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최항영, 그를 만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차례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고 나서야 어렵게 만남이 이루어졌다. 전업 작가로서 이렇게 바쁘다는 것은 분명 축하할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만나기가 힘이 드는데, 이 프로젝트를 앞으로 일 년 동안 지속시켜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앞으로 11명을 이런 식으로 어렵게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어찔해진다. 사진 촬영까지 하면 보통 두세 번을 만나야 하고, 두세 번을 만나려면 열 번 정도는 약속하고 취소하기를 반복해야 한다. 시간이 넉넉한 다른 작가로 순서를 바꿀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드디어 약속이 잡혔다.
만남이 이루어진 2월 27일, 나타나서도 그는 업무 전화로 정신이 없다. 한참의 통화가 끝나고 나서 드.디.어.
인터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렇게 해서 에너지는 소진되어 버리고, 머릿속에서 여기저기 뒹굴던 질문들은
모두 하얗게 표백되어 버렸다. 이제 모든 것을 흐름에 맡겨두는 수밖에 없다. 그냥 살아온 인생살이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건데 뭐,
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작가의 다른 약속 때문에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 3시간.
한국의 30대를 대표하는 다큐 사진가이다.
남이 알고 싶어하는 것과 남이 알아야 할 것을, 자신의 색깔로 표현 하는 프리랜서 사진가이기도 하다.
로이터통신, AP와 뉴욕 타임즈에서 활동하다가 몇 해 전엔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코소보를 다녀왔다.
현재는 H. U. Pictures 라는 에이젼시를 운영중이며, 2000년에 시작한 철의 실크로드와 한국의 동해안에 관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2014 평창동계 올림픽 최종PT작업에 참여했다.
글/ 노정환(편집인)
4. INTERVIEW
1. 고등학교 시절. 419. 풍물패
강: 사진을 시작하기 전의 학생시절의 최항영부터 만나 볼까요. 고향이 어딥니까? 최: 성북구 정릉. 그곳에서 태어나서 30년 정도를 살았습니다.
강: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셨어요? 최: 평범한 직장인. 아버님께서는 아직도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민을 가는 사람들의 짐을 옮기는 회사입니다. 그 밖에 해외 화물을 주로 다룹니다.
강: 그 걸로 가족들이 생활하신 거네요. 최: 그렇죠. 어머님은 전업주부고 음식솜씨가 좋으셔서 드문 드문 주방장으로 일하신 적이 있어요.
손맛이 좋으셔서… 소일거리로 하신 거죠.
강: 그럼 지금 집에서 부모님과 같이 사시는 거에요? 최: 예, 정릉에서 살다가 지금의 구리로 이사왔습니다.
부모님. 여동생 둘은 이미 결혼도 했고 조카들과 자주 놀러 오는 편입니다.
강: 중고등학교는 어땠어요? 최: 중학교는 그저 그렇게 보낸 걸로 기억 됩니다. 고등학교 때가 이야기가 많습니다.
전교죠 1세대로 풍물패 활동을 하게 되었고.
학교 행정에 비합리적인 것이 있으면 대자보도 붙이고. 고등학교 다닐 때 동국대학교 탈패 선배들을 알게 되어 함께 데모에도 나가보고
고등학생이지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한때는 꿈이 혁명가였는데, 그릇이 크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 (사진가로) 합의를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웃음)
제가 사진과 인연을 맺은 것은 우선 저의 생일과 연관이 있습니다. 제 생일이 4월 19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419탑에 호기심
때문에 가보게 되었는데, 87년 고등1학년 때로 기억됩니다. 그때 당시는 화염병이 날아다니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화염병을 던지고
격렬한 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불신검문이 있었지만 고등학생이라서 별 문제없이 419탑까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사람들을 잡아가고 때리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방송사 신문사 기자들이 많이 와 있었는데. 그래서 내가 본
현장이 9시 뉴스에 나오는 거구나. 그래서 그날 집에 가서 호기심에 9시 뉴스를 보고 신문도 봤는데, 정치인들 헌화하는 것만
나오고, 시위 장면은 나오지 않더군요.
그 때 결심했습니다. 내가 본 현장을 전달해야겠다. 적어도 시작은 단순, 명료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확실한 동기부여는 없었습니다. 보도 되지 않는 것에 사실 많은 충격을 받았고 그전까지는 저의 막연한 꿈은
요리사였거든요. 내가 본 것을 전달하는 도구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때부터였고 결국은 그것이 카메라였습니다.
