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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진의 즐거운 책보기 - 05. 시간의 유산
한국사진에 있어서 과거란 아직 정리되지 않은 보물 창고 같은 것이다. 과거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이 양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데, 지금 한국사진에 대한 관심 - 학문적 연구의 수준이든 가벼운 흥미이든 - 은 그러한 초보적 단계에 놓여있다.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자료로서의 사진의 가치에 주목하지 못한 탓이 가장 크겠지만, 사료로서의 사진은 수집된 양이 적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체계적인 분류나 축적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현실이다. 지금이라도 과거의 사진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귀중한 문화적 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무궁무진한 부를 숨기고 있을 지도 모르는 보물 창고를 들여다보는 마음으로 과거의 사진들을 대할 일이다. 『한국사진과 리얼리즘』이라는 일면 딱딱하고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은 한국사진의 과거, 즉 1950-60년대의 대표적인 경향이었던 리얼리즘 사진을 보여주는 사진집이다. 2002년 11월 18일과 12월 2일 사진에 열린 동명의 전시를 계기로 출판되었으며, 김한용, 손규문, 안종칠, 이형록, 정범태 등 5인의 현존 사진가가 4-50년 전에 촬영한 사진들을 수록하였다. 김한용(1924-)은 해방 이후 국제보도연맹과 부산일보 사진기자로 활동하였으며, 1959년 한국 최초의 광고사진 전문 스튜디오인 ‘김한용사진연구소’를 개설하였다. 손규문(1927-)은 조선미술연구원을 수료하고 ‘신선회’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안종칠(1928-)은 한국일보 사진기자를 역임하였으며 ‘신선회’와 ‘한국사진작가협회’의 창립 회원이다. 이형록(1917-)은 ‘신선회’의 창립에 산파 역할을 하였으며, 정범태(1928-)는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세계일보 등에서 사진 기자를 역임하였다.
「한국사진과 리얼리즘」1950-60년대의 사진가들, 눈빛
김한용, <요지경> 서울 혜화동, 1955
김한용, <고아> 부산역 앞, 1952
김한용, 부산 광복동, 1952
리얼리즘이란 사전적으로 ‘객관적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재현하려는 태도’이다. 사진술의 탄생 이면에 19세기 유럽 회화의 리얼리즘적 전통이 있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진은 본질적으로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며 사실적인 기록에 있어서 뛰어난 도구이다. 리얼리즘에 대한 정의는 적용되는 매체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20세기의 리얼리즘은 사실 또는 객관을 정의하는 시점(視點)의 개념이 포함된다.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가’와 함께 ‘어떠한 태도로 그 사실을 보여주는가’도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사진들은 소위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표방하였던 <신선회>를 중심으로 제작된 것이다. 사진가 면면의 활동 영역은 보도, 광고, 종군 사진가 등으로 다양하지만, 전쟁직후 예술을 긍정적 활력으로 승화시키려는 공통된 의지가 담겨져 있다. 1930년대 문학을 중심으로 시도되었던 한국의 리얼리즘 경향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색채를 강하고 띈 것이었고, 전후 냉전 시대의 예술가들은 자연히 그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사진에서 생활주의의 전통은 휴머니즘과 긍정적 세계관으로 요약될 수 있다.
손규문, <목재소> 서울 청량리, 1960
손규문, 서울 녹번동, 1962
과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사진은 본질적으로 기록의 속성을 띄고 있다. 모든 사진은 촬영되는 순간의 찍혀진 대상에 대한 존재의 증명이다. 인간의 기억은 가변적이고 유한한 것이지만 사진은 영원하다. 사진은 우리의 기억을 대신하여 역사를 구성한다. 사진 속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사진으로 회상하는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불과 사오십년의 세월일 뿐이라고 말하기에 1950년대 이후 우리가 겪어온 외형적 변모는 너무나 급격한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우리의 현대사는 왠지 막연히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불안정한 정치 환경과 급속도로 성장한 경제의 허점들이 인간으로서의 기본 생존권을 위협해온 지난한 세월쯤으로 우리의 과거를 폄하하는 태도는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인지부조화적 상황을 초래한다. 과거사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가지려면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지나간 시간들이 현재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인식은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미래지향적 태도를 가지게 하는 힘을 낳는다.
