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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젊은 다큐멘터리 사진가 I - 이규철
한국의 젊은 다큐멘터리 사진가 I
이규철 “관계의 진화, 이미지의 퇴적암”
기획_ 인터뷰_사진/ 강제욱
주최/ 아이포스 웹진
장비 협찬/ 소니코리아
1. 기획자의 글
2009년 한 해 동안 한국의 젊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을 소개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됩니다. 여기에 소개되는 작가군은 젊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작가의 작품세계를 점차적으로 완성시켜나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작가와 관객과의 적극적인 소통, 그리고 작가 스스로 다큐멘터리에 대한 깊은 고민을 통해서 지금까지의 작업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 시도되었습니다.
이 기획의 목적은 작가의 위대한 세계를 칭송(?)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젊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을 한 명 한 명 무대 위에 올려놓고, 솔직하고 날카로운 비판과 담론들을 만들어갈 계획입니다.
다큐멘터리의 위기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만, 다큐멘터리 사진가 자신도 책임의 많은 부분을 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젊은 다큐멘터리 작가들의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들과 각자의 작업 스타일을 소개하는 등 친근한 이미지로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진행시켜 나가겠습니다. 사진가를 주인공으로 하는 휴먼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1. 온라인 매체, 2. 오프라인 매체, 3. 오프라인 전시장
등 3개의 장소에서 동시에 진행됩니다.
온라인 매체인 아이포스 웹진에 프로젝트 전반에 관한 기사들이 올려지며, 오프라인 매체인 월간 사진예술에는 작가의 작품에 관한 김석원(사진비평) 씨의 비평 글이 실립니다. 또한 포스갤러리에서는 작가의 지금까지의 작업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회를 열고, 또한 작가와 관객이 만나서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합니다.
온라인에서는 지금까지 작가가 진행시켜 나온 작업들을 시기별로 정리하여 보여주는 온라인 전시와 인터뷰, 본격적인 포트레이트, 동영상 인터뷰를 함께 올리는 등, 사진가의 전모가 입체적으로 소개될 것입니다. 또한 그 동안 작가를 조망해온 다양한 텍스트들이 함께 선보이게 되며, 그 동안 작가가 발간한 책들이 모두 링크가 되어 내용 조회는 물론, 구입에 관한 안내까지 받을 수 있도록 짜여질 것입니다.
포스갤러리에서는 작가의 초기 작품부터 최근 작업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리지널 프린트뿐만 아니라 밀착인화 필름, 장비 등도 전시가 될 것이고, 작가의 그 동안의 기념사진 출간한 책들 사진가의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다양한 오브제들이 함께 전시됩니다. 이 전시회는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전시가 되는 행사입니다.
첫 번째 타자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이규철 씨입니다.
2. 이규철의 작품 이야기
1. 군인841의 휴가 (촬영1990-1991년)
2. 용담 댐 수몰지구 (촬영1993년)
3. 비 온 날의 오후 (촬영2001년)
4. 달빛 소금에 물들다 (촬영2004 - 2006년)
5. 見, 다르샨 (촬영2007년)
6. 소설가 (촬영2005년)
3. 사진가 이 규 철 은 누구인가?
이 규 철
1987년 대구 경북고등학교 졸업
1994년 중앙대학교 예술대 사진학과 졸업
1994년 시사저널 사진부 근무
1994년 -1998년 웅진 출판사 사진부 근무
현 재 스튜디오 aza
개인전
‘달빛, 소금에 머물다’ 갤러리룩스 초대전(인사동) 2007. 8
'군인, 841의 휴가' 스페이스 사진 갤러리(충무로) 2002. 11
단체
2008 수목금토전-건희갤러리
2008 창원아시아 미술제-성산아트홀-다르샨
2008 Art Beijing International Artist Festival
2006 미소전 - 백혈문화재단 -토포하우스(인사동)
2006 새사회연대 제3회 인권전 광화문 신한갤러리
2005 프랑크프르트 도서전 주빈국 라이프찌히행사
한국의 소설가작업
2005 인권위원회 인권사진프로젝트 중국동포 현실문화연구출판
2004. 8동강 사진페스티벌 다큐멘터리사진가 33인전
2003.11경기문화재단 초청 사진전
2002. 12제14회 조국의산하전 '공유' 관훈갤러리
2002경기문화재단 특별 사진가 기금지원
2001. 10포토저널리즘 페스티벌
2001. 8경기문화재단 개관 초대전
2001. 08도자기 엑스포 사진전 신공항
1999, 2000젊은사진가전
1999, 2001, 2002,2004 출판사진가협회전
1995서울시립미술가 초대작가전
사진집
2002 '군인, 841의 휴가' 도서출판가각본
2005 ‘같이 왔으니 같이 가야지예’ 도서출판이른아침
‘여행하는 나무’ 청어람
5. INTERVIEW
1983-1986 고등학교 시절, 사진과의 만남
강제욱
: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사진을 시작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듣고 싶습니다.
