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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젊은 다큐멘터리 사진가 III - 안해룡
한국의 젊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 시리즈Ⅲ
안해룡 “사색의 세월, 그리고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기획_ 인터뷰_사진
/ 강제욱
주최
/ 아이포스 웹진장비
협찬
/ 소니코리아
1. 기획자의 글
2001년경부터 이미지프레스에 오가면서 사무실을 함께 쓰고 있던 안해룡 선배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거기엔 종종 일본에서 온 손님도 있었고 VJ 후배들도 보였다. 처음에는 NHK쪽 일을 하는 비디오 저널리스트라고 들었는데, 가끔 놀라운 사진들을 꺼내들며 전시를 한다고 했다. 당시로서는 사진과 설치미술을 넘나드는 그의 전시행위가 특이해 보였고 이후 2006년에는 뉴욕의 MoMA P.S.1에서 몇몇 사진가들과 함께 미군 문제를 다룬 전시를 가졌다.
내가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알고 지낸지 벌써 8년째다. 게다가 그의 사무실과 내가 사는 곳이 같은 낙성대 지역이라 가끔 지하철역이나 동네 식당에서 마주치곤 했다. 최근에 그의 영화가 극장에 개봉되었고, 그 동안의 그의 행적들이 궁금했다.
두 차례에 걸쳐 낙성대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좁은 오피스텔은 각종 비디오테이프와 자료들로 빼곡했다. 인터뷰를 하기도 전에 이미 많은 이야기를 들은 듯 한 느낌이다. 그의 방안 가득한 책 제목들만 슬쩍 훑어보아도 이제 50을 바라보는 그의 인생살이가 한눈에 읽혀진다. 외길 인생이다. 그의 사무실은 외로워보였다. 닫혀 있는 자신과 만나는 끝없는 고독과 사색의 공간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2. 안해룡의 작품 이야기
1. 신성불가침지역
2. 조선학교 도요하시
3. 침묵의외침
3. 사진가 안해룡은 누구인가
학 력
1980 - 1984년 서강대학교 사학과
경 력
1984 - 1986년 인링구아출판사 편집부
1987 - 1987년 금강기획 기획부 AE
1988 - 1989년 영원무역 기획실 광고팀
1990 - 1993년 출판물 기획사 열린터, 도서출판 공간 대표
2001년 전주국제영화제 다큐멘타리 비엔날레 프로그래밍 어드바이저
서울인디다큐페스티벌 프로그래머
제3회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심사위원
2002년 전주국제영화제 컨텐츠 디렉터
서울독립영화제 예심위원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 사진전 <눈 밖에 나다> 기획․프로듀서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 사진프로젝트 프로듀서
1994 - 2006년 한국독립영화협회 감사
1994 - 현재 아시아프레스 인터내셔널 서울사무소 대표
교 직 경 력
1996 - 1999년 서강대방송아카데미 강사
2000년 서강대 언론대학원 강사 (다큐멘타리 제작)
2001년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 강사 (이미지와 이야기 만들기)
2002년 한양대 연극영화과 강사 (기록영화론)
2003년 서울대 연합전공 강사 (영상스튜디오실습)
성균관대 대학원 영상학과 강사 (기록영화론)
2003-2004년 대진대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방송제작)
프 로 젝 트
2002년 일본군 위안부 비디오 증언집 27편 제작, 여성부 프로젝트
다 큐 멘 터 리
2007년 "한국의 맛 - 불고기" 울산MBC
"オレの心は負けてない(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일본어)
"오사카 일레븐 - 오사카조고 축구부 이야기" KBS 스페셜
2005년 "지울 수 없는 역사 - ‘일본군’ 위안부"
2004년 "북에서 온 소녀 - 한국 탈북자의 2년" NHK
" 도요하시의 민들레" EBS
"북에서 온 아이들" 안해룡․최지영 공동 연출 KBS 일요스페셜
2003년 "북에서 온 소녀들" NHK BS 프라임타임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여성부
"침묵의 외침" 안해룡․박영임․김정민우 공동 연출
"재일교포 특집" 오사카 편 9편, MBC 포토에세이 사람
2002년 "억압의 사슬 아내 폭력" 한국여성의 전화
"침묵의 외침" 일본군 ‘위안부’ 비디오 증언집 27편
2001년 "끝나지 않은 법정"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인도 땅에서 계승되는 티베트문화" KBS 세계는 지금
"버블 붕괴! 변화하는 일본의 택시서비스" KBS 세계는 지금
2000년 "코소보, 불안한 공존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 KBS 세계는 지금
" 우간다 소녀들의 참혹한 전쟁" KBS 세계는 지금
1999년 "한국인 철강왕 백영중" KBS 수요기획
"스타가 되고픈 아이들 오키나와 액터즈 스쿨
" Q채널 아시아리포트
1998년 "선택-현대장동차 1공장 45반의 기록" KBS 일요스페셜
"일만명의 리스트라" NHK ETV특집
"연변르뽀-무너지는 조선족 사회" KBS 일요스페셜
기 획 전
2008년 석임생 사진전 "북녘의 일상 풍경" 도쿄, 갤러리&바 나그네
2007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사진전 "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
석임생 사진전
"북녘의 일상풍경" 도쿄, 나카노제로 갤러리
개 인 전
2007년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 일본, 도요하시․도쿄․구니타치
2005년 "침묵의 외침" 일본, 도쿄, 갤러리&바 나그네
"침묵의 외침" 일본, 오사카, ArtspaceK
"Silent Crying" 일본, 야마가타
"Silent Crying" 프랑스, 파리, 알터나시옹
2003년 "일상성의 새로운 발견 : 사진으로 기억 돌아보기 展", 서울, 일주아트하우스 미디어 갤러리
2002년 "침묵의 외침 _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목소리 展" 서울, 일주아트하우스 미디어 갤러리
단 체 전
2005년 "Wars Unfinished _ US Military Bases in Okinawa and Korea" 미국, 프로비던스, The Watso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Studies
"Diverse Universe" 탈린, 페이드, 타르투, 페르누(에스토니아), 헬싱키, 라흐티(핀란드)
"국기에 대한 맹세" 해방60주년기념 제17회 조국의 산하전, 서울 공평아트센터 2층
2004년 "평화의 파편(平和の欠片)" 일본 도쿄, 마키 마사루 파인 아트
"오아시스 프로젝트" 2004 헤이리 페스티벌
"Neo Vessel AREUM '04-'05 - 새로운 장을 지향하며" 일본 교토, 교토시미술관
"The Perpetual Moment _ Visions from within Okinawa and Korea(영속하는 시간 - 오카나와와 한국 내부로부터의 조망)"
미국 뉴욕, PS1 현대아트센터
2003년 "한국 일본 오키나와에 관한 기록과 기억, 사진가 10인의 눈" 오키나와, 오사카, 도쿄, 서울
"종군위안부를 위한 애가(哀歌)" 영상 연주와 함께 상영(2003년 세계여성음악제, 호암아트홀)
"여성과 평화"전 안일순, 구웬, 안해룡(사진)
1998년 "NIX"전 (사진전)
1994년 "아시아, 격동하는 역사의 현장"전 (사진전)
1992년 "사진집단 사실"전
1990년 "사진집단 사실"전
외 다수
4. 인터뷰 #3
사진가를 말하다 – 안해룡 편
강:
일단 어릴 적 얘기부터 들어볼게요. 제가 사실 질문을 만들어 오진 못했어요.
