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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하는 눈˝ 구와바라 시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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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해야 할 역사를 그 시대의 유산으로서 남겨두지 못한 사진가는, 다만 그 시대를 살았을 뿐인 한 사람의 방관자에 지나지 않는다.” - 구와바라 시세이의 ‘보도사진가’ 중에서
사진의 원점, 미나마타
구와바라 시세이(桑原史成)가 ‘미나마타(水俣)병’을 찍기 위해서 구마모토(熊本)에 들어간 것은 1960년, 미일간에 체결된 안보조약 개정을 반대하는 좌익급진파 학생들과 노동자연합에 의한 투쟁으로 일본 전국이 거센 안보의 소용돌이에 휩싸여있을 때였다. 도쿄농과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던 그는 사진가가 되기 위해서 사진전문학교에 들어갔지만, 졸업을 했어도 스튜디오나 잡지사 같은데 들어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직장에 메어 있는 사진가들은 안정된 수입이나 신원을 보장 받을 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테마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진짜 이유는 농과대학을 나오고 전문학교 야간부에서 1년 남짓 사진을 배웠을 뿐인 그가 신문사나 통신사, 출판사 사진부 같은 경쟁이 심한 직장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리랜스 사진가로 방향을 잡은 그가 사진가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독창적인 포트폴리오가 필요했다. 다른 사진가를 뛰어넘지 못하는 한, 사진가로서의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진가들이 건드리지 않은, 자신만의 오리지널이라고 할 만한 주제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쿄올림픽을 4년 앞둔 일본의 경제와 산업구조가 급격하게 개편되면서 에너지도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어 가던 때였다. 어느 곳에서나 그런 현대화 과정에서는 희생자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가 첫 도전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한때 일본의 출탄 량의 절반을 생산하던 큐슈(九州)의 한 폐광촌 사람들을 기록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촬영이 일단락되었을 때, 그는 그가 찍었던 폐광촌이 몇 사람의 유명한 다른 사진가들에 의해서 이미 다뤄진 소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진가로서 첫 번째 좌절을 맛보아야 했던 그가 다음 테마를 찾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고향의 어머니가 그를 불렀다. 꿈을 접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그가 시골로 내려가는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을 때까지만 해도, 배웅 나온 친구가 차창 너머로 넣어준 한 권의 주간지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잡지에는 당시 아직 사회문제로 떠오르기 전의 공해병인 미나마타 병에 관한 특집 리포트가 실려 있었다. “가난하기 때문에 독에 찌든 물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었고, 그 독 때문에 불치의 병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그 분노를 어디에 쏟아야 하는가…”. 주간지에 실린 그 기사가 심장을 때리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 평범한 시골 농부로 살아가고 있을 지도 모른다. 거의 뜬눈으로 지샌 그는 하루만 집에서 머물고 도쿄로 다시 돌아와, 미나마타 취재를 위한 기초적인 자료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일본의 고도성장의 그늘에 감추어진 비참한 현실을 기록하는 것으로 사진가로서의 발판을 만들기로 했다. 미나마타에서 촬영을 시작한 지 2년 후인 1962년 9월, 도쿄에서 열린 데뷔 전시는 공해문제가 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한 당시 일본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 한 차례의 전시로 그는 그토록 원했던 보도사진가 대열에 단숨에 뛰어 들게 되었다. 유진 스미스가 미나마타로 건너와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72년의 일이다. 자신감을 얻은 구와바라는 벌써 다음 테마를 물색하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의 한국, 격동의 소용돌이 속으로
