 대부분의 경우 명확하게 증명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단적인 예로 작가가 세상을 마주하며 느끼는 미세한 감각의 것들은, 우리가 논리적으로 풀 수 없는 것들이고 또한 쉽게 정답을 얘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마치 어떤 단어의 정의를 내리듯이, 정의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처럼 존재론적인 본질은 우리가 명확하게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우리의 눈앞에 시각화하여 증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질 그 자체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정답’으로서의 것 외에 존재론적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본질도 있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 관점만으로 통일되기 보다는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배남우 :
최근에는 비평의 초점이 작가보다는 작품에 맞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가의 입장에서 작품을 이해하기 보다는, 작품에 대한 비평가나 관객의 독자적 해석에 무게를 두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작가의 무의식적인 직감에 의한 창작활동은, 심미적이고 유미주의적인 것으로 그 의미가 한정되는 경향이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이경률 :
흔히 사람들은 스스로 직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사람들은 직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단순한 미신이라고 생각할까요? 이야기의 범주를 예술에 대한 부분으로 옮겨 생각해보죠. 예술작품의 창작과정에 있어서 모든 작가들이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조각을 하기 이전에, 사진을 찍기 이전에, 모든 과정을 치밀하게 계산하고 계획해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계획한 그대로 작품을 제작할까요? 물론 그렇게 작업하는 작가들도 분명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설명할 수 없는 직감과 감각, 그리고 충동 이라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얘깁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점들은 분명 작가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만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에, 담론의 대상이 되지 못했을 뿐이죠. 쉽게 말해서 직감과 감각, 그리고 충동과 같은 것들은 내가 생각은 하고 있지만 단지 의식을 못하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인 코드가 없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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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탈코드는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는 이데올로기나 문화를 지칭하지 않기에 보편화가 되지 못했을 뿐이지, 사람들은 항상 무의식적으로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마음 한 구석에 무엇인가를 쌓아두고 억압시켜 놓곤 합니다. 자기 자신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거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마음 한 구석에 가두어 놓는 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존재론적인 대상들이 담론의 대상이 된다고 했을 때에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기 때문에, 인식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연역법이나 귀납법처럼 일반적 사실이나 원리를 전제로 하여, 개별적인 특수한 사실이나 원리를 결론으로 이끌어 내는 방법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탈코드적인 현상, 존재론적인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현상들을 추적하고 접근하는 방식이 바뀌어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만약 접근 방식을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말해 기존에 갖고 있던 자신의 관점을(인식론적인 관점) 변화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존재론적인 대상을 바라봤을 때에는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인식론적인 관점으로 존재론적인 대상의 의미를 고착화 시키고 한정시켜 버리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대상을 이해하는 방법도, 존재론적인 방법으로 대상을 이해하는 방법도, 결국은 어떤 대상을 추적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방법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에는 열의 아홉 정도는 학문을 바라보는 관점이 하나의 관점으로 획일화 되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굉장히 경계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는 과학중심의 사고와 논리중심의 사고만으로 모든 대상을 이해하려는, 그래서 겉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를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200년 전에 일어났었던 ‘계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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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행어처럼 사용하는 후기구조주의라는 것은, 계몽주의 이후로 모든 것들을 한쪽 방향으로 구조화시켜 이해하려는 것에 한계를 느껴 나오게 된 철학적 현상입니다. 계몽주의의 한계, 구조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논리의 영역 밖에 있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나온 것이 후기구조주의라는 얘깁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후기구조주의는 담론의 쟁점이 구조주의의 보편자 담론에서 무규정자로 이동된 메타-구조주의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담론의 이동으로 인한 문화적 생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후기구조주의’라는 용어 자체도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만들어낸 용어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후기구조주의’라고 부르는 용어를, 정작 이론적으로 후기구조주의를 발전시킨 프랑스에서는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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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남우 :
학문을 바라보는 관점이 하나의 관점으로 획일화 되어있는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해 주셨지만, 특정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든 작가의 사진을 그 이론과 동일시하여 이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의 저서를 읽고 나서, 랄프 깁슨의 사진을 인덱스론과 동일시하여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죠.
