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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덕의 사진이야기 - 시대의 목격자
20C에 있어서 사진기술의 진보는, 19C 일부 특권자들의 소유물이었던 사진을 일반 대중들에까지 깊숙이 침투시켜 갔다. 게다가 사진의 기능은 새로운 인쇄기술과의 접목으로 다양화되고, 그 이용 범위가 비약적으로 증대되었다. 즉 사진의 광범위한 산업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 결과 사진은 사회 기구의 한 구성원이 되어 아마추어의 소일거리 대상이 아닌, 시대를 움직이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갔다. 또한 점점 보편화되어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복제의 도구’로써 기반을 잡아갔다.
포토그래피즘의 태동
이와 같이 사진의 범사회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하프톤을 찍어낼 수 있는 사진 인쇄기술에 의해서였다. 일반 대중지로서는 처음으로 「뉴욕트래뷴」지가 1896년 맨하탄 슬럼가의 실태를 찍은 사진을 게재하였다. 이에 따라 화가나 목판공 등을 거치지 않고 사진이 인쇄물로서 게재되었는데, 이러한 획기적인 인쇄법이 널리 퍼지고 활판인쇄의 활자를 능가하게 되기까지에는 4반세기의 세월이 걸렸다.
한편 사진기술은 짧은 역사 속에서도 1920년대 중반부터 30년대 전반에 걸쳐서 큰 변혁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당신이 보는 것은 무엇이든 찍을 수 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1925년 독일의 엘마녹스 소형 사진기가 발매되었다. 이는 한 번에 한 장의 필름밖에 장착할 수 없었지만 이 카메라에 의해 실내에서 조명 없이 촬영이 가능하게 되고, 소형 카메라의 활동 영역이 넓어졌으며 야간촬영, 인공광의 실내촬영, 공연사진, 움직이는 피사체의 촬영, 과학사진 등의 촬영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35미리 카메라의 원형인 라이카가 1928년 독일에서 발표되어 빛의 조건이 나쁜 장소에서도 손쉽게 촬영을 할 수 있고,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이나 포즈를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자연과 인간사의 재미있는 모습이나 희로애락의 다양한 모습들을 촬영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1932년에는 빌트인 레인지 파인더와 교환렌즈 시스템, 연속촬영 시스템을 구비한 소형 사진기 콘택스가 등장하였다. 이는 속사 기동성이 뛰어나 사진가들에게 행동의 자유를 확보해주면서 사람의 눈과 사진기의 눈을 일체시켜주게 되었다.
이러한 카메라의 혁명과 감광재료와 필름의 진보에 의해 사진은 그 본질의 하나인 순간 표현을 가능하게 하였고, ‘포토저널리즘’의 시대가 1930년대에 도래하게 되었다. 또한 많은 고성능의 카메라가 계속 발매되면서 20종에 달하는 사진 주간지가 1930년대를 시작으로 발행되었고, 유럽에서도 사진가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던 독일을 중심으로 새로운 포토저널리즘의 방법론이 확립되게 되었다.
독일의 르포르타주
포토저널리즘의 최초 사진가로 알려진 에리히 잘로몬은 1928년 「베르리너 일러스트리르테 자이퉁」지의 데뷔 이래 법정과 국회의회 등을 촬영하였고, 1931년 「순간적 모습의 유명인들」이라는 사진집을 출판하였다. 또 「자이퉁」지의 요청에 의해 최초의 엮음사진 형식의 보도 페이지를 만들어 ‘문카치의 세계여행’이라는 인기 르포르타주를 게재한 마틴 문카치, 「퍼시픽 앤드 애틀란티그」지에 토마스 만의 노벨상 수상과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회담을 촬영하는 등 다양한 활동으로 오소독스한 보도사진의 전형을 만들어낸 알프레드 아이젠슈타트, 「뮨히나 일러스트리르테 프렛세」지에 베를린의 야간생활을 최초로 르포르타주한 페릭스 만 등 소형 카메라를 사용하여 다채로운 활약을 보인 사진가들이 독일에서 계속 배출되었는데 그들은 진정한 ‘시대의 목격자’들이었다.