이규철
: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여러 동아리를 두고 어디로 들어갈까 고민을 했습니다. 짝꿍은 미술반에 들었는데, 미술반에 들까 하다가 저는 비로 결과를 볼 수 있는 사진에 마음이 끌려 사진반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마침 외삼촌이 중동에서 일하고 돌아오면서 야시카라고 하는 거리계 연동식 카메라를 사가지고 와서 저에게 선물로 주었던 것이 더 큰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시절에는 모형항공 동아리 활동을 했었지요.
그런데 고등학교에는 모형항공 동아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동아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사진동아리였죠. 그 때는 사진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고등학교 사진반의 이름이 ‘청운사우회’에요. 사진가 이기명, 송정근 등이 같은 동아리 출신이죠. 또 대구지하철 화재사건 때 핸드폰으로 촬영한 영상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는데, 그 영상을 촬영한 것도 청운사우회 회원이었지요.
그런데 옆 여고 사진동아리에 한 여학생이 있었는데, 마음에 드는 그 여학생에게 나만의 사진을 보여주고 인정받고 싶었지요. 그 학교의 사진반과 우리학교 사진반이 교류를 하고 있었거든요. 만나자니까 저에게 그러더라구요. 자기는 공부를 할 때니까, 공부하고 대학에 들어가서 보자. 그 친구는 결국 지리교육과에 들어갔어요. 제가 지원한 중대 합격발표하기 전에, 그 여학생에게 대구에서 만나자고 편지를 보냈는데 약속 장소에서 서너 시간을 기다려도 안 나타나더라구요. 혼자 좋아했던 짝사랑이었던 거죠. 그때 깨달은 것이 사진이다, 나는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자신감이 없었는데, 삶의 열정이 좋은 결과물로 돌아온 거지요.
그 후로 사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사람들과 편하게 만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사진이 나의 애인이 되었습니다. 하여간 그 여학생과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어요. 수년이 지나서 95년도에 그 친구랑 여행을 가게 되었어요.
그냥 친구로요. 그녀가 고등학교 때 저에게 사진에 대한 열정을 주었죠. 짝사랑의 그림자는 남아 있었어요. 그 친구에게 왜 약속장소에 안 나왔냐고 물어보니까 자기는 그런 편지를 받아본 적이 없데요. 엄마가 버렸다고 하더라구요. 나중에 개인전할 때(2002년) 그 친구를 초대했어요.
1985년 경맥제 청운사우회 전시회(사진 맨 오른쪽이 이규철) / 1985년 수학여행에서
1986년 경맥제 방명록, 친구들이 이규철에게 남긴 글
1987년 중앙대학교 1학년 때 동기들과 함께한 전시회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이규철, 네 번째는 사진가 서헌강)
/ 88올림픽 연합통신사 인턴시절 올림픽 체육관에서
1987-1993 88올림픽, 대학, 군대, 졸업 무렵
88올림픽이 열렸어요. 그때 대학교 2학년이었는데 연합통신사 인턴으로 두세 달 일하게 되었어요. 선배들이 찍어온 사진, 중국신화통신, 러시아와 미국의 통신사 등, 전 세계 내노라 하는 사진가들이 와서 일하는 것을 보고 나도 언론사에 들어가서 역사적인 기록을 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지요.
올림픽 끝나고 휴학을 하고 입시를 가르쳤어요. 닥터 프린트의 유병욱과 광고사진 하는 몇 명이서 학교 후배들을 가르쳤어요.
그러다 1989년 1월에
군대
를 갔어요. 한쪽 눈이 안 좋아 단기병으로 갈 줄 알았는데, 2급 현역으로 가게 된 거죠.(웃음) 당시 면제도 많았는데 결국 군대를 가게 됐어요. 군대가 싫었고 어떻게 이 징글징글한 시간을 보낼까 생각을 했죠. 그래서 사진병을 하려고 생각했어요.
사진병이 되고 싶다는 의사표현을 했으나 당시 티오가 없었어요. 그냥 그렇게 소대까지 내려가게 됐어요. 처음엔 찍을 기회가 없었는데, 여러 번 이야기하니까 이등병 때부터 사진을 찍게 해줬어요.
사진병이 아니라서 기념사진이나, 사진 찍히고 싶어 하는 제대하는 병장이나, 중대장 행사나 훈련하는 모습 같은 것을 찍게 되었죠. 그러다 이사종으로(행정병)으로 6개월 말에 발령이 났어요. 행정관에서 기록을 했어요. 물품관리를 맡았죠. 부대에 있을 때 인사계 과장님이 행사 있을 때마다 저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하니깐 부대원들이 쟤는 사진도 찍는 행정병이라고 말했어요.
일병 말부터 집에 있는 카메라 들고 부대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캐논 AE-1카메라에 Kodak Tri-X(감도400), Plus-X(감도125) 필름을 사용했죠. 부대에 암실이 없어서 휴가 나갈 때마다 현상을 했었죠. 상병 때 부사수가 생겼는데 찍어서 냉장고에 넣어 놓았다가 걔보고 울산에 나가서 필름을 현상해 오도록 했어요. 그 친구는 단기병이라 출퇴근을 했거든요.
