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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 골목안 풍경 Ⅵ

이번 여섯번째 '골목안 풍경'이란 사진집을 낸사진가 김기찬 선생은 그동안 고도로 산업화되고 현대화된 도시 속에서 이른바 소외된 사람들이 골목 안에서 영위하는 삶의 모습을 오래 동안 기록해 왔다.

「박하사탕」이라는 영화는 많은 분들이 알다시피, 담고 있는 내용도 좋았지만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진행시키는 스토리의 전개방법이 마음에 들어 아직도 가슴속에 아릿한 여운을 남게 만든 영화다. 이번에 출간된 김기찬 선생의 여섯 번째 사진집 「골목안 풍경 VI」(2003, 눈빛)에서 그 때와 같은 감동을 받게 되었다. 정겹고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골목 안 정경들은 이미 그의 독자적인 스타일로 정착해버렸다. 하지만 이번 사진집의 특징은 그보다도 시간을 압축하는 '정점촬영(定點撮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점촬영이란 간단히 말하면 시간을 두고 같은 장소를 같은 카메라 앵글로 기록하는 것.

연속적으로 이어진 시공간 가운데에서 어떤 순간을 잘라내는 것이 사진의 본성이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아득한 과거의 한 장면을 기록한 사진은 그 사이에 흘러갔을 시간의 경과와 사건들을 보는 사람에게 연상시킨다. 말하자면 한 장의 사진은 그 사진이 찍혀진 순간과 먼 훗날 누군가가 그 사진을 들여다보는 순간 사이의 시간과 공간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다. 김기찬 선생은 이번 사진집에서 그런 적분(積分)적인 시간의 축약을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1972년 '무더운 여름날 골목을 돌아 내려오다'에서 만난 어린 쌍둥이 자매와 검은머리의 어머니가 그로부터 29년이 지난 후에 아주머니들이 되어 이번에는 머리가 하얗게 쇠어버린 어머니와 함께 찍혀 있거나, 한 살 아래의 사촌 동생의 얼굴을 씻겨주고 있는 자매들이 22년 후 각각 첫 아들을 안은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들이. 29년! 한국의 어떤 사진가가 이처럼 길게 사진을 찍었던가. 그것은 그냥 골목 안 사람들을 찍은 한 장의 사진으로 보아 넘기고 말 그런 사진이 아니다.

■ 인 터 뷰

대방동 공군회관 근처에 있는 김기찬 선생의 자택을 방문했다. 현관의 초인종을 누르자 함박 웃음을 띈 얼굴로 반갑게 손을 내밀어 주신다.

1. 안녕하세요? 먼저 여섯 번째 「골목안 풍경」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1964년, 첫 직장으로 동양TV 영화부에 입사하신 걸로 알고 있는 데요. 사진을 처음 시작하셨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그렇지요. 당시 내가 입사해서 소속된 영화부에 김행오 선생님이 부장으로 계셨습니다. 사진에 깊은 애정과 뚜렷한 철학을 갖고 계신 분이었죠. 나에게 사진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주신 분입니다. 그 분과의 만남을 계기로

사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입사한지 만 2년이 되는 1966년 가을 어렵사리 중고 카메라 한대를 장만했습니다. 방송국이라는 곳이 바쁜 곳이라서 주로 출퇴 근길에 카메라를 메고 다니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요. 항상 시간에 쫓기며 살긴 했지만, 카메라를 메고 출근하는 새벽길을 상기하면 지금 생각해보아도 참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2. 어떤 사진가들을 좋아하셨는가요?

사진을 처음 시작했을 당시, 김행오 부장께서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든 유명한 사진가들의 사진집을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이나 「유럽인」, 브루스 데이빗슨의 「뉴욕」, 유진 스미드의 「시골의사」와 「피츠버그」, 「스페인 촌락」, 로버트 카파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찍은 사진들과 헝가리의 고아를 찍은 베르너 비숍, 데이비드 세이무어,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 윌리엄 클라인의 「뉴욕」 등 지금은 모두 사진의 고전이 되어 있는 사진들이었죠. 모두가 나의 우상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유진 스미드를 제일 존경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들여다보는 따뜻한 눈길도 그렇지만, 자신을 '약자의 대변자'라고 말하는 그의 사진가로서의 인간적인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3. 서울이 고향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고향이 없다는 말을 곧잘 하는데요. 이른바 '개발'이나 '현대화'에 물들지 않은 골목은 그들에게는 어쩌면 고향과 같은 느낌을 주는 유일한 공간이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카메라를 들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그리고 30년도 훨씬 넘게 그 '특별한' 장소를 찍고 계시는데, 어떤 매력 때문입니까?

나도 원래 서울 토박이입니다만, 내가 어렸을 때와는 많이 변했지요. 지금은 노량진 쪽으로 옮겨갔습니다만, 내가 처음 사진을 찍기 시작한 곳은 그때까지만 해도 서소문 쪽 철길 건너편에 있었던 염천교 수산시장이었습니다. 이곳과 내가 다니던 회사가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출퇴근길에 이곳에 들러 2년 가까이 그곳을 생활 터전으로 하는 사람들을 찍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살고 있는 동네까지도 찍게 되었는데, 그들이 살던 곳이 바로 지금의 나의 사진 속에 나오는 골목길 동네였습니다. 그것이 내가 골목안 동네를 찍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하지만 거기는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동네와 너무 흡사해서 그곳에 가면 마치 고향 동네를 찾아간 것처럼 아주 포근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까요, 그런 곳이었죠.

4. 지금은 한국의 도시들에서 골목길이 많이 사라져버렸고, 그 대신 그곳에 아파트 같은 대단위 주거 공간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골목'에서 생활하고 있거나 아니면 '골목'에 대해서 남다른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일반적인 '골목' 찍으시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로서 골목 안 동네를 찍고 계시는데, 선생님의 골목과 다른 골목과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 지요?