강: 그 이유는? 최: 우선 사실을 가장 사실적으로 전달 할 수 있는 것이 카메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사진 저널리즘이 활성화 되어 있을
때였고. 그때 나에게 카메라는 현장을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려면 카메라도 필요했고, 암실도 있어야 했죠.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 사진반이 없었고 장비를 구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던 상황도 아니었고 전 평범한
고등학생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지만 사회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있었고. 그러다가 학교 풍물패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주말에는 대학로에 차가 안 다녔는데. 거리 공연도 하고, 공연 끝나면 여학생들이 캔 커피도 갖다 주고 괜찮았어요. 남들에게 주목
받는다는 것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수)북을 쳤고. 그러다가, 동국대학교 선배들을 알게 된 거죠. 데모하는 현장에 기웃거리기도
하고. 술도 배우고 그 때는 정치적인 관심보다는 현장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재수, 바리스타, 군대, 대학시절 그리고 외신 기자들과의 만남
최: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다가 대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에 있는 사진과를 알아봤는데. 서울에서 일어나는 뉴스
사진을 찍어야 하니깐요. 학교가 서울에는 서울예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재수를 해서 들어갔고. 처음엔 장비도 부족했고 암실도
없었고 제대로 된 포트폴리오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이론 테스트는 잘 했는데 포트폴리오가 받쳐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입학하기도 진짜 힘들었고요. 경쟁률도 지금이랑 많이 달랐고요.
재수하면서 자뎅이라는 제대로 된 원두커피를 파는 카페 체인점으로는 1세대죠. 거길 들어갔어요. 거기서 일년내내 일하면서 장비도
바꾸고 다락방에다가 암실도 하나 만들었어요. 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도 재료비가 많이 드니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대학 잡지사 명예
사진기자도 하고 레슨도 그 때 시작했어요..
강: 첫 카메라는 뭐였어요? 최: 종로에 가서 중고로 하나 샀어요. 니콘이었는데… 이름이 뭐더라? F2? 맞아, F2였지. 아버지가 뭘 모으는 게 취미셨는데.
집에 미녹스라고 하는 초소형 카메라도 있었고, 이름은 모르겠는데, 다른 구작다리 카메라도 있었고. 그걸로 취미 삼아 가끔
찍으셨어요. 한두 장 찍고, 장롱에 넣어 두고….
고 1때, 고 2때 그 카메라로 찍긴 했는데, 고 3이 돼서야 내 카메라를 사게 되었고. 일하면서 암실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사진작업도 하게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로는 아주 다양한 서브 카메라를 사용했고 모든 카메라가 손에 익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메인은 계속
니콘을 썼어요 F2, FM2, F3, F3P, F801, F4 그리고 마지막 필름 카메라가 F5였지 지금도 F5가 35mm필름
카메라 중에서는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 후에 지금 쓰고 있는 캐논 5D로 바꿨는데, 그 때 당시에는 니콘은 모두 크롭바디였고
그런 몇 가지 실패한 정책 때문에 니콘이 지금 고전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연유로 필름에서 디지털로 니콘에서 캐논으로 바꾸게
된거죠. 카메라 바꾸고 나서 한동안 얼마나 낯설던지. 요즘은 가끔 니콘을 꿈꾸지요. 니콘의 초기 정책이 좀 야속할 때도 있고요.
작가가 사용했던 필름 카메라
군대를 가게 됐는데 92년, 93년을 군에서 보내고 94년도에 제대를 했지요. 제대할 무렵 성수대교 무너지는 것을 봤고요.
신병교육대 가기 전 춘천의 대기 보충대에서 잘 하는 거 있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더라고. "사진 잘 찍습니다!", 했더니
사진병은 지난주에 다 뽑아 갔다고 하더군요. 카메라를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죠. 일주일 이상 셔터를 누르지 않음 많이 낯설어 지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신병교육대 가서 통신병 주특기를 받았어요. 자대를 102여단으로 갔고. 3년 동안 주둔지가
동해안이었고 그때 특별히 바다와 동해안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지금도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거진항과 삼척을 좋아합니다.
개인적으로 추억이 많은 곳입니다.
강: 아, 군대생활이 동해안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거군요.
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같이 했으니, 그 후에 있었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진가들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많은 내, 외신기자들을 만났고. 성남훈 선배도 그때 현장에
있었습니다. 난 아직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있었고, 성남훈 선배는 파리와 외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할 때였죠. 그렇게 현장에서 선배
사진가들을 만나면서 모든 계획들이 구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작업을 하다가, 현장에서 외국 통신사 기자들과 친해지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외신 통신사 포토저널리스트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동기 중에서는 포토저널리스트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제가 유일했던 걸로 기억됩니다.
1학년 때, 배병우 선생님 수업시간에, 암실 실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매번 데모사진을 과제로 가져갔지요. 암실 실기수업에 나는
화염병이나 최루탄 터지는 사진을 찍어서 과제로 제출했는데. 그런데 배병우 선생님이 재미있는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꾸준히 하니까
그것에 대한 열정을 알겠다. 한번 포맷을 617로 찍어봐라." 하시더라고. 그때 그 말을 귀담아 들었더라면 지금쯤 내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어쩌면 조금 더 빨리 작가로 데뷔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선배의 선견지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동해안 작업
하지만 저는 그때 작가보다는 포토저널리스트로 일을 하려고 했으니. 617 포맷이 나에겐 의미가 없었던
것이고 그래서 35mm로 작업을 계속 하게 되었지요. 후배들 얘기로는 배병우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제 얘기를 하신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때의 꾸준함을 기억하시는 것 같습니다.