1년에 두 번씩 부대 검열이 나왔어요. 걸리면 필름을 뺐기게 되니깐 검열 나오면 필름을 산에다 묻어 두었어요. 주중엔 근무를 해야 하고, 어슬렁거리면 혼나니까 토, 일요일이나 수요일 오후에 사진을 찍었어요. 그러다 병장이 되니까 카메라를 매고 다녀도 아무도 말도 안 하더라구요. 중대장이 시켰나보다 그렇게 다들 생각했어요.
캐논 AE-1카메라에 2.5m 싱크로 케이블로 메쯔45 스트로보를 연동해서 촬영을 했었어요. 그때 사진에는 일상적인 풍경이 많아요. 지긋지긋하고 벗어나고 싶었고. 했던 생각 또 하고 또 하고 무뎌지고 그런 답답함에 의미를 두고 기록을 했어요.
나중에 사진전을 하고 났더니 사람들은 그것을 저의 군대생활의 추억쯤으로 받아들이더라구요. 저의 의도와 관객들의 반응에는 간극이 있었어요. 제대 후에는 예비군 훈련도 작업으로 담으려고 했으나 결국 완결시키지는 못했어요.
1989년 훈련소, 부산 / 1990년 상병시절 행정반에서
제대하고 복학을 했어요. 구본창 선생님의 파인아트 수업을 들었는데, 과제로
비오는 날의 오후
를 찍게 되었죠. 느낌이 좋다고 하셨어요. 정주하 선생님은 그 작업을 보고 당신의 ‘사진의 폭력’ 시리즈와 유사하다고 하셨죠.
플래시를 사용한 방법은 비슷하지만, 저는 빗물에 반사시켜서 찍었고 1600으로 증감해서 찍는 작업이었죠. 국민학교 5학년 때 비가 주룩주룩 떨어지는데 물이 흘러가는 게 음악 같기도 하고, 스산하고 맘이 짠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런데 나이 먹고 10여년이나 지났는데도 비가 오면 그런 느낌이 되돌아 왔어요. 그 느낌을 이미지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비가 오는 날 꿀꿀해서 술 찾는 것처럼, 비오는 날 내 기분이 왜 그럴까. 왜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찾을까. 정작 만나지 못하고 어떤 감정의 상태로서 이렇게 계속 침울하게 우울한 상태로 살아가는 걸까. 그것을 즐기는 거 같기도 했어요.
또 한편으로는 내가 생각해도 이상해요. 92년도에는 휴학을 하고 작업을 했지요. 제가 태어난 곳이 진안인데, 거기 근처에
용담댐
이 만들어지게 되었어요. 태어난 곳에서부터 주변 2km까지 수몰되게 되었죠. 우리 마을은 다행이 수몰지구는 아니었어요.
6년대 말 무렵에는 엄청난 기근이 들려서 지금의 중국처럼 한국 농촌사람들이 도시로 많이 이동했어요. 기근 때문에 우리 가족도 제가 태어난 지 1년이 안 되어서 농촌을 떠나 대구로 이주를 했어요. 대구에 건설 일을 하는 친척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대구에서 쭈욱 자라게 됐는데, 명절이나 방학이 되면 시골로 내려가 한 달씩 있었어요. 아버지 8남매 친척 모두 다 진안에 그대로 살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어릴 때는 대구의 기억보다 진안에서의 기억이 더 많아요.
그러다 졸업 전시를 위해 용담댐 작업을 하게 된 거지요. 졸업 후에도 98년, 99년까지 명절 때마다 진안에 들러 작업을 계속 했어요. 수몰 예정지구 주민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화면에 담았어요. 이주 문제도 함께 다뤘죠. 댐이 건설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 작업을 했지만, 사람들에게 보여줄 기회를 잡지는 못했어요. 생각만 있었고. 내용이 진부하게 느껴지고 답습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것이 사진공부였다고 생각을 해요.
3년-1998 회사생활 시사저널, 웅진, IMF 시대
93년 겨울부터 시사저널 인턴생활을 3개월 동안 했어요. 스트링어 계약직으로 들어갔죠. 3개월 만에 웅진으로 옮겼어요. 3년만 일하자고 생각하고 회사에 들어갔었죠.
웅진에 들어가니 신화적인 사진가들이 거기 다 있었어요.
제가 들어가기 직전에 강운구, 권태균 선생님들이 생태 책을 만들고 있었죠. 한국의 자연탐험 시리즈였어요. 거기서 이갑철 선생님도 생태 책을 냈어요. 윤광준, 심환근, 여동완 선배도 알게 되었죠. 이때 처음으로 사진가들과 교류를 하게 됐어요.
그때 하게 된 일이 단행본, 잡지, 전집, 유아물 등이었어요. 한국의 전통문화, 생태관련도 배우게 되고 5년 동안 거기 있으면서 제 코란도 차로 22만km를 달렸어요. 회사에서 출장비 주며 찍어 와라 하면 찍어오는 식이었어요. 장례, 굿, 건축사진도 찍었어요.
그 사이에 시립미술관에서 단체전(1995년)을 했는데, 저는 파노라마로 관계 시리즈를 작업해서 전시했었죠. 사람들의 관계성을 보여주려 했는데, 작업에 깊이가 부족했어요. 그 주제를 계속 했으면 좋았을 텐 데 아쉬움이 남아요. 비오는 날의 오후도 관계성이 베이스였죠. 군대 작업도 마찬가지구요. 회사는 전통문화 전집만 끝나면 나오려고 했는데, IMF 때문에 그 일 자체가 없어져 버렸어요.
