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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우를 말한다
그의 모태는 바다
배병우. 서정적인 자연의 표류자
글 / 김승곤 (사진 평론가)
배병우의 본격적인 사진의 표류가 시작된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다. 홍도, 완도, 백도, 소라도와 같은 남쪽 섬들의 해안에 서서 시야에 들어오는 등대나 파도나 바위섬이나 하늘의 구름 같은 것을 찍는 일이 시작이었다. 그는 인생의 스승이며 그가 누구에게보다도 큰 애정을 보내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바다에서 태어나 자란 바다사람이다. 바다는 그에게 있어서 고향이며 원풍경原風景이다. 그의 삶과 의식 가운데 깊게 자리잡고 있는 바다는 아마도 그가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숙명적인 대상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있어서 바다는 뭍이 끝나는 지학 상의 경계나 또는 이국異國에 대한 탐험의 출발점이 아니라, 영혼의 방황을 떠나기 위해서 딛고 서는 성스러운 장소다.
언제나 우울하고 눅눅한 대기 - 표면을 가지지 않으며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이 하나의 개념을 그는 물질적인 양감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에 눌려있는 그 바다는 하늘도 수평선도, 빛도 어둠도, 중심도 주변도, 미래도 과거도, 죽음과 삶의 어느 것조차도 명확하게 경계를 구별할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는 공허한 세계다. 끝을 헤아릴 수 없는 무상無常의 바다, 눈을 떴을 때가 아니라 눈을 감았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불가시不可視의 바다 - 그는 그 바다를 통해서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원형적인 정서ethos의 실체를 그려내고자 한다.
그것은 분리가 아니라 몰입을 통해서 출현하는 혼연渾然의 세계다. 1985년, 배병우의 두 번째 사진집 마라도」의 바다와 하늘과 섬들은 그런 모습으로 우리 앞에 펼쳐졌다.
그는 사진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고교 시절 수채화를 그렸고 대학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한 그를 사진으로 돌아서도록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조형주의자 모호이-나지László Moholy-Nagy였다. 창호지에 드리운 창살의 그림자나 삼베, 한지와 같은 공기와 빛을 통과시키는 소재들에 대한 1970년대 중반의 그의 관심도, 색채와 질감을 억제하고 흑과 백과 회색의 긴장감으로 실현시키고자 하는 욕구도 나지의 가르침Vision in Motion으로부터 촉발된 것이다.
설악산/1985
그러나 조형적인 요소들을 찾아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물을 섭렵해 나가는 동안, 그는 서양에서와 같은 금욕적으로 절제된 기하학적 조형이 한국에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흙과 돌과 나무로 형성된 한국의 삶의 공간으로서의 건축이 보여주는 무정형한 형태 가운데는 윤회의 원리가 깃들여 있다.
자연과 인간이 어울러 만들어내는 그 본질적이고 영원한 반복의 메커니즘을 사진을 통해서 표현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의 공동체의 의식 하에 잠재된 예지叡智를 일깨울 어떤 필연적인 매개체가 그에게 필요했다. 이후, 십여 년간 줄기차게 찾아 다니게 될 소나무들을 찍기 시작하는 것도 그 무렵부터다. 독일 빌레펠트 대학에서의 예거Gottfried Jager 교수와의 만남과 1988년 여름부터 일 년여에 걸친 지중해를 기점으로 한 서구 문명 발상지들의 순례를 통해서, 그는 자신에게 부과한 한국 고유의 정서적 아이덴티티의 추구라는 라이프 워크의 목표에 관한 확신을 얻게 된다.
그가 무엇을 찍건 그의 사진에 있어서의 관심은 한국성의 탐구에 있다. 최근 그가 중심이 되어 첫 번째 전시를 마친 그룹전 ‘대동산수大同山水’가 지향하는 목표도 이런 그의 관심과 일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그가 내어놓은 것은 마치 모뉴멘트와도 같이 거대한 바위로 만들어진 고인돌이다. 바위는 인간의 원초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힘과 함께, 인간의 자연에 대한 외경과 공포의 감정을 촉발시키는 어떤 종류의 신성神性을 그 안에 내재시키고 있다. 그의 사진에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은 바위 그 자체나 바위가 가지고 있는 사전적인 수준의 기호성이 아니라 그 바위를 떠받치고 있는 대지와, 그리고 자연이 내재시키고 있는 우주적인 원리다. 대지는 지상의 모든 존재를 생성시키는 출발점인 동시에 모든 생명체들이 돌아가야 하는 회귀의 장소다. 대지 위에 선 바위는 그래서 그가 지금까지 찍어온 수많은 소나무들과 마찬가지로 지상의 삶과 지하의 죽음의 세계가 맞닿아 있는 접점이며 매개체인 것이다.
