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후우궁 인터뷰 - 훗날 나라와 민족은 내 사진을 필요로 할 것
관람객에게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후우궁
사진가 후우궁(胡武功). 1949년 중국 서안생. 20살에 군에 입대해서 보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1975년 협서일보( 西日報)에 입사해서 본격적인 사진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국 우수 신문기자로 표창되는 등, 수 많은 작품으로 수상했다. 1988년 북경에서 개최된 한거역정( 巨歷程) 사진전에는 10만 명의 관객이 들었고, 이 전시는 1989년 도쿄에서 ‘중국현대화의 과정’이라는 타이틀로 재현되었다. 현재 협서일보의 사진부에 적을 두고, 서안(西安)미술학원에서 객원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중국 사진계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저서로는 ‘사진가의 눈’, ‘중국영상혁명’, ‘장착의 한중(藏着的간中)’ 등이, 개인 작품집으로는 ‘후우궁 사진작품집’, ‘사방성(四方城)’, ‘서안 기억’, 기획 사진집으로는 ‘중국사진 40년’, ‘중국 인본(中國人本)’ 외 다수가 있다.
작가 홈페이지 : http://www.hwgphoto.com
작가 블로그 : http://blog.dagi.com/huwugong
인터뷰를 한 도다 이쿠코는 자유 문필가로, 잡지 등을 통해서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한 이불 속의 두 나라’ 등이 있다.
중국 서부에 펼쳐진 황토(黃土) 고원은 황하 기슭에 문명이 싹트고 왕조가 도읍으로 정했던 장소다. 여기에서 살고 있는 농민과 서민들의 모습을 30년 이상 찍어오고 있는 사진가 후우궁 씨는 땅의 냄새가 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해외에도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전 중국의 뛰어난 후진들의 작품을 모아 대규모 사진전을 기획하는 등, 중국 사진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다.
도다
: 후우궁 씨의 작품에는 언제나 서민이 주인궁입니다. 농촌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꾸미지 않은 표정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후우궁
: 중국어로는 서민들을 ‘노백성(老百姓)’이라고 부릅니다. 저 자신 바로 그 노백성입니다. 노백성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많습니다만,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요. 저는 앞으로도 제 주변에 있는 서민들의 삶의 모습을 찍어 나가고 싶습니다.
도
: 처음 카메라를 손에 쥔 것은 언제입니까? 그 때의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후
: 1966년 서안미술학원 부속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림을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해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학교에 가도 수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물론 그림도 그릴 수도 없었습니다. 거의 모든 선생님들이 정치 투쟁에 합세했는데, 미술 선생님은 혼자 집에 머물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선생님의 집에 드나들면서 그림을 배우기로 했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사진을 찍고 계셨습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모델을 섭외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카메라를 들고 밖에 나가 인물사진을 찍고, 실제 모델 대신 그 사진을 보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당시의 중국은 가난했고 카메라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입수했는지 군의 공장에서 생산된 카메라를 갖고 있었습니다. 카메라라고 하지만 군사용 렌즈를 개조해서 카메라에 장착한 것이기 때문에, 초점이나 노출도 맞출 수 없는 매우 간단한 구조의 카메라였습니다. 저는 선생님에게 배워서 그 카메라로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나 데모 행진을 하는 사람들,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찍은 많은 필름들을 현상하고 프린트를 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일러주신 대로 약국에 가서 현상약품을 샀고, 약품 안에 있는 설명서를 보고 필름을 현상하기 위한 약품들을 조합했습니다. 현상이 끝나면 방에 햇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어둡게 한 후, 두 개의 그릇에 현상액과 정착액을 준비해서 혼자 프린트를 했습니다. 그것이 저와 사진의 만남이었습니다.
도
: 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에 입대했군요?
후
: 제가 20살 때, 그러니까 문화혁명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졸업은 했습니다만, 직업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군에 입대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군에 입대하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군에서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서 ‘선전부’에 들어갔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곤 했습니다. 선전 공작에 사용하기 위해서 병사들의 생활을 그리거나 카메라로 찍거나 해서 벽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1975년 제대한 후 협서일보의 사진부에 들어갔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30년 이상 계속 근무하고 있습니다.
도
: 신문기자로서 일을 시작했을 때인 1976년에 문화혁명이 끝났습니다.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사회의 분위기도 변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후우궁 씨의 직업은 어땠습니까?