강: 이런 스승과의 만남도 중요한 것 같아요. 이규철 선배도 구본창 선생님이나 정주하 선생님 수업을
들었고. 그래서 ‘비오는 날의 오후’를 완성한 거죠. 그런데 일이나 생활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최: 당시 배병우 선생님은 소나무가 널리 알려질 때가 아니었어요. 어느 정도 작가로서 명성은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습니다. 617이라고 하는 독특한 포맷으로 꾸준히 작업을 하셨죠 선생님의 말씀을 돌아보니 열정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도 형식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나고 보니 배병우 선생님의 조언을 시도해 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될 때도 있지만 모든 것은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배병우 선생님의 본뜻은 자신만의 공유한 감수성을 바쳐줄
독특한 형식이 반드시 필요하다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형식을 찾는 건 무척 중요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감수성이야 훈련이 필요로 하지 않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을 담보해
낼 수 있는 형식이나 라인업을 구축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경험과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학교 다닐 때도 아주 다양한 일을 했어요. 캠퍼스 저널이라고 하는 잡지를 대학 언론문화사라는 곳에서 만들고
있었는데 사진 명예기자로 일을 시작했어요. 그렇게 해서 현장을 다니기 시작한 거죠. 그리고 입시 때가 되면 사진 레슨을 했어요.
한때는 사진 레슨 계에서는 떠오르는 스타였죠. 레슨은 학교 졸업할 때까지 계속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자뎅의 스페셜리스트로 일을 했어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바리스타죠. 새로운 지점을 열고 일정기간 자리 잡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런 일을 가끔 했고 특별한 기억이 하나 있는데 대학로 지점에서 일할 때 김광석씨가 세상을 등지기 며칠 전에 원두를 사러
왔던 겁니다. 진한 원두를 그라인딩 해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해서 데모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제대 이후로는 삼풍에서 외신기자들을 만났는데, 그러다가 지금의 게티 이미지에 있던 정성준 기자하고 친해졌고 그때 정성준 씨는
AFP 프리랜서였고. 나더러 혼자 다니지 말고, 로이터에 자리가 있다고 하더군요. 한겨레신문사에 있는 선배를 통해 로이터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땐 휴학 중이었죠. 학교를 그만두고 외신기자로 뛰어들려고 했는데, 지금 미국 AP에 있는 윤재형 선배가, 한 학기 남았는데
졸업은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당시에는 졸업장 같은 것이 나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 선배 말 듣고
졸업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로이터에서 일할 당시 촬영한 사진
로이터에서 일할 당시 촬영한 사진
3. 대교출판사,HU photos
강: 졸업전시 때는 어떤 작품을 냈습니까? 최: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데모 사진 중에서 골라서 냈어요. 돌아보니 그런 사진밖에 없더군요. 그러다가 대교에 들어갔지요. 학교로 취업 추천의뢰가 들어왔는데, 동기생이었던 조교가 소개시켜줘서 가게 됐지요.
슬슬 데모사진에 염증을 느끼고 있을
때였고. 딱 한 장만 쓰잖아요. 내가 본 상황은 더 다양한데. 한 장만 보여준다는 것에 대한 한계라고 할까 염증 같은 걸 느끼게
된 거죠. 그래서 일단 생각 복잡할 때 취직해서 놀지 말고 일하자, 이러다가 IMF가 터졌고. 회사에서 누구 한 사람 그만둬야
한다는 겁니다.
다들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내가 총대를 메고 그만 뒀어요. 그리고 나서 포토에이전시를 만들었어요. H.U.Photos라고.
정성준(게티이미지) 등 여러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만들어서 99년 코소보 갈 때까지 했지요. 그때는 좋은 시절이었어요.
강: 에이전시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했습니까? 최: 지금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업체 브로슈어, 농구 잡지 그 때는 농구가 인기가 많았죠 기업 사보도 하고, 처음
시작할 때를 생각하면 까마득합니다. 처음 사무실이 강남구청 인근이었는데 참 열악했어요. 그 때는 열정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
이었죠. 다들 참고 열심히 했어요. 견뎠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고생은 되었지만 그때가 가장 열정적으로 살았던 때라고 생각합니다.
낭만도 있었고요. 돈 벌어서 장비는 업그레이드 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요. 문득 이렇게 지내다가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태까지 나의 사진의 관심 대상은 외부로 향해 있었는데, 그게 점차 내부로 옮겨가고 있을 때 이었는데. 이제는 내
작업을 해야겠다.