이경률 :
제가 랄프 깁슨을 언급했던 것은 인덱스론을 설명하기 위한 예를 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고 지구상에서 저만 유일하게 인덱스론을 설명하기 위해, 그의 작업을 언급했던 것도 아닙니다. 이미 인덱스론을 연구하는 서양의 유명한 이론가나 철학가들이, 후기구조주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랄프 깁슨의 사진을 연구한 사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전달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연구 사례들을 저 나름대로 소화해서 이야기한 것뿐이지, 정작 랄프 깁슨은 자신의 사진이 어떻게 이론적으로 분석되고 또 설명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호기심을 가지고 그러한 글들을 읽어봤을 수는 있겠죠. 제가 생각하기에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서양의 어떤 유명 이론을 수용할 때 그것이 일단 국내로 들어오고 난 이후에는, 이론과 그 적용대상이 일대일 대응 식으로 고정되어 버린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특히 국내의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많은 부분들이 획일적인 관점으로 논리화되고, 관념화되고, 고착화되어 왔는데, 이런 상황이 개선되지 않은 채 계속 반복되고 있다 보니 질문을 통해 지적하신 문제점들이 일어났을 수도 있겠지요. 한국 사회에서의 지적 유행이 대체로 그렇듯이 어떠한 철학적 혹은 이론적 경향의 유행과 쇠퇴는, 국내적인 연구의 성숙이나 포화 현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히 외국, 미국이나 유럽에서 이 유행이 발흥하고 쇠퇴하였다는 외부적인 요인에 주로 기인한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들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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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관념론이나 인식론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듯이, 인덱스론적이고 지시론적인 것은 존재론적인 하부구조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대중들이 랄프 깁슨의 사진과 관계된 제가 쓴 이론적인 글들을 읽고, 마치 ‘랄프 깁슨 = 인덱스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전체적으로 제가 예술에 대해 생각하는 관점을 대중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술에 대한 대중들의 잘못된 이해가 가장 큰 문제점.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자주 소개되고,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작가만이 1등 작가는 아님.
배남우 :
인터뷰의 앞부분에서도 짧게 언급하셨지만, 예술가를 서열화 시키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봤으면 합니다. 일반적으로 특정 작가의 작품이 외국의 유명 경매에서 거래되었을 경우, 외국의 유명 비엔날레나 전시에 참가할 경우, TV의 특집 다큐멘터리나 연에 프로그램에 소개되었을 경우, 대중들 사이에서는 마치 그러한 작가들이 최고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예술가를 서열화 시킨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궁금합니다.
이경률 :
예술가들은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체계에 순응해서 움직이지 않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술가들 개개인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임을 인정하고, 서로서로 존중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술가들을 일일이 서열화 한다는 것은(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지만) 마치 고3 학생들이 수능 점수에 따라 대학에 진학하듯이, 사회적으로 예술가들을 서열화 시켜 그 순서대로 줄을 세우는 것과 똑같습니다. 예술에 있어서 이러한 현상의 대표적인 예가 기획전과 비엔날레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모두 집단 사회가 잘 못 만들어 놓은 것들 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진 앞에서 “저 사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사진을 이해할 때에도, “저 사람은 교수니까.”, “저 사람은 유명한 사람이니까.”하는 식으로 모든 것을 사회적인 선입관 속에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사회적으로 서열화 된, 그래서 그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분류된 것을 우선시 한다는 것은, 우리가 집단적이고 전체적인 관점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는 모든 것이 서열화 되어야 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관점에서 예술작품을 바라보고, 또 공공의 관점에서 중요시 여기는 것들을 그대로 작가에게 적용 시키는 식의 잘못된 비평은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어떤 작품의 의미를 분석할 때에는, 작품이 갖고 있는 고유한 본성은 사회 내에서의 어떤 의미에 묻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러한 비평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대중과 사회의 취향에 부합하는 사진을 찍는 작가들만이 훌륭한 작가가 되고, 그러한 작가가 1등이라는 식의 편견은 극복되지 않을 것입니다.(이는 마치 TV에 자주 나오는 사진작가가 최고라고 잘 못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자주 소개 되고,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작가만이 훌륭한 작가 혹은 1등 작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도, 사실은 모두 가변적인 것이니까요.
배남우 :
오르테가 이 가세트(스페인의 대표적인 문필가)의 <대중의 반역>이라는 책에는 20세기 이후의 사회는 대중사회로 정의내릴 수 있고, 완전한 사회세력으로 등장한 ‘대중적 인간’의 출현으로 인해 야기되는 여러 문제점들에 대한 논의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예술에 있어서도 향유와 소비의 중심에 대중이 존재함에 따라, 대중의 취향이 예술을 평가하는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경률 :
제가 생각할 때에는 예술에 대한 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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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잘못된 이해가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봅니다. 특히 국내에서는 순수예술이 작가를 중심으로 한 개체중심이 아니라 대중예술과 같은 집단적인 관점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예술은 대중과 관계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반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은 분명히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진의 경우에는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는 관점에 따라 달리 평가되고 또 이해되므로 조심할 필요성이 있는데, 창작행위를 소통을 전제로 하는 일반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다면 대중예술이 될 것이고, 대중의 눈에 읽혀지지 않는 무규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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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개념에 둔다면 주관적 느낌을 드러내는 창작 행위로서 순수예술이 될 것입니다.