후
: 변화는 바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난 후 긴 시간에 걸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중국 사진계의 움직임을 되돌아보면, 1976년은 커다란 분기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를 계기로 사진에도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때까지의 중국 사진은 계급투쟁과 정치선전의 도구로 쓰여 왔기 때문에 주로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사진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만, 문화혁명이 끝나자 그런 현상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진 애호가들이 카메라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정치 선전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시각으로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자신은 군에 있을 때부터 서로 다른 두 가지 일을 했습니다. 군대에서의 임무는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동시에 그 임무와는 관계없이 제가 찍고 싶은 것을 개인적으로 필름을 구입해서 촬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서민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렇게 사진을 찍어오고 있었던 사람들은 저 외에도 몇 사람 더 있었습니다.
도
: 1983년에 ‘중국 최우수 신문기자상’과 ‘중국 신문 특별상’을 수상하셨는데, 그 때의 작품은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후
: 그 상으로 저는 개혁, 개방 이래 처음으로 신문사에서 상을 탄 사람이라는 커다란 영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당시 수상한 작품은 한 지방에서 대 홍수의 재해를 입은 사람들을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장마 비가 내리기 시작한지 3, 4시간 후, 도시 전체가 수몰되어 버릴 정도의 대 홍수였기 때문에 저 자신도 매우 위험한 상황에서 촬영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3층 건물의 옥상에서 하루 밤을 보냈습니다만, 아슬아슬한 위치까지 물이 차올라 와서 매우 긴장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개혁 개방 전에는 그런 사진을 찍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런 사진을 찍었다면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을 것이고, 신문사도 그만 두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저는 일을 위해서 홍수가 난 지역을 간 것은 아니었고 친구들과 만날 약속이 있어서 그곳에 갔는데 때마침 홍수와 마주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홍수 지역을 촬영한 사진을 신문사로 가져왔는데, 그 가운데 한 장이 ‘중국일보’의 영문판에 개재되어 훗날 상을 받게 된 것이죠. 그 사진은 보도사진의 시점에서 중국 내에서 처음 발표된 사진이 되었습니다.
도
: 그때까지는 홍수 같은 재해지역의 사진을 찍을 수 없었습니까?
후
: 당시에는 정치적으로 이익이 되지 않는 사진은 찍으면 안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면 자연 재해는 정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시에는 재해사진이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정치가들은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의 생명처럼 귀중한 것은 없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지금은 사람의 목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정치가들이 서민의 생활에도 주목하게 되고 사고와 사건의 사진을 보도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도
: 그 후 자신의 작품으로 몇 차례 수상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 이외에도 많은 큰 사진전을 주최하셨군요.
후
: 사진가의 한 사람으로서 사진을 통해 역사의 진실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1988년 ‘한거역정’이라는 사진전을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서안에서 기획하고 사진전을 열었고. 북경의 중국미술관에서도 같은 전시를 개최했습니다. 북경에서는 10일 동안 전시를 했는데, 하루 1만 명의 관객이 미술관을 찾았습니다. 총 10만명 정도의 관객이 전시장을 찾았을 정도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도
: 어떤 내용의 사진들이었습니까?
후
: 40년간 중국이 걸어온 길을 사진을 통해서 되돌아 본 것으로, 당연히 문화혁명 시대의 사진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전시에서는 과거 중국에서는 유일한 보도기관이었던 ‘신화사’에서 사진의 조작이 행해졌던 일도 폭로되었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죠. 정치문제로 평판이 안 좋았던 사람이 모택동의 바로 옆에서 함께 찍은 기념사진의 원본이 있었는데, 모택동이 실각한 이후에는 그 사람의 모습이 깨끗하게 지워졌습니다. 위조가 중국의 현대사에서는 이러한 사진의 조작이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것입니다. 이 사진전은 해외에서도 화제가 되어 1989년에는 도쿄도 사진미술관에서도 전시가 열렸고 사진집도 발간되었습니다.
도
: 공산당에 의한 사진의 날조를 폭로한 것으로 비판을 받지는 않으셨나요?
후
: 그때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음해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자 저는 정치적으로 비판 받았고, 1990년에는 신문사 사진기자로서 취재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습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참 동안은 이른바 ‘창(窓)가 족’ 취급을 받았습니다. 특별한 처벌을 받지는 않았습니다만, 사진부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받았고, 사진을 찍을 권리를 박탈 당했습니다. 정치가 제게 가져온 최대의 징벌이었습니다.