고인돌은 이미 한낱 물질로서의 바위이거나 주검을 묻기 위한 기능을 가진 인공적인 구조물이 아니다. 비록 과거에 그렇다 할지라도 오랜 시간의 풍화에 의해서 그들은 이미 자연의 일부로 환원되었을 뿐 아니라, 그에 부여된 이름과 기능 그 자체로부터도 영원한 자유를 얻고 있다. 자연 속에 깃들인 죽음과 태어남을 관장하는 영적인 에네르기 - 그것은 바로 한국인의 생사관과 자연관의 근간을 이루는 원리다.
풍경은 인간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서 떠오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의 풍경화는 그처럼 그곳에 그려진 유현幽玄한 자연의 깊이와 그에게 눈길을 보내는 사람과의 영적인 거리의 균형에 의해서 성립되어 왔다. 그곳에서 무엇을 읽어 낼 것인가는 그곳에 그려진 것이 무엇인가를 보는 일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풍경을 바라보는 행위는 바로 풍경과 그 풍경을 앞에 둔 인간과의 관계 그 자체이며, 인간이 스스로의 내면을 관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배병우는 한국의 대표적이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겸재 정선의 작품들로부터 풍경에 대한 철학적인 영감을 얻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산수화는 자연에 대한 관조의 개념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보는 자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완결된 공간이 아니라, 그 속으로 끌어들이는 하나의 역동적인 장소다. 자연의 혼돈상태를 조직화시켜 그곳에 또 하나의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서양화의 이성적인 풍경과는 다른, 순치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상호교환적interactive인 공간인 것이다.
현실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공간과 시간과 그들의 외관을 드러나게 만드는 광선은 중요한 요소다. 독립된 사물의 존재도 또는 그들 간의 관계도 이들을 통해서 파악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크기나 거리를 잴 수 있는 아무런 기준이 없는 하늘이나 바다에서는 그 공간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시간적 공간적인 지각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
경주/1985/50x50/1985
그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이 놓여있는 위치나 상태를 알 수 없을 때와도 일종의 불안 심리를 유발시킨다. 배병우의 사진이 바다에 떠있는 섬을 찍은 것이건, 소나무를 찍은 것이건, 보는 일을 통해서 깨어있는 의식을 유지시키려는 우리의 본능적인 욕망을 무위無爲로 만들고, 불합리한 무의식의 늪으로 강인하게 끌어내리는 것은 그가 사진 가운데에서 까무러질 듯 섬세하고 신비주의적인 광선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명료한 퍼스팩티브를 거의 상실해 버린 그의 풍경 가운데에서의 공간과 시간은 측량하거나 또는 분할로서 인식할 수도 없는, 오직 순수한 감각과 상상력에 의해서만 전체의 체험이 가능한 세계다. 이처럼 기하학적 투시법 대신, 명암의 해조諧調에 의해서 보다 깊은 수준의 정신적인 퍼스팩티브를 암시하려는 그의 태도는 분명 그가 한국의 산수화의 전통을 자신의 사진 가운데 올바르게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불안정하고 애매한 어둠이 깔린 그의 사진 속에서 그곳에 필연적으로 있어야 할 무엇인가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단 한 줄의 캡션에 의해서 의미가 한정되어 버리는 그런 사진과는 정반대 편에 위치하는 세계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일은 누구인가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의미의 세계에 안주하도록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신선한 놀라움을 준다. 그가 다루고 있는 것은 구체적인 사물이나 현상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 사이에 놓여 있는 경계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경계는 자신과 타자, 삶과 죽음, 의미와 무의미와 같은 이질적인 테리토리를 가르는 선이다. 그는 이 선상(線上)의 경계의 명확성 대신 그 애매함을 하나의 전체적인 체적體積으로 그려냄으로써 경계의 본질적인 성질이 경계 그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계를 긋는 행위에 의해서 성립된다는 사실을 암시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의 풍경에서 읽어내야 할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몰아沒我 - 경계가 와해된 자연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의 행위자의 적극적인 의식의 참여commit인 것이다.
