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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남우의 이론 / 평론가와의 대화 8편 - 김승곤
배
남우의 이론
/
평론가와의 대화
9
편
–
김승곤
- Interview 9, 김 승 곤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했고, 일본대학 예술학부에서 사진학과를(예술학사)를 졸업 및 같은 대학에서 예술연구과정을 수료했으며, 츠쿠바(筑波)대학 대학원 예술연구과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국내외에서 다수의 사진전과 사진 이벤트를 기획, 주관 및 주최하는 등 지금까지 주로 사진에 대한 행정적인 활동을 해왔다. 주요 수상경력으로는 <제2회 서울문화예술평론상>(1986) 사진부문 수상, <제8회 대한사진문화상>(2001) 학술평론부문 수상, <일본사진협회(JPA) 국제상>(2004) 수상, <제5회 이명동 사진상>(2004)을 수상한 바 있다.
주요 논문 및 저술활동으로는 <사진에 있어서의 몇 가지 논점>(1986, 예술과 비평), <사진기호학 시론>(1986, 예술과 비평), <대중문화와 사진의 지체현상>(1987, 예술과 비평), <현대사진의 상황>(1987-1989, 월간 미술세계), <사진예술의 한계와 극복>(1987, 예술과 비평), <거울의 숲>(1992, 예장), <한국현대사진의 장면>(1998, 코리아나), <잔인한 사진의 정치학>(2000, 자유,진리) 외 200여 편이 있다.
현재 도서출판 포토스페이스 대표, 강원다큐멘터리사진사업운영위원회 운영위원, 순천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석좌교수, <동강사진마을>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序
비평의 상황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까닭은, 비평이 스스로 풍부한 관객과 독자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 위기의 가장 큰 원인
배남우 :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아보셨을 줄 압니다만 ‘석좌교수로 임용된 김승곤 선생님’과 관련된 질문이 바로 그것인데요(웃음), ‘석좌교수’라는 자리가 이론과 비평의 후학 양성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만들 수 있는 자리인지, 아니면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로서의 자리에 불과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김승곤 :
석좌교수라는 제도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학문적으로 탁월한 업적과 공적을 이룬 사람, 두 번째는 학문적인 부분 이외에 여러 가지 실질적인 분야에서 뛰어난 활동을 한 사람에 대해, 이런 사람들이 자신이 활동해 왔었던 분야에서 계속해서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자는 것이 석좌교수 제도입니다. 그래서 실무적으로 교육행정이나 전시기획, 혹은 출판과 관계된 활동을 해왔던 사람은 석좌교수가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관련된 일을 이어나갈 수 있고, 학술적인 영역에서 연구 활동을 해왔던 사람은 계속해서 자신의 연구를 지속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것이 석좌교수 제도의 취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석좌교수라는 자리는, 교육현장에서의 실질적인 역할보다는 상징적인 위치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학교의 교육행정과 같은 실무적인 업무에 직접 참여한다거나, 정책적으로 교육제도에 관해서 제안하거나 개선해 나간다거나 하는 일들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배남우 :
이론가나 비평가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떤 주제로 대화가 시작되었던 간에, 결국은 넋두리 식의(글과 글이 비판의 고리로만 연결된다거나, 사적인 감정이 섞여 흐르는) 이야기로 귀결될 때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 마음으로는 공감이 가더라도, 한편으로는 하소연으로 비추어질 수 있는 한계성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무어라 명쾌한 해법을 제시할 수 없는 문제임은 분명한데, 선생님께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승곤 :
비평이라는 행위는 작가들이 작품 활동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작가나 작품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가지고 작업을 시작하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무엇을 꺼내어 어떤 형태로 비평적인 작업을 진행하던지 간에 기본적으로는 혼자 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에,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비평도 외로운 작업일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그런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문제, 다시 말해 비평가도 한 사람으로서의 사회와 가족 구성원이기 때문에, 먹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먹고 살 수도 없는데 무슨 수로 지적 생산 활동이 이루어지겠습니까? 만약 지금이 조선시대라면 아내가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더라도, 남편은 고고하게 선비행세를 하면서 유유자적하며 살수도 있었겠지만, 요즘 같아서는 가족에게 그런 삶을 강요해서는 안 되겠지요. 비평가들의 수적인 열세는 아마도 그런 경제적인 것이 큰 원인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대학 사진과의 신입생 모집을 위한 입시 심사위원으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심사에는 작품 심사와 논술 심사로 나뉘어 있었는데, 저는 논술 심사위원으로 참석했었습니다. 그런데 논술이라는 것이 비록 A4용지 두 장 정도의 짧은 분량이라고는 하지만, 오전 10시부터 심사를 시작했는데도 300명 정도의 수험생들이 쓴 글을 모두 읽는데 저녁 6시까지 하루가 꼬박 걸렸습니다. 그런데 아침 10시에 심사를 똑같이 시작한, 작품부문의 심사위원들은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심사를 다 마치고 돌아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농담으로 저 사람들도 심사료는 똑같이 받느냐고 물었더니, 똑같이 받는다고 그러더군요.(웃음) 순간 이것이 비평의 현실적인 한 단면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을 쓰거나 글을 읽는 것과 같은 언어적인 능력에 대한 대우가 너무 안 좋다는 생각 말이죠. 그런 인식들이 사회 전반의 곳곳에 걸쳐 깔려 있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지 않으려 해도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우러나올 때가 많을 거라고 봅니다.