독일의 그래프 잡지의 성공으로 유럽에서는 계속해서 같은 종류의 잡지가 발간되었는데, 브랏사이를 등용하여 새로운 ‘그래프저널리즘’을 목표로 한 프랑스의 「뷰」지는 창간호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새로운 정신에 의해 구상되어 새로운 수단으로 만들어진 「뷰」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사진을 보도 전달한다.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지 사진, 특보, 논설이 「뷰」에 도달해 우리들의 독자들을 전 세계로 연결해준다.”
포토저널리즘의 제1단계인 유럽의 보도사진은 사물을 보는 수단과 사물을 보는 것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수단으로써 사진을 찍어내었다. 거기에는 잡다한 피사체들의 통일되고 융합된 이미지가 망라되었다. 그리고 보도사진은 시대와 함께 움직이고 다양화 되어가는 현실 사회를 그 표층에 따라 모자이크처럼 정착된 집합 이미지가 되어갔다. 그러나 독일의 융성했던 보도사진도 히틀러에 의해 중단되고 사진가와 편집자 등 그 중심들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신속하게 이동해 갔다.
아메리칸 다큐멘트
미국에서도 19C 말 사진에 의한 본격적인 사회 기록인 ‘아메리칸 다큐멘트’의 계보가 시작되었다. 「뉴욕 트래뷴」지와 「이브닝 선」지의 기자로 뉴욕 슬럼가의 환경과 범죄를 고발한 미국 최초의 포토저널리스트 제이코브 리스와 뉴욕 에리스 섬의 이민자 수용소의 비참한 실태를 촬영한 루이스 하인 등에 의해 다큐멘트의 기틀을 잡기 시작하였다. “올바르지 않으면 안되는 일과 평가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을 사진으로 나타내고 싶다.”는 하인의 말처럼 단순히 시대를 목격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진에 의해 사람들의 도덕성을 일깨워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정신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자신의 사진을 설명적이라고 말한 하인은 20C 초에 미국 사회를 정례적으로 촬영하였고, 특히 아동학대의 사회악을 고발한 일련의 사진으로 ‘아동노동법’ 제정의 기반을 구축한 인물이었다.
사진으로 사회를 비판한다고 하는 미국의 사진정신은, 1930년대 대공황 하에서 새로운 이슈로 부상하여 당시의 황폐한 미국의 실태를 똑똑히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되었다. 이러한 미국의 사회적 양심은 우선 1935년 경제학자 로이 스트라이커가 조직한 농업안정국(FSA)의 활동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이는 가난한 소작농의 구제 계획을 예산안 삭감의 문제에서 정부가 스트라이커에게 조언을 구하였는데, 그는 보도사진을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제안하고 사진가 집단을 편성하여 각지의 극빈 농민지구에 파견한 것이었다. 그는 도로시아 랭, 워커 에반스, 칼 마이던스, 아더 로드스타인, 러셀 리 등 젊고 유망한 사진가들에게 설득력 있는 사진을 요구하고 사명감이 넘치는 대규모의 사진 계획을 3년간에 걸쳐서 수행하였다. 사진가들은 “주제에 대해 잘 알고 그 주제의 의미와 환경과의 관계를 발견해야 한다.”고 하며 극도의 빈곤 속에서 허덕이는 궁핍한 실태를 기록하고, 이를 신문, 잡지에 게재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농업계획 예산이 통과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미국의 보도사진은 어떠한 사회적 목적을 위한 방법론으로도 이용되었다. 시인 제임스 에이지와 워커 에반스의 공저인 남부 소작농의 기록 사진집 「유명한 사람에게 찬사를 보냅시다」, 캘리포니아의 극빈자들을 촬영한 도로시아 랭, 사회학자 폴 테일러의 「아메리카의 집단 이주 인간적 혼란의 기록」, 마가렛 버크 화이트와 그녀의 남편인 소설가 아스킨 콜드웰이 완성한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 등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공동작업의 사회조사 기록을 만들어갔다.
