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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쟁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글 / 김승곤(사진 평론가, 국립 순천대)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이라크전쟁은 미국의 일방적인 승전발표로 끝나버렸다. 월남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전 세계 50만 명이 넘는 대규모 반전시위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불과 몇 달 전 얘기다. 그런데도 이라크전쟁은 마치 까마득한 옛날에 일어났던 일처럼 기억에 아물거린다. 가끔씩 매스컴에서 흘러나오는 폭탄테러에 관한 기사도 거의 듣는 순간 잊혀지고 만다. 이렇게 쉽게 잊혀지는 것은 아마 민족성 탓도 있겠지만, 월남전 때와는 달리 걸프전이나 아프간전쟁, 이라크전쟁이라는 것이 너무 현실감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TV에서 방영되는 자료화면은 미국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F16이나, 긴 불꽃을 달고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크루즈 미사일, 바그다드의 하늘을 수놓는 검붉은 불길뿐이었다. 화면에서는 작열하는 포탄소리도 화상을 입은 아이들의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식탁에 둘러앉아 바라보는 TV 화면은 아득한 과거의 세계처럼 어디까지나 조용했고, 어쩌면 아름답기까지 했다. 과연 이라크 전쟁은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그 전쟁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지난 60년대 미국이 월남전의 깊은 수렁에서 허덕였을 때의 끔찍한 악몽을 떠올린 사람들도 많았다. 그 많은 병력과 전쟁 물자를 쏟아 붓고, 그 많은 젊은이와 무고한 월남인들을 희생시킨 전쟁에서 강대국 미국이 얻은 것은 수모와 좌절감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비록 숫자는 많다고 하지만 변변한 공군력도 주변국의 지원도 정찰위성도 없는 후세인의 군대가 성전의 맹세만으로 최첨단무기로 무장한 부시의 막강한 군사력에 견딜 수 있었겠는가. 승부는 처음부터 뻔한 것이었다.
9. 11 테러를 자행한 알 카에다와의 연계, 그리고 가공할 대량 살상용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미국이 이라크에서 전쟁을 강행한 명분이었다. 생화학 무기에 대비해서 예방주사를 맞고 방독면으로 완전 무장한 병사들이 TV에 비치는 장면이 그런 우려를 가능성으로 실감시켜 주는 유일한 증표였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전쟁이 끝난 지 오랜 지금까지 그런 가공할 화학무기 같은 것은 이라크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VX나 탄저균 같은 생화학 무기가 숨겨져 있다고 지목된 무기고에는 미군의 비상선이 쳐졌다. 그곳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몰려든 포토 저널리스트나 리포터들이 접근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기자들에게 사진촬영이 허용된 무기고에는 뇌관이 없는, 몇 십 개인가의 포탄 껍질이 전부였고, 우리가 볼 수 있었던 이라크의 ‘가공할 무기’도 그것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미․� 연합군 수뇌부를 기쁘게 만든 것이 바그다드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담 후세인의 암흑지배를 상징하는 ‘고문의 방’과 ‘강간의 방’, 비밀경찰들이 끔찍한 고문을 자행한 감방들을 찾아낸 것이 그것이다. 이들은 극악무도한 후세인을 제거하고 탄압 받는 이라크 민중을 해방시킨다고 하는 미국의 ‘인도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일으킨 전쟁이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증거가 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엄청난 전비를 쓰고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이라크 전쟁은 무엇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다는 말인가. 그것은 어쩌면 전쟁이라기보다는 서양의 왕족이나 귀족들이 옛날부터 즐겨온 여우사냥과도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토끼나 여우 같은 작은 짐승을 사냥할 때, 사냥꾼의 안전은 처음부터 보장되어 있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사냥이란 작은 짐승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재난이지만, 사냥꾼에게는 재미와 수확과 안전이 보장되는 일종의 살육행위라고 할 수 있다. 압도적인 무력과 첨단적인 정보시스템을 갖춘 미국과, 구식 비행기와 거의 못쓰게 된 전차와 재래식 무기가 전부인 이라크와의 전쟁은 처음부터 어른과 아이의 게임과도 같은 것이었다.
