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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선 / 로맨틱 가도에서 길 위의 사진은 모든 것이 허락된 사진이다.
뷔르츠부르크에서 퓌센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로맨틱 가도는 진정 ‘길’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길은 떠남에 의미가 있고 그 떠남 속에서 멀어진 것들을 보게 되는, 미래를 향한 과거완료형의 무대이다. 사진이 길 위에서 비로소 피어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미래를 향한 과거완료의 모습이기에…. 여행도 사진도 길 위에 있다. 끝없이 다가서면 또 그만큼 멀어지는 길 위에서 사진을 통해 추구하는 의미는 ‘사라짐’이다. 길도 사진도 사라짐을 전제로 한다. 모든 것이 결국 하나의 이미지로 끝나고 마는 사라짐의 기표들이다.
뷔르츠부르크를 떠나 국도 E43에 들어서자 로맨틱 가도가 시작된다. 끝없이 펼쳐진 길, 오직 가고 오는 외길의 연속. 길 양편에 펼쳐진 밀밭과 포도밭, 옥수수밭, 그리고 이름 모를 농작물들이 숨쉬는 너른 평원. 멀리 완만한 구릉을 넘어오는 뭉게구름과 햇살, 대지의 시원한 바람은 자꾸만 차장 밖으로 시선을 머물게 한다. 운전을 하느라 사진을 찍지 못하는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딸은 곁에서 조용히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단지 이 길이 로맨틱 가도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풍요로운 자연과 넘치는 햇살, 아름다운 전원이 품은 기운이 눈과 마음을 사로잡고 카메라 렌즈 속에서 더없이 꿈 같은 풍경을 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마음으로 셔터를 누르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들은 이제까지 소란스럽게 셔터를 누를 때와는 분명 다를 것이다. 길은 그 자체로 인생의 교과서이다. 길의 운명이 사람의 운명과 같기에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은 가장 아름다운 사색과 성찰의 기회를 선물한다.
수많은 사진가들이 길 위에서 위대한 사진들을 만들었고, 그 사진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길이 사진가의 내면 이야기에서만 머문 것이 아니라 세상을 말하고 시대를 말하는 상징의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나는 길 위에서 사진을 찍을 때면 위대한 사진가 두 사람을 떠올리곤 한다. 한 사람은 1954년부터 이듬해까지 미국의 국도를 따라 사진을 찍었던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로 그의 작품집 『미국인(The Americans)』에 실린
라는 작품이 함께 떠오른다. 또 일본의 저명한 사진가 모리야마 다이도와 1960년대 그의 작품 <국도 1번>이 떠오른다. 이들은 길이 무엇인지, 사진에서 길이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여 말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보았던 사진이지만, 지금도 길 위에 서면 그들의 강렬한 사진이 떠오른다.
나는 언젠가 딸에게 이런 말을 했다. “길 위의 사진은 모든 것이 허락된 사진”이라고…. 마음으로 담는 사진이기에 노출도 앵글도 초점도, 심지어 프레임까지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길은 흐름 속에 있다. 흐름은 사유의 연속이고 움직이는 피사체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뭐라고 결정지을 수 없는 정신과 육체와 마음, 대상들 사이를 흐른다. 따라서 길 위의 사진은 흔들리지 않을 수 없고, 완벽하게 초점이 맞을 수 없고, 노출은 물론 눈과 마음과 렌즈의 프레임까지도 떨리고 흔들릴 수밖에 없다. 세계가 로버트 프랭크의 흔들리고 기울고 초점이 선명하지 못해 불투명하고 눈에 거슬리는 불완전한 프레임까지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진정한 길의 사진이고 길 위의 인생의 모습이자 진정 마음으로 바라본 시선이기 때문이다. 모리야마 다이도의 거칠고 어둡고 조악하고 찢겨나가는 프레임에 수많은 일본 사진가들이 전율했던 것도 그 거칠고 자유로운 모습이 진정 길 위의 프레임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흐르는 길 위에서, 끝없이 다가서고 물러나는 길 위에서 사진을 찍을 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길 위의 사진이라 할 수 없고, 그 사진의 프레임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면 길 위의 프레임이라 할 수 없다. 나는 모든 것이 용해되는 사진, LCDF와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 사진이 길 위의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달리는 로맨틱 가도는 바로 길 위의 사진이란 무엇인지, 그 길에서 마주치고 다가왔다 사라지는 풍경이 무슨 의미인지를 눈과 마음과 렌즈를 통해 발견하는 사유의 풍경이라고 생각한다. 운전대를 잡은 나는 안타깝지만 눈으로 사진을 찍는다. 꼭 한번 만나고 싶고 달려보고 싶고 찍어보고 싶었던 로맨틱 가도를 오로지 눈과 마음 속에 깊이 담는다.