안:
정확히 말하자면 만들어 올 수 없었겠지. 알려진 것이 별로 없으니까.
강:
어떤 집안 분위기였어요?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안:
잘 모르겠네요. 원래는 정읍이 고향이었는데, 전주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다니기 전에 서울로 올라와서 학교를 다녔지. 나를 좋은 학교를 보내고 싶은 마음에 이사를 한 거야. 맹모삼천지교처럼 교육환경이 좋은 서울로 올라오신 거지. 아버지는 공무원이셨어.
강:
성장할 때 부모님이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잖아요
안:
나 혼자였어. 형제가 없었고. 부모가 무엇을 하라고 얘기한 적이 없었어. 내가 찾아서 했지. 뭘 해라 하지 말라는 말도 들어본 일이 없어.
강:
집안에서 예술 쪽이나 사진 쪽 영향은 있었나요?
안:
그런 것은 전혀 없었던 것 같아.
강:
어릴 때 꿈이 뭐였어요?
안:
평범하지. 당시 보통의 아이들처럼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을 뿐, 특별한 꿈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은데.
강:
열광했던 취미 같은 거 있었어요? 다들 어릴 때 그러듯이 어느 것에 푹 빠지고 미치고 그런 거요.
안:
스타일이 없었지. 만화방에 가는 거 말고는 특별히 없었어.
강:
공부에는 취미가 있었어요?(왠지 그의 이미지가 학구적인 느낌이어서)
안:
공부도 별로…. 미친 듯이 공부한 적도 없고 머리도 우수하지 않았고…, 그냥 그럭저럭이었던 것 같아.
강:
중․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주축이 되서 한 일이 있었어요?
안:
그런 것도 없었어.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조금 특별한 학교였어. 지금의 외고나 과학고 같은 집단화 되어 있는 평준화 시대에 특수지 고등학교라는 게 있었어. 내가 지금 이 동네에 살지만, 원래는 현재 청와대 옆에 있는 신교동에 살았어. 중학교까지 그곳에서 다녔는데 졸업하면 추첨으로 배정되는 고등학교가 대성, 명지, 충암 세 군데였어. 중3 때 가정형편 때문에 봉천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면 고등학교까지 거리가 무척 멀어지게 돼. 당시 변두리에 세워지는 일부 신설 고등학교를 특수지 고등학교라고 해서 일정한 수준 이상의 학생을 뽑는 학교가 있었는데, 우신고등학교도 그 중 하나지.
- 조선학교 도요하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학교 가운데 그 학교가 가장 가깝기도 해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어. 시험 떨어지면 할 수 없고, 붙으면 가는 거라고 생각했지. 시험을 봐야 하는데 반에서 10등 안에 못 들면 원서를 안 써줬어. 나중에 성적이 올라서 시험을 보게 됐고, 어떻게 합격을 해서 그 학교를 가게 된 거야. 대부분 출신 중학교에서 전교 2, 30 등 안에 드는 애들이 들어왔어. 그런 애들 640 명이 다녔지. 우리 반만 해도 3분의 2가 서울대, 연고대 정도의 대학을 들어갈 정도였으니 알만 하지. 내가 56등으로 졸업했지. 전교가 아니라 우리 반에서 말야. 항상 열등감에 빠져 있었지. 암만 공부해도 올라갈 가능성은 전혀 없고….
강:
고등학교 시절 데모에 참여한 적이 있나요?
안:
아니. 그럴 시기도 아니었으니까. 그야말로 편하게 지냈던 것 같아. 도시락 2개 싸 가지고 입시공부만 했던 시기였으니까. 77년~79년도였지. 박정희 말기였어.
강: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셨나요?
안:
없었지. 당시 학교에는 교사들 가운데 재미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어. 입시 때인데 수업과는 관계없는 이상한 얘기를 하는 일도 많았어. 생물 선생님은 프로이트의 ‘이드(id)’를 가르치는 것으로 한 강의를 나가고. 국문학은 갑자기 한시를 가르치거나 고조선의 재야 사학자들의 이론을 가르치질 않나, 골 때리는 선생들이 많았지. 다른 학교는 안 다녀서 모르지만, 교사들이 좋은 양반들이 많이 와 있었어. 로맨티스트들이 많았지. 자기가 갑자기 감명 받은 영시나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진도와 상관없이 그런 자유로움이 있었지.
강:
서클활동 같은 것 했었나요?
안:
신문반. 신문 내는 것을 했어.
강:
재미 있었어요?
안:
일 년에 네 번 신문을 냈어. 4명밖에 안 뽑았거든. 4명 안에 들었다는 일종의 어쭙잖은 엘리트 의식 같은 것이 있었지. 그 쪽의 선후배들이 다른 서클에 비해서는 선후배 관계가 각별했고, 그 신문반이라는 것이 대외활동을 하는데 약간의 해택이 있었지. 취재를 한다는 명목으로 여학교를 방문한다든가 그런….
강:
기억나는 것은요?
안:
내가 있을 때 박목월 시인이 돌아가셨어. 다른 기사를 빼고, 갑자기 그것으로 기사를 대체하자는 이야기가 있어서 쓰게 됐는데, 그 기사를 읽은 국어 선생님에게 잘 썼다는 칭찬을 들었지. 성적이 안 좋아서 영어시간에 특별히 많이 맞은 기억이 있어.
강:
신문반 활동이 지금의 활동에 영향을 미친 것이네요.
안: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학생중앙에 학생기자 제도가 있었는데, 학생기자로 추천이 되어 한 달에 한 번씩 기사를 보냈다. 그것 때문에 다른 고등학교 친구들을 여럿 만들 수 있었지. 그 밖에 뭐 특별한 건 없었고….