도
: 중국에서는 지방마다 사진단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후우궁씨가 소속되어 있는 ‘서북풍(西北風)’이라는 단체는 어떤 특색을 갖고 있습니까?
후
: 개혁 개방 시대가 되자 사회에 자유로운 분위기가 넘쳐흐르게 되었고, 그런 분위기가 사진에도 반영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협서성의 사진가들은 일관되게 서민의 생활을 기록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물론 그 밖의 지역에서도 서민들의 삶을 찍은 사진가들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 등 주변의 사람들에만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서북 지역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서민들의 생활 가운데로 뛰어들어 그들의 삶의 모습을 찍었고, 그것이 우리들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진의 배경에는 지역적인 특징들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황토고원은 예부터 황화문명이 발달하고, 역대 왕조가 도읍을 정한 지역입니다. 그러나 개혁, 개방 이후에는 여느 도시에 비해 개발의 속도가 느리고 새로운 유행에서도 뒤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에는 오래된 문화나 생활 풍습이 지금까지 많이 남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 역사나 전통은 우리들을 키우고 배움을 얻게 해주었습니다. 또 무엇이 올바른 문화인지, 무엇이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기원전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은 올바른 역사를 전하려고 했는데, 그 일로 인해서 그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진실된 모습을 그대로 적는 것은 범죄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이지요. 저도 1988년의 사진전을 기획하고 비판을 받았습니다. 사마천은 ‘사기’를 바로 이 협서성에서 저술했습니다. 제가 사진을 찍을 때 ‘어떤 사진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 확신을 갖고 찍을 수 있었던 것은 ‘사기’를 통해서 올바른 역사 인식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
사진을 찍기 위해 민속과 역사에 대해서도 공부를 많이 하셨겠지요?
후
: 학생시절에는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 특히 국어나 역사 교과서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 했습니다. 또한 제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도
: 사진집뿐만 아니라 사진과 관련된 저서도 많이 출판하셨는데요, 많은 사진가들은 문장을 쓰는 것이 서투르다고 합니다. 후우궁 씨가 하신 일을 부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습니다.
후
: 아마 그것이 제가 다른 사진가들보다 더 잘 알려진 이유가 아닐까요?(웃음) 물론 저도 문장을 적는 것보다 사진을 찍는 쪽을 더 좋아합니다. 하지만 사진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거나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문장으로 적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도
: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계신데, 젊은 학생들의 사진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후
: 요즘의 젊은이들은 저희들보다 여러 가지로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고, 머리도 좋습니다. 문화 지식의 레벨도 높고, 환경의 혜택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저희 세대가 갖고 있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일에는 책임을 다하지만, 민족이나 국가에 대해서도 자신이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의식은 매우 약합니다. 이 점이 젊은 세대의 약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줄곧 일을 해서 번 돈은 사진을 찍는데 사용해 왔습니다. 제 월급으로 필름을 샀고, 어떻게 해서든지 먹고 살면서 자신의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정부를 위해서 사진을 찍지 않았고, 정부가 바라는 사진도 찍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정부는 제가 찍은 사진들을 필요로 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이 나라와 민족은 제가 찍은 사진을 필요 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정부는 언젠가 또 바뀌겠지요. 하지만 민족과 나라는 바뀌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제가 찍은 사진들을 필요로 할 날이 반드시 오리라 확신합니다.
후우궁 사진전 - 민간의 기억 전시 스케치 보러가기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 행사&세미나 ]
후우궁 세미나 스케치
2008.07.09
[ 사진계동정 ]
후우궁 인터뷰 - 훗날 나라와 민족은 내 사진을 필요로 할 것
2008.07.07
[ 행사&세미나 ]
후우궁 세미나 - 민간의 기억
2008.06.26
후우궁 Hu Wu Gung
후우궁 사진전 / 民間의 기억
국내 최대의 사진전문 포털사이트인 아이포스 웹진에서는 각 미디어와 화랑의 전시담당자, 프로사진가, 전국의 각 대학 사진학과 교수 및 전공자, 미술계와 광고 디자인계, 출판 편집인,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인사, 국내 유수 기업의 최고경영자와 임원, 사진동호인 등
27만6,830명
에게 사진문화에 관한 유익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