1998년 웅진에서 퇴사하는 날 심환근 선배와 함께
7년- 다큐넷 창간, 워크샵
1997년에 주변 포토그래퍼들과
다큐넷
을 결성을 하였어요. 96년에 다큐사진 스터디를 만들었었죠. 참여한 사진가가 송정근, 김상진, 이상엽, 나명석, 이규철, 전성현, 이기명, 허영무 등이었어요.
1996년에 다음(http://www.daum.net)에서 이진혁 큐레이터 진행으로 버추얼갤러리 전시회를 열었어요. 그 영향을 받아서 다큐넷 웹진을 만들게 됐어요. 그때 우리들 생각은 인터넷 상으로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라고 느꼈어요. 좋은 장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기획을 송정근이 맡았고, 결국 큰 주목을 받았지요. 연합뉴스부터 시작해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매체가 취재해 갔어요. 컴퓨터 앞에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냈죠. 그때 사진이 어딘가 있을 거에요.
송정근의 작업실 지하 카페에서 오픈행사를 열었어요. 당시 시사저널 기자인 나명석이 다큐넷 회장이었어요.
창간호의 메인 화두가 뭐였냐면, 최저 생계비의 기준이었어요. 제가 맡은 것은 부랑아였는데, 96년, 97년에 회사 생활하면서 부랑아들을 쫓아다녔어요. 박자유라는 이름이었어요. 한 달 동안 그 사람 만나려고 여기저기 쪽방까지 찾아다녔어요. 결국 찍으라고 해서, 2박3일 동안 지하철도 같이 타고 길가에서 술도 같이 마시면서 찍었지요. 그때 이문재 선배가 글을 써줬지요. 부랑아의(홈리스)의 사회적인 이야기들이었는데 괜찮았어요.
1997년 워싱턴 워크샵 당시 기념사진. 좌로부터 나명석, 레자, 이규철, 석재현
거기에 고무되어서 97년도에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워크샵
을 만들었어요. 디렉터가 오하이오대 교수로 갔어요. 레리 교수였어요. 석재현이 다리를 놨죠.
먼저 레리 교수를 초대해서 96년에 한국에서 워크샵을 했어요. 행사를 치루고 내년에 우리가 갈 테니까(사진가들을 데리고) 워크샵을 미국에서 할 수 있겠는가 타진을 했어요. 래리 교수가 현지 진행을 맡아서 해줬어요. 호텔도 예약을 해줬고 참가자들은 한 사람 당 250-300만원 정도 경비가 들었어요.
사진가 12명이 미국으로 갔죠. 거기서 유진 리차드, 김영희,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스탭 기자인 하베이와 함께 워크샵을 했어요. 워싱턴에 있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본사를 방문하고 다른 언론사들도 탐방했지요. 사진박물관도 가고 워크샵 과제로 워싱턴을 주제로 그곳 지역문화에 관한 작업을 했죠.
그날 찍어서 바로 현상해서 저녁에 토론과 평가를 했어요. 다음날 또 찍고 강의를 들었어요. 다들 굉장히 고무되어서 한국에 돌아왔어요. 돌아와서 원종란 씨가 한국에서 비슷한 워크샵을 만들었죠. 한국 사진가들을 데리고 한국에서 하는 행사였죠. 마침 IMF가 터져서 해외는 더 이상 못 가는 상황이 되었죠.
다큐넷은 97년에 1월에 생겼다가 7월에 해체되었어요. 티격태격 내부적으로 다투었어요. 8명의 사진가가 있었는데 서로 견해가 달랐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다큐넷이라는 것이 수익성이 생기는 일은 아닌데, 일의 분담 때문에 문제가 생겨서 손을 떼게 되었어요. 비싼 양주 먹이고 흩어지게 되었죠.
이후에 99년도가 되자 나명석 선배가 네이버에서 후원금을 받아서 이상엽과 함께 이미지프레스 웹진을 만들었어요. 나명석 선배가 이후에 스튜디오를 하면서 이미지프레스를 이상엽에게 넘겼어요.
프리랜서, 스튜디오, 그리고 현재
98년 10월에 회사를 나와서 프리랜서 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회사를 나오면서 1-2년 정도 유랑을 하면서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못했어요. 사보도 하고 다양한 일들을 했죠. 2001년까지 했죠.
회사에서 나오면서 6개월은 놀고 6개월은 일하면서 살고 싶었어요.
달력
을 만들면 그렇게 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달력을 수집했어요. 일본에서도 사 모았죠.
99년 여름에 500만원을 대출받아서 한 달 동안 와이프와 함께 중국여행을 했어요. 베이징, 내몽골, 계림, 광주, 홍콩 등을 여행했었죠. 귀국 후에 과학도감의 식물편(금성출판사) 14권을 작업했어요. 당시 남양주의 전원주택에서 생활을 했는데 다행히 텃밭이 있었어요. 그래서 30종의 씨를 뿌리고 밭을 갈아서 1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사진을 찍었어요.