한편 1960년, 한국에서는 4. 19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뒤이어 탄생한 장면 내각이 이끄는 제2공화국은 이듬해 일어난 5. 16으로 단명한 정권의 막을 내리게 된다. 구와바라가 미나마타를 찍고 있었던 1960년과 1961년의 한국은 역사상 가장 과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던 시기였다. 그가 한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대학 1학년 때부터였다. 좁은 자취방에 함께 모여 앉아서 외로움을 달래던 지방출신의 학우들 가운데에는 6. 25 때 밀항해서 건너온 완도 출신의 학생이 있었다. 싸구려 위스키가 달아오를 때쯤이면 그는 으레 ‘아리랑’이며 ‘도라지’ 같은 노래를 불렀고, 애조를 띈 구슬픈 가락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미지의 ‘가깝고도 먼’ 한국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다음 테마를 한국으로 정한 것은 어쩌면 운명적인 것이었다.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한국과의 땔래야 땔 수 없는 끈끈한 인연이 반세기 가까이 이어지게 될 줄은 그 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특사가 오가면서 국교수립에 대한 소문으로 양국 사회가 술렁거렸다. 어떤 예감 같은 것이 구와바라의 머리를 스쳤다. 그는 한국 취재에 필요한 자료들을 조사하는 한편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도항 방법을 찾아보았다.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이 들끓어 오르던 1964년 8월 3일, 그래프잡지인 ‘타이요(太陽)’의 특파원 자격을 손에 넣은 구와바라는 긴장감으로 떨리는 가슴을 안고 김포공항에 첫 발을 내디딘다. 그의 본능적인 예감은 적중했다. 입국해서 넉 달 가까이 체재하는 동안, 그는 부산의 산기슭에 빼곡히 늘어선 ‘하꼬방’과 근대화 이전의 농어촌 서민들의 궁핍한 삶, 일본 강점기 시대가 남겨놓은 잔재 등 ‘분단 한국’의 현실들을 기록해나갔다. 일본과는 정식으로 국교가 맺어지지 않았고, 군사정권의 서슬이 한창 시퍼렇던 시절이었다. 프리랜스 사진가로서는 입국은 물론, 정부가 가리고 싶어하는 한국의 ‘치부’에 렌즈를 겨누는 일 자체가 어려운 상태였다. 하지만 어떤 장애도 한국을 향한 그의 열정을 누를 수는 없었다. 아니 스물일곱이는 강력한 자력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입국이 잦아지고, 체재기간도 길어졌다. 그가 한국이 살의 젊은 그에게는 오히려 전신을 옥죄는 듯한 그런 팽팽한 긴장감이야말로 그를 한국으로 끌어들놓인 현실에 가장 광범위하고 깊숙하게 관여하는 것은 1965년으로, 한국을 테마로 한 사진 가운데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진들이 이 무렵 집중적으로 촬영되었다.
1964년 외과 의료병력과 태권도 교관의 파견에서 시작된 베트남전 개입은, 1965년의 비둘기 부대에 이어 청룡, 맹호, 십자성, 백구, 해산진, 백마부대 등 5만 명 가까운 군대를 잇달아 파견하기에 이른다. 10여 년 전부터 시작된 한일협정이 제3공화국의 경제발전 계획과 맞물려 6월 타결의 급한 물살을 타고 있었던 1965년, 그는 두 차례 한국을 찾았다. 그 해 4월에 시작된 한일협정 반대시위로 서울지역에 위수령이 발동된다. 날로 격화되는 시위는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급기야 8월에는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미국의 전략적인 의도나 군사정부가 경제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 돈이 급하게 필요했던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36년에 걸쳐 굴욕적인 식민지 지배를 받아온 일본과 국교를 연다는 것은, 자유당 독재정권에 항거해서 4.19를 일으켰던 한국의 대학생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구와바라는 계엄령이 선포되기 직전의 시위현장에서부터 무장군인들의 고려대 캠퍼스 진입, 청계천 시궁창 물에 빠지면서 진압군에 쫓기는 시위대, 경찰에 연행되는 학생 등, 잇달아 전개되는 긴박한 상황들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5층 이상의 높이에서는 창밖을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을 수도 없었고, 자정이 지난 시간에는 집밖으로 자유롭게 나다닐 수도 없었던 시절이다. 격렬한 데모 현장을 취재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시장에서는 상인이 퍼부은 구정물을 전신에 뒤집어쓰기도 했고, 촬영 현장에서 검문을 받거나 필름을 몰수당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시절, 신문사 같은 어떤 보도매체도 등에 업지 않은 필마단기의 일본인 사진가가 한국의 현실에 카메라를 들이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한 일이었는가는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두렵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격동의 순간들을 기록했다. 추적거리는 비를 맞으며 침묵의 시위를 벌이는 서울대 학생들을 정면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은 구와바라의 사진 스타일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걸작이다. 분노에 찬 함성도 화염병의 자욱한 연기도 없지만, 그 사진에서는 한국이 놓인 당시의 절박한 사회적 상황을 웅변으로 말하는 지성들의 분노에 찬 낮고 무거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것은 역사의 한 순간을 예리하게 잘라낸 뛰어난 기록인 동시에 구와바라 특유의 영상미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다.