한마디로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되어야겠다. 그래서 99년도에 내전중인 코소보로 날아가게 됩니다.
여권을 만들어서 처음으로 간 곳이 전쟁터였죠. 개인적으로 소망이 있다면 방송과 같이 10년 전의 난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추적하고 싶습니다. 다른 얘기지만 인권위와 함께 한국에 난민 신청을 낸 미얀마 난민들을 작업한 적이 있는데 작년에 난민지위를
인정받았다고 하더군요. 이럴 때는 보람을 느낍니다.
4. 99년. 코소보 작업
최: 99년에 코소보 작업을 하러 갈 때, 인천방송과 연결이 되어서 동영상(캠코더)을 갖고 갔어요. 그때 경비가 800만원 정도
들었는데. 인천방송, 동아일보, 한겨레21과 협조 관계가 있었어요. 한겨레21은 ID카드를 만들어 줬고, 동아일보는 지면을
비워놓겠다고 약속했지요. 프리랜서가 스폰쉽을 갖고 외국으로 나가 리얼타임으로 신문에 전송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절이었지요. 거기서 취재한 사진이 5월 5일자 어린이날 동아일보 1면에 실렸죠. 코소보의 어린아이들이 주제였어요.
동아일보에 실린 '코소보'기사
그리고 저에 대한 특집기사가 함께 나갔고. 그리고 돌아와서 성남훈 선배님과 단체전을 한 것이. 본격적으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나서서 지금까지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남훈 선배나 다른 선배 다큐사진가들과 외신 기자들과 교류는 그 전부터
있었지만. 전시회를 계기로 더욱 깊어진 관계가 형성되고 그렇게 함께 어울렸어요.
강: 코소보 작업에 대해 자세히 들어볼까요. 최: 코소보…. 그때는 정보가 거의 없었는데. 공항은 이미 오래전에 폐쇄 됐고 대사관마저 한국에서
철수한 상태라 비자문제도 그렇고 그곳에 가는 것부터가 가장 큰 문제였어요.
Lonely Planet이라는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인접국들에 대한 정보를 얻어서. 코소보 난민을 찍으러 간 거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코소보 난민이 있는 알바니아로 가는 건데, 알바니아의 수도가 티라나. 그리스 편을 보니 아테네에서 23시간 달려서
티라나로 가는 국제버스가 있더라고요. 한국에는 어떠한 정보도 없었는데, 암튼 무작정 그리스로 갔지요.
그리스의 한국대사관에 전화해서 국경을 어떻게 넘느냐고 물어보니까 담당자가 자세히 가르쳐주더군요. 국경으로 향하기 전까진 시간이
남아서 아테네를 기록하는 것도 잊지 않았죠. 알바니아의 티라나까지 23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가는데,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더군요. 영어를 하는 프랑스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비디오에 카메라까지 가진 제가 주목을 받은 거죠. 알바니아에 도착해서
현지 기자증을 받으려고 알바니아 외무부를 찾아갔는데, 담당자가 유창한 한국말을 하는 겁니다. 많이 놀랐죠. 김일성 대학을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그 후에 외교관으로 국내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배우 조민기씨가 SBS 리포터로 왔었고. 교민들의 도움을
받고 나니 마음이 잠시나마 든든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강: 그때가 몇 살이었죠? 최: 1999년도 29살이었습니다. 사진을 인터넷을 통해 전송을 해야 하는데, 그때 위성 전화를 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외무부에 전화를 했어요. 대사나 영사관이 없는 나라의 경우 외무부에서 교민대표 연락처를 갖고 있었는데.
통상적으로 그런 곳에 연락이 닿는 사람들은 선교사이거나 사업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티라나에 있는 개척 선교를 하는 한국인
선교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분들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래서 그곳에서 인터넷으로 사진을 전송할 수 있게
되었고요. 아파트도 빌렸고. 지금 생각해보면 혼자서 그 일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운도 좋았어요.
코소보 티라나 시내 난민촌
코소보 현지 기자증
티라나 시내도 난민으로 넘쳐났어요. 체육관도 병원에도 난민이 있었고, 그곳을 베이스로 알바니아와 유고의 국경지역인 난민촌
쿠케스를 오가며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여기저기 다른 지역의 난민촌들도 취재했지요. 난민이 국경을 바로 넘어오는 장면을 찍으려고
쿠케스까지 8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간 적이 있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헬기를 타려고 알아봤어요.
기자증을 보여주니까. 처음엔 "CNN OK. BBC big company OK. but small company NO!"라는
거야. 그런 순위 말고도, 나름 순위가 있는데 가장 1순위가 환자, 2순위가 NGO 의사들, 구호물자 그리고 자리가 남으면
저널리스트였어요. 그렇게 버스도 타고 헬기도 타면서 계속 왔다 갔다 했어요. 한겨레 21에서 내준 영문으로 된 프레스 카드가
있었고, 인천방송의 도큐멘트 있어서, 알바니아 외무부에서 현지어로 된 기자증을 받아서 작업하는데는 특별히 불편했던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거기는 양고기를 많이 먹는데,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 음식도 많았고 물론 음식을 가릴 상황도 아니었지만,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40일 정도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음식과 기후가 안 맞아서 현장에서 탈이 많이 났는데, 건강한 몸과 물려주신 부모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기도 했지요.