18)
하지만 그렇다고 대중예술보다 순수예술이 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이 서로 위치하고 있는 영역이 다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서로 공존하면서 함께 이해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중들이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대중과 사회 사이의 관계에 놓여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술도 예외일 수는 없겠죠. 그런데 예술이 대중과 사회 사이에 놓여있다 보면, 대중예술이 순수예술로 둔갑되어 마치 그것이 예술에 있어서의 절대적인 바이블(Bible)로 잘못 인식되는 문제가 발생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대중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대중의 집단적인 가치관이 발현된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술이 그렇게 집단중심으로 가다보면 집단이 바라보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작가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문제점도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대중예술의 가치가 저질이다, 진부하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술에 대한 그러한 집단적인 관점 하에서는 작가가 예술에 대해 자기중심적인 관점을 가지기 힘들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작가로써 살아남기 위해서 나보다는 사회가 요구하고 또 외부에서 평가받는 것, 즉 타자에 의해 내가 결정되는 것에만 골몰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 자체가 예술이 대중예술의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하에서 작가는 자신의 이상(理想)과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결국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전업 작가로서 자리 잡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게 되겠죠. 그런데 타협을 하는 과정에서 작가 자신이 의식을 가지고 타협을 하면 문제가 안 되겠지만, 대게의 경우에 있어서는 작가가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줄부터 서야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상태에까지 몰리게 되면 작가 스스로 현실에 대한 환멸을 느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순수예술로 둔갑된 대중예술은 모든 것을 서열화 하려하고, 언론은 “아무개 작가가 요즘 최고야.”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스타를 만들고, 혹은 신화창조의 형식으로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대중 중심적인 기호에 끼워 맞추려하기 때문에, 작가들 개개인들은 고유한 주체로써 존중받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야 관계된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런 방식들이 절대화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현상에 대해서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와 같은 각성을 넘어서, 근본적으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전체적인 인식을 바꿔줘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의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관점이 아닌, 다양한 형태를 규정하는 가치관들을 소개하고 공유함으로써 서로를 부정하지 않고 존중해 줄 수 있을 때,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은 어느 한쪽으로만 편승되지 않고 서로 공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남우 :
물론 대중적인 비평가도 있습니다만, 대게의 경우 이론가나 비평가들은 대중의 취향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일 때가 많습니다. 비단 이론가나 비평가들뿐만 아니라 작가들에게 있어서도, 대중성은 넘기 힘든 과제로서의 벽이라기보다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가로막는 벽으로서의 의미가 클 것 같습니다.
이경률 :
제가 대중예술을 부정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보다 근원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죠. 작가가 가지고 있는 개성과 관점은 모두 다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사회적인 관점과 같은 집단적인 관점 하에서만 작가를 바라보다 보니까, 작가들 개개인이 갖고 있는 개성과 고유한 관점이 완전히 말살되어 버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 아닐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작가들 자신도 자신들이 작업을 할 때에 어떻게 하면 좀 더 사회적인 이슈로 승화시킬 수 있을지, 어떤 식으로 스스로의 작업을 보편화 시켜야 대중들의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에 대해 강박관념을 갖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처럼 작가 스스로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말살 시켜야 하는 현실이 되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의 예술은 순수예술보다 대중예술의 가치가 더 높게 책정되는 것입니다. 개인성보다는 보편성이 더욱 중요시 여겨지고, 그 속에서 작가들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순수함은 부정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얘깁니다. 작가가 작업을 하는 이유는 뭘까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작가 나름대로 창작의 동기를 가지고, 작업을 통해 만족과 쾌감을 느끼며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집단 사회에서는 마치 고3 학생들이 수능 점수에 따라 대학에 진학하듯이, 예술가들도 사회적으로 모든 것들을 서열화 시켜 그 순서대로 줄을 세우다보니 작가들이 원래 추구해야 하는 것들이 원천 봉쇄되고 말살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는 이와 같은 의식을, 고착화 되어 있고 고정관념화 되어 있는 것들을 풀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반복적으로 말씀드렸지만, 제가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작가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것이지만,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작가의 족쇄를 풀어주는 것이 저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에서 작가들을 억압하는 갑옷을 벗겨주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배남우 :
순수예술을 대중의 눈에는 읽혀지지 않는, 무규정자의 개념에 둔 창작행위라고 표현하신 부분과 관련하여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책을 읽다보면 ‘무규정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무규정적인 것이 의미하는 개념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경률 :
무규정적인 것, 다시 말해 우리가 규정할 수 없는 것이란 들뢰즈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어떤 것들이 생기기 이전의 하부구조를 의미합니다. 엄밀히 얘기해서 이러한 것들을 명확하게 규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들 주변에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물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 규정적인 것과 하부구조에 대한 저의 관점은, 철저하게 유물론적인 관점과 베르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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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물질주의적인 관점
20)