그의 사진의 톤은 대체로 무겁다.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풍경은 잃어버린 세계 - 과거에 대한 이미지다. 그래서 그가 사진을 찍는 것은 현실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억을 일으키기 위한 행위다. 그것도 한국인의 유전자의 먼 거리에까지 거슬러 올라간 역사의 시간을 환기시키는 그런 힘을 필요로 하는 행위다. 그것이 그를 서정주의자로 보이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진에 짙게 나타나는 서정성은 결코 그의 약점이 아니다. 왜냐하면 서정적인 감성을 가진 사람만이, 우리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그토록 많은 과거의 존재들이 무의식의 암상자暗箱子로부터 풀려 나와 새로운 시간을 짜내는 장면들을 체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둠은 어둠을 가지고도 모두 감싸버릴 수 없을 만큼의 풍부한 빛을 자신의 안쪽에 숨기고 있다. 길고 어두운 시간의 동굴을 마치 광물의 내부를 통과하듯, 눈에 보이지 않는 느린 속도로 진행해 나온 기억의 입자들이 그의 감광물질에 노출되어 모습을 다시 드러내는 것을 상상하는 일은 감미로운 고통을 준다. 그 일을 실현시킬 수만 있다면, 그 자신은 어떤 이름으로 불린다 할지라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가 가리는 하늘과 바다는 언제나 보라빛을 띠고 있다. 그것은 바람의 색채다. 바람은 한 곳에 머무르는 법이 없으나 언제나 그곳에 있다. 그 바람과 마찬가지로 그는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는 천성적인 표류자다. 대지와 바다를 표류하면서 그가 구하는 것은 시간의 피안彼岸을 향해 소멸되어 가는 기억을 다시 불러내는 일 - 기시旣視의 체험을 재현하는 일이다. 비록 처음으로 그 장소에 들어섰다 할지라도 그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그곳을 떠돌고 있었을 대기의 내음을 가슴 가득히 맡고, 나무들의 가지 사이를 타고 내려와 대지 위에 연약한 드리우는 그때의 황혼 녘의 햇살에 취한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로서 이름 지워지지 않은 장소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존재들만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모든 것이 경험의 표본상자 가운데 채집되어 버리고 만 현실 가운데에서는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무구(無垢)한 풍경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배병우의 사진은 그 기지(旣知)와 미지(未知)가 교차하는 공간에서 우리들의 기억을 흔들어 깨우고 바람처럼 물처럼 흐르고 있다. 그의 사진은 우리가 내면의 눈을 뜨기만 한다면 지금 무수한 잎을 달고 눈앞에 서있는 나무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다. 그것은 한국의 고대(古代)의 바다와 산야를 가로지르고 불어오는 원시의 바람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풍경과 인간 존재, 그리고 그들 개념에 실체를 부여하기 위한 매개체로서의 자연의 형상물의 삼위일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고향에 대한 진한 향수의 눈길을 담은 서정적인 바다는 한국인의 자연에 대한 가치관을 상징하는 소나무로 전개되고,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대지와 그곳에 뿌리를 내린 식물들을 통해서 보다 근원적인 한국인의 자아성identity에 관한 문제까지를 사진의 시야 속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나는 그가 단순히 흐름에 자신을 맡기려 하지 않는 큰 느티나무 같은 사진가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이루어낸 것들에 대해서 정당한 평가를 얻고 있다 할지라도, 원시의 시간과 공간을 찾아나서는 그 자신의 장대한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그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자신이 추구하는 테마가 서로 다른 문화와 지역적인 제약에도 견딜 수 있는 시각 메시지로서 얼마만큼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에 있을 것이다.
이글은 2001년 배병우 사진집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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