배남우 :
일반적으로 일반 독자대중들의 비평에 관한 취향에 대해서, 비평가들의 태도는 냉소적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글을 쓴다고 하는 행위에는 누군가에게 읽혀질 것을 바라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비평가가 독자대중들의 취향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독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저서는 대중들에게 두루 읽혀야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결과를 야기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김승곤 :
똑같은 비평이라고 해도 “비평의 대상이 무엇인가?”, “어느 정도의 깊이로 비평을 하는가?”에 따라 다른 성격의 비평이 생산될 수 있습니다. 또는 어떤 대상을 비평 속에 융화시키는 과정에 사용되는 지식의 전문성,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구사되는 용어에 따라서도 비평의 심도가 달라질 수 있지만, 결국 그러한 비평이 어떤 사람에게 읽혀지느냐를 생각한다면 독자층을 한정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미술비평이나 문예비평,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비평들이 지닌 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을 썼으니까 독자들이 읽어야 된다.”, “독자들에게 읽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음악이나 영화처럼 청중이나 관객들의 층이 두터운 매체에서는 가능한 일일 수 있겠지만, 전문적인 사진이론이나 비평은 전체 사진인구의 1000분의 1도 되지 않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쓰는 글입니다. 따라서 그 외의 경우에는 비평이 아닌 감상문이라든지 사진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해설문처럼, 사진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수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비평가들이 그런 글들을 쓰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취미생활로서의 사진을 하는 아마추어들을 대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을 비평가들은 선뜻 마음내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령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론가나 비평가가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 지역을 벗어나 전 세계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해야 하고, 글의 내용도 사진이라고 하는 한정된 매체가 아닌 미술, 문화, 사회, 심리학, 정치, 테크놀로지와 같은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비평가들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게 사실상 무리라고 할 수 있겠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서를 쓰려는 비평가들도 그렇고, 이미 저서를 낸 비평가들도 그렇고 그것이 잘 팔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현상 역시 사진비평을 위축시키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비평의 상황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까닭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이론이나 비평의 확산에 대해 이론가나 비평가들 스스로 무관심한 원인도 있을 것이고, 비평이 학제적으로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도 원인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무엇보다도 비평이 스스로 풍부한 관객과 독자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것을 반대로 이야기하면 비평가들이 지금까지 적절하지 못한 비평을 해왔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소재들이 다양하듯이 독자들 개개인의 취향들도 다양하기 때문에, 누구를 주된 독자층으로 삼을 것인가도 글을 쓰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읽혀질 것이고 보여 질 것인가에 따라서도 다양한 비평이 생산될 수 있다는 것이죠. 빈약한 비평과 빈약한 독자, 이러한 여러 상황과 원인들이 서로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비평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또 호응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의 문제에 있어서는 관행적으로 불공정하게 이루어져 온 교수임용의 문제가 매우 심각.
이론을 공부하고자 하는 지적인 열망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 부족한 것도, 이론이 활성화 되지 않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
배남우 :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짧게 요약해보면, 비평의 위기는 언어적인 활동을 통한 생산과 그에 대한 소비에 인색한 국내의 열악한 환경과, 내부적으로 앞서 지적해 주신 것처럼 비평이 스스로 풍부한 관객과 독자를 확보하지 못한 요인들이 서로 복합적으로 작용함으로써 비롯된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론의 문제는 어떻게 봐야할지 궁금합니다. 미학뿐만 아니라 철학과 인문학이 비평의 근간이 된다고 했을 때, 이론의 문제는 아카데미와 관련된 부분이 클 것 같습니다만.
김승곤 :
흔히 이론의 문제를 이론의 부재에 대한 책임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보기에는 이론의 부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왜 이론이 이토록 척박한 환경에 놓일 수밖에 없는가?’라는 구조적인 문제에 관해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대학’이라고 하는 시스템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여기에는 시대에 맞지 않는 구태의연한 교육 커리큘럼의 내용과 교수의 자질 문제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는 특히 교수 임용의 문제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고 보는데, 겉으로는 교수 임용이 공개채용 형식으로 공정하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오래전부터 관행적으로 불공정하게 이루어져 온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총체적으로 지적하며 ‘대학의 위기’라는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임용 한다는 것은 여러 경쟁자들을 놓고 그 가운데에서 가장 적절한 인물을 선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한 얘기가 되겠지만, 선정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누가 어떤 잣대를 가지고 결정을 하는가?’라는 기준이 무척 중요할 것입니다. 실제로 심사를 하는 과정에는 교수를 비롯한 각 학교의 이사와 같은 사람들이 참여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합니다만,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분명한 것은 자신보다 똑똑하거나 그 분야에 있어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나, 남과 확연히 구분되는 독창성 혹은 개성이 강한 사람은 절대로 뽑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런 사람들보다는 조직 친화적인, 말하자면 순종형의 사람들을 뽑으려 하는데(물론 순종형의 사람들 중에도 능력이 있고 교육에 대한 확실한 자기 철학을 가진 사람들도 분명 있겠죠.), 이런 식의 도제제도 혹은 아카데미즘이 과거에는 교육의 기초적인 구조를 튼튼히 만드는 역할을 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오늘날과 같은 현대사회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이것은 결국 대학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교육수준을 향상시키는 일에 공헌할만한 능력 있는 사람들은 대학에 들어갈 수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겉으로는 대학교육이 지향하는 목표가 ‘인격의 완성’이나 ‘능력 있는 인재의 양성’일지 모르지만, 사실 운영 면에서는 일반 기업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곳이 바로 대학입니다. 