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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덕의 사진이야기 - 빛의 개척자
사진의 발명가 니에프스
니에프스(Joseph Nicephore Niepce 1765~1833)는 발명가로서 형 크로드와 함께 자전거, 열기관, 인디고 염료 등을 악전고투하며 발명하였으나, 어느 것도 특허권을 얻지 못한 채 그들의 자산만을 탕진해버리게 된다. 그 무렵 독일에서 전해온 석판 인쇄술(리토그래프)에 관심을 가진 니에프스는 아들인 이시도르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여, 그것을 대량으로 찍어내어 판매하는 사업을 구상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들은 군복무를 나가게 되고 니에프스가 스스로 밑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 때 누구라도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카메라 오브스큐라(암상자)를 접하게 된다.
카메라 오브스큐라는 간단히 말해 바늘구멍사진기이다. 15C의 원근법의 출현과 동시에 눈의 매카니즘이 사물을 제대로 직시하게 되었고, 이 카메라 오브스큐라의 상자에 비치는 풍경을 손으로 스케치하는 작업이 화가들 사이에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좁은 바늘구멍을 통과한 빛은 벽 등의 물체에 도달하면 도립상을 맺는다. 또 바늘구멍 대신 볼록렌즈를 장착하여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는 르네상스 이후 듀러나 홀바인이 사용한 투시장치와 함께 카메라 오브스큐라는 회화를 위한 과학적인 보조장치로서 많은 화가들이 애용하였다. 또 18C말에는 이를 화가용으로 정밀하게 제작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대량 산업화되기에까지 이른다.
석판인쇄를 위해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목적이었던 니에프스는 이 카메라 오브스큐라를 접하고 언젠가는 맺히는 상을 자동적으로 판에 새길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당시 동판화의 제판에 쓰였던 물질이 감광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판화의 복사를 시작하며 많은 실험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카메라 오브스큐라에 아스팔트 판을 장착하여 장시간 노광을 주어 상을 맺게 하는 실험을 계속하다 1826년 드디어 그의 집 창문에서 내다본 이웃집 지붕의 풍경을 상으로 고정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이것을 빛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뜻의 “헬리오그래피”라 명명하고, 이러한 방법으로 몇 점의 풍경 빛그림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 기법은 상이 선명하지 못하고 실용화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꾸준히 연구를 계속해나간다. 그는 카메라 오브스큐라를 이용하여 상을 제대로 맺게 하기 위해 은염을 유리, 니켈, 납, 동판, 은판 등 사용 가능한 모든 재료의 표면 위에 도포하여 다양한 실험을 하였는데, 그중 구리에 은을 도금한 은판을 통해 가장 아름다운 영상을 얻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상을 맺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이 검게 되어 없어지는, 즉 상을 정착시키지는 못하였다. 그 후 독자적인 연구를 계속해오다 파리의 광학 상인 슈발리에에 의해 다게르의 존재를 알게 된다.
니엡코타이프라 불리어야 할 다게레오타이프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 1787~1851)는 무대장치가의 조수로 출발하여 파노라마 관을 위한 풍경을 그리게 된다. 파노라마 관은 영국의 화가 로버트 버그가 1787년에 고안한 엄밀한 선원근법에 의한 초광각의 정경장치이다. 이는 그림을 원형극장의 내벽에 그려 놓고 빛을 투사하여 감상하는 것으로 18C말 파리에서도 운영되어왔다. 다게르는 보는 것과 일루젼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밀실의 효과를 보다 한층 높이기 위하여, 파노라마의 임장감에 각종 조명을 겹쳐 실제 모습 이상의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디오라마 관을 염두에 두고 이에 필요한 기자재를 슈발리에로부터 구입하게 된다.
다게르는 카메라 오브스큐라로 상의 정착에 성공하였다는 니에프스의 이야기를 슈발리에로부터 듣고 놀라는 한편 서둘러 니에프스에게 공동연구를 제안한다. 그러나 니에프스는 다게르의 제안을 거절하고 독자적인 연구를 계속하다 다게르의 집요한 요청에 의해 1829년 공동계약서에 서명한다. 니에프스는 다게르에게 그동안 연구했던 방법과 기법 등을 전수하였으며, 비밀 유지를 위해 서로 암호화한 편지로 자료를 주고받으며 은염의 광화학반응 등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실험을 계속해나간다. 그러나 얼마 후 니에프스는 사진술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타계하고 만다.
다게르는 니에프스의 아들 이시도르와 다시 계약을 맺고 실험을 계속하나 상을 정착시키지는 못하는 등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창고에서 상이 정확하게 맺혀있는 은판사진을 보고, 과연 어느 약품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알기 위해 매일 촬영을 하여 약품을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내면서 실험을 계속한다. 약 한 달 후 최종적으로 남은 약품은 수은(Hg)으로서 이 물질이 상을 정착시킨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게르는 잘 닦은 동판에다 은도금을 하여 여기에다 요오화은을 도포하여 감광성을 가지게 하여 약 20분간 촬영을 하고 수은증기로써 현상하는 기법을 취하였다. 그러나 수은으로 상을 정착하는 것 이외의 모든 기법상의 노하우는 전부 니에프스가 행하였던 기술이었으며, 다게르는 단지 1837년 니에프스의 연구결과에서 정착법을 우연히 발견한 것뿐이었다.