전쟁이 치러지는 동안 몇 차례인가의 전황에 대한 미군 당국의 일방적인 발표는 있었지만, 언론 미디어의 전장의 실상에 대한 보도는 거의 없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TV에서는 연일 ‘군사 전문가’들이 나와서 마치 축구시합이라도 중계하듯 이라크전의 전황을 ‘해설’했다. 그들의 해설은 지상 수십 km 상공의 정찰위성에서 촬영된 사진이나, 그 사진을 입체화시킨 모형을 앞에 두고 진행되었다. 그들이 ‘위성의 눈높이’에서 이라크전쟁을 바라본 것이다. 그리고 그런 높이에서 1m 단위로 이라크의 구석구석까지 내려다볼 수 있는 국가는 이 지구상에서 미국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전황을 해설하는 내용은 전쟁의 ‘진실’이나 실체보다 ‘가능성’에 집중되어 있고, 전황의 전개는 ‘시뮬레이션’이나 ‘시나리오’의 개념으로 풀이되었다.
그 전황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가진 자만이 볼 수 있는 상황이지만, 실제의 전장은 인간의 눈높이에서 수평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상황이다. 만일 우리가 이라크전쟁을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곳에는 분명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부상자나 처참한 주검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전쟁에서는 도로변에 굴러다니는 시체도, 머리가 날아간 채로 참호 안에서 썩어가고 있는 이라크 병사의 모습도, 30만 명에 이른다고 하는 전쟁 희생자들의 시체도 우리는 볼 수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충격과 공포 작전’은 너무나도 치밀하게 짜여져서 완벽하게 수행되었다. 어두운 곳에서도 적의 움직임 탐지할 수 있는 암시장치, 육안이 아니라 컴퓨터의 모니터를 보면서 정밀하게 폭탄을 투하하는 폭격기,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는 스텔스 폭격기, TV카메라와 레이저 광선의 유도로 적의 군사시설을 폭격하는 페트리어트(애국!) 미사일, 핀 포인트 폭격(Smart Bombs) …. 우리가 본 이라크 전쟁은 포성도 포연 냄새도 나지 않는 버추얼 게임이었는지 모른다.
월남전 때는 150명 가까운 종군기자들이 전장에서 취재 중 산화했다. 그런 월남전을 겪은 이후, 미군 당국은 위험으로부터 종군기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군의 통제를 따르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이런 ‘보호’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닉하게도 이라크에서는 전장에서의 이라크군의 총탄에 의한 희생자보다 미․� 연합군의 ‘오인 사격(friendly fire!)’으로 희생된 종군기자의 수가 더 많았다. 실제로 전 세계 200여 명의 취재진이 묵고 있는 팔레스티나 호텔이 에이브라함 탱크의 포탄 공격을 받았다. 미 중앙군 보도관은 “호텔 로비에서 적이 먼저 공격해 왔기 때문에 응사했다.” 고 해명했다. 그러나 탱크의 직격탄 세례를 받은 것은 1층 로비가 아니라 기자들이 묵고 있던 15층과 17층이었고, 이 사실을 지적하는 기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바그다드는 위험한 지구다.” 라는 보도관의 말이었다. 그런 위험한 지구에 들어간 기자가 나빴다는 얘기다.
사실 자유로운 취재를 인정했던 월남전에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참상들을 생생하게 기록한 사진들이 결과적으로 미국에서 거센 반전운동을 촉발시킨 직접적인 계기를 만들었고, 그 씁쓸한 체험을 미국은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걸프전 이후 미국이 엄격한 보도통제를 단행하게 된 데에는 사진의 그런 파괴력을 무력화시키자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라크 전쟁 내내 기자들은 군 보도관의 일방적인 브리핑 내용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전투(는 과연 있었는가?)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에서의 자유로운 취재활동이나 보도는 불가능했다. 피를 흘리는 부상병이나 민간인들은 적어도 머리나 팔다리에 깨끗한 붕대를 감고 난 뒤에야 종군기자들이 카메라 앞에 등장할 수 있었다. 가령 어떻게 해서 종군기자가 전장에서 취재한 사진이나 기사를 본사까지 보낼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받은 본사에서는 다시 선별적으로 스크리닝해서 ‘건전한’ 내용만을 보도하는 것이 보통이다. 매스미디어의 이런 ‘자율적인 검열’을 거치면서 전장에서 벌어지는 비참하고 혐오스러운 장면들은 걸러지게 되고, 소독이 끝난 위생적인 장면만이 우리 눈앞에 전장의 현장사진으로서 제시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만 수백만의 병사와 민간이 죽어야 하는 전쟁의 실상은 언제나 비열하고 참혹한 것이다. 끈적거리는 추악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고, 저항할 힘도 없는 사냥감을 궁지에 몰아넣어 결국은 그 심장에 칼을 꽂는 살육이 있을 뿐이다. 처음부터 건전하거나 위생적인 전쟁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런 현실을 제대로 보도할 수 있는 것은 인공위성의 높이에서 부감하는 시선이 아니라, 피로 적셔진 땅에 발을 붙이고 수평의 위치에서 자기 자신의 눈으로 전장을 직시하는 보도기자들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직 전쟁 전문 ‘해설자’의 유창한 전황 설명만을 들을 수 있을 뿐, 보도기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전해주는 TV프로그램이나 사진을 보지 못한다. 