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유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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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학적 유물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적인 개념에서는 인간의 정신에 대하여 그 의식 바깥에 존재하는 것 또한 물질이라고 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상황 그리고 감각에 의해서 포착되는 수많은 상황들도 물질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현실 바깥의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호흡하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철학에서는 이러한 경험들을 ‘매게 한다.’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에서 ‘매게’라고 하는 것은 관념적으로 현실 바깥에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다시 말해 내가 체험하지 않은 것들을 막연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순수예술에 있어서 규정할 수 없는 것들, 하부구조에 존재하는 것들을 상부구조로 끌어 올리는 행위를 우리는 ‘예술적 창작행위’라고 말하고, 이때 표현매체가 사진일 경우에는 ‘사진적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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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 경우에는 ‘영화적 행위’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는, 결과로 드러난 매체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매체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작가가 어떤 매체를 통해 작업을 완성시켜나가던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죠. 따라서 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매체가 아니라 그 매체를 있게 한 하부구조의 것들, 예술적 창작행위의 본질을 드러내는 과정, 이러한 과정 이후에 논의될 수 있는 담론,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관객들은 어떤 입장에서 바라볼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답> 그 자체를 중요시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품론과 형식주의, 그리고 매체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연구하기 위해 과학적인 분석 방법을 사용하는 매체미학과는 정 반대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結
배남우 :
전체적으로 작가론과 작품론, 존재론과 인식론의 틀 속에서 그와 관련된 여러 현상들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 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나와 다르면 일단 배척하고 보는 우리의 잘못된 관행을 되돌아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습니다. 끝으로 마무리할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경률 :
제가 볼 때 아직까지는 국내의 사진계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학문적인 기반이 아니라, 기본적인 인프라(infra)와 관련된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비평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결국은 인프라에 대한 문제로 갈 수 밖에 없을 때가 많습니다. 또한 매년 연말 혹은 연초에 사진잡지에서 이론과 비평을 특집으로 다룰 때에도, 사진계 내에 존재하는 개별적인 문제를 일시적으로 지적하는 형태로 갈 때가 많으므로, 이론이나 비평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를 꾸준히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지속적인 논의도 불가능하고 문제점도 개선될 여지를 보이지 않으므로, 이론가나 비평가가 그러한 문제점들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인문학은 시간이 필요한 학문입니다. 학문적인 것들은 술을 익혀가듯이 꾸준히 시간을 두고 단계를 밟아 나가지 않으면, 외부로부터의 지식을 단순히 짜깁기 한 것에 불과한 것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이론가에게 학문적인 바탕이 어느 정도 확고하게 정립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나이가 50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 꾸준히 연구 활동을 하면서 그것을 책으로 완성해 낼 수 있어야, 대중들이 그 책을 읽고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도 생기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들이 책으로 엮어지면서 각각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기에는,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는 기본적인 학문의 토양이 너무나 부실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는 이야기의 핵심적인 것, 말하자면 학문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한다는 것이 국내에서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인터뷰를 통해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사진과 비평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이 서로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미약하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배남우 :
긴 시간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자 주
1)
구조주의: 라틴어 동사 ‘struere’에서 온 ‘structura’에서 파생한 단어 <구조>는, 처음에는 ‘한 건물이 지어지는 방식’을 가리키는 건축적 의미로 쓰였다. 그런데 구조라는 용어는 17-18세기에 의미가 변해서, 유추에 의해 생명체에도 적용되게 되었다. 그래서 보줄라나 베르노가 언어를 하나의 건물이라고 파악한 것과 마찬가지로 퐁트넬은 인간의 육체를 하나의 건축물이라고 보았다. 이때부터 구조라는 단어는, 한 구체적 존재의 부분들이 하나의 전체로 조직되는 방식에 대한 기술을 의미하게 되었다. 동시에 이 용어는 해부학적, 심리학적, 지리학적, 수학적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쓰이게 되었는데, 이러한 개념을 인문사회과학의 영역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은 19세기의 스펜서, 모건, 마르크스였다. 그 당시 이 개념은, 한 전체의 부분들을 복합적인 방식으로 상호 연결하는 영속적인 현상이라는 추상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헤겔은 구조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고, 마르크스도 <정치경제학 비판>(1859)의 서문을 제외하고는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인문사회과학에서 이 용어를 공인한 것은 19세기 말에 뒤르켐이 쓴 <사회과학적 방법의 법칙>(1895)에서였다. 여기서 구조주의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앙드레 랄랑드의 <철학용어집>은 이것이 1900년에서 1926년 사이에 태어난 신조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이 단어가 현대적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언어학의 발전 덕분이었다.
물론 구조라는 용어는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에는 세 번밖에 나오지 않지만, 프라하 학파(트루베츠코이와 야콥슨)가 구조와 구조주의라는 용어를 전파하게 된다. 그리고 구조주의를 학문의 기분 프로그램으로서 최초로 표방한 사람은 덴마크의 엘름슬레우였다. 그는 1939년에 <악타 링귀스타카> 창간호의 권두 논문에서 <구조언어학>을 다루었다. 이처럼 언어학이라는 핵심에서 출발한 구조주의는 20세기 중반에 모든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말 그대로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왜냐하면 인문사회과학이 구조주의에 의지함으로써 진정한 과학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인문사회과학의 영역에서 구조주의의 수용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다. 롤랑 바르트는 이것들 사이의 차용, 일치, 유사성을 밝혀내는 일이 앞으로 구조주의의 역사를 쓰는 사람들의 임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우선 다음과 같은 분류를 시도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것은 인류학의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기호학의 알지르다스 쥘리앵 그레마스, 정신분석학의 자크 라캉이 대표하는 과학주의적 구조주의이다. 두 번째 것은 <법칙>을 탐구하는 첫 번째 구조주의와 비슷하면서도 더 유연하고 유동적이며 다채로운 기호학적 구조주의인데, 그 대표자는 롤랑 바르트, 제라르 주네트, 츠베탕 토도로프, 미셸 세르이다. 세 번째 것은 역사화된 구조주의 또는 인식론적 구조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이것은 루이 알튀세, 피에르 부르디외,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장 피에르 베르낭, 그리고 더 폭넓게는 아날 학파의 3세대 역사가들이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들을 넘어서는 공통의 언어와 목적이 드러나기 때문에 바르트, 푸코, 데리다, 라캉을 구분 짓는 상이한 문체와 영역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내용이라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따라서 위와 같이 다양한 대표자들 사이에 학설이나 학파 또는 논전에 관한 연대 의식이 거의 없었지만, 구조주의는 한 세대 지식인들 전체의 공통 언어였던 셈이다.
