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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곤 / 사진은 강운구의 삶의 방식
한국 유일한 신인 등용문인 ‘사진비평상’의 평론부문 응모자 수는 매년 서너 명을 넘은 적이 없다. 그것도 외국 사진가들의 작품론이 대부분이지만, 지금까지 강운구를 다룬 글이 몇 편이나 된다. 어느 대학에서 비전공자를 위한 교양과목으로 사진을 몇 해 가르친 적이 있는데, 작품 감상문 과제를 내면 ‘강운구’를 써서 제출하는 학생이 으레 몇 명씩 있다. 이번 ‘저녁에’ 전시 개막일에 운집한 사람들의 수나 면면만 보아도 그런 그의 인기를 알 수 있다. 여간해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는 그가 그처럼 폭넓은 지지층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의외롭겠지만, 왜 그런지 아는 사람은 안다. 그의 사진에는 한국인의 원체험의 이미지가 드리워져 있다. 서구화나 현대화라고 하는 외래종 이름에 물들기 이전의 한국인의 유전자적인 경험이나, 오랜 시간에 걸쳐 숙성된 민족적인 에토스 같은 것이 그의 사진의 원풍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국적을 알 수 없는 요즘 사진들을 보다가, 단정한 그의 흑백사진을 보면 무언가 신선하게 와 닿는 것이 있다. 그런 사진에 공감을 느끼는 나만이 아닌 것 같다.
강운구는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토종 사진가다. 사진에서 땅의 냄새가 물씬 난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논바닥에 찍힌 무수한 발자국과 담벼락에 드리운 수묵화처럼 깊고 부드러운 톤으로 드리워진 그림자들이었다. 농민의 맨발 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진흙 웅덩이에 고인 물에는 탁한 하늘이 담겨 있다. 그의 흙은 유기물과 무기물질의 단순한 혼합물이 아니다. 대대손손 흙을 일구며 살아온 농민들에게 있어서 땅은 그들이 딛고 서있는 발바닥과 혈관으로 이어진 신체의 일부다. 강운구는 논바닥에 찍혀 있는 징표들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썰렁한 시골 신작로가의 담벼락에 붙은 ‘후불제 결혼’, ‘외국 신부’라는 글자가 선명한 ‘어떤 벽보’도 그렇고, 길가에 버려진 액자를 찍은 ‘공든 탑이’나 나무 밑에 쓰러져 ‘스스로 누운 돌부처’들에는 그의 일류의 해학이 담겨 있다. 그가 이런 사진에 붙인 함축적인 제목들을 보면 사진가라기보다 시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자신의 삶에 수도자적인 엄격함을 부과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정신적인 자유와 리얼리티를 획득하고 있다. 그의 사진에는 눈앞의 현실을 도식에 끼워 맞추는 ‘그림 읽어내기’ 식의 사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존재감이 있다. 강운구 자신에게나 그의 작품에는 작가주의, 서정적 리얼리즘, 포토 저널리스트, 다큐멘터리 사진가 같은 몇 가지 수식어들이 따라다닌다. 정확한 수식어인지는 모르지만, 그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는 태생적인 아마추어 사진가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알고 있다. 그것은 우연도 아니고 누군가로부터 부과된 의무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찍고 싶은 사진을 찍고, 거칠 것 없는 자유를 누린다. 그것은 아마추어 사진가만이 가질 수 있는 지복의 권리다.
그는 흑백사진을 고집한다. 아마도 자신의 이미지를 색채라고 하는 요설스러운 언어가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형태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잡지 표지에 실린 그의 컬러사진을 몇 차례 본 적이 있지만, 색채가 극도로 억제된 사진은 거의 모노톤에 가까운 풍경들이었다. 지나치게 과장된 광각과 망원 효과도 사용하지 않는다. 소형 카메라에 표준렌즈를 달고 찍은 그의 사진은 마치 그 자리에 서서 육안으로 바라보는 풍경처럼 편안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흑백 프린트는 완벽하고 아름답다. 은의 입자들만이 나타낼 수 있는 디테일과 텍스처, 미묘한 톤의 변화와 독특한 물질감은 픽셀이 만들어내는 빤질빤질하고 얄팍한 전자 이미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이와 존재감을 갖고 있다.
포토스토리나 포토에세이 같은 연작사진은 르포르타주에서는 내용을 전달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잡지에 실리는 사진들은 대부분 설명적인 일러스트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저녁에’에서는 시간을 따라서 눈과 머리로 사진을 읽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듣도록 만든다는 방법론을 보여준다. 사진은 ‘거리’를 찍는다. 물리적으로는 대상에서 임계초점면을 이루는 필름에 이르는 정확한 거리의 범위에서 벗어난 프레임의 외부는 초점에서 벗어나게 되어 있다.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명확하다. ‘오래된 난초’에서는 사진가와 대상 사이에 놓인 ‘거리’와 거리에 따라서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는 대상과 대화를 나누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이 대상 가까이 다가가거나 멀리 물러서서 찍는다. 클로즈업으로 찍은 사진에서는 가깝게, 멀리서 찍은 사진에서는 그만큼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오래된 난초’나 ‘공든 탑’은 사진을 선적인 시간에 따라서 내용을 읽어나가게 만들지도, 시간의 흐름과 장면의 전개를 시퀀스로 보여주지도 않는다. 시간을 평면으로 풀어놓은 그의 사진에서 스토리 같은 것은 읽어낼 수 없다.