또 대부분의 대학들은 사립학교이기 때문에 운영 방침도 기업의 운영 방침과 똑같습니다. 예를 들어, 요즘 지방대학의 경우에는 전체적인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학과의 정원미달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졸업과 입학 시즌이 되면 지방대학의 교수들은 정원을 충당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고등학교나 사설학원 등을 대상으로 세일즈 활동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신입생 수가 얼마나 늘어났는가에 따라서, 교수의 능력과 공헌도가 평가됩니다. 다시 말해 강의를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준비하고 강의했는가 보다는, 얼마나 많은 학생들을 유치했는가의 여부가 교수의 자질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더욱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죠. 학생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에 관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학문에 대한 연구활동에 교수들의 능력을 사용해야 하는데, 마치 외판원처럼 전국을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모집하는데 골몰해야 하기 때문에 연구나 강의는 멀어질 수밖에 없고, 또 막상 학생들이 학교에 들어오면, 그것으로 자신에게 할당된 업무는 끝났다고 생각하는 식의 본말이 전도(顚倒)된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총 학생 수의 3분의 1이 줄어들 경우, 학교의 운영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통계 결과가 있기는 합니다. 특히 지방대학 사진학과의 경우에는 최근 학생들의 수가 3분의 1 정도 감소가 아닌, 아예 정원의 3분의 1에도 훨씬 못 미치는 사태가 빚어질 정도로 심각한데, 이것은 대학 운영이나 교수들의 잘못을 탓하기보다는, 10년 혹은 15년 후도 내다보지 못하고, 사진과 관련된 학과를 설치한 학교 재단과, 이들 대학의 요구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학과를 신설하도록 허가한 정부의 미시적이고 단기적인 교육정책에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런 현상이 장기화 되었을 때, 미래의 우리의 대학교육이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겠죠. 또 하나 심각한 문제는 시간강사들에 대한 처우 문제입니다. 받는 보수에 비해서 실제로 하는 일은 교수들보다도 월등히 더 많다는 사실은 다 아는 얘긴데요. 바로 이것이 현실의 부조리한 모습입니다. 학문적인 역량이나 교육에 대한 열정에 있어서, 또 일의 양에 있어서도 강사들이 붙박이 전임들보다 못지않은 면이 많은데도 대우는 그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죠. 현재 사진학과가 개설되어 있는 각 대학에는 전임 교수들이 적게는 2-3명, 많게는 5-6명 정도가 있는데, 전임교수들이 받는 월급과 시간강사들이 받는 월급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납니다. 더구나 전임교수들의 경우에는 방학에도 월급을 받고, 휴식년에 해외 연수까지 보장되어 있으니 실제로는 차이가 더 벌어진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므로 시간이 흐르면 더 이상 견디기 못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과, 어쨌든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기에 힘들어도 참고 견뎌내는 사람들로 나뉘게 됩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질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일단 임용되고 난 이후에는, 학술적인 활동은 등한시 한 채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에 심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원의 경우, 석사학위를 주고 안 주고의 문제에 관해서 전임교수들이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학생이 아무리 실기를 전공해서 졸업전시로 학위를 받고 싶다 하더라도 교수의 눈에서 벗어나거나 입맛에 안 맞는 작업을 하면 학위를 받지 못하는 예가 많다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어쨌든 졸업은 해야 하고 학위도 받아야 하니, (물론 자의적으로 논문을 선택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만) 어쩔 수 없이 방향을 바꿔서 논문을 선택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아니면 아예 학교를 그만둔다거나, 혹은 유학을 떠나는 식으로 다른 해법을 모색하는 경우도 많이 봅니다. 학생들 각자의 재능과 능력을 키워주는 교육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이나 방법을 자신에게 맞추도록 강요하는 판박이 식 관행이 저질러지고 있는 겁니다. 어느 면에서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죠. 이것은 특정한 어느 학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고질적인 병폐는 이름이 잘 알려진 대학일수록 심한 것 같습니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문제점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그 내부에는 아마 더 많은 모순과 부조리가 존재하고 있을 겁니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올바른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고, 훌륭한 작가나 훌륭한 이론가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무언가 획기적으로 변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 지지 않는 한 이런 현실이 쉽게 개선되지 않을 겁니다. 저도 교수의 한 사람이긴 합니다만 인터뷰가 교육계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들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내고 모두 한 번 심각하게 고민하도록 만드는 작은 계기라도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배남우 :
하지만 ‘대학’이라고 하는 표면적인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점만을 지적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시스템 내부에서 움직이는 구성원들이 범하는 오류로 인해서도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예로써 임용의 문제에 대해 말씀해 주셨지만, 그 외에 생각해 봐야할 문제는 없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김승곤 :