이러한 것은 사진에 의한 사회 논문이라 불릴 만한 것으로, 미국의 시대적 도해이며 무엇보다도 아메리카의 양심을 불러일으키는 사진 스타일의 전형이 되었다.
포토저널리즘의 시대
그러나 이러한 사회의 문제를 기록하고 미국의 양심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의 방법에 한계를 느낀 사진가도 있었다. 바로 도로시아 랭과 함께 FSA의 대표적인 사진가인 워커 에반스이다. 「소작인의 가족」「알라바마의 오두막집」 등 훌륭한 사진을 발표한 그는 무엇인가 양심에 한계를 느껴 그러한 보도사진을 찍지 않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뉴욕의 지하철에 몰래 카메라로 승객들의 일상을 담아 「많은 일들이 우리를 일깨우다」(1941년)라는 타이틀로 제임스 에이지의 서정적인 에세이와 함께 사진집을 출판하였다. 그의 사진은 지금까지의 포토저널리즘 스타일과는 다른 앵글로 일상의 모습을 담아, 그 사람들의 삶을 다시 일깨워주고 상기시켜주는 내용이었다. 에반스는 종래의 보도사진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사진의 새로운 가능성을 느꼈으며, 인간의 사회화된 의식으로서의 의미가 깊은 사진의 영역을 발견하였다.
어쨌든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1936년 지금까지의 포토저널리즘의 방법론과 시스템이 집약된 형태로서 미국에서 「라이프」지가 창간되었다. “생활을 보기 위해, 세계를 보기 위해, 사건을 목격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의 얼굴과 자랑스러운 사람들의 몸짓을 보기 위해, 진기한 것-기계, 군대, 군중, 정글, 달 표면을 보기 위해, 인류의 작업-그림, 탑, 대 발견을 보기 위해, 수천 키로 떨어져 있는 것들, 벽의 저편과 방 안쪽에 숨겨져 있는 것, 가까이 가면 위험한 것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와 아이들을 보기 위해, 보아서 즐거움을 얻기 위해, 보고 놀라기 위해, 보고 지식을 얻기 위해서…”라고 창업자 헨리 루스가 창간호에 게재한 이 말은, 새로운 사진기술과 미디어가 뒷받침되는 사진가의 행위와 의미를 명쾌히 지적한 것이었다. 사진가는 일상에서 나와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이 되었으며, 대중을 위해 보는 것을 일임하여 ‘직업으로서의 목격’과 ‘시대의 목격’을 행하는 영웅적인 인간으로서 이상화되었다. 이는 19C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타입의 표현자의 출현을 의미하였다. 현장에서 생각하여 실행하고 현상을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판단과 행동력을 갖는 사진가들은 일찍이 없었던 표현의 스타일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라이프」는 그러한 사진가들의 사진을 중심으로 ‘세계의 해석서’가 되어, 사진뿐만 아니라 문장, 레이아웃, 캡션 등 복합적인 정보전달의 형식을 완성시켰다. 이후 「루크」「포토」「픽츄어」「피크」 등의 그래프 잡지가 창간되었고, 최전성기에는 2,500만 부의 잡지가 판매되어 전대미문의 포토저널리즘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는 듣고 읽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의 효율적인 신뢰와 사진의 기능과 효용 그리고 사회의 건전한 융합을 나타내는 척도였다.
포토저널리즘의 번성은 가속도적으로 변화하는 혼돈스러운 사회에서, ‘시대의 목격자’인 사진가로 하여금 인간 중심적인 휴머니즘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이었으며, ‘보는 것’을 재정의 하는 상징적인 움직임이었다.
글 / 강현덕(한국사진 학술교육분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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