공정한 진실을 내거는 어느 보도매체도 그들이 전해줄 수 있는 진실의 레벨에 있어서는 거의 마찬가지다. 우리는 전쟁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도대체 그 전쟁이 왜 일어나야 했는지, 그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파월 국무장관은 이라크에서 나오는 석유로부터 얻어지는 이익은 모두 이라크 국민들을 위해서 신탁관리로 보호될 것이라고 언명했다. 그러나 미국과 이라크의 어느 한 쪽에 특별히 악의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애당초부터 석유가 누구에게 혜택을 줄 것인지는 문제 밖이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뻔한 얘기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보다 이번 이라크 전쟁을 통해서 사람들이 분명하게 알게 된 사실은 설령 전 세계가 한 덩어리가 되어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미국과 영국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그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반드시 승리로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 두 나라가,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유엔 회원국들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합한 것보다 훨씬 강력한 결정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누구 눈에도 분명하고, 그런 사실에 무력감과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평등한 권리에 대한 유엔의 이념은 결국은 헛된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 바그다드에 있는 유엔본부 건물이 폭파되어 데메로 사무총장 이라크 특별대표 등 17명의 사망자를 비롯해서 108명의 부상자가 나왔다는 뉴스를 착잡한 심경으로 듣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프간 전쟁이 끝나고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엄청난 액수의 달러를 지원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라크 전쟁 다음에 미국한테 야단맞을 나라를 미리 점치는 보도도 있었다. 전쟁 초기에 유엔 결의에서 그토록 단호한 태도로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던 미테랑이 G8을 앞두고 미국에 유화 제스쳐를 보내는 모습을 보는 것도 서글픈 일이지만, 월남전에 이어 발 빠르게 이라크에 군대를 보낸 우리로서는 남 말할 처지도 못 된다. 돌아앉아서 가슴을 쓸어 내리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어느 보도에서 현재 미국의 군비는, 미국을 제외한 두 번째 국사대국에서부터 15위까지의 나라가 쓰는 군비와 맞먹는 액수라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지난 걸프전이 끝난 직후부터 미국은 놀라운 성능을 가진 첨단무기와 정보수집 시스템을 개발해 왔다.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일으킨 전쟁은 그렇게 만든 첨단 무기들을 시험해보고 재래식 무기를 한꺼번에 소비해서 군수창고에 쌓여 있는 재고를 없애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성능이 높아진 신형 무기로 무기고를 다시 가득 채운다. 새로운 무기를 개발할 능력도, 그럴 기회도 없는 다른 나라들의 무기는 점점 구식으로 뒤떨어지고, 미국과 영국은 새로운 전쟁을 치르면서 한층 더 첨단화된 무기와 전쟁기술로 전쟁 수행능력을 키워나간다. 지구상에서 이들의 힘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나라는 당분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TV나 신문, 잡지에서 보는 사진(영상)에는 그것을 배급한 통신사가 있지만, 누구도 통신사 이름 같은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매일처럼 무수하게 쏟아지는 익명의 영상은 그냥 그렇게 일상적으로 소비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한 번 기억을 더듬어 보자. 우리가 바라본 전쟁사진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인 기자들이 찍은 사진이 단 한 장이라도 있었던가. 이런 질문이 의미하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서방 세계에서 배신된 정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테러나 아랍인의 종교, 정의, 독재와 같은 대상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들이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흘러 들어오는 정보를 근거로 결정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영상 이미지를 비롯한 정보 소스의 과독점은 어떤 첨단무기보다도 더욱 큰 힘을 갖고 있다. 내가 관여하고 있는 스탁 포토의 세계적인 판도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의 ‘코비스’와 영국의 석유재벌 폴 게티의 ‘게티이미지스’ 라고 하는 두 개의 세력으로 거의 양분되어 있다. 이들 두 회사들은 1억 매 가까운 사진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고 지금도 탐욕스럽게 그 숫자를 늘려가고 있다. 