물론 모든 잘못이 제도나 학교나 교수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소수의 학생들을 제외한다면, 체계적으로 이론을 공부하고자 하는 지적인 관심과 열망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 부족한 것도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예능 능력을 제외한 사진학과 학생들의 수학능력은 전체적으로 낮은 레벨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이런 환경에서 이론가나 비평가가 나오는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원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국내 대학원의 경우 잘 아시다시피 크게 이론 전공과 실기 전공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론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는 학생들이 스스로 이론적인 완성도를 높이고자 하는 의지가 있거나, 이론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면 지금처럼 이론이나 비평이 척박할리는 없다고 봅니다. 20여 년간 학생들의 논문을 읽어오면서, 눈이 번쩍 띄는 논문은 서너 편밖에 읽지 못했습니다. 나머지는 짜깁기죠. 그러므로 막연히 사진학과 내에서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사진학과가 아닌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 계열에서 사진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함으로써, 사진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를 폭넓게 조망할 수 있는 이론가가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바람직한 방법일수도 있다고 봅니다. 사진 안에서만 아무리 이론과 비평의 위기를 얘기를 한다 하더라도, 아무리 사진이론을 공부한 이론가 한 사람이 학교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하더라도, 이론가나 비평가가 그 학교에서 나올 수 있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미국이나 유럽, 그리고 가까운 일본만 보더라도 사진이론을 하는 사람들 중에 사진을 전공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사진 안에서만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은 애초에 문제 해결을 위한 방향 설정을 잘못한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배남우 :
선생님께서는 <동강사진마을>의 운영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에, <동강사진축제>의 여러 프로그램들을 통해 다양한 학생들을 만나오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전체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입장으로써, 지금까지 동강사진축제를 통해 학생들을 만나오시면서 어떤 점들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승곤 :
지난해(2005년) 동강사진축제 행사의 일환으로 <국제 대학생 사진캠프>를 진행했던 경험을 일례로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당시 사진캠프에는 미국, 독일, 스위스, 일본, 중국, 대만 등 세계 11개 대학에서 약 120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했었는데, 저는 한국의 학생들도 동수 정도가 참여해서 캠프 기간 중 젊은 청년들 사이의 만남과 교류를 나눌 수 있는, 한 마디로 왁자지껄한 축제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기대였을 뿐, 실제로 <국제 대학생 사진캠프>는 외국 학생들을 위한 잔치로 끝나버리고 만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국내에서는 단 3명의 학생이 캠프에 참여했습니다만, 그마저도 도중에 그만두었습니다. 운영하는 쪽에서도 무언가 문제점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때 그 일이 저에게는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여기서 해 봐야 더 이상 한국 학생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좌절감을 느꼈던 경험이었습니다. 당시 캠프에 참여했었던 외국의 학생들은 각자 고국에 돌아가서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고, 함께 그들끼리 그룹전시도 만들고 제게 이메일로 소식을 알려오기도 하는데, 그런 소식을 받을 때마다 우리가 자리를 만들어 주고 정작 남 좋은 일만 시킨 것 같아 속상한 마음이 들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기획이 잘못되어 그런 것인지, 국내 학생들의 성격이 내성적이라 참여율이 저조했던 것인지, 아니면 언어소통의 문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와서 2년이나 혹은 4년 동안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 학교를 다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제도적인 교육만을 통해서는 체험할 수 없는 다양한 문화와 정보를 외국 학생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접할 수 있고, 그러다보면 외국으로 자신의 역량을 넓혀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도 있는데도 스스로 그런 기회를 외면해 버리는 학생들의 태도가 정말 안타깝습니다.
배남우 :
선생님께서는 동강사진축제의 운영 위원장이신데요. 매년 동강사진축제의 워크숍 커리큘럼을 보면, 유명 작가가 진행하는 워크숍에 비해 비평가가 진행하는 워크숍의 수는 월등히 적은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김승곤 :
어떤 조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집단적인 운영체계가 갖는 비효율성이나 한계 같은 것이 있습니다. 현재의 운영위원 구성으로는 위원의 자질이나 전문성에 적지 않은 제약은 느끼고 있습니다만, 동강사진축제는 처음부터 각 단위행사별로 책임위원을 정하고 그 책임으로 일을 치러나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워크숍도 정해진 책임위원이 있고,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나 강사를 정하는 문제도 해당 책임위원이 자신의 재량으로 맡아서 해오고 있기 때문에 운영위원장이라고 해서 제가 일일이 관여할 사안이 아닙니다. 다만 몇 가지 제안들, 가령 국제적인 교류를 넓힐 수 있는 국제 대학생 사진캠프나 포트폴리오 리뷰 같은 프로그램의 활성화, 지역과 주민들에 대한 공헌, 대학 강의실의 연장이 아닌 젊은이들의 활기찬 축제 한마당이 되도록 프로그램을 운영해주도록 주문은 하고 있습니다. 동강사진축제는 시작된 지 5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해나왔고,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에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운영위원 모두가 위원회 자체의 체질도 개선하고 또 앞으로 전체 사진계의 다양한 의견들을 수용하면서 축제 내용을 발전적으로 고쳐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런 축제에서 치르는 워크숍은 현장과 실습 중심의 교육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3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비평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음미를 해보아야 하겠지요. 포트폴리오 리뷰를 활성화한다면 비평가나 이론가들이 해야 할 역할도 그만큼 많아지지 않을까요?
이론전문 계간지의 운영에 있어서는, 독자확보의 문제가 가장 큰 어려움.
대중 잡지에는 이론이나 비평관련 텍스트를 싣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음.
배남우 :
계간 <사진비평>에 대한 이야기를 안 나눠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필진으로 앞에 나서서 활동하기 보다는 젊은 이론가들과 비평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장(場)을 만들어 주고, 뒤에서 도와 주는 일에 집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필진으로 활동했었던 비평가들의 말을 빌리면, 계간지라고는 하지만 매번 새로운 기사를 꾸리는 것이 힘들었을 정도로 필진 부족의 문제가 심각했었다고 하는데, 당시 계간지를 운영하시면서 가장 어렵고 힘들게 느끼셨던 점이 있었다면 어떤 점이었는지요?