그때 NPH400 네가티브 필름이 정말 좋은 필름이라는 것도 다시 알게 되었고. 지금은 디지털을 사용하니까 상관없지만, 그때는
현지에서 현상을 해야 하니까 네거티브 필름을 사용했지요.
재미있는 일화도 있었는데 티라나에서 기자증을 만들려고 여분의 사진을 찍으려고 사진관에 갔는데, 주인이 왜 사진을 찍느냐고
물어보더라고. 저널리스트라고 하니까, 그 사람이 바로 웃으면서 테러리스트 같은데 그러더라구. 당시 면도할 상황이 아니라서 수염
길렀는데 그런 오해도 받았지요. 서로 한참을 웃었지만, 사실 수염이 취재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어요. 그쪽 문화권에서는 수염을
아무나 못 기르거든. 동네 어른이나 되어야 기른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현지인들 만날 때 덕을 봤어요. 수염 때문에 쉽게 친숙해진
것도 있고 특유의 넉살도 있었고 그런 문화적인 요소들이 전부일 때도 있다는 걸 그 때 알았지요.
그리고 이런 끔직한 일도 있었어요. 국경에서 칠레기자였나, 국경에서 취재하다가 얼굴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직접 보고 큰
충격을 받기도 했지요. 그곳에선 늘 총소리, 폭탄소리가 들렸습니다. 또 늘 혼자였기 때문에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가 외로움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드네요.
필름사용 할때의 해외 작업 환경
해외에서 디지털 작업 환경
국경에서 갔는데 잘 데가 없잖아요. 호텔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골이라 영어도 안 되고 그래서 국경에서 제일 가까운
국경수비대 대원의 집을 찾아가서 손짓으로 잠자는 시늉을 해 보이며, "오케이?" 하고 며칠 묵었어요. 별 일이 다 있었네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동네 애들 모아다가 태권도를 가르치기도 했지요. 동네 아이들이 "왓추어 네임?" 물으면, "마임 네임 형님,
형님" 하며 놀았지요.
국경 마을에 카페가 하나 있었는데, 외신기자들을 모두 거기에 모아놓고 매일 아침 8시에 UNHCR 직원이 나와서 난민이 몇 명이
넘어오고 어디로 이동하는 지 브리핑을 했는데, 세계적인 사진가들이 다 모여서. 아침에 그곳에 모여서 커피도 한잔하고 이야기를
나눴어요. 국경마을 모닝커피라, 난민촌에도 그런 게 있다는 것이 무척 신기하게 느껴졌어요.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적어도 아침에는 할 수 있었죠.
국경에서는 국경 수비대원 집에 여러 번 머물렀는데 떠나면서 성의 표시를 하려니깐 안 받으려고 해서 가족사진을 찍어서 인화해줬어요.
갖고 있는 의약품도 그들에게 필요한 건 모두 주고 왔어요. 사진은 아마 집에 있을 겁니다.
코소보국경수비대가족
그곳에서 작업을 하면서 사진가로서 심경의 변화가 있었어요. 사진을 찍고 전송하고, 머물면서 그곳 환경에 적응하면서 사진을
작업을 하는 것이 나랑 맞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놀라웠던 것은 전쟁터였고 난민으로 넘쳐났지만 현장에서는 슬픔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담담했던 것. 슬픔이 몰려온 건 그 후에 전시를 하고 책이 나왔을 때는 슬펐지요.
준비해간 스캐너로 현장에서 스캔을 받아서 동아일보에 사진을 보냈는데 5월 5일에 맞춰 동아일보 1면에 실렸고. 저도 1면에
실릴지는 몰랐어요. 지금도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더군요. 그 사진으로 데뷔했다고 할까요. 배병우 선생님도 신문 봤다고
하시더라고. 동아일보에 특파원이 보낸 사진이 나가니깐 경쟁사인 조선일보에서도 기자를 거기로 보냈지요. 현장에서 그 기자 분을
만났는데 "너 때문에 내가 여기 왔어." 그러더군요. 지금 그 선배는 조선일보 사진 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 분쟁지역이라 상황이 좋지 않았을 텐데, 위험을 느끼지는 않았는가요? 최: 국경 바로 옆이니깐 항상 폭탄소리가 났었지요. 군사훈련도 자주 목격됐고요. 하지만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 같은 것은 그리 많지 않았어요. 난민 작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코소보는 유고연방의 연방자치구로, 원래는
풍요로운 지역입니다. 사실 분쟁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거기엔 성지가 많고 곡창지대였는데. 그래서 난민들도 여유가 있는 편이었어요.