시기 구분 역시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물론 구조라는 현상에 대한 언급이 1950년대에 두드러지게 증가하다가, 60년대에는 구조주의가 본격적으로 유행하여 대부분의 학계를 풍미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구조주의 활동이 학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는 1966년이었다. 이 해는 구조주의 활동의 강도와 경계를 넘어서는 기호들의 세계가 구축되었다는 점에서 절정기였다. 이처럼 1966년까지 구조주의는 상승기를 구가하며 비약을 거듭했다. 그러나 1967년부터 퇴조가 시작된다. 언론 매체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구조주의를 일대 사건으로 취급하는 와중에, 구조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들이 제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조주의자라고 분류되었던 사람들이 스스로 구조주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조주의의 퇴조는 이미 1968년 5월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조주의는 근본적으로 학문 영역간의 교환에 기초하기 때문에, 분야들 사이의 시각적 편차가 있고 경계도 불분명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주의 덕에 숱한 대화와 학회가 열리고 풍요로운 연구가 이루어져, 이웃 분야의 작업과 성과를 능동적으로 주목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구조주의 사상가들이 자기의 연구와 사회적 실천을 접목시키려 노력했기 때문에 구조주의의 시기는 더욱더 강렬할 수 있었다. - <구조주의의 역사 I - 기호의 세계 1950년대>, 프랑수아 도스, 1998, 동문선
2)
인식론적인 관점은 현상으로부터 본질이 파악되면서 궁극적으로 현상을 본질과 동일시하는 관점이다. 특히 플라톤 철학에서는 감각적 인식대상이 바로 현상이고, 이성적 인식대상이 본질이라고 한다. 또한 인식론적 관점에서 우리는 세계 그 자체가 인간의 경험 여부에 관계없이 감각과 자료에 의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자연적 태도’를 갖는다. 이때 현상은 의식의 작용현상으로 현재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그것들은 과학적, 경험적, 귀납적, 실증적, 논리적 방식으로 분명히 밝혀지는 것들, 예컨대 법, 제도, 공리, 규칙 등은 현상에 대한 대표적인 본질이다. 결국 인식론적 관점에서 현상이라는 것은, 자연 현상이나 사회 현상과 같이 관찰되고 확인되는 모든 사실로서 과학적 연구 대상이 되는 것을 말한다.(반대로 관찰되고 확인될 수 없는 인지 영역 밖의 대상은 여기서 현상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헤겔은 “현상은 곧 본질이다. 즉 본질은 현상의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그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라고 언급하면서 현상과 분리된 본질은 없다고 단언한다. 이는 곧 변증법적 유물론의 현상론을 이루고 있다. - <현대 사진미학의 이해-사진적 사실주의와 존재>, 이경률, 2006, 사진마실
3)
존재론적 관점이란 현상이 우리의 의식에 드러내는 감각적 자료로부터 본질을 논리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 그 자체에 은닉된 존재론적인 본질을 탐구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현상을 본질과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관점을 말한다, - <현대 사진미학의 이해-사진적 사실주의와 존재>, 이경률, 2006, 사진마실
4)
우리가 숲 속에서 나와 숲 전체를 조망하는 거시적인 위상, 즉 이중적인 세상 구조를 탐구하는 존재론인 반-플라톤주의 관점에서 볼 때, 음지에 존재하는 무규정자는 결코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것들은 모든 세상의 배경임과 동시에 실질적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의 존재론은 음의 세계, 즉 안 보이는 세계라는 것은 비유적으로 음의 세계를 통하여 빛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어떤 대상을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형상이나 구성으로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어둠으로 치부되고 문화적으로 배제된 본래의 생성을 되살리면서, 그 형상을 침투하거나 또는 그 주위를 감싸는 질료나 배경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흔히 이러한 사변적 경향을 반-플라톤주의 관점이라고 한다. - <현대 사진미학의 이해-사진적 사실주의와 존재>, 이경률, 2006, 사진마실
5)
20세기 초 당시 새로운 학문이었던 기호학(sémiologie)이 형성될 때부터 70년대 말까지, 당시 소쉬르의 기표와 기의로 대변되었던 구조주의 관점 - <사진은 무엇을 재현 하는가 - 사진과 존재 그리고 인덱스>, 이경률, 2001, 마실 출판사