김승곤 :
“이론과 비평의 부재” 혹은 “이론은 있지만 이론을 직업화 할 수 있는 매체가 없다.”는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잡지라는 것은 아무리 뜻이 좋아도 만드는데 돈이 들기 때문에 상업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잘 팔리지 않는 이론이나 비평은 대중에게 읽혀지지 않아요. 이는 시중의 서점에서 판매되는 이론서들을 보면 너무나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물론 똑같은 이론서라 하더라도 흥밋거리 위주의 이론서들이라면 조금 팔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여러 경제적인 어려움을 감내해내면서도 <사진비평>이라는 계간지를 만들면서 가장 힘들게 느꼈던 점은, 어디를 가더라도 책을 읽는 독자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었습니다. 저 스스로는 제가 잡지를 잘 만들지 못하고, 잡지에 실린 글들이 독자들의 취향에 맞지 않았기에 책이 팔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만, 현실적으로 국내에서는 이론이나 비평에 관심을 갖고 가까이 하려는 독자 대중이 많지 않다는 것을 <사진비평>을 만들면서 절실히 느끼게 됐습니다. 특히 국내 같은 경우에는 사회 어디를 가더라도 ‘감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대중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많은 TV나 인터넷 같은 매체들이 감성과 촉각을 자극하는 단선적인 것 위주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대중들은 글을 읽는 것과 같은 선적인 체험(linear activity)을 통해서 ‘이성’을 일으켜 세우려는 행위는 거의 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더욱 가속화 될 것이므로, 이론 전문 계간지가 다시 나온다는 것은 당분간 어려운 일이 되겠지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사진이론지인 계간 <사진장치>나 월간 <카메라 마이니치>라고 하는 잡지들은 7, 80년대에 폐간되었지만, 단편적인 정보와 기사 위주에 이미지를 많이 넣은 다른 카메라 잡지들은 여전히 발행되고 있습니다. 미국 같은 경우에도 사진 쪽에서의 수준 높았던 잡지는 과거에
라는 계간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폐간 되었고, 그나마 Art Forum이 여전히 발행되고 있지만 잡지의 내용은 이미지 위주로의 편성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유명한 이론 잡지 혹은 계간지는 세계적으로도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소수에 불과하고, 그 운영 또한 무척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일단 잡지를 소화할 수 있는 독자가 있어야 하는데, 독자가 없으니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독자확보의 문제 외에도 글을 쓰는 사람들의 문제 즉, 필진 확보라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저는 사진 쪽의 필진만이 아니라 미술이나 영화, 문학과 같은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가와 이론가들과도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했는데, 월간지가 아닌 계간지임에도 글 쓰는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역시 재정적인 어려움이었습니다. 재정적인 문제는 앞서 말한 독자확보의 문제와도 연결된다고 할 수 있는데, 책을 읽으려는 독자가 없다는 것은 곧 책이 팔리는 일도 그만큼 줄어든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적인 어려움이 책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주었고,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계간 <사진비평>을 접고 말았습니다. 술집에서 서로 옹기종기 모여 얼굴이 벌겋게 된 상태에서 목청 높여 싸울 일이 아니라, 서툰 말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의견을 정직하게 표현하고, 그런 글들이 모여지고 읽혀지면서 무언가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요. 그 때의 힘들었던 경험으로 인해 한 때는 만약 다시 잡지를 만든다면 <사진비평>과 같은 이론지가 아닌, 성인용 콘텐츠를 담은 잡지를 만들어서 한번 원 없이 팔아 보고픈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내용의 선정성으로 인해 심의에 걸려 유치장을 몇 번 들어갔다 나온다 하더라도 잡지를 많이 팔아볼 수만 있다면, 그 정도는 견딜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진비평>을 운영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았었고, 말 못할 마음고생도 많이 했었기 때문입니다.
배남우 :
사진을 다루는 대표적인 잡지로 <월간사진>, <사진예술>, <포토넷>을 들 수 있는데, 한 매체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잡지의 종류가 3종류 있다는 것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라고 봅니다. 미술의 경우에는 <월간미술>과
가 가장 대중적이고 대표적이니, 수적인 면에 있어서는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비평가의 글이 차지하는 지면의 비율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떨어지는데, 사진을 매체로 다루는 잡지에서 이론과 비평을 소홀이 다루는 까닭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김승곤 :
일반적인 사진잡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진비평>의 경우에는 이론 전문지였기 때문에 이론 전문지로서의 역할이 있었지만, 현재 시중에 시판되는 사진잡지들은 주로 전시 정보나 카메라, 기법 등을 다루는 대중적인 잡지들입니다. 대중잡지는 학생들과 아마추어 사진애호가들이 읽는 잡지인데, 개인적으로 저는 그러한 대중잡지에 이론을 드러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독자들도 그런 글을 읽는 일에는 익숙해 있지 않습니다. 또 우리나라의 이론이나 비평은 서양의 어떠한 흐름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그러한 경향이 학생들이나 아마추어 대중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몇 년 전부터 일상을 문제로 다룬 사진들, 대상을 중립적인 시각으로 다룬 사진들, 퍼포먼스적인 사진들의 의미가 비평적으로 지나치게 강조되어온 나머지, 유행의 변화에 민감한 학생들이나 작가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이 이를 그대로 수용하여 단순한 아류에 불과한 사진들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만든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대중 잡지에서 특정 경향이 이론적으로 강조되어 소개되다보면, 그와 같은 왜곡된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대중 잡지에 이론이나 비평 관련 텍스트를 싣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보다는 어느 정도 시기가 무르익었을 때, 비록 독자의 수는 적더라도 이론 전문지가 다시 생겨나 그러한 텍스트들을 심도 있게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한 개인의 능력으로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재정적인 지원을 제공하더라도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 않는 정부나 기업의 후원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름 있는 기업이나 문예진흥원(새 정부 들어서 이름이 바뀌었다지요?) 같은 데에서 그런 형태의 후원을 할 가능성은 희박하겠죠. 저 같은 경우에는 <사진비평>을 계속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문예진흥원에 재정지원을 신청하는 기획안을 제출한 적이 있습니다만, 한 방에 딱지를 맞아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개인 전시나 그룹전에 돈을 대거나 개인전의 사진집을 내는데 상당액의 지원이 돌아가지만, 이론 전문지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처럼 냉담한 것이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입니다. 다른 사회적인 현상과 똑같이 인맥 같은 것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심사하는 사람들을 선정하는 기준이나 과정 자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지 않습니까? 최근에는 이른바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사전에 미리 얘기를 끝내놓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도 들리고, 실질적인 심사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배남우 :
몇 달 전 어떤 미술잡지에서는 잡지 저널리즘에서의 비평의 소멸에 대한 기사가 특집으로 다루어 졌던 적이 있습니다. 기사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대중 잡지는 대중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코드를 계속해서 찾아줄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심도 있는 비평적인 쟁점을 꾸준히 제시하면서 양자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상업성을 배제하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매체가 대중 잡지라 하더라도, 소량의 분량을 통해 비평가에게 발언권을 주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서는(제가 제3자라 그런지는 몰라도)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김승곤 :
물론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적하신 부분은 어디까지나 이상론일 뿐이고, 대중지를 통해 비평가가 자신의 비평적 쟁점을 지속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또한 미술잡지에서 잡지 저널리즘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논의가 있었던 간에, 결국 잡지라는 것은 상업논리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표면으로는 잡지의 사명이라든지, 잡지의 목표와 이상에 대해 여러 가지 좋은 말들을 할 수 있겠지만, 굵직한 스폰서라도 뒤에서 돈을 대지 않거나 잡지가 팔리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평가의 역할은 저서로 완결되는 것인가.