어느덧 나의 시선은 딸을 향한다. 딸애는 이 길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길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 길이 곧 인생이고 삶이라는 사실을, 무수한 사람들이 이 길로 떠났고 이 길로 돌아왔으며 이 길에서 사라졌음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을까? 달리는 차 안에서는 촬영 조건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 그러나 길을 담은 위대한 사진들이 쾌적한 조건에서 찍힌 사진들이 있었던가. 로버트 프랭크의
처럼,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상황에서 남겨진 사진이 감동을 줄 수 있다. 나는 딸이 나의 눈이 되어주기를 마음으로 바랐다. 딸애가 나의 몫까지 자신의 카메라에 담아주기를…….
길은 그를 대하는 사람에 따라 풍경을 달리 드러낸다. 사진가에 따라 흑백으로 대하는 이가 있고 컬러로 다가가는 이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훗날 사진의 연주(인화)로 나타나지만 길 위의 풍경이 컬러일지 흑백일지, 빛(L), 컬러(C), 구도(D), 프레임(F)은 물론 초점, 노출, 디테일까지도 길이 사진가에게 보여주고 사진가가 길을 보았던 시선으로 나타난다. 모든 사진은 ‘되돌리는 시선’이다. 그때 그 자리에서 보았던 것을 또 다른 시선으로 되돌리는 것이 사진이다. 로맨틱 가도는 이번 사진여행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의미를 두고 만났던 사진 학습의 장이다. 다시 펼쳐보는 한장한장의 사진 속에서 그날 그 순간 딸의 시선을 만나고, 딸이 보았던 것을 본다. 그 사진을 통해서 그 시간과 공간 속으로 되돌아간다.
길 위에서 길을 찍을 때는 무엇보다 마음을 따르는 것이 좋다.
빛도 색도 프레임도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진동선
현대사진연구소장
홍익대 미술대학원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학 예술학과 졸업.
뉴욕 주립대 예술대학원 사진비평을, 홍익대 미술대학원 미술비평 전공.
2000년 광주비엔날레 전시팀장 역임.
주요 저서: 한 장의 사진미학, 영화보다 재미있는 사진이야기, 사진 영화를 캐스팅하다, 현대사진가론, 현대사진의 쟁점, 현대 사진의 흐름 등 다수.
사진전: 앗제가 본 서울, 미명의 새벽, 퍼스널 컬러 등 다수 기획.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1924~
미국의 사진작가. 일상적인 광경을 포착하여 이를 조형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사진집 『미국인』을 출판하였다. 날카로운 기록정신이 창출해낸 독자적인 스타일로 주목받아, 젊은 세대의 사진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모리야마 다이도 森山 大道, 1938~
현대 일본 사진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널리 인정받은 사진작가. 포토저널리즘의 객관적인 리얼리즘을 넘어 작가의 주관이 개입된 주관적 리얼리즘을 통해 대상을 종합적으로 포착한 작품들로 유명해졌다. 일상의 무질서한 현실이나 인간 실존의 우울함 등을 담은 이미지를 강한 명암의 대비와 단순하고 불균형한 구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인물 혹은 뒷모습이나 초점이 흐려진 이미지 등을 통해 드러내면서 새로운 리얼리즘을 제시하고자 했다.
- 이 글은 한국프로사진협회지에 실린 글입니다.
글, 사진 / 진동선(현대사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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