가혹한 시련
시위가 잠잠한 날에는 이른 아침부터 카메라를 목에 걸고 숙소인 남대문 근처의 호텔에서 3.1고가도로 건설이 시작된 청계천까지 걸어 나갔다. 청계천 2가에서 동대문을 지나 왕십리에 이르는 긴 청계천변에는 듬성듬성 박아놓은 가느다란 나무 말뚝 위에 2층 3층으로 위태롭게 걸쳐진 무수한 판자집에서는 전쟁으로 고향을 등져야 했던 이북 난민들이 하루하루 고달픈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 아래로는 악취가 코를 찌르는 구정물이 고여 있었지만, 그곳은 아이들에게는 둘도 없는 놀이터였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그의 눈과 가슴을 사로잡았고, 1965년의 서울은 사진가에게 있어서 문자 그대로 무진장한 테마의 보고였다. 5년여의 망명생활을 죽음으로 마치고 귀국한 이승만 대통령의 장례행렬을 찍은 것도, 여의도 비행장과 포항에서 거행된 베트남 파병군 결단식과 부산에서 미군 LST함에 승선하는 청룡여단 군인들, 이국의 전장으로 떠나는 아들을 군용열차의 차창 너머로 애틋한 얼굴로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을 찍은 것도 이 무렵이다. 현대화가 시작되기 직전의 한국에서는 모든 것이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마치 먹이를 쫓는 굶주린 짐승처럼 식민지 시대와 6.25 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한국의 1965년을 그렇게 기록해 나갔다.
뉴스가 될 만한 장면을 찍고 나면 그 자리를 떠나버리는 다른 신문기자들과는 달리, 하나의 테마를 여러 장의 사진으로 표현해야 했던 구와바라는 한 곳에서 촬영하는 기간도 길고 찍는 양도 많다. 1965년의 8개월이라고 하는 장기 체재는 의욕만 앞서 있던 가난한 이방인 사진가에게는 너무나 긴 기간이었다. 돈이 떨어진 그는 가지고 들어온 얼마 안 되는 흑백필름과 우선 급하지 않은 렌즈를 팔아서 남은 기간 동안의 취재비용으로 보태 쓰기로 했다. 달리 비용을 조달할 방법이 없었다. 청계천 빈민가와 미군기지 주변의 여성들, 지하도 계단에 드러누운 노숙자와 뜨내기 노동자들…, 전쟁의 포화가 멎은 지 7년여가 지났지만 아직 극도의 빈곤과 사회적 정치적 혼란 속에 놓여 있는 분단 한국의 암울한 실상을 담은 사진들은 걸러지지 않은 생생한 영상으로 일본 그래픽 잡지들에 소개되었다. 구와바라의 그런 행위가 한국 당국의 감정을 건드릴 것이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촬영에만 열중해 있던 구와바라는 자신에게 시련의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의 취재활동이 관헌에게 트집을 잡힐만한 완벽한 사유가 된다는 사실도,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필름밀수’라는 혐의로 두 달 넘게 경찰서에 드나들며 조사를 받던 그는 결국 그 해 12월 1일 관세법 위반으로 강제 출국을 당하고 만다. “… 전쟁이 한창인 베트남에도 갔고, 내란 상태의 캄보디아나 아프간 같은 곳에도 가서 취재했지만, 그 때처럼 두려움과 정신적인 압박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한마디로 ‘공포’ 그 자체였다.” 남대문경찰서 외사과에 불려가서 심문을 받았을 때의 심경을 40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렇게 술회한다. 촬영하고 싶은 주제가 산처럼 많이 남아 있었지만,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외국인에게는 적어도 3년 이내에 재입국 허가가 떨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한국을 필드로 정한 보도사진가에게는 더없이 가혹한 처벌이었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전면전으로 확산된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은 완전 철군이 이루어지는 1973년까지 연 34만 여명의 군대를 그곳에 파병했다. 한국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외국의 전장에 군대를 보내는 것은 ‘백의민족’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강제 퇴거 이후, 구와바라가 네 번째로 다시 한국 땅을 밟은 것은 미국과 월맹 사이에 휴전협정이 시작되기 직전인 1968년 4월이었다. 사이공으로 날아간 구와바라는 막바지에 이른 베트남전의 한국군을 취재하면서, 현지 한국군과 일종의 동지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그곳 대사관을 통해서 그토록 원했던 한국 행 입국비자를 발급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열정과 집념이 얻어낸 승리였다. 블랙리스트에서 이름이 삭제된 그는 15일간의 짧은 체재기간을 허락 받아 3년 만에 한국 땅을 밟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식 취재 비자를 받아서 다시 들어오는 것은 60년대의 마지막 해인 1969년 12월의 일이다.