비평가의 글이라고 해서 성경처럼 받아들여서는 안 됨.
배남우 :
<한국 사진이론의 지형>을 보면 ‘사진비평가’로서 20여년 가까이 활동해 오신 선생님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논문집이라는 점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활동해온 시간에 비해, 정작 비평가가 자신만의 저서가 없다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비판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비록 선생님 스스로는 비평가로서의 활동보다는 행정가로서의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해오셨다 하더라도 말이죠.
김승곤 :
그렇다고 글을 쓰는 일을 게을리 했던 건 아닙니다만, 지적하신 것처럼 저는 지금까지 저술활동 보다는 우리가 놓인 현실 가운데에서 사진의 영역을 넓혀 나갈 수 있는 활동에 집중해 왔습니다. 거기에 대해선 얘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제가 유학을 마치고 온 80년대 초는 사진술이 발명되고 150년이 되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이행되는 시기였습니다만, 한국의 사진에 이렇다 할 변화도 움직임도 없이 1950, 60년대에 머물러 있는 듯한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워크숍을 만들고 당시 유일한 예술평론지로 발행되던 <예술과 비평>지에 글을 쓰는 한 편, 그룹전과 학술행사 같은 한국사진에 활기를 불어넣을 ‘사진운동’들을 시작했습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행동하는 지성’이 되겠다고 생각한 거죠. 1996년에는 공립의 사진미술관을 건립하자는데 뜻을 같이 하는 몇 사람이 모여서 정기적인 스터디 모임을 갖고, 1997년에는 심포지움을 열고 보고서를 내면서 정식으로 공립의 사진미술관 건립 추진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이름을 말하지는 않겠지만, 당시 이른바 한국 사진 계를 대표한다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참여해서 여러 차례 구체적인 방안들을 논의해 나갔지요. 그런데 이듬해인 1998년에 느닷없이 ‘한국영상의 해’라는 것이 생기고 나더니 그쪽 발기인 명단에 이 사람들 이름이 줄줄이 나와 있는 겁니다. 우리가 염원하는 미술관만 생긴다면 어디에 이름을 걸건 상관 없겠다고 체념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정 관계에 끈이 닿는 어느 신문사 사진기자 출신 한 사람이 꾸민 터무니 없는 일에 이 사람들이 모두 말려들어간 거였습니다. 그들의 사진미술관 건립이라는 것은 결국 십 수억이라는 국민 세금만 날린 한 바탕 사기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만, 이때부터 이른바 사진 계의 선배로 불리는 사람들의 판단력이나 그들이 한국 사진을 위해서 과연 무엇을 해왔고, 무엇을 함께 해나갈 수 있는가에 관해서 비판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지요. 후세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지요. 그 뒤로는 주로 젊은 사람들에게 기대를 거는 쪽으로 일을 만들어나갔습니다만….
자신의 역할을 어디에 집중시킬 것인지는 개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할 문제겠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책상에만 앉아 있다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싫은 소리만 하는 비평가는 되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저술과 같은 정적인 활동에 소홀했었던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봅니다. 물론 심도 있는 분석과 연구를 통해, 비평가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역할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할 일이 있다면 그런 활동들을 통해서 비평가로서의 영역을 넓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저술활동에 소홀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자신만의 언어를 갖지 못한 비평가로서의 한계성을 느낄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자의식이 너무 강해서 그런 혼자 씨름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동안 가끔씩 글을 써오면서도 “내가 스스로 내 것이라고 믿는 생각이나 지식들이 과연 내 것이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은 발터 벤야민이나 롤랑 바르트, 혹은 수잔 손탁의 이론이나 문체지, 그것이 나의 문화나 역사 속에서 배양되어 나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다른 비평가들의 글을 읽다보면 지나치게 현학적이거나 계몽적인 내용의 글이 있는데, 그런 글들이 자신의 언어가 아닌 경우가 무척 많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무의식의 밑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도, 지금까지 저서를 준비하는데 소홀했었던 원인이 되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신만의 언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고, 자신만의 언어를 찾기 까지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따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많이 늦기는 했지만 작년(2005년) 말부터 개인적인 글쓰기 작업을 진행해 오고 있고, 작업이 완성되면 책으로 출간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진에 관한 이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거나, 비평적인 쟁점을 드러낸 책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지금까지 여러 활동을 해오면서 느꼈던 경험들을 통해, 사진에 드러나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다양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내용입니다. 가령 전쟁을 찍은 다큐멘터리사진을 통해서 잔혹성이나 선동성(propaganda) 같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문제를 짚어나가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나 그 이유가 어찌되었든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으로 책 한권 내지 못한 것은, 저 스스로가 나태했었던 점도 분명 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못을 지적 받아도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앞서 대학의 교육 문제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학교에 어떤 식으로든 임용이 되기는 했지만 교수가 된지 4, 5년이 지나도록, 혹은 퇴직할 때까지 제대로 된 논문 한 편 쓰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사람들에 대해, 저도 그런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지만 결국은 같은 실수를 범했다고 할 수 있겠죠.