이 책의 사진들 속에 남겨진 시대의 초상은 우리의 과거에 대한 자료적 성격을 띄고 있다. 우리는 그 사진들에서 낯설게도 가난하고 절박한 삶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이 곧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이며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뿌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현재는 사진 속의 삶과 다르지만 이러한 오늘을 누리게 되기까지 그들의 희생과 인내가 밑거름이 되었음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서양사회에서 사진술이 처음 등장한 이후, 프랑스와 미국을 중심으로 사진 이미지를 통한 역사의 기록은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하나의 사례로, 1929년 미국의 졍제대공황 이후 황폐해진 농촌의 극단적으로 비참해진 모습을 기록한 FSA(Farm Security Administration) Project을 생각해 보자. 이 기록 사업의 특징은 정부가 전문 사진가들을 고용하여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기록을 시도하였다는 것이며, 그 결과물은 당시 관주도의 재건 사업에 필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을 뿐 아니라 현재 미국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20세기를 통해서 세계 최강의 부국으로 자라난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하는 학습 자료로도 활용되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사진들이 가지는 자료적 성격은 사실주의적 접근방식을 통한 삶에 대한 기록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안종칠, <소년> 서울 명동, 1956
안종칠, <모녀> 서울 효자동, 1956
안종칠, <강태공> 서울 한강, 1959
긍정과 온기의 시대
사진은 존재하는 것을 기록하지만, 그 기록된 결과물은 사진가의 눈을 통해 해석된 것이다. 사진은 순간을 기록하고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세상을 담는다. 이러한 시간적, 공간적 선택을 통해서 사진가는 세상에서 자신이 주목하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을 드러낸다. 어느 순간의 어느 공간을 사진에 담느냐는 사진가의 세계관과 신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사진을 볼 때, 감상자는 사진가의 선택의 결과가 이끄는 대로 대상을 바라보게 된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만 오히려 그렇게 너무나 일상적이기 때문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서 우리가 새삼스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이 지닌 존엄성이다. 노동과 절제, 평등과 형제애, 긍정과 온기가 5인의 사진가들의 눈길을 따라 만나게되는 주인공들의 얼굴에 담겨있다. 그들의 사진 속에서, 과거는 낯설기 만한 가난과 절박함에 머물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빈한하고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의연하게 삶에 맞서는 활기와 세대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다. 이 책에 담긴 사진들은 외면하고 잊어야 할 과거지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지탱해 주는 뿌리인 인류애를 느끼게 해줌으로써 과거보다 나은 오늘과 오늘보다 아름다운 내일을 향하는 긍정적인 세계관을 전파하는 장치이다.
현재의 모든 존재들은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뿌리를 아는 것은 현재에 대한 이해의 가장 초보적인 과제이다. 이 땅에 사진술이 전래된 지 약 120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제 사진의 사회적 쓰임새는 서양사회에서와 큰 차이 없이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외래의 기술이나 사상이 그러하듯이 사진술도 토착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 한국적인 사진의 특성을 만들어 왔다. 오늘의 한국사진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뿌리를 탐색하는 일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형록, <벽> 서울 면목동, 1959
이형록, <거리의 구두상> 서울 남대문 시장, 1957
정범태, 서울 신수동, 1957
정범태, 서울 만리동(현 서부역 앞),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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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수진
(사진심리학, 연세대학교 인지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즐거운 책보기』는 사진과 관련된 글이나 이미지를 담고 있는 모든 책에 관한 컬럼이다.글쓴이 신수진은 사진이론과 시각을 전공한 심리학 박사이며, 현재 연세대학교 인지과학연구소의 전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본 기사의 내용은 '월간 포토넷'에서 제공해준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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