블로그에 가면 좀 자세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난민촌 텐트에 가면 서로 오라고 그랬지요. 우리의 현실을 널리 알려달라고 커피나 빵도
내놓고, 그러면서 서로 친해져서 사진도 찍고 그랬지요.
강: 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꼈나요? 최: 난 사실 이상주의자라고 할까 솔직히 전쟁이 왜 일어나는지 확실히 모르겠어요. 확실한건 참혹한
겁니다. 상상 이상입니다. 병원에서 다친 사람들 많이 봤고 애들과 노인들, 그리고 여자밖에 없어요. 난민촌에는 건장한 젊은
남자들은 없어요. 살려두면 반군이 되니깐. 모두 학살을 당한 거고 가족의 시체도 거두지 못하고 일주일 이상을 걸어와서 난민촌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란 상상이 갈지 모르겠네요.
5. 코소보 이후. 철의 실크로드 프로젝트
강: 그 이후의 작업에 대해 듣고 싶네요. 최: 단편적인 작업에 염증을 느끼고 있을 때였고 모든 시선이 외부가 아닌 마음 안으로 향하고 있었던
때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루트 작업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는데 문제는 세상에는 매력적인 루트가 너무 많은 게 문제였죠. 코소보
작업을 마치고 나서 2000년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6.15선언문도 발표되고. 실천 합의문 안에 경의선 복구 항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철의 실크로드 작업을 시작한 거죠. 코소보 다녀와서 2000년도에 성남훈 선배와 문화일보에서 단체전 한 것이 첫
전시였습니다.
제목이 "No war, No cry".
그 이후로 시베리아 횡단열차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생각하고, 유럽 쪽부터 작업을 시작했어요. 짬짬이 동해안과 서울도
찍었고. 프리랜서 사진가가 매번 자비로 외국 나가기가 버거워서 2003년까지는 기내지나 미디어를 엮어 가지고 유럽을 드나들었지요.
작업비가 있어야 하니깐 8년 동안 천문학적인(?) 작업비가 들어갔어요. 2008년 봄에 기대했던 철도청과 프로젝트가 마무리
단계에서 고배를 마시면서 그때는 정말로 힘들었지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군요. 경기문화재단에서 지원금을 받아서 조용히 개인전하고
지금은 단행본 준비하고 있습니다.
2000년 단체전
올해부터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공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올해 들어 서울과 경기도에 관련된 일들이 많아서 어쨌든
올해는 조용히 일하고 공부도 좀 하려고요. 외국작업을 자제하려고 합니다. 다시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철의 실크로드 프로젝트는 처음에 유럽으로 몸을 풀었다고 할까요. 2003년 말이 되어서야 몽골, 러시아를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이
작업을 하면서 가장 감격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첫째는 블라디보스톡에 처음 들어갔을 때이고, 다음은 바이칼 호수를 갔을 때, 그리고
베를린과 평양에 갔을 때, 마지막은 유럽의 땅 끝 마을에 갔을 때, 비석에 이렇게 써 있더라구요. ‘여기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고’ 이렇게 개인적으로 가슴이 뭉클한 순간을 겪었지요. 어느 날은 하바롭스크에 갔는데, 거기에 나나이족이라는 소수민족이
있어요. 한국 사람과 진짜 똑같아.
실크로드 개인전
나도 모르게 안녕하세요? 라고 한국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한국말로 말을 거니까 꼬마 애들이 머리를 갸우뚱 하더라고요. 오래전으로 치면 고구려의 최북단 지역이었죠.
순서대로 설명하자면 유럽작업을 먼저하고, 그리고 나선 처음에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바이칼까지 기차를 타고 그리고 베이징에서 바이칼,
나머지는 바이칼에서 모스크바, 이것이 몇 번 반복이 되었고, 모스크바에서 레닌그라드로 간 다음 핀란드까지 갔어요. 핀란드에서
독일, 파리도 갔고, 유럽을 다시 한 번 정리하고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포르투갈의 땅 끝 마을까지요. 그 바다를 건너면 북미죠.
캐나다도 철도로 일주를 했으니 북반구를 철도로 관통했습니다.
강: 왜 철의 실크로드를 선택 했는가요? 최: 기차를 찍으러 간 게 아니라 그 길에 놓인 무언가를 찍으러 간 거죠. 왜 철의 실트로드가
중요하냐면, 예전 실크로드랑 뭐가 다르냐. 예전 실크로드는 아무나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거래된 물품은 주로
기호품과 사치품들이었고. 하지만 철의 실크로드는 물건이 아닌 사람을 운반하는 길이 되었지요. 전혀 다른 길입니다.철의 실크로드가
와서 비로소 교역로가 아닌 소통로가 된 거죠. 예전에는 이동자체가 독점적이었고, 일반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지요, 그
역사 또한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한정된 역사입니다.