외삼촌과 함께 살았는데, 책장에서 김병익이라는 문학평론가(역자: 지금 문학과 지성 사장인 듯), 그 양반이 자기가 쓴 칼럼들을 엮어서 낸 『지성과 반지성』이라는 일종의 문화비평론 에세이집을 보았어. 그 안에 국민교육현장을 비판하는 글이 있었는데, 그 글은 유신교육에 세뇌되었던 학생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충격이었지. 문학도는 아니었지만,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많이 읽었지.
강:
당시에 사진을 찍었나요?
안:
그때는 사진기를 갖는 것도 쉽지 않은 시기였지. 열등감에 빠져 있던 고등학교 2, 3학년 때는 중국집에서 술 많이 먹었지. 학교가 인천 쪽에 가까웠어. 애들 중에 인천에 가서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고 와서 자랑한 녀석도 있었는데, 나는 그런 기억도 없어.
강:
대학은 어떻게 가게 됐나요?
안:
담임선생이 ‘니가 대학을 가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했을 정도로 공부하곤 담을 쌓고 지냈지. 그때는 본고사가 있었는데, 예비고사 보고 나니까, 내가 갈 대학이 서강대라고 나왔어. 그때는 서강대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어. 내 머리 속에는 서울대, 연대, 고대, 이대 정도만 들어 있었는데, 도대체 서강대가 어디 있는 거야?
전교생이 본고사를 대비해서 대성학원에서 3준가 4주 전체 수업을 받았어. 지금 생각하면 골 때리는 얘기지. 수학은 2학년 때 고3까지 끝냈으니까 괜찮게 했던 것 같아. 정문에서 원서 사면서 처음으로 여기가 서강대구나라고 알았어. 본고사에서는 국어, 수학, 영어 쳤는데, 영어는 별로였고 수학이 점수가 좋게 나왔어. 그래서 들어가게 된 거지.
강:
무슨 과였죠?
안:
당시는 계열로 뽑을 때여서 문과대학으로 입학을 했고, 2학년 때 사학과를 선택했지. 제한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가고 싶은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어.
강:
사학과를 선택한 이유가 있어요?
안:
특별히 없었던 것 같아. 역사를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면접을 보고 학보사 기자가 됐는데, 처음에는 거기서도 꼴통 짓 많이 했어. 아니라고 생각되면 못 참는 거 있지. 면접 볼 때 ‘왜 서강대 들어왔냐’고 물어서, ‘성적이 안 되어 왔다’라고 대답했는데 붙여 주더라. 그렇게 입학은 했는데 정상적인 수업을 못했어. 당시 남자 신입생들은 일주일 동안 문무대라는 곳에 들어가서 군사훈련을 받게 되어 있었어. 79년에 12.12사건이 터지고 난 다음, 민주화 요구가 높아진 시기였지. 그런데 문무대를 들어가는 것은 대학을 병영화시키는 일이라고 해서 입소 반대운동이 벌어졌어.
맨 처음 서울대가 안 들어갔고, 두 번 째가 성균관대, 세 번째가 서강대였지. 그렇게 순차적으로 입소를 거부했어. 서강대는 학생회관에서 철야농성을 했는데, 한국의 분단 상황에서 안보를 생각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비판이 일었어. 계속 거부하던 서울대가 먼저 문무대에 싹 들어가 버렸어. 항상 기회주의적으로 빠지는 놈들이란 말야. 그래서 성균관대와 서강대만 개털이 된 거지. 문무대에서는 그냥 일주일 동안 편하게 있다가 나왔지. 거기서 나오니까 딱 5․18이 터졌고 계엄령이 내려졌어.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떨어지고 학교 앞에 땡크가 들이닥치고, 갑자기 수배가 내려져서 선배들 다 도망 다니게 되었어. 그것이 대학교 1학년 때 일이야. 그러니 수업이라는 것을 거의 못했지.
리포트로 성적을 평가했는데, 리포트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학점이 좋게 나왔고, 그래서 갑자기 2학기 때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지. 9월 개강 때는 서강타임즈라고 하는 학보사가 폐간을 당했어. 계엄 하의 서울에서는 매일처럼 학생 데모가 벌어졌는데, 대학신문 중에서는 서강타임즈가 유일하게 매일 호외를 만들었어. 그게 전두환 정권에 밉보인 거지. 계엄하고 TBS와 동아일보 라디오가 없어지는 등 언론사 통폐합하면서 대학 언론으로는 유일하게 서강타임즈가 당했던 거야.
강:
학보사가 없어져서 기자는 못하게 된 것이네요. 대학생활에 다른 기억이 있나요.
안:
뭐 그냥 평범한 대학 생활이었지. 아르바이트한 것이 생각나는데, 서강대 도서관은 완전 개가식이었는데, 학생들이 책을 마음대로 뽑아서 보고, 나갈 때 책상에 두고 간 책들을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제 위치에 다시 꽂아 넣는 일이었어. 시간 단위여서 공강 시간에 할 수 있었지 학생들에겐 최고로 인기 있는 아르바이트였지. 그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됐지. 사학과를 택해서 2학년이 되었지만, 학교에서 배웠던 기억은 별로 없고, 술집에서 맨 날 막걸리 먹고 뚜드리며 노래하는 분위기였지.
선생님 강의보다 술집에서 선배들 강의가 더 중요한 시절이었어. 학내에서 집회가 성사가 안 되고, 마포서 경찰들이 학내에 들어 와 있었어. 안기부 관계자가 있어서 요주의 인물을 면담하고 그런 시절이었지. 당시에는 데모를 주도하거나 하면 바로 잡혀 들어가서 짧아도 2~5년 구형을 받던 때였어. ‘뭔가 있을 것이다’라는 소문이 은밀하게 퍼지면 유인물이 뿌려졌고, 유인물이 다 뿌려지기도 전에 경찰에게 잡아가던 시절이었지. 대학 캠파스가 워낙 작았기도 했고. 한 학기에 2번 정도 유인물이 뿌려졌는데, 5분도 안 돼서 경찰들이 들어와서 잡아가는 시절이었으니까. 교문 앞의 대치가 아니라, 학교 안에서 대치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게릴라전 같은 거였지.
강:
군대는요?
안:
군대는 2대 독자였기 때문에 ‘꿈의 육방’(6개월 방위 근무)으로 끝냈어. 옛날 대방동의 공군사관학교에서 근무했지.
강:
3, 4학년 때는 특별한 일이 없었나요?
안:
기억에 남는 것이 거의 없어.
강:
대학 다닐 때 무엇을 제일 열심히 했어요?
안:
음, 역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도서관 아르바이트헤서 등록금 내고 술 먹고 책 사고 했던 거. 등록금이 40만원이었는데, 도서관 알바가 시급 1천 2백원이었지.