2001년에는 다큐사진연구원을 나명석 선배로부터 인수를 했어요.(현 아자스투디오) 명석한 선배에요. 프렌차이즈라는 잡지를 만들었고, 그 잡지의 사진을 찍어줬지요. 그리고 2000년부터 출판, 잡지, 유아 아동, 건설 브로셔, 지자체 선거 사진 같은 것들을 매년 촬영하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돈 맛을 보게 된 것이죠. (웃음)
2002년도 즈음에 이기명 선배가 유학을 갔다가 한국에 돌아왔고 이미지프레스에 성남훈, 이기명, 그리고 제가 투자를 했어요. 이미지프레스 사무소는 처음에 다큐사진연구원에 같이 있다가 독립을 해서 충정로 사무실을 열었어요. 그때 보증금과 운영비를 4명이서 같이 냈어요. 매달 10-20만원씩 냈죠. 그 건물에 E-Book를 만드는 회사가 같이 있었어요. 충정로사무소를 정리하면서 이미지프레스는 개인 운영으로 바뀌게 되었어요.
이때 즈음에 찍은 사진가지고 책으로 몇 권 엮었어요. '같이 왔으니 같이 가야지예'(이른아침, 2004)를 여의주 쌍용사보에서 만들었어요. 이때 사진 중 일부가(사보를 위한 작업. 전국을 다니며 우리의 땅 -장터, 마을, 옛길-를 기록함) 이미지프레스 무크지에 나중에 실리게 되었죠.
99년도에
출판사진가 협회
를 만들었었는데, 2001-2002년도에는 회장을 했어요. 전시도 하고 친목도 도모하는 모임이었죠. 중국 가서 찍은 사진도 걸고 2003년도에는 연변에 가서 백두산, 해란강과 항일 유적지 사진을 찍었어요. 그때 아는 선배가 거기서 장사를 하고 있었거든요. 순수한 여행 목적으로 갔었어요. 그 전에 96년에는 베트남에 간 적도 있었어요. 그게 첫 해외여행이었지요. 회사 생활을 할 땐데 휴가 받아서 베트남을 일주했죠.
그러다가 2002년도에 경기문화재단으로부터 기금을 받아서 첫 개인전을 하게 되었어요. 스페이스사진 갤러리에서(현 갤러리 브레송) 했죠. 전시 제목은 ‘군인 841의 휴가’였어요. 방송만 열 군데 정도 와서 취재를 해 갔어요. 이 전시회가 제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죠.
사실 이미지프레스에만 올릴려고 했으나 반영이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전시만을 위한 홈페이지를 따로 만들게 되었어요. 이게 지금의 블로그 같은 형태였어요. 텍스트는 전문작가가 써 줬어요. 그냥 이미지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보고 자기의 느낌을 글로 남길 수 있게 했어요. 온라인 전시로서는 처음으로 하는 시도였죠. 소재의 특이성, 플래시의 사용 등이 신선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 굿디자인 홈페이지로 선정되기도 하였어요. 그래서 아 나는 전시할 때마다 홈페이지를 만들어야겠다. 플래시를 많이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002년 첫 번째 개인전 오프닝 행사장면
대학교 다닐 때 굿사진을 찍으면서 이자균 연구원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후 10년 동안 그와 계속 교류를 하면서 굿사진을 찍었어요. 제 생각은 이미 김수남 선생님이 다 정리해서 나는 뭘 해야 할까 고민을 했어요. 그래서 황태도 풍어제, 동해단 별신굿, 경기도 도당굿 등을 찍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동해안 별신굿이 마음에 들어요. 화려하고 주빈들과의 어울림이 많았어요. 주로 풍어제 굿 할 때가 되면 연락이 왔어요. 자비를 들여서 1년에 두서너 번 정도 갔었죠.
그러나 2002년부터는 스튜디오를 하면서 못 가게 되었어요. 그 때 사진들은 2001년 포토저널리즘 페스티벌을 할 때 발표했죠.
2005년에는 인권위원회의 프로젝트를 하면서 중국동포들을 기록하는 작업을 했어요. 일제 시대에 중국으로 갔다가 자녀들이 한국에 와서 노동자로 일하는 모습. 할아버지와 손주 가족들이 한 가족으로 모이는 이야기를 추석 풍경과 함께 담았어요. 이후에는 백혈병을 주제로 하는 미소전에도 참여를 했구요. 최근 3년간은 사회연대 인권전에도 참여했어요.
그러다 2007년에
‘달빛 소금에 머물다‘
라는 개인전을 했어요. 어떻게 한 작업이었냐면, 일단 음악을 듣고 그 음악에 감성이 느껴지잖아요. 그 음악에 연상되는 장소가 생각나고 그 지역에 가서 그 음악의 느낌을 사진으로 찾아가는 작업이었어요. 여행이라는 코드에 음악을 넣고 나의 감성을 다시 거기에 넣었어요. 찍은 시리즈들 중에 상징적 이미지만 추려서 전시회를 하게 된 거에요. 플래시를 이용해서 홈페이지도 만들었어요. 원래는 출판이 목적이었는데, 마침 갤러리 룩스의 초대를 받아 전시회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죠. 감정적으로 너무 많은 에너지가 고갈되어 있는 힘든 시기였고 출판은 결국 못했어요.