제 작업은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소통로에 관한 작업입니다. 세계사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는, 교역로에서 소통로, 그 길의 끝에
한반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우리와는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서양을 잇는 길의 끝과 시작이라는 것. 원래는
연결되어 있었지만 한국전쟁 이후로 중단된 길. 철도청이랑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작업을 모두 마치고, 철도청이랑 대규모 프로젝트로 전국 순회전시와 사람들을 이끌고 시베리아로 가려고 했는데 무산되고 말았어요.
그것도 거의 마무리되는 단계에서 말이죠. 꼬박 2년 동안 준비했는데, 그렇게 해서 대규모 전시와 대형 프로젝트는 어려워 졌었죠.
작업하면서 남겨진 전 세계 동전
작업에사용된 여행책들
작업을 모두 마치고, 철도청이랑 대규모 프로젝트로 전국 순회전시와 사람들을 이끌고 시베리아로 가려고 했는데 무산되고
말았어요. 그것도 거의 마무리되는 단계에서 말이죠. 꼬박 2년 동안 준비했는데, 그렇게 해서 대규모 전시와 대형 프로젝트는 어려워
졌고요. 그 이후의 상황은 좀 전에 얘기 했고요.
강: 와. 그렇게 2000년부터 시작된 철의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2008년이 되어 드디어 세상에
선보이게 되었군요. 8년이라…. 긴 세월이네요. 코소보 작업 이후로 분쟁지역은 전혀 가지 않은 것 같은데, 이유는 있나요? 그
동안의 작업을 하나의 주제로 엮는 다면 어떤 것일까요? 최: 굳이 하나의 소재로 나를 묶는 것이 싫었습니다. 전쟁 말고도 다양한 작업을 하고 싶었고. 내
작업을 하나로 묶는다면, 그건 ‘소외’입니다. 소외를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현장을 찾은 거죠. 그리고 물건이 오가는 예전의
실크로드와는 다른, 사람이 중심이 되는 철의 실크로드 작업을 하게 된 거죠. 있으되 가지 않는 소외된 길이었거든요. 이게 답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토리 작업보다는 시리즈 작업이 저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작업에 대한 자세한 것은 블로그에 올라와 있어요. 미안하지만, 약속이 있어서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최항영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photodir)
ebs세계테마기행, 네팔
강: 하나만 더요.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가요?
최: 공격적으로 살려고 합니다. 제 주위에 소중한 것들을 지키려고 합니다. 올해부터라도
편안한 일상을 갖고 싶어요. 전시를 준비하면서 진이 빠져서 일상으로 돌아오려고 노력 중입니다. 얼마 전에 한 달 넘게 EBS와
함께 네팔 작업해서 방송 나갔고, 일도 거의 못 하게 되었지요.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도 끊기고 요즘은 사람 만나는 게 일입니다.
철의 실크로드 이후에 준비하고 있는 다음 작업은 인문학적인 소재인데, 전 세계를 돌아다녀야 하는 겁니다.
이번에는 같이 하고 싶은 사람도 생겼고, 그 재원을 장기적으로 마련하려고 노력중입니다.
주제와 소재가 뭐냐면? 아직은 비밀입니다. 길에 관한 것은 아니고. 전 세계 어디에나 다 있는 특이한 현상입니다. 언제
시작할지 모르니 중간 중간에 조그만 일들도 기획중이고 국내에도 그 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게 제에게는 마지막 대형 프로젝트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철의 실크로드는 지금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철도가 길이 실제로 열리면 북한을 통해서 러시아까지 쭉 뚫리는데, 지금은 길이 닫혀
있지요. 앞으로 넘어야 될 산이 많습니다. 철의 실크로드 프로젝트는 중간 정리하는 단계로, 지금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아마
여름까지는 정확한 계획이 나오지 않을까요. 올해는 정리 못한 작업들 정리하고 싶어요. 마냥 쌓여있는 사진들이 많이 있어서요. 가장
일순위는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게 일상을 복원하는 일입니다. 출발을 순조로운데 먼 길이니 긴장을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면세점에서사모은소품들
집에 있는 필름보관 봉투와 일했던 책과 잡지
6. 인터뷰를 정리하며
사진가 최항영은 80년대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사회를 바라보는 도구로 사진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AP, AFP 통신사 등의
스트링거 외신기자로서 한국과 코소보에서 현장 경험을 쌓았다. 그러다가 뉴스매체를 통해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이 아닌, 작가로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호흡이 긴 포토스토리 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첫 장기 프로젝트는 '철의 실크로드'였다. 잠시 휴식기를 갖고
있지만, 아직도 사진가 최항영의 심장은 증기기관차처럼 힘차게 뛰고 있다. 그의 기차가 전 세계를 누비고 소외 받는 사람들과
만나고,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되기를 기대한다.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들려준 그에게 고맙다. 한국처럼 다큐멘터리 사진이 뿌리를
내리기 힘든 토양에서도 그의 작업이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져 많은 대중들과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벌써 그의 책이 기다려진다.