강:
졸업 후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안:
학고 나오고 84년 겨울부터 친한 선배가 소개한 ‘인링구아’라는 출판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어. 거기서 노동법 해설집을 만드는 편집 일을 했지. 그러다가 조선일보 해직기자로 조선투위 소속인 선배 소개로 ‘두레’라는 사회과학 출판사로 자리를 옮겼지.
그러다가 금강기획이라고 하는 광화문 근처에 있던 현대그룹의 광고회사로 들어갔지. 거기서 기획서 쓰고 PT를 했어. 3개월 다니다가 다시 영원무역이라는 곳으로 옮겼지. 금강기획에 있을 때 신용카드 처음 만들어서 24개월 할부로 니콘 FM2를 구입했지. 40 몇 만원이었던가. 이한열 장례식 노제를 했단 때였는데, 사람들이 시청에서 광화문 쪽으로 몰려 나오고 경고방송 나오고, 다다다다… 최류탄 터지고, 사람들이 최루탄 연기에 휩싸이는 모습을 5층 사무실에서 내려다보면서, ‘사진기가 있었더라면 나도 찍었을 텐데…’ 하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FM2를 샀던 거야. 영원무역이라는 회사로 옮겨서, 거기 광고 팀에서는 1년 7개월 버텼지. 비교적 자유롭고 괜찮은 분위기여서, 그때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었어. 회사에 사진 좋아하는 과장이 있어서 사진 많이 찍었지. 이것저것. 초첨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진을 시작한 거지.
그러다가 ‘열린 터’라는 인쇄물 기획사무실을 후배와 함께 차렸어. 29살 때였지. 잘 나갔어. 둘이서 시작한 회사 직원이 7명까지 늘어났으니까. 디자이너도 두고. 그러다가 출판업까지 하게 되었지. 그런데 갑자기 사진을 찍고 싶어진 거야. 일을 하는 것 자체는 재미가 없으니까. 싫은 소리 들어가면서 비벼야 하잖아. 왠지 모르지만 갑자기 싫어지더라고. 그때 만든 책이 꽤 많아. 학고재 있잖아. 당시 학고재 출판물은 우리 사무실에서 거의 다 제작했어.
강:
29살 때…. 대단하시네요.
안:
후배가 만든 ‘공간’이라고 하는 출판사와 ‘열린 터’ 2개를 통합해서 출판사를 만들어 운영했지. 그때 ‘연극과 사진’이라는 시리즈를 만들었어. 첫 책으로 버지니아 울프 원작의 ‘자기만의 방’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지. 류승렬 씨가 각색해서 장기공연 1인극을 제작했단 말이지. 그 연극이 큰 관심을 모았어. 그래서 사진연극 책을 만들었는데. 말하자면 사진으로 보는 연극인 거지.
강:
너무 좋은 아이디어인 걸요.
안
: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연극 업계에서는 주목 받았지. 배우들이 좋아했어. 왜냐면 자기 연극이 기록으로 남잖아. 당시 전무성, 최종원, 작가로서는 이윤택, 이강백이 관계한 책을 만들었지. 7권의 시리즈가 나왔어.
*사진집단 사실, 아시아프레스와의 만남
강:
여러 군데 회사는 옮겨 다니셨지만 사진과는 관련이 없잖아요? 초점도 못 맞추던 분이 어떻게 사진을 찍게 되었는가요?
안:
틈틈이 시위나 이런 것들을 많이 찍었지. 학생들 데모사진도 찍고, 울산까지 내려가서 대규모 파업 사진도 찍고 했지. 회사 일 젖혀두고 그냥 내려가서 찍었던 거야. 사회사진연구소라고 들어봤어? 중대 나온 사진가였는데, 사회 현실을 드러내는 사진을 찍는 그룹을 만들었지. 노동 현장을 중심으로 말이야. 사진집단 ‘사실’이라고 있었지? 한국의 다큐멘터리 사진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그 당시에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어. 우연히 학교 후배로부터 사진가 한 사람을 소개받았어. 그 사람이 김문호 씨였지.
강:
흑백작업 하시고 번역도 하시는 분요?
안:
그래. 후배의 오빠였거든.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와 노동운동이 피크에 달했던 시절이었지. 뉴스 카메라맨이 될 것인가 사진가가 될 것인가 뭐가 뭔지도 모르고 고민하고 있던 시절에 후배의 소개로 김문호 씨를 만나고, 사진 얘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지. 그러면서 주변의 최민식, 조문호, 김문호, 이석필, 추연공 같은 다큐멘터리 사진기들이 모여서 ‘사진집단 사실’이라는 다큐멘터리 그룹을 만들게 된 거야. 80년대 중반 쯤이었는가, 90년에는 인사동에서 ‘사진집단 사실’전이란 사진전도 열었지.
이 집단의 활동은 공론화까지는 되지 않았지만, 이른바 예술사진이 판치던 시절에 다큐멘터리를 고민했던 사람들 입에서 회자가 됐었지. 나는 사진사나 사진집 같은 책을 보면서 공부를 했어. 쿠델카 같은 사진가가가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 ‘프라하의 봄’도 그렇고. 그런 사진집들을 보는 게 나에게는 제일 사진을 고민하는 방법이었지. 하지만 그것 때문에 유학을 가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없었고….
강:
일본 작업은 어떤 계기가 있었는가요?
안:
92년도에 오사카 출신의 마끼다 기요시라는 일본인 프리랜서 사진작가가 한국에 체류하면서 재일동포 출신의 양심수에 관한 사진들을 찍고 있었어. ‘어머니들-양심수의 어머님들’이라는 전시를 하게 됐는데, 그때 사진집을 만들고 사진전을 하는 일을 많이 도왔지. 오사카에서도 같은 사진전을 열고 출판기념회를 했는데, 그때 내가 오사카를 가게 되었고, 거기서 아시아프레스의 멤버들을 만나게 되었고 멤버로 들어가게 된 거지. 그 해에 사진집단 사실의 두 번째 전시를 했어. 그때는 한겨레신문의 변재성 씨가 들어왔었지.