다게르는 이것을 “다게레오타이프”라 명명하였으며 특허를 얻기 위해 고심하던 중 결국 당시 학사원의 파리 천문대장이며 정치가였던 프랑스와 아라고 공의 힘을 빌어, 1839년 8월 19일 프랑스 예술원 및 과학아카데미의 발표에서 특허권을 인정받게 되었으며 공식적인 사진발명을 공표하기에 이른다. 또한 다게레오타이프의 사진기를 광학상에 제작하도록 하여 상업화하였으며, 그가 쓴 소책자
「다게레오타이프의 역사와 설명」은 그해 26쇄를 넘어 러시아, 영국, 이태리, 독일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무엇보다도 정부로부터 발명특허에 대한 연금혜택을 독차지하였으며, 니에프스의 아들 이시도로에게는 극히 적은 혜택만이 돌아갈 뿐이었다. 그러나 다게르는 그 이후 이렇다 할 연구성과를 내지 못하였고, 우연히 발견한 수은 정착법 이외에 그가 사진발전에 기여한 공적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세월의 흐름과 함께 그의 이름은 잊혀져 갔다.
사진술이 공표되자 이 기술은 유럽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퍼져나갔으며, 사진을 처음 접한 사람들에게는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광택이 나는 은판에 실물을 보는 것과 같은 너무나도 선명한 화면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하나의 충격이었으며 누구나가 사진을 찍고 싶은 욕구를 가지게 했다. 파리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관광과 함께 사진을 찍어가는 게 하나의 유행처럼 되었으며 실로 그 인기는 대단했다. 디오도르 모리세가 그린 1839년의 ‘다게레오타이프의 광’이라는 풍자만화에는 사진을 찍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과 졸지에 일거리를 잃어버린 화가 등 그 시대 상황을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종이사진의 발명가 탈보트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파리로부터 사진발명의 뉴스를 접한 이는 영국의 인문, 자연과학자 탈보트(William Henry Fox Talbot 1800~1877)였다. 그도 독자적인 사진술의 연구를 계속해왔는데 1841년 종이의 네가에서 여러 장의 양화를 얻어낼 수 있는 네가-포지 기법의 사진술을 완성시켜 빛으로 소묘한다는 의미로 “포토제닉 드로잉”이라 하였다. 그 후 아름답다는 뜻의 그리스어 카로스를 따 “카로타이프”라 하였으며 그의 이름을 붙여 “탈보타이프”라 명명하였다. 탈보트는 포토그래피라는 단어를 직접 만들어 쓰기도 하였는데 네가-포지기법은 오늘날 종이사진의 원형이 되는 것으로 그의 발명은 크게 평가받을 만한 업적이다. 또한 그가 사진을 발명하게 된 것은 카메라 오브스큐라 등의 사생도구를 통해 그의 고향마을의 다양한 풍경을 촬영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당시 영국의 유명 풍경화가들의 그림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과 자연관에 눈뜨게 해준 영향도 있었으나, 그는 자연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생명력이 풍부한 자연현상에 심취하였기 때문에, 그의 시각과 사진술은 사진발명 이전부터 자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에 기인한다.
탈보트는 1844년 세계최초의 사진집 「자연의 연필」을 발간하였는데, 이 타이틀은 사진은 자연이라는 조물주의 손에 의해 각인된 이미지라고 하는 탈보트의 강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술사진가 바야르
프랑스의 재무성 관리인 바야르(Hippolyte Bayard 1801~1887)도 독자적인 방법으로 사진술을 연구하였다. 그도 종이네가의 사진술을 1840년 완성하였으나, 다게레오타이프의 업적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는 일찍이 1839년 6월 구호금 마련을 위한 세계 최초의 사진전을 가졌을 만큼 오늘날 위대한 사진가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의 사진은 자신의 창작의욕의 참신함과 예술성을 나타내주는 작품들로서, 당시 다게레오타이프가 표현해내지 못한 시각적 안목을 가지는 것이었다. 특히 그의 사진술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에 항거라도 하듯 스스로 나체가 되어 자신의 몸을 묶어 촬영을 한 자화상을 선보이기도 하는 한편 다방면에 걸쳐 사회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작품은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다. 예를 들어 몽마르트 언덕의 풍차를 장기적으로 촬영한 회화적인 광경은 사진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시야를 깨닫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진에 있어서의 원근법과 주제의식 및 시간적 법칙을 설명해주기도 하는 그러한 차원 높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의 이러한 사진들은 당시의 사진이나 그림에서 느끼지 못하였던 미학적으로 우수한 예술성을 지닌 작품으로서 예술사진의 원조로 불릴 만큼 격조 높은 작품들로 평가받는다.
사진술은 이들 과학자들의 시행착오를 거듭한 개척정신과 과학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글 / 강현덕(한국사진 학술교육분과위원)
- 이 글은 '한국사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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