거대한 이미지의 창고인 셈이다. 그래서 어느 나라 미술 교과서에 이태리의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회화 작품을 싣고자 할 때는 이들 회사에 사용료를 내고 그 사진을 빌려 써야만 하는 사태가 올지 모른다. 우리가 석굴암 사진을 코비스에서 빌려 써야 하는 상황은 지금 당장은 상상도 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것은 우려나 픽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근 미래의 우리의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얼마 전, 미국 국방성이 민간회사인 <스페이스 이미징>사가 소유한 위성 ‘ICONOS’가 찍은 사진들을 구입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세계에서 가장 해상도가 높은 사진을 찍어 보내는 것으로 알려진 이 회사의 위성관측 사진이 국제적인 테러조직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의 화상지도국(NIMA)이 수백만 달러를 지불하고 독점 구매해버린 것이다. 이것은 사진뿐만 아니라 모든 정보가 어떤 세력에 독점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거나, 또는 어느 특정한 사진만이 의도적으로 흘러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가 접하는 정보가 ‘모든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도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독점 상태에서 흘러나오는 정보가 그 정보에 대한 사람들의 변별능력이나 판단의 기준을 왜곡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정보를 의도적으로 조작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걸프전 때 쿠웨이트에서 탈출했다는 한 난민 소녀가, 이라크 군인이 쿠웨이트 병원의 미숙아 보육기에서 아기를 꺼내 차가운 마루 위에 방치해서 죽게 하는 것을 보았다고 미 의회에서 증언했다. 그러나 이 증언은 미국의 어느 대형 광고대행사가 사전에 각본을 짜고 미리 연습시켜서 꾸며낸 연극인 것이었다. 그 ‘천진난만’한 얼굴의 소녀는 바로 당시 워싱턴에 주재하고 있던 쿠웨이트 대사의 딸로서, 걸프전을 전후한 시기에는 쿠웨이트 국내에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뒤에 밝혀진 것이다. 이라크가 페르시아 만에 엄청난 양의 원유를 방출했다는 보도와 함께, 시커먼 기름을 뒤집어쓴 물새 사진에 전 세계에 공개된 것도 대표적인 조작 사례 가운데 하나다. 그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몹쓸 짓을 하는 이라크를 응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물새가 뒤집어쓴 원유는 미군의 유도폭탄을 맞은 사우디의 영국계 원유 저장시설에서 유출된 것이었다는 것이 그 사진을 찍은 사진기자에 의해서 뒤에 밝혀졌다. ‘해방의 기쁨으로 연합군에 투항하는 이라크 시민’의 모습이나 ‘미군 포로병의 인터뷰’가 몇 차례고 TV에 방영된 것도 어쩌면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사정은 어느 쪽 진영에서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어느 한 쪽을 두둔하거나 비난할 생각은 없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 TV의 카메라 앞에서 “미국 오폭으로 주택지에 폭탄이 떨어졌다!”고, 그것도 영어로 울부짖는 이라크 중년여성의 영상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영상이 어느 쪽에 있어서나 강력한 프로퍼갠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TV에서는 투항하는 이라크 병사들의 모습과, 미군의 입성을 환영하는 이라크의 시민들의 영상이 반복해서 방영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이 열광적으로 미군을 환영했다고 하는 이라크 남부의 마을에 들어간 어느 미국 TV기자는 “미국을 환영하는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악마’라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TV에서 본 미군들에게 손을 흔드는 이라크 소년들이 혹시 리허설을 거친 ‘배우’들은 아니었을까? 이라크 인들이 신발을 벗어 흔드는 것은 상대에 대한 경멸과 분노의 표현이라고 한다. 여기 싣는 사진에서 미군에게 신발을 벗어 흔들고 있는 소년들의 모습과, 미군에게 우호적인 웃음을 보내는 소년들의 모습은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2001년 12월, 바그다드의 사담산부인과병원에서 촬영된 이 사진의 아이에게는 뇌가 없다. 걸프전이 끝난 후, 백혈병과 암 등 이전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환자들로 이라크의 병원의 침대가 가득 찼다. 그 수는 전년에 비해 10배.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태어나는 아기의 출생률은 전체의 27%(약 5,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입을 떼고 있지 않지만, 이라크와 쿠웨이트 국경지대에서 대량으로 사용된 미군의 열화 우라늄탄 방사능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라크가 잘했다고 편을 드는 얘기는 아니다. 