첫 방한으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의 사회와 경제는 경이적인 규모와 속도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1986년의 아시안게임과 88년의 서울올림픽을 잇달아 개최하면서 한국의 국제적인 위상도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80년대 후반에 실시된 어느 의식조사에서는 도시민의 80%가 자신을 중산층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했을 정도로 국민들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 무렵 구와바라는 한국을 빈번하게 드나들며 수출로 미증유의 활황을 누리는 자동차산업과 조선소 등 남부의 공업지대와 자유분방한 대도시 젊은이들의 새로운 풍속도를 필름에 담았다. 80년대의 슬로건은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였다.
또 하나의 좌절
1980년 5월 18일, 덕수궁에서 한가롭게 탈춤과 마당극을 촬영하고 있던 그는 도쿄에 있는 아내로부터 ‘광주사태’를 알리는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올 때까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 군부에 의해서 전국 보도기관에 엄격한 보도통제가 펼쳐진 상태였기 때문에, 방송이나 신문에는 사태에 관한 단 한 줄의 보도도 나오지 않았다. 군부의 퇴진과, 계엄령 철폐, 민주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폭동의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벌어진 사태였다. 구와바라는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미 계엄군에 의해서 출입이 완전히 봉쇄된 광주로 들어가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관광비자로 입국한 그는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이번에는 강제퇴거 정도로 일이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3년 전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역사적인 순간에 입회해서 그것을 기록하는 것은 보도사진가의 사명이다. 1991년 8월 19일, 그는 소련 붕괴의 순간을 맞는 모스크바의 정경을 기록했다. 그러나 자신이 한국에 체재하고 있던 1980년 5월 18일, 두세 시간 남짓한 거리의 광주에서 일어난 이 중대한 사건을 바로 눈앞에서 놓쳤을 때의 좌절감과 허탈감, 1975년 4월 30일 캄보디아에 있으면서도 몇 시간 거리에 있는 사이공의 함락 순간을 기록하지 못했던 일은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통한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조작하고 연출해서 찍는 ‘예술’ 사진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만들어 낼 수 있고, 붉은 단풍이 절정인 풍경사진을 찍을 기회를 놓쳤다고 해도 이듬해 가을에 다시 가서 찍으면 된다. 그러나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은 그 때와 장소에 사진가가 서있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촬영할 수 없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말은 보도사진가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한 번의 기회를 놓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영원히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황금시대로 불리는 1950년대에서 20세기 말에 이르는 반세기 동안 구와바라는 자신이 카메라로 채집한 생생한 증언들을 신문과 잡지, 사진집과 저서를 통해서 발표해왔다. 취재하는 동안 수많은 난관들을 거쳐 나와야 했지만, 그것은 의무 지워진 일도 아니고 다른 누구로부터 강요 받은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어느 누구로부터도 환영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그토록 한국에 집착했던 것일까?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와 외국 세력에 의한 지배, 민족과 국가의 분단과 첨예한 군사적 대립, 군사정권의 압제, 유사 이래 최초의 해외 파병, 한일국교 정상화, 급진적으로 추진된 경제개발정책과 거센 현대화의 소용돌이, 민권과 민주화 운동…. 1960년대와 70년대의 한국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러나 확실한 존재감을 가진 어떤 거대한 에네르기로 나라 전체가 꿈틀대고 있었다. 그런 한국은 보도사진가로서의 꿈을 실현시키려는 젊은 구와바라의 눈에는 어떤 위험과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도전할만한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테마로 비쳐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구와바라의 영상미학
그는 폭력과 부조리한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 비판하거나, 포탄이 작렬하는 전장을 뛰어다니는 그런 타입의 사진가가 아니다. 그의 렌즈는 항상 사건의 전면에서 약간 벗어난 장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그런 사진들이야말로 오히려 현실의 핵심을 찌르는 본질적인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읽어내도록 만든다. 그의 뛰어난 영상미학과 표현 스타일은 한미합동 군사훈련인 팀 스피릿을 찍은 사진에서 잘 드러난다. 거대한 C-135 수송기가 경부고속도로의 비상 착륙장에 내려 앉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들과,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육중한 탱크 쪽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내아이, 한적한 농촌의 논 가운데에 설치된 미사일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 옆을 지나가는 여인네들, 물보라를 일으키며 해안을 달리는 상륙용 장갑차를 바라보는 어촌마을 사람들…. 가공할 첨단 살상무기와 무방비한 농어촌 사람들과의 그런 절묘한 콘트라스트를 통해서 그의 사진들은 전쟁과 평화에 대한 상징성을 강렬하게 환기시킨다.