배남우 :
예전에 어떤 인터뷰에서 선생님께서 ‘평론은 무기’라 언급하시며, 비평가가 작가와의 이해관계나 전략관계에 얽매이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던 걸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비평가는 작가뿐만 아니라, 큐레이터 - 미술관 - 갤러리 사이에서도 서로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입니다. 이는 결국 비평가가 비판적 견해 표명과 토론, 자신의 의견과 주장 표명에 소극적이며, 드물게 제기되는 주의 주장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주요 원인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승곤 :
가령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겠죠. 어느 비평가가 문예진흥원(?)과 같은 곳에서 물리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가 있는 경우, 문예정책을 수립한다거나 지원금을 주어야 할 대상을 심사할 때, 작가와 비평가 사이에 개인적인 커넥션이 있다면 공정한 심사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평의 권력화는 비평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비평가 스스로 끊임없이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할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비평가는 기본적으로 작가와 손을 잡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비평가가 작가론을 쓸 경우에는 작가와의 인간관계가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작가론은 작가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여 글을 쓰는 행위이므로, 작가와의 친분관계가 글을 쓰는데 있어서 오히려 객관성을 떨어트릴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작가를 대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 작가의 철학이라든지 작업에 있어서의 성향 같은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작가를 대상으로 한다는 의미지, 작가와의 친분관계를 과시하고 드러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지요. 또한 제 개인적으로는 작가론이란 비평의 범주에서 조금 떨어진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평이라는 것은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는 추상적인 단면들을 언어로써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비평가가 글을 쓸 때에는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비평가와 작품 사이에는 물리적인 거리가 아닌 심리적인 거리를 분명히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작품을 어디까지나 대상으로 봐야하지, 자신의 주관성과 혼동해 작품을 보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평가가 작품과 정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않은 채, 작품을 눈앞에 가까이 두고 쓴 글들은 우리가 경계해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훌륭한 작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물론 비평가의 눈치를 살피며 비평가의 코드를 자신의 작품에 뒤집어씌우면서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비평가가 어떤 얘기를 하던 묵묵히 자신의 세계를 구현시켜 나가는 사람을 훌륭한 작가라 얘기합니다. 비평가도 작가와 똑같습니다. 작가가 작품을 만들어 나가듯이, 비평가가 자신의 비평적 관점을 언어화 시키는 것도 하나의 창조적인 과정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비평 또한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작가와 비평가, 작품과 비평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작가와 비평가가 인간적으로 손을 잡거나 감정적으로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어차피 좁은 사회이기 때문에 서로 부딪히고 함께 술을 마실 때도 있겠지만, 작품에 한해서는 분명히 선을 그어야지 그렇지 않은 채 감정에 치우치면 인상비평이나 감상문, 주례사 비평이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남우 :
작가의 의도와 비평가의 해석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과 같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작가의 원인적인 상항은 고려되지 않은 채, 오히려 비평가의 글이 대중에게 작품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경우를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죠.
김승곤 :
비평가의 글이라고 해서 우리가 성경처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비평가가 작가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어서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아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대중들 스스로 자신의 주체적인 관점을 가지고 작품을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이와 관련해서는 현대미술 비판론가 에프라임 키숀(Ephraim Kishon)1)이 소개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2) 키숀에 따르면 예전에 독일에서는 침팬지가 캔버스에 물감을 뿌려 대며 그린 그림을, 비평가들이 품평하는 모습이 몰래 카메라 방식으로 방영되어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3세계에서 온 젊은 미개인 전>에 출품한 침팬지가 그린 그림에 대해, 침팬지가 그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비평가들은 나름대로 이유를 들어가며 작품성을 칭찬했었기 때문입니다. ‘위와 아래가 붉은색으로 조화를 이루면서도 신선함을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이라는 식으로 말이죠. 키숀은 이와 같은 웃지 못 할 일화를 소개하며 현대미술에 대한 싸늘한 냉소를 보이는데, 만약 비평가의 말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곳이 곳대로 믿는다면 키숀의 일화에 등장하는 비평가 옆에 서서 경청하고 있는 꼴이 되지 않을까요?
특히 국내의 경우에는 전시도록이나 전시서문에 꼭 비평가의 글이 실려야 한다는 통념이 있는데, 이제는 그런 식의 고정관념이 사라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당위성과 권위를 높이기 위해 비평가에게 글을 요구하고, 비평가는 생활에 얼마라도 보탬 하고자 그러한 요구에 응하고는 하는데, 이런 식으로 쓰인 글은 결국 작품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심지어 어떤 비평가들의 경우에는 작가가 작품을 만든 과정이나 배경에 대해 깊게 연구하거나 생각하지 않은 채, 단순히 작품 몇 점만 보고 글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비평가의 책무에 충실하지 못한 매우 무책임한 처사입니다. 작품 몇 개만 슬쩍 보고 전광석화처럼 글을 써내려 갈 수 있는 사람은, 사람의 외양만 보고 그 사람의 인생이나 앞으로의 삶을 말하는 점쟁이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비평가가 작가와 충분히 대화를 나눈 뒤에 혹은 비평가가와 작가와 작품에 대해 충분히 분석한 뒤에 글을 쓴다면 그런 식의 엉터리 글이 나올리는 없겠죠.