6)
인덱스(index) : 원래 인덱스는 도상과 상징, 그리고 지표로 분류되는 퍼스 기호체계에서 어떤 불특정한 무엇을 지시하는 지표(index)이다. 사진이 이와 같은 지표적인 측면, 즉 어떤 무엇을 지시하는 자국(흔적)으로 이해될 때, 사진 이미지를 인덱스라고 하고 또한 그러한 기능이나 원리를 사진적인 것 혹은 사진적 행위라고 한다. - <사진적 행위>, 필립 뒤바, 2005, 사진 마실
7)
생성-존재론 : 세상을 끝없이 변하는 운동으로 설명하는 대표적인 존재철학으로, 어떤 상자가 있다고 가정 했을 때, 상자의 내용물이 아닌 내적 의미의 연관체에 의문을 가지는 담론 - <현대 사진미학의 이해-사진적 사실주의와 존재>, 이경률, 2006, 사진마실
8)
특히 사진은 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표현매체라고 할 수 있는데, 작가의 직감을 순간적으로 이미지화 하는데 사진만큼 탁월한 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때의 사진은 인화되어 나온 사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상(像)을 우리가 뷰 파인더로 확인하는 모든 것들까지도 모두 포함합니다. - 이경률
9)
‘CSI’는 미국 내에서 독보적인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화제의 시리즈로서. CBS를 통해서 2000년부터 방영을 시작했다. ‘CSI’란 ‘범죄현장수사(Crime Scene Investigation)’의 약자이며, 라스베이거스를(Las Vegas) 배경으로 범행 현장에서 최첨단 장비를 동원한 감식활동으로 단서와 범인을 찾아내는 과학 수사관들의 활약상을 다루고 있다. ‘CSI’의 인기 비결은 클로즈업 화면 기법을 활용해, 지문 채취 스프레이, 혈액 검출기 등 첨단장비를 동원한 과학적인 증거 수집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시청자에게 마치 실제로 사건 현장에서 시신을 관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데 있다.
10)
<철학으로 읽어보는 사진예술 - 현대 영상사진과 존재>, p.62, 이경률, 2005, 사진 마실
11)
그러나 이러한 비평을 할 때에는 무척 신중을 기하여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림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이미 지로부터 관객으로의 일방적인 의미 전달에 있어 사진비평은 거의 절대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일단 사진 과 텍스트가 조합되면 사진의 기록성과 증거성 앞에서 우리들의 ‘논리적인 사고’는 텍스트에 대한 어떠한 의 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사진은 본원적으로 모호한 전달 매체이기 때문에, 사진비평은 사진에 의미를 부여 하는 코드화 작업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사진은 무엇을 재현 하는가 - 사진과 존재 그 리고 인덱스>, 이경률, 2001, 마실 출판
12)
탈코드 : 탈코드라고 번역된 이 용어는 주로 코드 없는 메시지와 함께 쓰이는 술어 용어이다. ‘코드 없음’ 또 는 ‘코드 없이’라는 것은 한 시대, 한 사회 내에서 문화적 소통 양식에 관계없이 새로운 양식으로 생성되는 어떤 실재성의 외(재)화를 의미한다. 코드 없는 메시지는 기존 소통양식의 그물에 걸리지 않고, 배제되었거나 소외되었던 실재가 현실의 전면에 등장하는 어떤 한 신호이다. - <사진적 행위>, 필립 뒤바, 2005, 사진 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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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enlightenment) : 18세기 프랑스 사상의 주류를 이루고, 프랑스혁명에 원리를 제공한 사상. 임마누 엘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1784)를 저술한 후부터 사상사(思想史)에서의 용어가 되었다. 계몽이란, 아 직 미자각상태에서 잠들고 있는 인간에게 이성의 빛을 던져주고, 편견이나 미망에서 빠져나오게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또 신학에 대응되는 의미에서 철학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경우, 철학이란 좁은 의미의 형이 상학이 아니라, 널리 인간세계나 자연 ·인생 등에 관한 지혜와 교양을 나타낸다. 또한 신학이 죽음을 주제로 하는데 반해서 철학은 삶의 실학을 가리킨다. 따라서 계몽사상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영원의 물음에다 가 ‘어떻게 행복해질 것인가’라는 현세의 과제가 덧붙여진다.
본류는 몽테스키외, 볼테르, J.J.루소를 비롯한 프랑스의 사상가, 문학가의 여러 저작 ·작품에 있으나, 그 원류 는 T.홉스, J.로크를 비롯하여 17세기의 영국에서 시작된다. 그리하여 T.레싱, J.G.헤르더를 비롯한 독일의 여러 사상가에게까지 미쳤다. 이런 뜻에서는 18세기의 모든 문학운동 ·사상활동의 저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으며, 각국에 싹트기 시작했던 시민정신의 형상화에 있어 매개자의 역할도 하였던 것이다.