예를 들어 봉천동에도 골목길 동네가 있긴 하지만, 그곳은 정부정책에 의해서 억지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공간입니다. 하지만 나의 사진집에 나오는 중림동이나 도화동 같은 곳은 오래 전부터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서 형성된 그런 자연스런 생활공간이지요.

5.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들은 바로 이웃 간에도 여간해서 인사를 나누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찍으시는 골목 안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거주공간, 말하자면 골목이나 동네라고 하는 공동체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 같고, 선생님께서도 그들 주민의 일부로 동화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요. 그들에게 있어서 '골목'이라는 공간은 삶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마당이며 정원이고 놀이터이자 서로 모여 앉아 정보를 나누기도 하는 그런 공유의 공간입니다. 아파트와는 다르지요. 시골 촌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정경들을 서울이라고 하는 대도시 한복판에 남아있는 이 골목길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곳 주민들은 한 달에 2, 3만 원씩 계를 부어서 얼마쯤 모아지면 함께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답니다. 늦가을이 되면 김장거리를 공동구매해서 함께 김장을 담그기도 하구요. 거짓말로라도 풍족한 생활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이곳에는 공동체 생활의 좋은 풍습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덕목들이 남아있습니다.

6. 이번 사진집에는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은 페이지를 넘기면 커다란 처녀가 되어있고, 그 처녀들은 어느새 애를 업고 있는 엄마가 되어있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시간의 흐름을 따라 기록한 시퀀스가 아니라 철저한 정점 촬영적인 방법으로 찍혀져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에 따라 달라진 사람들의 사진들을 보면서 그들이 경과해 왔을 개인의 역사라고 할까요, 긴 시간을 압축한 듯한 사진에서 정확히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요. 과거의 시간은 언제나 아름답지 않습니까? 선생님의 사진에는 정서적으로 상당히 메마른 사람조차도 한 순간에 과거의 시간 속으로 끌어들이는 강인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진을 보면 30년 가까이 지난 다음 같은 장소에서 찍으신 것이 있는데, 그들을 다시 찾아내서 찍는데는 어려움도 많으셨겠죠?

네, 아주 어려웠습니다. 내가 평생의 작업으로 골목을 찍기로 작정은 했지만, 처음 시작했을 때는 그들의 연락처나 주민등록번호 같은, 그들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실마리 같은 것을 들어두지 않았기 때문에, 달랑 사진 한 장을 갖고 다니며 수소문해서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막상 이전 사진집들에 나온 사람들을 찾아 만나게 되어도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의 모습들이 밝혀지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만. 그런가 하면 오히려 나를 일부러 찾아와서 사진을 찍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언젠가 내가 KBS방송의 한 프로그램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때 나를 보고 어떻게 연락이 되어 만나게된 거였죠. 애띈 모습의 소녀가 어느새 아줌마가 되어 눈앞에 훌쩍 출현한 것이지요. 그 감회는 이루 말할 수 가 없었습니다.

7. 이번 여섯 번 째 사진집을 마지막으로 「골목안 풍경」시리즈를 끝내시겠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 이유를 여쭈어 보아도 될까요?

사실 내 사진의 주제인 골목안 동네는 급속한 도시화에 밀려 사라져가고 거의 찾아볼 수 없는게 현실입니다. 평생을 찍기로 마음먹었던 장소인 골목 동네가 이젠 사라져버린 것이지요. 이전의 사진집에 찍혔던 사람들을 찾아서 다시 찍게 된 동기도 그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큰언니가 유영애 동생을 업고 있다.1972.9.4
29년후, 언니 영애 씨등에 업혔던 동생 영자씨가 아들을 업고 있다.-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앞에서-2001.12.9

8. 어쩐지 가슴이 허전해지는 말씀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조국 근대화나 풍요로운 생활 같은 것을 추구해 왔는데, 생활이 윤택해진다는 것은 결국 그만큼 많은 것들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는 얘기이겠지요. 선생님의 사진에는 메마른 삶 속에서 우리가 잊고 살아온 따뜻한 이웃들의 마음들이 담겨있습니다. 더 이상 찍으시지 않는다는 말씀을 들으니 선생님이 사진으로 담아오신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되는군요. 그런데 프린트는 직접 하시는 건가요?

네. 처음부터 직접 프린트하고 있습니다.

9. 작업실은 따로 가지고 계신가요.

하하. 작업실은 따로 없습니다. 집의 방 한 칸을 아예 작업장으로 만들어 쓰고 있습니다.

10. 지금 진행되고 있거나 앞으로 예정된 작업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9월에 대림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때 전시할 사진들을 프린트하는데 전념하고 있습니다. 번에는 전지 사이즈로 몇 점을 인화할까 합니다.

11. 젊은 사진가들에게 들려주실 말씀은요?

사진 작업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황이고 흐름이고 패션(유행)이겠지만, 사진의 본질이 기록에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젊은 사진가들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요건은 인내와 지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갈 때, 회사로 가는 버스 번호까지 자상하게 일러주시는 김기찬 선생…. 그의 사진에서처럼, 그에게서는 포근한
인간의 냄새가 난다. 환갑을 넘기고 이제 일흔 가까운 나이가 된 그가 골목길에서 아이들과 함께 웃고 장난을 치며 사진을 찍고 있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자신도 모르게 따스한 행복감에 젖어든다.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확대되어가고 변하여 가는 거대 도시 서울에 사는 우리들에게 영원히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고향을 남겨주신 김기찬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다양하고 많은 서적과 재즈와 클래식등 많은 수의 레코드판을 소장하고 있는 김기찬 선생

luna@fotato.com 표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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