그렇게 해서 일본 쪽의 프리랜서들 작업을 알게 되었는데, 지금이야 우리도 여기저기 갈 수 있지만, 당시에는 보스니아 내전, 멕시코의 사파티스타의 근거지를 촬영한다거나 하는 일은은 불가능했지. 일본 사진가들이 쿤사(골든 트라이앵글의 지배자)를 인터뷰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지. ‘아, 프리랜서 작업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 집중적인 테마나 대상을 갖지 못하면 프리랜서가 못된다. 당시 우리나라의 프리의 개념은 기자의 하청을 받아서 찍는 정도의 인식이었지. 진정한 독립적인 프리랜서가 없었던 거야. 그런데 일본 사진가들은 자신이 기획해서 취재한 것을 매체에 제공하고 있었던 거야. 그 때부터 아시아프레스 한국 멤버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거지. 94년도부터 일본에서는 비디오 저널리즘이라는 것이 도입되었지.
강:
독립 비디오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하셨는데요.
안:
아시아프레스 소개로 ‘아시아뉴스타’라는 위성방송에서 ‘프리존 2000’이라는 비디오 저널리즘 취재물을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었어. 아시아프레스 대표가 나에게 방송시간을 할당해 줬어. 그래서 처음 만든 게 이철이라고 하는 재일동포 정치범에 관한 비디오 리포트였지. 청년시절에 고려대에 유학 왔다가 간첩혐의로 사형수가 됐다가, 무기가 됐다가 석방되고, 88올림픽 때 결혼해서 돌아온 재일동포 유학생의 인생역정을 다룬 거였지. 그게 비디오 저널리스트 시작이었어. 당시 한국 내에서는 일반화되어 있지 않았고, 독립영화를 만드는 ‘푸른 영상’이라는 곳에서 8mm로 일반 언론매체에서 다루지 않는 주제를 다루기 시작하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위안부를 취재하던 때, 한겨레21이 주간지로 창간되었지. 한겨레21과 아시아프레스가 기사공급 계약을 맺고, 런 지면을 이용해서 여러 가지 발표를 하게 되지. 팔레스타인, 아시아 에이즈, 보스니아 내전 같은 그런 기사들을 취재한 일본 기자들의 사진과 글을 받아서 한겨레에 번역 소개하기도 하고, 나도 발표할 기회를 얻었지. 그때 이상엽, 정문태 등 프리랜서 군이라고 불리는 사진가들이 한겨레21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었지.
한겨레21이 창간되면서 한국의 프리랜스 저널리즘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거야. 그러면서 KBS의 취재물을 하거나, 같이 가거나 하게 됐고, 일본군 위안부(중국 잔류)나 조선족, 사할린 쪽 잔류 조선인들, 미국으로 입양한 아이들, 입양 캠프 등 그런 기사들이 잡지나 방송을 통해서 여러 차례 발표되었어. 그러면서 사진 쪽보다는 방송으로 일의 중심이 옮겨지게 되기 시작한 거지.
(인터뷰는 한 달 후에 다시 이어졌다.)
특별히 주제나 스타일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았고, 공간이나 대상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을 때였어. 그렇게 된 이후에 월간 ‘말’이나 ‘한겨레21’ 같은 주간지를 통해 사진과 함께 기사를 발표하는 일을 했다. 90년대 초반이었지. ‘사진집단 사실’이 공간이 있거나 정기적인 모임은 아니었고. 최민식 선생님은 조직가는 아니었지. 그런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내주셨던 것 같고, 전시회를 열었던 것이었어. 기존 사단에는 발언처럼 보였던 것이지. ‘사진집단 사실’을 만들었다고 선언서도 있었는데, 어쨌든 이런 다큐멘터리를 한다는 발언으로 한 것이지. 공론화까지는 되지 않았지만 다큐멘터리를 고민했던 사람들에게는 회자가 됐던 것 같아. ‘밝은 방’ 같은(책 제목) 쪽의 사람들이나 고전적인 사협 중심의 사진계가 아닌 새로운 사진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목을 받았던 것 같아. 내 사진이야 뭔 별로였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발언의 가치를 가진 충분한 사진이었다고 생각해.
나는 사진을 정규 학교에서 배운 것은 아니고, 사진사 책을 읽으면서 공부를 했어. 포토박스라는 사진서점이 광화문에 있었어. 다방으로 가는 입구에 쪽방 같은 형태로 있었지. 사장이 도서관이나 사진 공부하는 선생에게 책을 팔고,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사기도 하고 그랬지. 당시에는 쿠델카 같은 사진가가가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 ‘프라하의 봄’도 그렇고. 그런 사진집들을 보는 게 나에게는 제일 사진을 고민하는 방법이었지. 하지만 그것 때문에 유학을 가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없었고. 이렇게 찍으면 된다는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다가 92년도에 마끼다 기요시라는 일본 프리랜서 사진작가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한국에 체류하면서 재일동포 출신의 양심수에 관한 사진들을 작업하고 있었어. 그림마당에서 민가협의 ‘어머니들-양심수의 어머님들’이라는 전시를 하게 되었어. 그때 사진집을 만들고 사진전을 하는 것을 많이 도왔지. 그러다가 그 양반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됐고, 오사카 출신인데 오사카에서도 같은 사진전을 열고 출판기념회를 했는데, 그때 내가 오사카를 가게 되었고, 거기서 아시아프레스의 멤버들을 만나게 된 거지. 그래서 그 사람이 아시아프레스가 프리랜서 사진가들의 모임인데, 관심이 있으면 아시아프레스 총회에 참여해 달라, 그 비용을 대겠다고 해서, 93년도였던가 도쿄에 가서 아시아지역의 프리렌서 사진가들을 만났어. 중국에서 영화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 사람들을 만나서 그때는 아시아프레스가 사진가가 중심이었거든. 그렇게 관계가 시작되었고, 그런 가운데서 92년에 사진집단 사실전의 두 번째 전시를 했어. 그때는 한겨레신문의 변재성 씨가 들어왔었지.
그렇게 해서 일본 쪽의 프리랜서들이 어떤 작업을 하는가 알았는데, 작업 자체가 굉장히 놀라운 것이었지. 지금이야 여기저기 가지만, 당시에는 보스니아 내전, 멕시코의 사파티스타의 근거지를 촬영한다거나(지도자 마르코스), 이런저런 세계적인 뉴스의 현장에 아시아 사진가가(일본) 있었던 것이 대단한 일이었지. 일본이 아시아의 뉴스가 모이는 시장이 형성되었으니까, 일본에서 발표하면 세계적으로 발표되는 상황이었던 거지. 어떤 작업을 하는지 직접 만나서 알게 된 것이고. 일본 사진가들은 쿤사라고 하는 중국계의 사람이 있었다고(골든 트라이앵글이라고 불리는 마약을 제배하는 동남아지역. 정부의 군사력이 지배하지 못하는) 이런 사람도 인터뷰해서 경험담도 듣고, 나에게는 굉장히 행복했던 기억이야. 프리랜서 작업이 이런 것이구나. 집중적인 테마나 대상을 갖지 못하면 프리랜서가 못된다. 당시 우리나라의 프리의 개념은 기자가 하청을 주는 것이었지. 진정한 인디펜던트한 프리랜서가 없었던 거지. 그러나 일본 사진가들은 자신이 기획해서 취재한 것을 매체에 제공하는 것이었는데, 한국에는 없었던 것이지. 그런 일들을 알게 되었고, 프리랜서의 길이다 해서 아시아프레스 한국 멤버로 같이 활동하게 된 거지. 94년도부터 일본에는 비디오 저널리즘이라는 것이 도입되었지.