최근에 중국에서 열린 99텐트전에 참여하면서 중국에서 찍은 사진을 이용한 설치작업을 선보였어요. 그때 한 큐레이터를 만나 작년에는 창원아시아미술제에 참여하게 되었죠. 또 얼마 전에는 농민신문사의 최수연 씨가 기획하는 ‘수목금토’전에 참여했어요. 전 토(흙)를 맡게 되었죠. 2005년도에 지질학 관련 책을 보고 영감을 느껴서 진행을 하고 있는 작업이에요. 작년에도 서너 번 촬영을 다녀왔고, 올해도 한 번 다녀왔어요. 선캠브리아기지 층을 중심으로 촬영을 하고 있어요. 4x5 대형카메라로도 찍고 디카로도 찍고 있어요.
2008년에 중국에서 열린 99텐트전에 출품한 이규철의 사진 설치작업
/ 2008년에 중국에서 열린 99텐트전의 사진 설치작업
강제욱
: 참 많은 일들이 있었군요. 그런데 혹시 영향을 받은 사진가가 있습니까? 사진가가 아니더라도 자극을 받았던 매체라든지...
이규철
: 알렉스 웹의 사진을 좋아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좋아했었죠. 사실은 사진역사에 나오는 사진들이 와! 하고 좋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알렉스 웹의 컬러, 구도 이런 것을 좋아 합니다. 그 중 아이티의 내전을 다룬 작업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강제욱
: 18년 동안 작업을 해오셨는데요. 본인의 작업에 가장 중요한 주제는 무엇인가요? 그 주제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는가요.
이규철
: 제 작업의
주제는 주로 관계성에 관한 것
입니다. 제 작업의 가장 큰 흐름은 “군대->비오는 날의 오후->용담댐 수몰지구->달빛 소금에 머물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90년부터 18년에 걸친 작업입니다. 나와 사회, 나와 주변 그리고 나와 나의 내면과의 관계성에 관한 작업입니다.
특별히 다큐멘터리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에 맞아서 한 것이죠. 그 것을 통해서 불합리하거나 감정적인 것, 사회적인 것들에 대한 기록을 했고, 외부사람들이 공감해주기 바라는 저의 바램이 있었습니다.
기록이라는 형식은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라서 선택을 했습니다. 군대의 시대적인 상황, 내가 머무는 상황, 현재성은 없고 감정적인 것만 있습니다. 자랐던 곳에 대한 기억과 향수. 그 안에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변해오고 있는지.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기억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이미지로 보여지길 원했고 삶의 궤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다큐멘터리입니다.
강제욱
: 가장 애정이 가는 작업은 어떤 작업입니까?
이규철
:
군대 작업
에 가장 애정이 갑니다. 그리고 최근에 전시한 ‘달빛 소금에 머물다’가 작업을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사진입니다. 군대는 대한민국의 관계의 축소판입니다. 계급, 조직사회의 특성을 알게 되면서 우리 모두는 20대 이후의 삶을 지배하는 의식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지요.
야생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가축처럼 애완견처럼 길들여지고, 모난 부분이 깎여지면서 조직성에 길들여지는 느낌, 흔히 철든다는 것과 획일화된다는 것과 사회화된다는 것, 순수함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리는 시기가 아닐까. 관찰자의 시점을 갖게 되어요. 절절한 한 사람의 심정의 변화를 느끼기도 하고, 고참이 될수록 이미 조직에 자연스럽게 물든 나를 비인권적인 것들이 자연스러운 일상처럼 보여지게 되는 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당하고 있을 때의 얼차례가 주변 동료가 당하고 있을 때의 계급의 변화에서 나오는 거리감, 피해자였던 적이 있었다가 가해자가 되었을 때의 무뎌짐 같은 것들... 군대 내에서는 보통의 경우에 시간이 계급을 만들어줘요. 시간이 관계의 우위에 서게 만들죠. 소위 짠밥이란 것으로 표현할 수 있어요.
작은 스튜디오 안에서도 은근히 군대문화가 상존하고 있어요. 모든 만남에 있어서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내가 처한 상황과 표현, 표출하고 싶은데 내적인 것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논농사를 지면서 들일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듯, 감정의 정화처럼 저도 나를 정화시키는 작용을 해요. 카메라를 드는 순간 상황에서 한 발짝 떨어져 객관화시키는 위치에 서게 돼요. 대상을 사유하게 하고, 사진으로 발견하게 되는 나라기보다는, 그 느낌을 ‘사진적’으로 어떻게 담아낼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의 시기였어요.
‘달빛 소금에 머물다’
와 같은 경우는 내가 왜 사진을 했을까 하는, 나의 사진적 열정과 애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던 시기였어요. 외국에 나가면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게 되죠. 그것은 열정과 감수성의 부분인데,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 땅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나와 동일시되는 순간들을 경험했던 순간이었지요.
그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과 철암과 노래 검은 눈물을 들으면 땅과 음악과 내가 하나라는 느낌이 분명히 들었어요. 내 스스로 충만해질 때였어요. 지역과 사람과 땅에 얽힌 이야기들이 사진적인 상징이라고 생각해요.