휴전선과 판문점, 베트남 파병, 청계천 복개공사, 판자집들, 농어민과 서민들의 생활, 농촌근대화, 주한미군, 군사훈련, 고속도로건설, 지하철, 자동차, 제철, 선박을 비롯한 중화학공업에서 도자기와 탈춤에 이르기까지, 그는 50여 회에 걸쳐 한국을 드나들며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경제 드라이브정책이 급속도로 추진되던 70년대에 걸쳐 긴박하게 전개된 한국의 시대적인 상황들을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취재했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그의 관심은 ‘바쁘다, 바빠’로 상징되는 70년대와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80년대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에 이르기까지의 역동적인 변화와 발전의 시기를 마지막으로 차츰 식어가기 시작했고, 서울올림픽이 개최되는 1988년 무렵을 마지막으로 그의 한국에 대한 기록 작업은 일단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 동안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기는 했지만,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기반이 만들어진 90년대 이후의 한국에서는 더 이상 그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테마를 찾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무렵을 경계로 그의 관심은 차츰 청학동이나 도자기나 가면극 같은 전통과 문화의 원류를 찾아 내려가는 정적인 활동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1989년, 그 동안 기록한 방대한 양의 필름 가운데에서 370여 점을 골라 ‘격동의 사반세기’라는 타이틀로 서울에서 전시가 개최되었다. 25년 동안의 한국 취재를 총결산하는 성격의 대규모 전시였다. 칠순을 넘긴 지금, 그는 자신이 한국 현대사의 편린들을 영상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망각의 어둠 속에 영원히 묻혀버렸을지도 모르는 중요한 역사의 장면들을 소중한 영상기록으로 후세에 남겨둘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진의 본질은 기록
도전과 파란으로 가득 찬 그의 사진 인생은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와도 같다. 그러나 그것은 연출되거나 가공된 허구의 드라마가 아니다. 누가 그에게 사진을 정의하라고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기록’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사진의 진정한 가치는 사실의 기록성에 있으며, 현실에 대한 사진의 입증 능력은 부정될 수 없다. 그것은 한 장의 사진은 물리적인 대상이 사진가의 눈앞에서 존재하고 그 시간 사진가가 그 자리에 입회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쳐 나와야 했던 역사의 시간들은 구와바라의 작은 필름 조각들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가 기록한 역사의 장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가치가 더욱 커질 것임에 틀림없다. 여간해서 겉으로 나서는 일이 없는 조용한 성품을 갖고 있지만, 그의 내면에는 외모나 언동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예리한 통찰력과 강인한 신념이 잠재되어 있다. 1964년 그가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4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고향인 쯔와노(津和野)의 그의 이름을 딴 ‘구와바라 시세이 사진미술관’에서는 일 년 내내 그의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30권 가까운 책을 펴냈고, 그 가운데 한국에 관한 사진집만 여섯 권이다. 그가 사진을 시작한 이십 대 청년시절에 목표로 정했던 제1급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의 움직일 수 없는 업적과 명예와 위치를 쌓았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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