*독립 비디오 저널리즘, 사진 저널리즘의 시작
비디오 카메라를 가지고 취재하고 인터뷰하고 촬영하고 편집하고 메시지 담아내는 것을 시작하게 되는데, 일종의 저널리즘 감각도 있고 촬영도 해야 해서 프리랜서 사진가들에게 권유하는 상황이었어. 아시아프레스 소개로 ‘아시아뉴스타’라는 위성방송에서 ‘프리존 2000’이라는 비디오 저널리즘 취재물을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만들어졌어. 여러 비디오 저널리스트가 소개할 수 있는 권리들을 아시아프레스 대표가 갖고 있었는데, 나에게 방송할 수 있는 시간을 할애해 줬어. 그래서 처음 만든 게 재일동포 정치범 이철이라는 사람에 관한 비디오 리포트였지. 청년시절에 고려대에 유학 왔다가 간첩혐의로 사형수가 됐다가 무기가 됐다가 석방되고, 88올림픽 때 결혼해서 돌아온 재일 유학생의 인생 역정을 비디오로 찍어서 다룬 거였지. 그게 비디오 저널리스트 시작이었어. 당시로서는 비디오라는 매체는 소형 Hi 8mm가 화질 혁명을 일으키는 시기였고, 나도 Hi 8mm로 작업했어. 한국에도 그런 방식이 소개됐지. 한국 내에서는 일반화되어 있지는 않았고, 독립영화를 제작하는 집단 가운데 푸른 영상이라는 곳에서 8mm로 일반 언론매체에서 다루지 않는 주제를 다루기 시작하지.
그런 상태에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위안부를 취재하게 되었어. 그런 시점에 한겨레21이 주간지로 창간되었지. 그때 한겨레21의 해외기사에서 외국의 통신원들이 현장에서 취재하는 방식을 했지. 한겨레21과 아시아프레스가 기사공급 계약을 맺고, 그런 지면을 이용해 여러 가지 발표를 하게 되지. 팔레스타인, 아시아 에이즈, 보스니아 내전이라던가 그런 기사들을 일본의 현장 취재한 기자로부터 사진과 글을 받아서 한겨레에 번역 소개하고, 나도 그 지면을 통해서 기회를 얻었지. 그때 프리랜서 군이라고 불리는 사진가들은 한겨레 21을 중심으로 발표하게 되고, 그 가운데 이상엽, 정문태 이런 사람들이 한겨레 21을 베이스로 기사를 발표하게 되었지. 한겨레21의 창간과 더불어 한국의 프리랜스 저널리즘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기지. 그런 상태에서 KBS와도 관계가 생겨서 KBS의 취재물을 하거나, 같이 가거나 이런 상황들이 됐고, 일본군 위안부(중국 잔류)나 조선족, 사할린 쪽 잔류 조선인들, 미국으로 입양한 아이들, 입양 캠프 등 그런 기사들이 잡지나 방송을 통해서 여러 차례 발표되었어. 그러면서 사진 쪽보다는 방송 중심으로 일이 바뀌게 되고, 그 다음엔 특별히 변화가 없이 이어져 나온 것이지.
영화와의 만남
그러다가 2001년-2002년 무렵에는 사진이든 비디오작업이든 거의 아무 일도 안 하던 시절이었는데, 이때 전주 국제영화제 쪽 일을 하게 되었지. 2000년에 첫 영화제가 시작되었는데, 2회 때 프로그래머와 전주시 사이에 마찰이 생기고 파행이 되면서 영화제 자체에 대한 지속성이 문제가 생겼어. 내가 들어가자 갑자기 다큐멘터리 비엔날레를 하라고 해서, 프로그램 어드바이저로 들어가서 작품을 선정하고 영화 속의 다큐멘터리, 다른 장르 영화를 집중적으로 볼 수 있었지. 상업영화가 아니라, 접하기 힘든 유럽이나 미국 쪽의 예술영화나 방송 다큐가 아닌 다큐영화를 영화제를 위해서 보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런 일을 하면서 영화를 보는 것이 나에게 좋은 자양분이 되었지. 다른 일 하지 않고 500-600이 넘는 영화들을 그 당시에 봤으니까.
그러다가 2001년에 한국 여성부의 지원을 받아서 한국정신대 문제 대책협의회에서 일본군 위완부 피해자들의 비디오 증언집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지. 촬영할 수 있는 4명 정도의 사람들과 함께, 그 정대협 일을 추진하게 된 거야. 그러면서 전국에 있는 할머니들 가운데서 기억이 뚜렷한 상황을 재현할 수 있는 분을 대상으로 인터뷰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해서 전국에 있는 30명이 넘는 할머니들을 기록하게 되었지. 기록하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는 스물일곱 분의 할머니들이 각각 20분 정도의 증언집을 영상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반년에 걸쳐 완성하게 되지. 그게 아카이브로 보관되는 프로젝트였지.