영국의 홉스는 프랑스의 R.데카르트와 함께 계몽사상의 원조라 할 수 있으나 고유의 의미에서의 영국 계몽철 학은 로크와 D.흄에서 시작된다. 로크는 경험론을 인식론 안에 도입하여, 인간의 자연 상태를 자유의 실존이 라 규정하였으며, 자유로운 개인이 자유의지에 따라 공동체에 대한 복종을 선택한 이상, 선택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계약에 의한 것이며, 인간의 자유의 지주가 사유재산권의 보유에 있는 이상, 국가는 시민의 이 익을 지키기 위한 존재요, 국왕은 그 집행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프랑스의 계몽사상은 1734년에 출판된 볼테르의 <철학서간>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어 몽테스키외 가 <법의 정신>(1748)을 지어 삼권분립의 원칙을 밝히고, 절대왕정에 쐐기를 박았다. 또 D.디드로, J.R.달랑베르, 뷔퐁, E.B.콩디야크, P.H.돌바크 등에 의해서 18세기 중엽부터 <백과전서>가 발간되었으며, 종교나 관습 ·제도의 주술에 묶여 있는 인간을 감성적 ·심정적으로 해방시키고, 앞으로 꽃필 과학에 대한 꿈을 고취하며, 각자가 자신의 주체성 위에 서서 새로운 세계관 ·처세술 ·창조에의 참가를 실현하도록 촉구하였다. 볼테르는 <캉디드, Candide>, <자디그, Zadig>를 통하여, 디드로는 <라모의 조카>,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통해서, 문명의 상식에 등을 돌리고, 태어난 그대로인 자연아(自然兒)로 하여금 현실세계 속을 걷도록 함으로써, 사회와 인간 간의 깊은 상대관계를 알아내려고 하였다. 이 주제는 루소에 의해서 더욱 추구되었으며, <인간 불평등 기원론>(55), <신(新) 엘로이스>(61), <사회계약론>(62), <에밀>(62), <고백록>(81 ·88, 사후 출판) 등을 낳는 원동력이 되었다. 계몽사상은 루소에 의해서 인간성의 전가치체계(全價値體系)로 완성되었으며, 18세기뿐만 아니라 널리 근대 시민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루소 뒤에는 G.B.마블리, J.르나르, M.콩도르 세 등이 나와서 진보사상을 주창하였으며, 전제정치와 교회에 대해서 공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계몽사상의 본류는 어느덧 사상을 기술화하는 몇 가지 말류로 갈라졌으며, F.케네, A.R.J.튀르고 등에 의해서 중농주의 (重農主義)가 제창되는 한편, 시에예스 등에 의해서 제3신분의 정치론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 <두산 Encyber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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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중반 이래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이 불어닥치면서 한국의 지성계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기반 을 제공한 ‘포스트구조주의’라는 용어를 <후기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의 둘로 번역해 왔다. 전자는 구조 주의와의 연속성을 강조한 것이고, 후자는 그것과의 단절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파리 10대학의 교수이자 파리 정치연구원에서 인간 및 사회과학의 역사를 담당하고 있는 프랑수아 도스는 <구조주의의 역사>라는 자 신의 저작을 통해, 구조주의의 제1세대라고 할 수 있는 레비 스트로스, 로만 야콥슨, 롤랑 바르트, 그레마스, 자크 라캉등과, 제2세대라 할 수 있는 루이 알튀세,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등의 작업이 결코 단절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유기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이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 는 지난 반세기 동안 프랑스 지성계를 지배하였던 구조주의의 운명, 즉 기원에서 쇠퇴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통해, 우리가 흔히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라고 구분하여 부르는 이 두 사조가 모두 인간 및 사회, 정치, 문학, 그리고 역사에 관한 고전적인 개념의 근저를 천착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의 정당성 을 의문시하게 만드는 탈신비화의 과정에 참여했다는 것을 밝혔으며, 이런 공통점들에 의거하여 이들 두 사 조를 하나의 동일한 사조로 파악하였다. - <구조주의의 역사 I - 기호의 세계 1950년대>, 프랑수아 도스, 1998, 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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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소르본느 대학 철학과를 졸업했으먀, 페 르니당 알티에, 조르주 깡길렘, 장 이뽈리트 등에게 수학했다. 미셸 뷔토르, 미셸 투르니에 등과 교우했으며, 라캉, 푸코 등과도 만났다. 1969년 주 논문인 <차이와 반복>, 부 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푸코의 후임으로 벵센 실험대학(이후 파리 8대학) 철학과 교수가 되었다. 후일 소로 본느 대학, 리옹 대학에서도 철학을 가르쳤다. 실존주의를 비판하고 헤겔적 맑스주의와 구조주의에 도전했었 던, 그래서 ‘철학자 중의 철학자’라는 평을 받았던 들뢰즈는, 1995년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자살하는 것으로 생을 마쳤다. 주요 저서로는 <경험주의와 주관성>, <니체와 철학>, <칸트의 비판철학>, <마르셀 푸르스트와 기호>, <베르그송 주의>, <의미와 논리>, <프란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가 있으며, 펠릭스 가타리와 <안 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공저했다. - <시네마 I, 운동-이미지>, 질 들뢰즈, 유진상 옮김, 2002, 시각과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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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의 ‘대중’이란 작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 관람객들과 사진을 평가하는 사람들, 그리고 콜렉터들을 모두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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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규정자’는 우리의 인식 영역에서 구체적이고 분명히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숲속에 들어갔을 때, 우리의 직접 눈에 보이는 양지식물들처럼(대표적인 예로 숲속의 여러 나무들을 들 수 있다.)