그는 연속된 현실의 시공간 가운데의 어느 ‘융기’된 부분과 정신이 동조되는 순간을 찾아 셔터를 누른다. 그와 대상과의 만남 자체는 우연일지 모르지만, 그 만남의 결과로 태어나는 사진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그의 사진에 찍힌 장면들은 흔히 말하는 ‘결정적인 순간’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지만, 그렇게 찍혀지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의 영역을 초월하는 운명적인 순간이 깊은 흔적으로 남아 있는 그의 사진에서의 신비한 순간의 출현은 처음부터 우연 가운데 잉태되어 있던 것이다.
그의 사진은 과격하지 않다. 그럼에도 거역하기 어려운 저항을 담고 있다. 그 저항은 분노나 증오 같은, 고통을 수반하는 일시적인 정념이 아니다. 소금창고의 염부꾼과 얼굴이 보이지 않는 농부의 휘청거리는 걸음걸이, 허공에 덩그렇게 떠있는 무덤과 땅에 드러누운 돌부처의 얼굴에조차 우리가 겪어 나와야 했던 고단한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들은 과거에 우리들이 극복해야 할 불합리하고 전근대적인 장애물이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 시름겨운 표정들에서 슬프고 고통스러운, 그러나 아련한 그리움 같은 응축된 감정들이 가슴 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얼굴들은 물질적인 풍요를 위해서 우리가 대가로 치른 것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가치였는가를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다. 누군가는 거기에 대해서 언급해야 했고, 지금까지 강운구는 바로 그 지점에 렌즈를 겨누어온 있는 것이다.
요즘 젊은 사진가들은 정신이 아니라 머리로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단순한 정보나 기호의 차원의 도구로 여기는 그들은 외국의 유행을 따르는 덧없는 에피고넨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들의 사진에서는 몸이 움츠러들 것 같은 긴장감도 에너지도 느껴지지 않는다. 거대한 스케일은 속이 비어 있고, 중심도 무게도 없다. 그들은 사진의 본성을 생각하며 몇 날 밤을 뒤척이거나, 카메라를 메고 먼 거리를 걸어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세계의 모습을 진지하게 인식하거나 그 안에서 독창적인 무엇인가를 이끌어내려고 하지 않고, 오직 현실의 표층을 미끌어져 내리는 듯한 현대사진에 온통 혼을 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그들의 대극점에 서 있는 강운구의 존재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저녁에’는 수동적이다. 스스로 말하는 대신, 대상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 한다는 뜻이다. 눈이 번쩍 뜨이는 장면은 없지만, 그의 사진에는 대상과 만나고 사유되는 분량만큼의 시간의 무게가 담겨 있다. 그의 시선은 현실 대상과 확고부동한 접점을 갖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그림자에 유난히 집착한다. 빛이 차단됨으로서 비로소 나타나는 그림자와, 그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물체는 항상 하나의 쌍을 이룬다. 우리는 그림자가 죽음과 덧없음을, 그리고 빛이 생명과 약동을 상징해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실제 세계가 아니라 그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강운구는 그런 그림자를 통해서 명료함과 합리주의의 다른 실체를 드러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련된 유머감각과 예리한 판단력과 남다른 예지를 갖추고 있지만, 붙임성도 없고 조금도 정치적이거나 사교적이지 않은 그가 다른 사진가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독보적인 위치를 만들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놀라운 일이다. 그는 소재의 선택이나 개성적인 표현 스타일에서 사진철학에 이르기까지 ‘강운구표’ 사진 같은 것을 만들어냈다. 이번 전시는 흐트러지지 않은 발걸음으로 일관된 사진의 길을 걸어온 그가 거의 완결점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을 배반하지도 않았고,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도 않았다. 완강함은 그를 한길을 걷게 만든 원동력이다.
사진은 강운구의 삶의 방식 그 자체다. ‘저녁에’라는 이번 전시제목은 어쩐지 쓸쓸한 울림을 가진다. 그 단어에는 얼마쯤의 상실감과 고독과 두려움이 들어 있다. 그도 일흔의 나이를 바로 앞에 두고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생을 통해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에스키모들은 물범을 잡지 못하는 나이가 된 남자를 노인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강운구가 노인 소리를 그렇게 쉽게 듣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에게 ‘저녁’은 그가 카메라를 더 이상 손에 들 수 없게 되었을 때일 것이기 때문이다.
강운구는 작가만의 세계관과 독창적인 비전, 뛰어난 표현스타일이라고 하는, 이른바 작가주의 작가에게 요구되는 덕목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상업주의가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순도 높은 아마추어정신으로 버텨 나온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그는 명확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한국사회가 놓인 현실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와 현대문명에 대한 저항의식을 작품 속에 반영시켜 나왔다. 그가 한국사진의 장면에서 뚜렷한 존재감과 영향력을 가진 사진가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글 / 김승곤(순천대 교수, 아이포스 대표)
- 이 글은 월간미술 10월호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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