그런 작업을 하면서 위안부 문제는 테마를 갖고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작업을 할 수는 없을까 고민을 했어. 녹취와 편집 따로 각 기능적으로 나누어서 했던 프로젝트였지. (아까 말했던 작업) 그것들을 다른 표현물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해보자. 비디오를 스틸로 뽑아서 비디오 인터뷰한 내용을 텍스트로 정리를 했어. 그것을 가지고 일부는 골라내고 비디오 캡쳐한 내용 중에서 상징적인 사진들은 영화 콘티처럼 배열을 했지. 비디오 사진전이라고 해야 할까. 비디오는 시간의 흐름으로 봐야 하지.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하고, 중간에 놓치게 되면 내용을 알 수 없는 게 영상이다. 그것을 일종의 텍스트로 변환시키면 책이라는 매체가 될 수 있잖아. 책은 원하는 공간과 시간에 원하는 사진이나 텍스트로 편집해서 내용을 전달할 수 있지. 그 부분에서 독자의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다. 비디오는 강압적인 매체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비디오를 텍스트와 사진으로 만들어서 영화 콘티식으로 전시회를 했지. 공동작업이었는데 전체를 아우르는 프로듀서로 사진을 선정하고 배치하고 택스트를 만들고 의미를 만들고 그런 디렉팅을 했지. 다양한 채널에서 쏘아보자. 방송, 웹, 전시 등 지금 현재 가능한 다양한 공간 개념에 액세스할 수 있도록 한 가지 소스이지만 표현방식을 정리하면 동영상, 스틸이 고정되지 않고 그 매체의 속성을 넘나들고 관통하고 어울리는 그런 것을 시도하기 위해서 ‘침묵의 외침’전을 일주일 동안 하게 되었지. 일주아트하우스 미디어 갤러리에서 비디오라는 매체를 판화지에 프린트해서 텍스트와 함께 보여주는 전시를 했고, 그 이미지와 텍스트를 다시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거야. 그런 일종의 순환을 프로덕션 작업으로 완성하려는 새로운 시도였지. 당시로서는 미술계든 사진계든 다른 미디어 관련된 어떤 공간에도 속해있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미디어를 믹스한 도발적인 전시였다고 생각해. 그 전시를 2주 정도 했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보고 갔어. 흥국생명 로비갤러리라는 속성 때문에 많이 왔지. ‘침묵의 외침’이라는 15분짜리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전주영화제를 통해서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졌어.
그 다음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 2003년, 신동필, 국수용 등과 함께 오키나와를 방문해서 이시가와라는 사진가를 만나게 되었어. 거기서 사진전이나 공동 프로젝트에 관해서 논의하고 왔는데, 한국 현대사의 문제 - 미군문제를 다룬 한국 사진가 5명과 일본 사진가 5명을 선정해서 사진전을 하자는 기획이 정리되었지. 그래서 한국의 사진가로서 국수용, 신동필이 주최가 되어 이용남, 노순택, 안해룡이 참가하기로 했고, 일본 쪽에는 이시가와 마오, 히가 토요미츠, 마끼다 기요시, 배소(재일교포) 외에 한 명(오마이 기사에 나옴) 5명+5명이 보여 ‘한국 일본 오키나와와에 관한 기록과 기억-사진가 10인의 눈’이라는 전시를 하게 되었지. 이 전시는 뒤에 오키나와와 오사카, 서울, 동경 등지에서도 순회전으로 열렸고, 여기서 일본의 식민지 국가에 대한 전쟁 책임 문제나 매향리 오키나와의 미군문제, 그 당시 효순이 미순이 사건, 재일교포 문제 같은 이슈들로 전시를 했지. 10명이 10개의 테마로 1년 동안 왔다 갔다 하면서 준비하고 그랬지. 그 안에서 의견 차이가 생겼었지. 복잡했어. 나는 신동필, 국수용을 돕는다는 정도로 사이드로 들어간 사람이었지만, 그 일들을 진행하면서 사진가들 사이에서 이견들이 생겼던 같아.
한국과 일본의 문제를 미국에서도 보여주려고 알아보고 있었던 중에 이시가와 마오가 만난 일본인 큐레이터를 만나서 고바다라는 PS1의 일본 담당 큐레이터를 만나서 이 사진집을 보여주고, 그래서 미군문제에 대해서 미국에서 전시한다, 미국에서는 주제를 단순화시켜서 아시아인들이 찍은 미군들의 현실에 관한 사진전을 열자는데 합의가 되고, 어떤 작가가 참여할 것인가가 결정되었어. 일본에서는 이시가와 마오, 히가 토요미즈, 한국은 안해룡(창구 역활), 이용남, 노순택, 이재갑이 하게 되었지. 10인 전에서는 위완부였지만, 미국 전시에서는 미군관련 사진을 하는 걸로 내용을 바꾸고, 이재갑을 추천해서 한국 4명 일본 2명 등 모두 6명이 전시를 하게 되지.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진가들끼리 복잡한 일들이 있었어.
PS1에서 2006년 9월부터 3개월 동안
이라는 전시를 하게 되었지. 당시로서는 미국에서 아시아인의 시각으로 집단적으로 미군문제를 다룬 최초의 전시였을 거야. PS1에서의 평가도 좋았고. 한국에서는 비자문제가 있어서 나 혼자가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디스플레이만 전문적으로 하는 큐레이터가 따로 있어서 사진을 어떻게 붙이는가를 고민하더라고. 3일 걸려서 디스플레이를 했어. 옛날에 찍어났던 사진을 골라낸 거였지. 발표하지 않았던 사진들. 그런 기간 중에 2003년에 도요하시에 있는 조선학교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콘서트에 한국 음악단체가 함께하는 행사를 내가 코디네이팅 하게 되는데, 그것을 계기로 도요하시 조선초급학교라는 자그마한 사진작업들을 시작하게 되었어. 사진작업과 영상작업. 2004년 초에 콘서트를 하게 되고, 그해 여름에는 ‘도요하시의 민들레’라는 이름으로 EBS에 영상작업이 소개되었어.
그리고 일단 재일동포 관련된 작업을 진행하면서 2005년에 에스토니아와 핀란드 두 나라에서 기획하고 코디한 디버스유니버스라는 퍼포먼스 페스티발에 참가하게 되었지. 처음에는 행사 자체를 사진이나 비디오로 찍는 걸로 따라가는 것이었는데, 가는 김에 발표하자고 해서. ‘침묵의 외침’ 영어판을 만들어서 전시를 하게 되었지. 퍼포먼스적인 액션도 하게 되고. 에스토니아, 필랜드, 파리까지 돌았는데 그 경험이 예술 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여서 굉장히 새로웠지. 주로 퍼포먼스 아티스트들과 같이 했지. 예술적인 체험이었고, 그런 것들이 재미있었어. 김윤환, 김강(오아시스 프로젝트)이라는 프랑스 스쾃에 관한 연구나 경험들을 한 친구들을 통해 그쪽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졌지. 목동 예술인회관을 점거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해서 추진한다고 해서 거기에 중심이 있는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친구들의 네트워크로 가게된 것이지. 그곳의 예술가들과 만나는 소중한 경험이었어.
그러다가 2005년에 ‘북녘 일상의 풍경’ 출판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고난의 행군시기의 북의 일상생활을 기록한 아마 유일한 기록이 될 거라고 생각해. 일본어판도 만들고 일본에서 사진전도 하고 잡지에 소개하고 이런 일들을 했지. 그 다음 작업이 2005년에 시작한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라는 다큐작업이야. 2007년 8월 25일에 일본에서 상영을 시작했고, 한국에서 극장 개봉은 마케팅 지원이랑 극장 상영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지.