군대작업이 사람 안에서의 관계성 속에 우리 안에 잠재워두었던 본능에 가까운 ‘권위’와 ‘계급적 동물성’을 발견하게 되었다면, '달빛 소금에 머물다'는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내 안의 ‘신성’, 혹은 사람 안에 담긴 ‘신성’을 발견하는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사진이 나와 주변, 사회적인 이슈나 문화적인 것을 이야기하는데, 대부분의 베이스는 내가 그것을 바라보는 특별한 관계성이 있기 때문에 찍는다고 생각해요. 나는 사회학자는 아니지만 사회적인 시각을 공유하고 있어요. 어떤 현상을 볼 때도 저널리즘적 시각이라기보다는 어릴 때의 기억의 코드 확장이라든지, 굿과 같은 경우도 그렇고 큰어머니의 민간신앙에서 친숙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굿으로 이끌린 것 같아요. 그런 요소들이 작업의 연속성 안에서 나만의 코드와 만납니다.
강제욱
: 앞으로의 작업은 어떤 방향성을 갖게 될 것 같습니까?
이규철
: 최근엔 돌에 대해 애정을 느낍니다. 시간과의 관계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작업이지요. 나의 선캠브리아기를 찾아가는 작업이랄까요. 지구상에 처음 등장한 생명체의 기원이잖아요. 그것처럼
사진의 퇴적층
이라고 붙여보고 싶어요. 사진이 이미지의 퇴적층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퇴적층이라는 게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 사람들이 보게 되는데, 보게 되는 것이 사진도 찍는 행위를 통해 보기도 하지만 퇴적층의 두께가 인류의 역사라면 사진 또한 인류의 역사라는 부분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거죠.
96-97년에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암각화들을 기록한 적이 있었어요. 울산, 경주, 고령, 전주에 있는 암각화들을 한국학연구자들과 동행해 다니면서 돌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었어요. 그 기원이 지층, 지층 중에서도 40억년이 되었다는 선캠브리아기로 가게 되는 과정이었어요.
돌에 새겨진, 혹은 돌을 통한 민간신앙에 대한 관심이 사람들이 그 동안 이어온 ‘시간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집니다. 돌을 보면서 ‘내가 왜 저것을 보고 있지’에 대한 대답이 됩니다.
이외에 ‘시간’으로 풀어볼 수 있는 다른 작업은 지금 세대를 담는 것인데.... 우리를 X세대라고 불렀고, 지금은 보통 88만원 세대라고 규정을 하는데 그 규정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현실을 기록하고 싶어요.
강제욱
: 사진 중에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규철
: 대구에서 자랐고, 고등학교 때 거리를 방황하면서 내가 주로 갔던 곳은 대구역과 번개시장이라고 하는 곳이었는데, 시내 한복판에 부랑자들이 있어요.
그 당시 시장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고 부랑자들을 찍게 되면서 그 사람들의 삶에 대한 연민이랄까, 지금은 대답을 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왜’라는 막연한 궁금증을 품고 사진을 찍으면서 이미지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었어요.
환경과 내용이 궁금했고, 대학에 가서 이런 부분을 ‘사진적’으로 어떻게 밝혀내고 싶었는데, 형식적인 면에서 비주얼과 무게감이 컸었던 책들 중에 하나가 내셔널 지오그래픽이었어요. 그것은 사회적인 근거와 이유를 밝혀내는 텍스트였어요. 그때 경험이 전공을 선택하는 계기가 됐어요.
고등학교 때 ‘부랑자’와, ‘자화상’을 주제로 상을 받기도 했어요.(고등학생 대상 공모전) 미술시간에 석고로 만든 자화상이 쓰레기장에서 뒹굴고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어요. 그것을 사진으로 찍었지요.
‘전국의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2000년-2002년) 작업을 통해 97년 홈리스 작업을 하면서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 봤어요. 사회적 시스템을 보게 되면서 그때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냈다고 봅니다. 사회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찾아가는 과정이 ‘다큐멘터리’사진이 아니었나,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품었던 질문들을 다시 ‘사진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에 대한 관심보다는 문화, 사람들, 인류학에 관한 것을 사진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좋은 정보를 주고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그런 감동을 선사하고 싶습니다. 저는 꼭 다큐멘터리라는 형식보다는 사람 사진을 찍는 것이 좋았을 뿐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감정에 동화도 되고, 그 사람을 통해 배우고 정화시키고 그런 부분을 담아내고 싶습니다.
강제욱
: 다큐멘터리 사진은 무엇입니까?
이규철
: 매체 즉 저널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 가장 큰 특성입니다. 그 작업의 엑키스가 다큐멘터리가 됩니다.
사람으로부터 다큐멘터리가 비롯됩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다큐멘터리를 하게 만든 거죠. 제 스튜디오의 이름은 ‘아자‘이지요. 我之我’ 아자. 나 아와 갈 지, 그리고 나 아의 합성어입니다 내 안의 나. 내 안에 있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사람이 원하는 것입니다.
나의 느낌을 내가 본 세상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는 것이 내가 사진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고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강제욱
: 미소전, 인권위전시, 새사회연대 전시를 통해서, 그리고 다큐넷, 이미지프레스를 통해서 사회와 직접적인 소통을 하는 다큐 운동을 해오셨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유가 있으셨나요?