그 실체를 구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것들을 ‘규정자’라고 한다면, 음지식물들처럼 우리들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것들, 분명한 가치와 절대적 기준에 의해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을 ‘무규정자’라고 한다. - <현대 사진미학의 이해-사진적 사실주의와 존재>, 이경률, 2006, 사진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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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진미학의 이해-사진적 사실주의와 존재>, 이경률, 2006, 사진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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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루이 베르그송(Henri Louis Bergson, 1859-1941) :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고교시절 학력경시대 회에서 각종 상을 휩쓸었으며, 19세에 프랑스 지적 엘리트들의 집합소인 파리 고등사범학교(ENS)에 입학하 였다. 고등사범학교 졸업 후, 앙제(Angers), 끌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 앙리4세(Henri IV) 고등학 교 교수를 거쳐, 1900년에 꼴레즈 드 프랑스의 희랍, 라틴철학 담당교수, 1904년에는 현대철학 담당교수가 되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노벨 문학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지적 엘리트가 거치는 전형적인 여정을 보여준 그의 삶은 <태어나서, 일하고 죽었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릴 법하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1889), <물질과 기억>(1896), <창조적 진화>(1907),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1932)등 의 4대 주저는 본질에서 기능으로, 형상에서 지속으로, 정지에서 운동으로, 공간에서 시간으로, 형태에서 유 전으로, 도덕률에서 상황으로의 일대 변혁을 일으킴으로써, 전통 형이상학을 넘어서 새로운 형이상학적 방향 을 정립하였다. -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앙리 베르그송, 최화 옮김, 2001, 대우고전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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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정신에 대한 베르그송의 관점 : 근대 철학의 아버지인 르네 데카르트의 물심 이원론의 영향 아래 있 는 존재론은 유물론과 유심론의 양축 사이를 오고 가게 되면서 때로는 엄격한 분리와 때로는 어느 한 축에 로의 수렴이나 환원을 주장하고 있었다. 칸트의 존재론이 기본적으로 데카르트의 이원론적인 구도를 계승했 다고 볼 수 있다면, 헤겔과 마르크스에 이르면서 근대 존재론 철학은 가장 현저한 대립양상을 띄게 된다. 정 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는 물과 기름이나 평행선에서의 두 선분인양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서 이해되면서, 양 자의 만남과 교류가 어느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환원되고, 물질이나 정신 가운데 어느 한 쪽의 그 존재론적 인 우위성만이 주장된 것이다. 그런데 현대 과학철학에 이르러 이러한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물질이 나 물리적인 현상에 대한 확고부동의 절대적 지식이란 불가능할 수 있다는 반성이 자리 잡게 되면서, 물질 현상에 대한 앎이란 정신적인 현상에 대한 이해와 그 둘 간의 관계성 아래에서 접근되어야 한다는 반성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베르그송도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는 데카르트가 기초를 닦아놓은 물질 개념인 점, 선, 면의 3차원적인 공간성으로서의 연장성과, 이에 입각한 근데 뉴턴 물리학의 기계론적이고 결 정론적인 세계관으로부터 철저한 이탈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원론적인 일원론 혹은 일원론적인 이원 론의 구도 아래에서 물질을 정신적인 현상과 동일하게 지속의 한 전개양상으로서 이해했다. 베르그송의 관점 에 의하면 이제 물질은 데카르트의 이원론에서처럼 독립적인 실재로서의 존재론적인 상위 개념이 아니라, 지 속의 실재관에 입각하여 정신과 관계하는 하위 개념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베르그송의 역동적인 형이상학에 의해 존재 개념은 이제 생성 개념으로서 대체되고, 전통적으로 이분되어 오던 정신과 물질의 대립구조가 일원론적인 상위 개념에 의해 해소되기에 이른다. 베르그송의 이러한 새로운 존재론에서 물질에 대한 올바른 접근은, 정신과 함께 관계하는 모습을 살필 수 있는 능력이어야 하며, 여기서 베르그송 은 ‘직관’이라는 자신의 철학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 <베르그손의 철학>, 홍경실, 2005, 인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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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유물론 : 과학의 성과에 기초하여 세계를 인간의 의식과는 독립해 있는 객관적 실재로 인정하는 유물 론적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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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적 행위 : 촬영자의 입장에서 볼 때, 대상을 카메라로 찍어내는 행위는 단순히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복 제의 개념이 아니라, 사실상 작동자의 어떤 의도를 드러내는 일종의 시각적인 증거물을 만드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때 이러한 개념적인 촬영행위를 사진적 행위라고 한다. - <사진적 행위>, 필립 뒤바, 2005, 사진 마실
인터뷰 기획 및 진행 : 배남우
본 인터뷰의 저작권은 배남우씨와 fotato.com에 있습니다. 따라서 인터뷰의 무단 배포와 전제를 금하며, 관련 사항은 필자인 배남우씨와 fotato.com으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배남우씨는 현재 상명대학교 예술, 디자인 대학원 순수사진학과 휴학 중이며, 제 7회 사진비평상 평론부문 우수상을 수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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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사내방 ]
[2004.07.02] 이경률(사진평론가)
2004.07.02
[ 출판 ]
이경률 지음 -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
2002.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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