2008년에는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학교다’의 도요하시 전시를 복합 예술공간에서 했지. 사진영상, 모델링한 재현한 학교 공간들을 보여주는 전시가 됐고, 그게 나로서는 작업 부분에서 내 작업 자체를 정리(5년 동안 도요하시를 찍은)해서 역사와 현재를 보여주는 종합적인 전시를 한 거야. 오프닝 때는 권해요도 오고 도요하시 출신 유학생들과 관계자들 100명 넘게 왔어. 실제 학교사진으로 한쪽 벽을 현수막으로 채우고 작은 학교를 짓고. 강의실로도 이용하고 전시장 입구를 토요하시 학교처럼 간판을 달고 계단을 통해서 계단에서 학교의 역사를 볼 수 있도록 했지.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는 전시회는 공간자체를 확장하는 전시였고, 올해 대안공간 건희에서 6월 5일부터 18일까지 하는 것은 나고야 지역에 있는 학교야.(영상물은 완성했고) 나고야 조선초급학교 (옛날에는 7개였는데 통폐합)를 재현해서 보여주는 전시를 생각하고 있지. 상장, 표창장, 개근상들을 칼라 복사해서 재현해. 당시 했던 졸업앨범들을 구한 게 있어. 사진들이 있고 비디오 인터뷰가 있고. 학교 모습을 좋은 이미지형태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새벽부터 밤 모습까지의 하루의 모습을 스케치할 거야. 시간적인 개념으로 조선학교를 해석하는 거지. 갖고 온 오브제로 전시할 것이고. 학생들이 와서 현지 식으로 꾸미고 공부를 할 것이고. 그 공간자체가 프로젝트 룸으로 생각하고 있어, 마당에 배경 대를 만들어 천을 설치하려고 생각하고 있어. 학생들을 찍듯이 인터뷰를 기록할 거야. 오프닝 행사 끝나고. 마당에는 지금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을 페트에 출력해서 붙일 거야. 야외 공간은 살아있는 공간이고, 하루의 모습을 사진으로 오브제들도 전시가 되고 영상은 한 구석에서 상영되지.
강:
그동안 일본과 한국과의 관계에 놓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욱 해오셨죠. 이 주제를 이끌어온 이유가 있나요?
안:
우연히 만났는데 쪼금만 더 한다는 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그게 지나 보니까 시간이 많이 투자된 거지. 그 만큼 사람들을 만나고 자료들을 만났던 거야. 옛날사진 - 도요하시는 원사진도 다 있거든. 학교가 없어지면 그 학교에 있는 자료가 다 없어지지. 사람들이 중요시 않고 있지. 도요하시도 앞으로 없어질 수도 있어. 학생 수가 없어서. 나고야의 학교 인가 서류, 학교 건립될 때의 자료들, 옛날 흑백 졸업 앨범. 모든 역사가 상층부의 지도자의 일이거나 몇몇 상징적인 일로 요약이 되잖아. 그 역사 공간을 구성하기 위해 교장도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내서 만든 공간이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하나하나 담아내야지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기록하지 않고 보지 않았지만 버려진 역사들에 대한 역사들을 정리해 놓으면 누군가는 온전한 역사를 남길 수 있다는 생각이랄까. 역사관이야. 역사과 출신이라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원사료에 관한 부분들에 관심이 많아.
강:
매체 자체에 대한 생각은?
안:
미디어라는 것들은 표현하는 수단이나 통로일 뿐이지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지. 노트와 펜을 고전적인 미디어로 둔다면 사진 비디오가 과거의 노트와 펜을 대체하는 것으로 전용이 가능한 것이지. 미디어를 제한된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 자체가 상호 침투하는 것을 보고 싶고 그런 부분들을 잘 보일 수 있는 작업들을 설계하고 싶은 거지..
강:
앞으로 생각하고 있는 작업들은 어떤 게 있는지요.
안:
사진과 영상, 설치 등으로 재구성한 재일교포의 역사. 이 작업을 계속할 거야. 이유는 마무리가 안 돼서. 아직 내 발언이 끝나는 시점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모르고 있거나 잊혀져 있거나 버려진 역사이기 때문에 중요해.
강: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다큐멘터리라는 것은 어떤 것인지
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찍는 거 자체가 기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찍는 게 아니라 찍는 것을 대상을 해석하는 것이 다큐멘터리다. 해석의 과정이잖아. 해석의 문제의 적극성을 둔 작업을 하고 싶다. 그리고 사진, 영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매체들을 통합해서 내고 싶다. 토탈 미디어와 같은 형태. 출판만을 사진만을 영화만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어느 공간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위안부 문제를 발언하고 싶은 관심, 다큐멘터리가 무엇인지의 고민보다는 어떤 형태로 해석하려고 하는가가 나에게는 제일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강:
한국에서는 다큐멘터리의 위기라고 하는데.
안:
위기는 사색이 없기 때문이다. 즉자적인 것들을 찍어서 그냥 극한 현장을 보여주는 것이 다큐의 목적인 것처럼 생각했으니까 그것이 원인이다. 사회에 대한 통찰이 없었다. 이미지에 대한 고민만 있고 문제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테크닉 비주얼 중심의 사진이 되고 평가를 하고 판단한 과정들이었지 그 사진을 찍었던 공간의 역사성이나 사회성들에 대한 성찰이 적었다고 생각해. 테마로서만 찍지. 테마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성찰이 사진에 반영된다. 뉴스에서 그런 예기가 있거든. 특종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개 오픈된 인터뷰에서도 특종이 나올 수 있다. 남들이 보기 힘든 공간을 찍는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 아닌. 지금 있지만 그 공간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이해하고 표현하는가를 발언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강:
다큐멘터리를 하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안:
기본적으로는 테마나 주제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이 없다면 보여주기 위한 표현에 지나지 않고 성찰이 전재 되어야지만 역사의 진실성이 담보된 사진이 나올 거라는 것이지. 다큐가 뉴스는 아니니까.
강:
본인 작업 중에 가장 애정이 가는 작업이 있나요?
안:
하나하나가 다 그런 게 아닌가.
강:
좋아하는 작가가 있나요?
안:
쿠델카나 살가도 같은 사진들이 인상적이지. 특히 쿠델라카 사진은 직접적이지 않고 은유나 사색의 언어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런 사진은 나오기 힘든 사진이야. 역사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해. 시계 있는 사진도 그렇고. 영화 쪽은 잘 모르겠어. 어느 부분의 어떤 이미지가 좋다 그런 거라서. 감독 이름을 외우려고 생각하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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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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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해룡
안해룡 초대展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 _ 나고야”
안해룡
사진가 안해룡을 만나다 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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