이규철
: 보수적인 것과 진보적인 것 사이에는 갭이 있습니다. 매체는 매체의 틀을 가지고 있구요. 사진가가 바라보고 싶은 것이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사진가 아닙니까. 그 두 가지를 소화할 수 있으면 좋은데, 못하고 있습니다.
현실 속에 없는, 꿈꿨던 것을 사진의 힘을 믿고 실천하고 싶었습니다. 진보적인 것을 하고 싶었어요. 젊은 날의 치기일 수도 있지만, 어디에 휩쓸리거나 매체 속에서 소화되지 않고 하고 싶었어요.
다큐멘터리라고 하는,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싶었고 사진의 매력을 보여주며 사진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한 장의 다큐멘터리 사진이 세상에 대한 파급력이 컸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다큐멘터리 사진이 전시장에 머물러 있고 그 영향력이 축소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사진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선택의 폭 안에서 인권 등에 관련된 기회가 닿으면 꾸준히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예전처럼 역사를 바꾸지는 못하지만 사회적으로 환기를 시켜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제욱
: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다큐멘터리 사진가를 꿈꾸는 후배들을 위해 한마디 해주겠습니까?
이규철
: 작업의 주제를 멀리서 찾지 말고, 자신의 주변에서 찾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회적이든 내적이든,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변화되기 원하는 것들을 자신의 주제로 삼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닌가.
나의 관심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세상을 탓하지 말고, 세상의 틀로서 나를 보지 말고, 내 안의 틀을 항상 기억하길 바래요. 외부 환경에 동조하는 순간, 나는 없어질 수 있어요. 항상 경계해야 할 점이에요. 트렌드도 봐야 하겠지만 본질적인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왜 이 작업을 해야 하는지, 흔들릴 때 그 이유를 되짚어 봐야 해요. 그 흔들림을 나도 알지만, 세상은 더 빨리 알아채요. ‘진정성’에 대한 생각을 늘 갖고 있어야 해요.
연민의 기억, 치유의 힘
_이규철 (다큐멘터리사진가)
“나는 삶의 연민이나, 집단적인 기원에 시선이 간다”
고 사진가 이규철은 말한다. 그가 그 동안 관심을 기울여온 분단 한국의 상징인 ‘군대’, 한국인의 치유와 기원을 담은 ‘동해안 별신굿’, 더욱 팍팍해져가는 농촌 사람들, 도시화에 밀려 사라져가는 몇 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옛길, 진안 용담댐의 수몰지구, 신안군 증도의 염전 등을 담담하게 기록해 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전시 <군인 841의 휴가!>는 실제 그가 군생활을 하며 기록해 온 것들이다. 이문재(시인, <시사저널> 편집위원) 씨는 발문에서 이렇게 평했다.
“이규철은 ‘한 사람의 군인’을 찍었지만 대한민국 성인 남성의 초상을 찍은 것이다. 사진의 사회적 기능이 이렇게 큰 경우란 흔치 않다”
고. 20여년이 흐른 지금 사진을 보면 분단 한국의 현실 속에서 나의 선택이 아니었던 것에 대한 심리적 반항이 지금은 통일에 대한 꿈이나, 후대에는 적어도 모병제라도 바뀌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다.
96년부터 꾸준히 기록해 온 <동해안 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 풍어제. 한국의 부산 동래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남부 동해안 지역에서 행해지는 굿으로 풍어제, 풍어굿이라 불림. 마을의 풍요와 다산, 안녕과 번창을 기원한다)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무녀와 일반인들의 소통이다. 한국의 민간신앙은 노래, 이야기, 춤 등을 통한 소통을 통해 치유된다. 그는 사람들의 소망이 이런 심리적인 치유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군대, 굿, 마을, 옛길, 중국 조선족 동포의 이주 이야기 등을 통해 찾았던 의미찾기는 <같이 왔으니 같이 가야지예>(이른아침),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한 <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현실문화연구) 등에 담겨 있다.
최근 들어 그는 좀더 내면으로 향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전시 <달빛 소금에 머물다>에서처럼 한국의 전통음악과 변두리라 표현할 제3세계 음악을 듣고 기록한 한국의 땅에 대한 작업이 그렇다. 오래된 탄광촌인 태백, 전남 순천, 태안의 신두리, 신안군 증도에서 발견한 사람과 땅은 그만의 고유한 소리가 있다. 그가 담아낸‘地音, 땅의 소리’는 살아간다는 것의 본질적인 연민이다.
그의 마음을‘이심전심’이라 표현해도 좋다. ‘비오는 날의 오후 풍경’처럼 그의 눈은 내적인 감성에서 본질을 찾아가는 길을 더 넓혀가고 있다. 세상과의 소통은 결국 ‘我之我’, 내 안의 나를 찾는 길이 아니겠는가. 그가 추구하는 본질적인 방향은 ‘아픈 곳에 손이 가는’ 삶에 대한 본질적인 연민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소통을 통한’치유로 일관돼 왔다. 그것은 또 다른 나, 본질적인 나 자신을 만나러 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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