후세인은 과거 몇 년 동안 체제에 반대하는 많은 저널리스트들과 몇 만 명에 이르는 시민들을 살해해 왔고, 미국은 그 증거를 공개하는 일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영국인 저널리스트인 로버트 피스크는 바그다드가 함락되기 직전인 4월 9일의 상황을 ‘개는 알고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렇게 리포트하고 있다. (「The dogs were yelping. They knew bombs were on the way」) “이라크를 ‘해방’시키기 위한 미국의 전쟁 20일째 되는 날은 어제와 다름없이 고통과 죽음, 그리고 전쟁의 참화로 얼룩진 하루였다. A-10 폭격기의 공중곡예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날개를 기울여 저쪽 방향에서 하늘을 미끄러지듯 날아온 폭격기는 대통령 관저를 공격하기에 앞서, 열 추적 미사일의 목표점을 설정하기 위해서 불붙은 화약을 살포하고, 그런 다음 열화 우라늄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병원의 복도에 생긴 핏자국 줄무늬와 3명의 해외 특파원의 죽음과 5명의 부상으로 하루가 끝났다. … 개들은 언제나 정확하다. 개들이 짖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폭격기가 날아온다. 나는 바그다드의 들개들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개들은 폭격기가 언제 날아오는가를 항상 알고 있다. 기압의 변화 때문인가, 아니면 인간에게는 들리지 않는 첨단무기의 징후를 감지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일까? …” 개에 관해서는 조선일보의 강은선 특파원도 적고 있다. “기지 주변에는 수십 마리의 개가 있다. 배를 주린 개들은 밤새도록 늑대처럼 슬픈 목소리로 울부짖는다. 어느 소령이 ‘개가 짖으면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적이 알아차리니까 죽일 수밖에 없다.’ 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날 밤 어쩐 일인지 개들이 조용해졌다. ‘죽여버렸는가요?’ 라고 묻자 그는 ‘병사가 비상식량을 나눠주자 조용해졌다.’고 대답했다.” 그 개들은 정말 배가 고파서 짖었던 것일까? 그리고 배가 채워졌기 때문에 조용해진 것일까?
비록 메이저 통신사를 타고 전 세계에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이번 이라크전쟁을 눈높이에서 취재한 기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들의 사진을 통해서 허구로 가려진 이라크 전쟁의 다른 하나의 실상의 일단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것은 찍는 것도, 보는 것도 고통스런 사진들이다. 어느 정도의 상상력과 문장력을 가진 기자라면 군 보도관의 정례 브리핑이나 병사들과의 인터뷰만으로도 그럴듯한 기사를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그런 기사로는 전장의 진실을 전할 수 없다. 그러나 사진가는 다르다. 그들이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어떤 위험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바로 그곳에 직접 입회해서 현장의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진가에게 다른 선택은 없다. 한 발 늦거나, 한 발 뒤로 물러선다면 그들은 아무 것도 찍지 못한다. 전장에서는 진짜 용기와 사명감을 가진 사진가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진실의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팔다리가 잘려나간 사람이나 심하게 부란한 시체를 어느 누구도 거실에 둘러앉은 가족들과 함께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장면에 누구나 혐오와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군이나 언론의 통제는 정당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참혹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 지구상에는 우리가 반드시 직시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 사람들은 TV 앞에 앉아서 정의로운 십자군이 극악무도한 이교도 독재자를 무너뜨리고 억압 속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을 해방시킨다고 하는, 결과가 뻔 한 스토리의 전쟁 드라마를 바라본다.
분명 브룩스 준장의 전황 브리핑이나 ‘전문가’들의 해설이 이라크 전쟁의 참모습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전쟁의 진실은 그들에 의해서 설명되지 않은, 어둡고 악취로 가득 찬 장소에서 찾아져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순히 본 것을 전하는 것만이 보도는 아니다. '전쟁은 안 된다.' 라고 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주는 것을 보도의 사명으로 믿는 전쟁 사진가들은 바그다드의 시민들이 공중폭격으로 어떻게 희생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전장의 보도가 비참한 것이면 그럴수록 전쟁을 억제하는 힘은 커진다. 사진 그 자체로는 어떤 진실도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은 엄연한 물리적인 현실의 한 장면임에는 틀림없다. 비록 사진의 증언력의 강도가 그것이 짜여있는 문맥에 대부분 의존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현실을 찍은 사진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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