그리고 그 책이 나오는 날, 그가 직접 원두를 갈아서 끓여 준 커피를 마시며 다시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가 추출한 커피와 긴
시간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 환상의 조합이다. 그렇게 그가 걸었던 소외의 길, 그리고 양면거울처럼 보이는 소통의 길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인터뷰를 마치고 작업을 작업실을 나오면서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최근에 만난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다 그랬다. 왜 그렇게 외롭고
지쳐 보이는지. 최근 메인 스트림을 이루고 있는 한국 사진계는 대부분의 젊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카메라를 놓게 만들었다. 몇몇
기획자와 비평가들은 대놓고 아직도 그런 사진(다큐멘터리)을 찍느냐고 말한다. 그리고 이들을 시대에 뒤떨어지는 고집불통의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세상을 바꾸고 기록하는 그 가치 있는 작업의 맥이 거의 끊겨버린 것이다. 오직 아마추어
사진가들에게 다큐멘터리 사진을 가르치는 사업만이 성행하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활동할 수 있는 현장은 사라지고 없는데
다큐멘터리를 가르치는 비즈니스는 많다는 것은 모순이다. 비싼 교육비를 받거나 카메라 홍보를 위한 마케팅에 딸려가는 상품이
되어버렸다. 교육이라는 것은 그 직업군이 존재할 때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학생들에게 무작정 희망을 심어 주는 것에 대해 회의가
든다.
그리고 외국의 다큐멘터리 사진을 블록버스터 급으로 포장해서 티켓을 살 관객을 끌어 모으는 상업주의만 살아남게 되었다.
사진에 대해서 잘 모르는 관객들을 마케팅의 힘으로 현혹하기 쉽다.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위기는 상업주의자들에게는 관심 밖의 일인
것 같다.
원로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그 시대 상황과 독보적인 존재감 때문에 아직도 그 명성, 영향력과 힘을 유지하고 있다.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다. 요즘 다들 동의를 하는 것은 젊은 세대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새로운 실험을 통해서 이전 세대와는 다른 다큐멘터리
사진의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다큐멘터리 사진의 위기는 혁신을 이루지 않은 젊은 다큐멘터리 사진가 스스로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진가 스스로 모두 느끼고 있다. 몇몇 남지 않은 젊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그 부분들을
고민하고 실행에 옮겨나가고 있다.
그 동안 젊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앞 세대와 사실 그리 다르지 않은 사진의 형식과 전략을
그대로 유지해왔고, 지금의 젊은 다큐멘터리 사진 층의 몰락의 원인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선배들이 그 시대에 맞는
전략을 세웠던 것처럼 젊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이 시대에 유효한 새로운 형식과 전략을 찾아가는 것이 맞다. 매체에 의존하는
시대는 지났고, 다큐멘터리 사진의 범주는 굉장히 광범위 해지고 심지어 사적인 영역까지 파고들었다. 젊은 사진가들도 모두 원로 선배
사진가들의 열정에 뿌리를 두고 문화적인 수혜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역사가 있기에 지금의 사진의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고민과 실천들이 원로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에게서 '유행을 따라가는', '전통적이지 않고 서구를 추종하는',
'다큐멘터리의 본질이 흐려지는', 혹은 '작업이 아닌 성공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오해와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누가 성공하려고
다큐멘터리 사진을 하겠는가. 사과장수가 오히려 더 현실적이다.
현대 다큐멘터리 사진에서는 물 부족을 주제로 하는 다큐멘터리
작업이라고 해서, 물이 없어서 목말라 죽어가는 이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형식을 띄지는 않는다. 눈이 높아진 관객들은 젊은
세대의 사진가가 그런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해서 이제는 피곤하고 지루해 한다. 형식의 변화에 대해 일부 선배사진가들은 젊은 사진가의
세상에 대한 타협과 진정성의 부족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원로 사진가들이 언젠가 아직 부족하고 왠지 철이 없는 듯한 후배들이 열정과
'인생을 바치고 있는 새로운 다큐멘터리 작업들을 따뜻하게 안아 주실 것으로 믿는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다양한 젊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과 만나고 새로운 고민과 담론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새로운 다큐멘터리 세대의 든든한 어깨가 보였으면
한다. 아직 우리 모두 젊다.
국내 최대의 사진전문 포털사이트인 아이포스 웹진에서는 각 미디어와 화랑의 전시담당자, 프로사진가, 전국의 각 대학 사진학과 교수 및 전공자, 미술계와 광고 디자인계, 출판 편집인,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인사, 국내 유수 기업의 최고경영자와 임원, 사진동호인 등 27만6,823명에게 사진문화에 관한 유익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