배남우 :
현대비평은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의 과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작가와 작품을 떠난 비평이어서도 안 되겠지만, 작가나 작품을 우선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과거에나 있음직한 일이라는 것이지요.
김승곤 :
작가가 어떤 시점으로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해서, 작업과정이 선형적으로 꾸준히 진행된다고 해 보겠습니다. 비록 전체적으로 봤을 때에는 선형적인 형태로 작업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세부적으로 바라보면 그 사이사이에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전체적인 과정을 나무의 기둥으로, 그리고 서로 다른 시도들을 나뭇가지로, 각각의 작품을 열매로 바꿔 생각하면 쉽게 형상이 떠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 시점에서 그 시점에 해당된 작품을 보고 그 작품에 관한 글을 쓴다면, 제가 생각할 때 그 글은 단편적인 인상을 정리해놓은 인상비평에 불과한 글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인상을 나열해 놓은 글이 되겠죠. 저는 비평가가 그런 식의 비평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보도사진이나 패션사진 같은 분야에서는 그런 형태의 단편적인 글쓰기가 가능할지 몰라도, 그것이 어떤 한 작가의 작품에 대한 비평일 때에는 그 작가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런 작품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과 메커니즘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구조를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비평은 최근의 유행이나 경향, 그리고 시대적 추세와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Jackson Pollock Painting in his Studio,
Springs, NY, 1949 by Martha Holmes
비평의 방법론에 있어서 어떤 특정한 것 하나여야만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지만 작품 몇 개만 보고 전체를 기술하는 비평도, 다양한 방법론중의 하나가 될 수 있겠죠. 그림을 그릴 때 현장에 가서 세밀하게 스케치를 하고 몇 달에 걸쳐 전체적인 그림을 완성시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잭슨 폴록처럼 캔버스에 충동적으로 물감을 뿌리거나 하는 식으로 그림을 완성시키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또한 비평가가 작품을 분석하는 방법, 예를 들면 작품에 드러난 대상의 형태를 읽을 것인지, 아니면 작품에 드러난 작가의 이데올로기를 읽을 것인지에 따라 다른 비평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로 총칭할 수 있는 비평의 방법론은 없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로 작품이 갖고 있는 구조적인 형태와, 작품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원리를 뽑아낼 줄 아는 것이 바람직한 비평의 방법론이라고 생각합니다.
結
배남우 :
조금은 까다로운 부분들에 대해서도 명쾌한 답변을 해주셔서, 두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뷰가 금세 마무리 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끝으로 마무리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승곤 :
비평가란 작가 혹은 작품과 감상자들을 이어주는 일종의 매개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작가와 작품, 그리고 감상자를 이어주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은, 굉장히 좁은 의미에 해당되는 역할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현대적인 의미로서의 비평가의 역할과 활동 영역은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예술과 사회 사이의 매개자, 예술과 문화 그리고 교육정책 사이의 매개자, 예술과 경제 사이의 매개자가 그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예술 내부적으로 다양한 장르와 매체의 예술들을 넘나들며 서로를 연결해주는 매개자를 들 수 있겠죠. 이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비평가는 사회와 문화 그리고 예술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좀 더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론가나 비평가의 입장에서는 작가나 작품을 떠나서, 시대나 사회의 의식을 읽을 때에도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와 같다는 사실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작가나 작품을 분석하고 연구할 때에도 그 대상을 통해 드러나는 반복적인 모습, 현상적인 모습만 봐서는 어느 순간 낡은 이론과 비평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그것이 만약 사진이라면, 사진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까지 모두 포함하여 그것이 사회와 어떤 구조로 얽혀 있고, 어떤 형태로 변화되어 가는지를 관찰할 수 있어야 생명이 긴 이론가나 비평가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비평적인 활동이나, 교육과 같은 계몽적인 활동, 학술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한 활동 외에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도 얼마든지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나 비평가는 물론이고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세상을 좀 더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점에서 그렇습니다.
배남우 :
긴 시간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자 주
1)
에프라임 키숀(Ephraim Kishon, 1924 - ) : 1924년 헝가리 출생. 유태인인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헝가리 등지의 강제수용소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은 뒤, 1949년 이스라엘로 건너가 히브리어로 창작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스라엘 유수의 일간지인 <마이리브>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하면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50여 권에 이르는 소설과 희곡, 코미디 작품을 썼으며, 1974년 이스라엘 최고의 문학상인 ‘야콥문학상’을 비롯해 권위 있는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고, 2001년에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개를 위한 스테이크>,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미안하지만 우리가 이겼어>, <가족>등의 풍자 에세이와, <법정 친구들>, <신분증>등의 희곡이 있다.
2)
다음의 참고문헌에서 정확한 사례를 참고함 - 최형순(2003), <현대 미술을 위한 변명> ; 해토 출판사
인터뷰 기획 및 진행 : 배남우
본 인터뷰의 저작권은 배남우씨와 fotato.com에 있습니다. 따라서 인터뷰의 무단 배포와 전제를 금하며, 관련 사항은 필자인 배남우씨와 fotato.com으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배남우씨는 현재 상명대학교 예술, 디자인 대학원 순수사진학과 휴학 중이며, 제 7회 사진비평상 평론부문 우수상을 수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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